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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심의 민중정신

문서에서 玄基榮 小說 硏究 (페이지 76-80)

현기영 소설들은 사건으로 인한 공동체집단구조의 파괴와 공동체의식의 훼손 을 문제 삼는다. 그것은 소설을 통해 훼손된 민족적 동질성을 재현하고 공동체의 식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람 타는 섬󰡕은 공 동체집단의 모습을, 「마지막 테우리」는 민중정신이 구현되는 모습을 각각 보여준 다.

제주는 고립된 변방이기 때문에 강력한 혈연·지연의 공동체의식과 운명공동체 로서의 일체성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식과 주인의식이 깊었다. 󰡔바람 타는 섬󰡕에서는 전통적인 제주 특유의 공동체의 모습이 잘 표현된다.

그러자 3백 명 가까운 잠녀들이 일제히 “가자!” “와아!” 소리지르며 우르르 물 가로 내려갔다. 한 차례 큰 해일이 해변을 덮쳐 쓸어가는 듯 장엄한 광경이었다.

물옷 바람의 발랄한 육체들이 거무칙칙한 암반과 자갈밭 위에 눈부시게 어울려 난무했다.107)

깊은 물일수록 좋은 미역이 많은지라 잠녀들은 어느 한쪽에 몰리지 않고 나이 나 능력에 따라 얕은 데서 멀리 깊은 데까지 골고루 바다 위에 퍼져 작업했다.

가깝고 얕은 데는 예순 넘은 할머니들이나 열서너 살짜리 아기 잠녀들의 몫이고

107) 현기영, 󰡔바람 타는 섬󰡕, p. 46.

멀고 깊은 데는 숨이 길고 자맥질 잘하는 상군 잠녀들의 몫이었다. 이날뿐만 아 니라 평소에도 상군 잠녀가 ‘할망바당’(할머니바다)에 들어 물질하는 것은 철저 한 금기로 삼았다. 일흔 살 가깝도록 물질을 놓지 못하는 것이 잠녀들의 생활인 지라 기운 없는 할머니들을 위해 얕은 물에다 ‘할망바당’을 따로 마련해 놓은 것 이었다.108)

마을 공동으로 가꿔온 미역밭의 추수날을 따로 정하여 미역베기 경쟁을 벌일 만큼 섬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은 굳건했다. 또한 잠녀들의 급수에 따라 바다의 범 위를 정하여 미역 채취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 규칙이 섬 전통 속에서 지 속적으로 지켜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굳건한 섬 공동체의 정신은 외세 의 압력 속에서 거대한 저항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공동체정신이 무너진 것은 4·3이라는 비극적 사건 때문이었 다. 「마지막 테우리」에서는 이 비극적 사건이 당시에 종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생태계의 파괴를 자행하는 것은 또 다른 외세인 것이다.

초원의 안개는 여전히 죽은자들의 슬픈 영혼으로 무리지어 떠돌고, 임자 없는 백골들이 아직도 어느 굴헝, 어느 굴속에 뒹굴고, 풀 뜯다가 풀속에 숨어 있는 녹슨 탄피까지 잘못 먹어 장파열로 죽는 소도 있건만, 세상은 초원의 과거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다.···그리하여 초원은 이제 다시 한번 환란을 맞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솔씨 하나만 날아와도 발 못 붙이게 완강하게 거부하던 초원 이 사방에 아스팔트 도로로 절단되고, 야초를 걷어내어 그 자리에 골프 잔디가 심겨지고 있었다.109)

「마지막 테우리」는 현기영 4·3소설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는 제주의 근대사와 전통적인 삶을 기억하는 마지막 증인으로 ‘고순만’ 노인이 등장 한다. 그는 4·3 당시 토벌대의 길잡이로 활동했던 고통스런 기억 때문에 사람들

108) 현기영, 󰡔바람 타는 섬󰡕, pp. 46~47.

109) 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마지막 테우리󰡕, 창작과비평사, 1994, pp. 19~20.

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초원에서 남은 생을 보낸다. 4·3의 고통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는 조화로웠던 생태계가 각인되어 있다. 4·3 당시 공동체 집단이 외세 세력에 의해 분열되었던 것처럼, 생태계가 외부 세력에 의해 변모하고 있는 오늘 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과 반성해야 할 과제를 제시한다.

「마지막 테우리」는 역사적 실체로서의 4·3의 환기, 잊혀져선 안 되는 것들이 잊혀져가는 상황에 대한 경고라는 현기영 소설의 종전까지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며, 역사적 상상력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만나는 데 그치지 않고 생태학적 상상력과 만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110)고 볼 수 있다.

광란의 들판에서 노인은 풀들과 함께 몹시 흔들렸다. 천지가 온통 흰 눈인데 그 가운데에서 오직 노인의 흙빛 얼굴만이 유일한 색이었다. 아직 눈으로 덮이 지 않은 한 줌의 훍, 그러나 노인은 온몸으로 버팅기며 눈보라 속을 꿋꿋이 헤 쳐나갔다.111)

주인공을 통해 현기영은 그 동안 자신의 소설에 생생한 증인으로 등장했던 4·3 체험자들의 소멸을 이야기한다. 4·3에 대한 논의가 공개되고, 역사적이고 사 회학적인 논의들이 그것을 주도하면서, 그 동안 4·3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가는 전위를 자임했던 문학은 역사 연구에 주요한 역할을 내주게 된 것이다.112)

가장 낮은 계층인 변방의 민중은 민족사적 수난 속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으 면서도 건강한 생명력과 드높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 의 민중성은 모진 시련과 압박을 통해 더욱 강철같이 단련되며 모든 역사적·사회 적 모순에 맞서 적극적 가치로 고양된다. 그들의 인품에 남아 있는 봉건적 요소 들조차 공동체적·민족적 바탕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에서 하나의 효과적인 무기로 전환되는데, 여기서도 작가 현기영의 원숙한 역사의식이 드러난다.113)

110) 김동윤, 「역사적 상상력과 생태학적 상상력의 만남」, 󰡔4·3의 진실과 문학󰡕, 도서출판 각, 2003, pp. 175~76.

111) 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앞의 책, p. 23.

112) 김진하, 앞의 글, 앞의 책, pp. 86~88.

「마지막 테우리」의 ‘고순만’ 노인은 제주 현대사의 증인이고, 초원 속에서 살 아가는 민중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다. 작중 인물을 통해 작가는 변방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민중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역사의 재판이 필요하며, 탈 중심의 민중정신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13) 염무웅, 「역사적 진실과 소설가의 운명」, 󰡔실천문학󰡕, 1994 가을, pp. 3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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