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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혼자 올랐다

나는 1999년 말에 한국천문연구원을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실내 골프를 시작했다. 3개월을 연습했 다. 필드에 나가려고 골프 장비를 구매했다. 그 무렵 산에 다니는 고교동창인 일백회(一白會)산악회의 최종 성 회장으로부터 산에 가자는 전화가 왔다. 밖에 나가보니 자가용 승합차를 몰고 다니는 동창이랑 한 팀이 돼서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소위 전국구 등산 마니아들이었다. 그래서 몇 번 등산을 따라가 봤다. 소백산 천문대를 건설할 때 수백 번 오르내렸던 이력 덕분인지 나는 높은 산도 험한 산도 곧잘 어울릴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산 타기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푹 빠져들었다. 골프 칠 맘이 사라지고 말았다. 또 12인승 봉고차를 가지고 산행을 즐기는 정병길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더 경쟁적으로 산행자료를 충실히 준비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은 산행 팀을 이뤄 등산했다. 그리고 산행 이름을 요산회(樂山會)라 지었 다. 우리는 산을 좋아했다. 우리는 산을 그냥 올라갔다. 아무도 산행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산행 계획을 미리 짠 후, 악천후를 빼고는 계획대로 산에 올라갔다. 산을 오르고 오르면 행복 호르몬 Oxytocin 이 증가한다. 산을 오를수록 즐거워진다. 나는 몸이 불편해도 산행을 빠진 적은 없다. 건강이 나에게 덤으 로 보상되는 것 같았다. 우리의 강토에는 산이 많다. 나는 산을 즐겨 다니니 산이 많은 국토를 복으로 느 꼈다. 10여 년간(年間)에 나는 전국의 600여 곳의 산행을 다녔다.

그 많은 산행 중 설악산의 긴 공룡능선을 넘으면서 식수가 모자라 갈증의 고통에 몹시 시달린 적이 있 다. 등산의 대부분을 조심조심 무난히 마쳤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이제 산깨나 탄다고 자타가 인정할 즈음에 뜻밖의 조난을 했다. 남쪽 소백산맥에 솟은 산세 수려하고 계곡이 아 름다운 금원산(1,353m)에서였다. 그날도 몸 상태와 날씨가 좋았으며 산행 길도 양호했다. 오히려 좋은 조 건에서 나의 오버런이 화근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산행지도는 내 배낭에 들어있었다. 급하면 돌아 가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도 멈춰서 꺼내 볼 여유가 안 생겼다. 등산객은 산행 필수품인 산행지도, 물, 간 식 등은 걸으면서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꼭 손이 닿는 위치에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두고 온 금송아지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핸드폰은 소통이 안 되는 경우 무용지물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하 산할 작정이어서 손등이나 머리 등의 준비를 안 했다. 둥근 달도 없어 산이 컴컴해지면서 산길을 찾을 수 없으니 난감했다. 무작정 비탈진 산세를 아래로 짐작하고 손발과 온몸으로 더듬더듬 이동했다. 가시나무에

찔리고 우거진 숲 풀 섶에 씻기고 날카로운 돌에 찍혀 상처도 났다. 그 와중에 한여름이라 독사라도 밟을 까 봐 조바심이 늘 엄습해 왔다. 초긴장 속에 얼마를 헤매었는지 어느 아래쯤 다다르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 들리는 쪽으로 갔다. 물 골짜기를 만났다. 반가워서 신을 신은 채 건넜다. 이제 하산이 출 발점의 근처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산천을 따라 계속 내려가니 다행히 출발점에 다 다랐다. 일행들이 초조해 저녁도 못 먹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119에 조난신고 했는데 워낙 산골이라 전경 몇 사람이 나와서 산 입구 언저리에서 수색한다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애먼 젊 은이들을 고생시켜서 미안했다. 산행 일행들에게도 다 미안했다. 원래 무박 산행의 일정이었지만 나의 조 난사고(遭難事故)로 일박해야 했다.

나는 전용차로 전국을 산행하는 한편 여유가 생기면 가끔 지하철을 타고 서울 주변의 명산을 찾기 시 작했다. 집에서 다소 멀지만,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이 갈만했다. 집에서 가까운 관악산은 많은 등산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언제든지 등산하기에 좋았다. 보물 같은 큰 산인 북한산은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많고 상 장능선처럼 긴 능선도 있어 가볼 만한 곳이 더 무궁무진했다. 한편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백악 산), 인왕산, 남산(목멱산), 낙산 등의 낮은 봉우리에서는 가끔 서울시가지를 가까이서 조망할만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10여 년을 열심히 전국의 산을 등산하던 산악회도 해체할 날이 왔다. 산악회가 해체되자 나는 여유롭게 처음 3년여 동안 서울의 명산 곳곳을 가고 또 가고 즐겨 다녀봤다. 그리고 다음 2년여 동안에는 비가 많이 내린 날을 빼고는 나는 사당역에서 시작해서 관악산의 정상까지 매일 올라갔다 왔다. 서울의 명산답게 여러 등산객이 스치는데도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정상을 오를 때는 바위산 답게 곳곳에서 로프에 의존해야 했다. 관악산의 이 홀로 등산은 15년 남짓 동안 이루어진 나의 산다운 산 에 대한 요산(樂山)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15년 전에는 우리 집에서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남산을 파노라마처럼 잘 볼 수 있었다. 이젠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은 보일락 말락 하다. 집주변의 건물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도 아 직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남산이 잘 보이니 감지덕지다.

42. 서울의 표고 300m 내외의 산행

재경광주56동기산악회는 만들어지고도 흐지부지 이름뿐이고 운영이 잘 안 되고 있었다. 2005~6년에 내 가 총무를 맡아서 산악회를 활성화했다. 서울 주변의 낮은 산을 1개월에 한 번 다녔다. 참가비는 1만 원을 받았다. 기부금을 십시일반으로 받았다. 점심을 살 사람에게는 사게 했다. 회비가 충족해지니 회원이 넘쳐 나왔다. 3월에 시산제도 즐겁게 했다. 2009~11년에 내가 회장을 맡았다. 56동기산악회의 전성기를 구가했 다. 서울 주변의 명소를 찾아서 즐거운 탐방을 했다. 명소 주변의 맛집을 찾았다. 산행의 뒤풀이로 성찬의 오찬을 만끽했다. 나의 조직을 살리는 주특기를 만년에 다시 만난 옛 벗들의 즐거운 모임 활성화에 한껏 쓸 수 있어 좋았다. 당시 시산제의 축문과 산행 안내문을 아래와 같이 하나씩 싣는다.

56동기산악회 시산제 축문

유세차 경인년 3월 21일 오시

재경광주56동기산악회장 오병렬은 산악회원 일동과 함께 이곳 우면산에서 주과포를 진설하고 삼가 엎드려 천지신명과 산신령님께 고하나이다.

우리는 산악의 나라에 태어났습니다. 산에 올라보면 전 국토가 온통 산입니다. 우리는 이 많고도 아름다운 대한민국 산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땅에 나서 산에 가지 않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산이 있기에 산에 가고, 산에 가기에 건강하고, 건강하기에 또

산에 옵니다.

천지신명과 산신령님이시어! 그 동안 우리 산악회원 누구도 산행 중 큰 부상이나 낙오되는 일이 없도록 굽어 살펴주신데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회원 모두가 안전한 산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무릎과 허리에 황소 심줄 같은 질긴 힘을 주시고, 서로의 따뜻한 우정 속에 구구팔팔토록 원기를 팡팡 넣어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해 마지않나이다.

올 한 해의 우리 산악회의 산행이 안전하고 즐겁도록 밝게 인도해 주실 것을 거듭 기원 하나이다.

천지신명과 산신령님이시어! 오늘 마련한 제물이 빈약하지만 우리의 정성이 깃들었사오니 우리 모두가 올리는 술잔을 흔쾌히 흠향하시옵소서!

단기 4343년 서기 2010년 3월 21일 재경광주56동기산악회 회장 오병렬

4월 18일 산행 안내 56동기산악회원님!

서울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좌청룡인 낙산에 오릅시다.

봄꽃도 보고 성곽의 세월도 헤아리고 춘곤증 떨쳐 낼 기지개도 활짝 켜 봅시다.

마로니에공원을 지나, 그 옆에 있는 대한제국 때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진 유일한 현존 목조건물을 보고, 함춘원에 건립된 대한의원(현서울대병원)의 102년 된 네오바로크양식의 건물을 보고, 창경궁의 101년 된 온실(식물원) 등을 다시 보고,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둘 러보면서, 봄과 흘러 간 역사의 시공을 새삼스레 느껴보도록 합시다.

10시 까지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뒤로돌아 직진 이대동대문병원 못 가 낙산공원 안내 이정표 앞에 모입시다.

오찬은 종로3가역 15번 출구서 동남약국 옆 골목으로 가다 4거리의 오른 쪽에 있는 삼해 집에서 12시 반 쯤에 들겠습니다.

2010년 4월 1일

재 경 광 주 56 동 기 산 악 회 회장 오병렬 대장 박병영 총무 이기준

43. 달리고 또 달려라

요즘 서울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나는 산책모임에 한 달에 두 번 나간다. 모이면 걷는다. 중간에 쉰다.

집에서 빚은 인삼주, 매실주, 복분자주, 포도주 등의 가양주(家釀酒)를 갖고 온 친구들이 있다. 서로 한잔 권한다. 이들의 술맛이 별미다. 그러나 이 술맛을 전혀 모르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처럼 술을 마시면서도 술의 맛을 모르는 사람을 주치(酒癡)라 한다.

술 얘기라면 할 말이 많지만 짧은 한마디만 더한다. 나는 술의 종류를 불문하고 대체로 즐겨 마신다.

근자에는 막걸리를 더 즐겨 마신다. 막걸리는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각종 회식 때에 반주로 우리 음식에도 잘 맞는다. 그래도 그 맛은 다양하다. 내가 막걸리를 유난히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앞서 이미 말 한대로 내가 일곱 살에 심하게 앓았다. 그때 회복기에 뭐든 먹고 싶어 했다. 그해 늦가을 어느

근자에는 막걸리를 더 즐겨 마신다. 막걸리는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각종 회식 때에 반주로 우리 음식에도 잘 맞는다. 그래도 그 맛은 다양하다. 내가 막걸리를 유난히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앞서 이미 말 한대로 내가 일곱 살에 심하게 앓았다. 그때 회복기에 뭐든 먹고 싶어 했다. 그해 늦가을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