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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증언

문서에서 玄基榮 小說 硏究 (페이지 32-36)

Ⅱ. 역사에 대한 소설적 대응방식

1) 진실의 증언

이 항에서는 「순이 삼촌」에서의 ‘순이 삼촌’의 자살을 통해 현기영이 소설을 매개로 진실을 규명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음을, 또한 증언을 통해 드러난 진

실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기영이 원하는 진실에의 추구가 처음으로 독자에게 보이게 된 것은 「순이 삼촌」이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화자인 ‘나(상수)’는 이틀간의 휴가를 받아 고향 인 제주도로 내려간다. 가족묘지 매입 관계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할아버지 제삿 날에 맞춰 내려오라는 큰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날은 두 집 제사가 있는 날이라 큰당숙 댁에서 초저녁에 제사를 치른 다음 모두가 큰집에 모였다.

그런데 한동안 서울에 올라와 밥을 해 주며 같이 살았던 ‘순이 삼촌’이 보이질 않았다. 옴팡밭의 덫에서 벗어나고자 ‘순이 삼촌’은 딸자식도 모르게 고향을 떠나

‘나’의 집으로 올라오지만, “혹시 누가 뒤에서 흉보지 않나” 하는 심한 결벽증과

“하지 않은 말을 들었노라고” 하는 환청 증세마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일년여 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인고의 땅인 자신의 옴 팡밭에서 30년 동안의 유예된 삶을 마감한다.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 순이 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다섯 개의 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살해되었다. 밭을 에워싸고 총질을 해서 수백의 사람들이 몰 살당할 당시 ‘순이 삼촌’은 그 시체더미에서 살아 돌아왔다. 이미 그 때 죽었을 사람이었는데 살 한 점 상하지 않고 살아났으니 참 신통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실마리로 하여 제삿집에서는 봇물이 터진 것처럼 4·3 당시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 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밭에서 두 자식을 잃은 ‘순이 삼촌’은 혼자 살아남아 또 다시 남아 있 는 자식을 끈으로 그 때 죽지 못한 세월을 끊임없이 되돌리면서 사건 이후의 세 월을 보내왔다. 그녀의 결벽증과 환청은 사건 당시의 경찰과 군, 산폭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건이 끝나고 나서도 ‘순이 삼촌’의 의식에선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임 을 보여준다.

‘순이 삼촌’의 자살은 어떤 뚜렷한 증거도 유서도 없이, 사건 당시 수많은 익 명의 사람들의 죽음처럼 죽은 지 이십여 일이 지난 후에야 밝혀진다. 그것은 사 건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순이 삼촌’에 대한 남아 있는 이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무관심은 끝내는 해원하지 못한 채 사건의 피해 자를 또 다른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현기영은 이 소설에서 ‘순이 삼촌’의 자살

이 갖는 의미를 통해 4·3을 환기하고 유족들의 빠른 대응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보여준다. 시간이 더 지나면 증언할 사람들이 이렇게 무관심 속에서 사라질 것이 기 때문이다.

무관심의 모습은 화자인 ‘나’와 아내가 ‘순이 삼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표준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순이 삼촌’을 아내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투리를 배우려는 노력도 없다. ‘상수’ 또한 아내에게 화 를 내며 친척 어른에게 갖춰야 할 예의만 강조할 뿐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다. 그저 ‘순이 삼촌’의 깊은 오해와 피해의식 때문일 것이라고 오히려 자신들의 무관심을 ‘순이 삼촌’의 병증으로 덮어버린다. 만일 ‘순이 삼촌’이 제삿집에 모였 던 다른 제주인들처럼, 내면 속의 상처를 고백하고 치유하면서 사건 당시의 비극 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자살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제삿집에서는 해마다 식구들이 모여 사건 당시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 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순이 삼촌’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녀가 지내온 세월에 관심을 가지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것이다. 4·3 당시 폭도에게 죽은 가족이 있어야 도피자 가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이 또한 죽음으로 해서 증명되는 현상이다.

‘순이 삼촌’은 4·3 당시 토벌대의 소개 작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얻은 정신적 충격으로 이후 삼십여 년 간을 피해의식과 강박증에 시달렸고, 그 결과 비극적인 자살을 감행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물론 화자인 ‘나’의 이러한 분석은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염두에 둘 때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49) 또한 ‘순이 삼촌’

의 서울행은 최후의 선택이었으나 그것이 계속 어긋나자 자살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의 정확한 원인과 개연성이 부족하고 자 살의 시기도 꼭 그래야만 하는 시기로 설정되지 않아서 ‘순이 삼촌’의 자살이 가 지는 의미가 제대로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 약점은 지적될 만하다. 차라리 ‘콩 사건’을 ‘순이 삼촌’이 서울에서 제주로 돌아온 이후의 사건으로 그려냈다면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히던 피해의식이 그 순간 드러나 자살에 이르는 ‘순이 삼촌’의

49) 이명원, 「4·3과 제주방언의 의미작용」,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 도서출판 각, 2004, p. 158.

행방을 더욱 잘 살려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순이 삼촌」에서 ‘서촌마을’로 나타나는 북촌리에서의 세칭 ‘북촌사건’은 1948 년 음력 섣달 열여드레(양력으로 1949년 1월 17일)에 벌어졌다. 이날 아침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2명의 군인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숨졌다. 그러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를 불태우고 주민 삼백여 명을 집단 총살한 것이다. 또한 군인들은 살아남은 주민들 중 함덕리로 소개해 간 북촌리 주민 백여 명을 또다 시 총살했다.

난 운전면허증이 있는 덕에 경찰에 들어간 후 차량계에 배속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2연대 3대대 선임하사가 와서 “대대장 차가 고장 났으니 자동차 하나 빌 려 달라”고 하더군요. 이에 차량계장은 “3대대 주둔지가 함덕인데 네 고향이 함 덕이니 오랜 만에 고향에도 갈 겸 며칠간 다녀오라”며 날 보냈습니다. 본래 GMC를 몰았는데 그땐 앰뷸런스 형식으로 된 차로 함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대장을 모시고 월정리에 있는 11중대를 둘러본 후 대대본부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보다 앞서가던 군차량이 북촌초등학교 앞에서 기습을 당했어요. 그래 서 대대 출동명령이 내려졌고 나는 대대장을 태운 채 북촌국민학교로 갔습니다.

그 때 군인들은 북촌리를 다 불태우면서 주민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 습니다. 대대장은 우선 “군인·경찰관 가족을 뽑아내라”고 한 후 차 안에서 참모 회의를 열었어요. 앰뷸런스 형식의 차니까 중앙은 비고 양쪽으로 긴 의자가 있 었는데 그곳에 약 7~8명의 장교가 모였습니다. 그 때 “돌담 위에서 박격포를 쏘아 몰살시켜 버리자”는 등 여러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한 장교가 “군에 들어온 후에도 적을 살상해보지 못한 군인들이 있으니까 1개 부대에서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해서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결국 그게 채택됐습니다.

···대대장에게 급히 사정했더니 그들을 빼내라고 하더군요.···그리고 계속해 서 대대장에게 “우리 집안은 무장대에게 어머니를 잃었고 9남매 중 4형제가 경 찰로 있는 반공가족입니다. 그런데 저기 끌려 나가는 노인·부녀자·아이들이 무슨 사상이 있습니까. 저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나 도 살려주고 싶지만 그러면 어떻게 저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대대장도 본래는 주민들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

다. 이에 나는 “걱정 마십시오. 함덕리에만 가면 다 저들의 친척이 있는데 함덕 리는 큰 마을이니까 다 해결이 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계속 사정하니까 대대장은 “그러면 네가 책임져라”면서 사격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백 명이 끌려 나가 총살된 상태였습니다.50)

김병석의 증언에 의하면 대대장은 차가 고장 나서 사건 현장에 늦게 도착한 것이 아니다. 총살 직전부터 현장에 있었으며, “군인과 경찰의 가족을 뽑아내라”

는 명령을 내린 후 참모회의를 진행했으며, “군인 개개인에게 살상의 경험을 주 기 위해” 총살이라는 방식으로 학살할 것을 직접 명령했고, 김병석의 사정으로 총살을 멈춘 것으로 드러난다.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 할 만한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몰살시켜야 한다는 대대장의 생각은 이 학 살이 인간의 생사문제가 아니라 처리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는 「순이 삼촌」에서 “고모부님, 대대장이 말한 차고장은 핑계가 아니까 마씸? 일 개 중대장이 대대장도 모르게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가 이서 마 씸?”51)과 같은 작중인물의 발언으로 나타나는 작가의 의문에 대한 진실의 증언 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에서의 의문이 증언을 통해 진실을 획득하는 과정을 살펴볼 때, 「순 이 삼촌」의 ‘순이 삼촌’이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처럼 사건 당시의 사람 들이 다 죽기 전에 빠른 대응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4·3사건 진상조 사보고서󰡕}등의 자료가 계속해서 나오는 현재의 상황들을 반영하여, 역사서와 같

문학 작품에서의 의문이 증언을 통해 진실을 획득하는 과정을 살펴볼 때, 「순 이 삼촌」의 ‘순이 삼촌’이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처럼 사건 당시의 사람 들이 다 죽기 전에 빠른 대응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4·3사건 진상조 사보고서󰡕}등의 자료가 계속해서 나오는 현재의 상황들을 반영하여, 역사서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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