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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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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은 우리나라의 《별주부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결합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다. 이들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토끼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 거북 이 말에 현혹되어 바다 속까지 갔다가 다시 지혜를 발휘해서 위험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 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게 된다. <간>에서 토끼와 프로메테우스는 생명의 상징인

‘간’으로 연결되어 시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연에서 토끼는 ‘간’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위에 펴 말리고 있다. 그냥 간도 아니고 물기가 묻은 습한 간이다. 이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 거북이의 말 에 속아 넘어간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행위로 볼 수 있다. 2연에서는 프로메테 우스 신화를 접목시켜 용궁에서 도망쳐 온 토끼가 아닌 프로메테우스가 두려워하 는 공간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두 고전을 부드 럽게 연결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프로메테우스와 토끼를 동일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 4연은 내가 오래 기르던 독수리에게 자신의 간을 시름없이 뜯어 먹고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을 마광수는 시인 의 자포자기한 모습 또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46) 반면에 박호영은 ‘독수리’는 ‘정신적 자아’이고 ‘나’는 ‘육체적 자아’로 보고 육체는 희생을 당하더라도 예리하고 비판적인 의식을 지키는 시인의 결의라고 보 았다. 47) 토끼는 프로메테우스이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간(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을 자각하는 반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서 가장 중점적으로 봐야 할 부분은 바로 마지막 연인 6연이다. <프로메테우스 신 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도둑질한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간>을 보면 프로메테우스는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 하는 벌을 받고 있다. <간>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앞에서 언급했던 간을 지키려했던 토끼도, 불 도적질한 죄로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도 아닌 시인 자신이다.

46) 마광수는 시인의 자포자기의 상태(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갖고서라도 간을 지킬 것인지, 현실에 굴복 하여 자포자기의 상태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 좋을 지의 고민 상태) 또는 인간에게 불을 줬던 행동을 후 회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으로 보았다. /마광수, 앞의 글, 104~105 쪽.

47) 박호영, 「저항의 희생의 남성적 톤-대표시 <간>의 구조 분석」, 권영민 엮음, 『윤동주연구』, 문학사

시인은 간을 펴서 말리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던 토끼의 모습에서 간을 쪼아 먹 히는 형벌을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로 반성적 행위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반 성적 행위는 이것으로 멈추지 않고 맷돌을 달고 침전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확장하 였다. 특히 《별주부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맷돌’에 주 목해서 그의 반성적 행위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48)

성경의 내용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갖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런 순수한 믿음을 갖는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이 형벌은 지옥형벌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두려운 형 벌이다. 왜 그는 맷돌을 달고 끝없이 가라앉는 벌을 택했을까? 그 이유는 외부적인 시련으로 인해 갈등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내적 자아’가 자신 이 지향하는 길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인이 원하는 자아는 외 부의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좁고 협착한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순결한 자아이다.

하지만 <간>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외부적인 상황보다는 자신 안의 또 다른 자 아들이 그의 길을 막고 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순결한 자아, 순결한 시정신과 는 거리가 멀다. 그는 무엇보다 외부적인 장애도 아닌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는 것을 용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내적 갈등은 ‘맷돌’

을 달고 더 깊이 가라앉는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마광수는 이러한 시인의 모습 을 긍정적인 자학의 모습으로 보고 치열한 내적갈등을 극복하려는 초월적 의지로 보았다.49) 또 박호영은 시인과 프로메테우스를 동일성으로 보고 자기희생적 인간, 고통을 감내하며 저항하는 속죄양 의식으로 해석하였다. 50)

윤동주는 하늘을 향한 상승욕구 즉, 천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에서 내적 갈등

48) 마태복음 18장 6절.

49) 마광수, 앞의 글, 109쪽.

을 겪는 자신의 모습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율법 의식에서 비롯되 었으며 자신을 한없는 절망으로 끌어 내리고 결국 자기 스스로 맷돌을 달고 침전 하는 형벌을 주게 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八福>

<八福>은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쓴 시이다.51) 이 시에서 보이는 주된 감정은 ‘슬픔’이다. 이 슬픔은 자신의 내적 갈등에서 비롯된 괴 로움과 고통이 동반되어 나온다. 이 또한 침륜에 빠져있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침륜은 <무서운 시간>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의 괴로움, 슬 픔을 거부하는 모습이 아닌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명제의 의미는 결국 지상의 삶에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궁

51) 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②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 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⑦ 화평케 하 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큼이라

극적으로 천상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천상의 복은 지 상의 복과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천상의 복의 조건으로서 슬픔이 강조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침륜에 빠져 있는 무방비한 자아 상태에 머 무는 것이 아닌 슬픔을 초월적 의지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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