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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관측기술 개발효과의 극대화

나는 특정연구과제 예산으로 외국 전문가를 초청 활용했다. 그 중에서도 Millitech에서 파견 온 FCRAO의 소속 전산 Programmer인 M. K. Brewer가 컴퓨터에 의한 수신기와 안테나의 제어 능력 향상 등 우리의 전파관측 기술개발에 가장 큰 흔적을 남겼다. 그가 1차로 1986년 8월 28일부터 29일간 머물 때 특정 연구비에서 체재비($105/1일)와 자문료($160/1일)를 지급했다. 같은 대우로 14일간 체류를 연장 했다. 이 결정 직후에 FCRAO의 Irvine 대장으로부터 Brewer가 그만 귀국했으면 한다는 텔레팩스가 왔 다. 나는 Irvine 대장에 미안했다. 팩스가 하루만 빨리 왔다면 Brewer가 그냥 귀국했을 것이다.

전파관측 프로그램 개발을 중심으로 Brewer의 지속적인 활용이 절실했다. 2차로 1987년 5월 22일부터 53일간 그를 초청했다. 특정연구과제 예산에서 자문료 7ㅇㅇ만 원 포함, 총 1천2백만 원이 지출됐다.

1988년 9월 11일부터 10월 12일까지 32일 동안 3차로 그를 초청 활용했다. 전파망원경의 관측 프로그래 머인 그는 총 128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 전파망원경의 관측기술 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Irvine을 국제협력의 확실한 파트너로 삼고, Brewer와 같은 유능한 실무형 전문가를 초청 활용한 전략 이 전파망원경에 의한 관측기술개발 연구사업의 성공에 주효(奏效)했다.

35. 보현산천문대 건설

나는 국립천문대 설립 및 소백산천체관측소와 우주전파관측소 건설 사업의 기획부터 완성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보현산천문대의 경우는 달랐다. 1991년 12월 3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천문대 광학천문연구부장 으로 발령을 받고서 보현산천문대 건설사업 업무를 시작했다. 이미 3대의 망원경이 발주되고 천문대 건설 후보지와 진입도로 설계가 확정돼 있었다. 소백산이나 대덕의 공사 현장과는 달리 천문대 기술직 인력을 현장 공사감독으로 파견할 수 있었다. 1993년 8월 2일 산 위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감독에게 핸드폰도 지 급했다. 공사 진척 상황 소통에 큰 도움이 됐다. 소백산천문대의 건설현장에는 인편(人便) 말고는 연락 방 법이 없었다. 봉화(烽火)나 전서구(傳書鳩)통신 보다도 못한 깜깜이였다. 국립기관으로 발족하고도 2년이 지나서야 자석식(磁石式) 수동전화기(手動電話器)를 겨우 설치했다.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았다.

보현산천문대의 자동유선전화시설 설치를 위해 건설공사 초기부터 특별히 노력했다. 나는 경북지역 전신전 화사업단장을 만나 유선전화인입을 확정지었다. 처음부터 스마트폰 시대를 사는 사람은 자동유선전화시설 의 모든 분야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잘 알지는 못할 것이다.

36. 2016년 5월 21일 보현산천문대 준공20주년: Home coming day!

1991년 무렵에 보현산 봉우리 일대의 천문대 건설부지는 군유지와 사유지로 나뉘어 있었다. 능선의 남 쪽은 영천 군청 땅이고 북쪽은 개인 땅이었다. 그래서 북쪽 개인 땅 사용을 최소화했다. 서울 사는 한영희 소유의 북쪽 땅 매입이 어려웠다. 김강민이 이 땅 매입에 많은 애를 썼다.

1992년 2월 26일 박홍서 대장과 사업관련자가 보현산 현장에 모였다. 1.8m반사망원경을 보현산의 최 고봉인 동봉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4채널태양플레어망원경은 동봉 밑에 세우기로 했다가 나중에 박영득의 건의로 현 위치로 옮겼다. 숙소와 사무실 겸 연구실로 쓸 기숙사의 위치는 동봉 남쪽 아래의 억새가 우거 진 곳을 택했다. 천혜의 양지였다. 내가 다른 의견을 물리치면서 이 위치를 관철한 데에는 소백산천문대 건설 시 북풍한설의 고난 체험이 반면교사였다.

도로공사 예산은 17억 원이었다. 도로 총연장 9.2km 중 입구 2.4km의 길은 천문대가 만들되 도로 소 유권을 영천군이 갖기로 했다. 그렇지 않고는 도로 공사가 불가능했다. 그 도로 구간의 미등기 필지 27건 때문이었다. 천문대는 그 땅을 매입할 수단이 없었다. 영천군은 “공공용지의 취득 및 손실 보상에 관한 특 례법”을 적용해서 문제의 미등기 필지를 수용할 수 있었다. 남은 구간 6.8km는 보존림 전용 및 군유지 사 용승인으로 임도(林道)개설 허가를 받았다. 도로공사를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영천군이 적극적으로 도 왔다. 1992년 10월 6일 정각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에서 여러 축하객이 모인 가운데 보현산천문대 진입도로 공사 기공식을 했다.

불도저가 산허리를 잘랐다. 능선을 깎았다. 아름다운 산자락이 싹둑싹둑 베였다. 고운 산의 자태가 망 가졌다. 예쁜 얼굴을 할퀴는 것 같았다. 황토의 속살이 마음을 쓰리고 아리게 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 토록 자연스레 흘러내린 아름다운 산자락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 것인가. 1993년 6월에 도로공사 준공을 했다. 23억 원의 예산이 추가로 들어갔다.

세월은 흘러 2016년 5월 21일 보현산천문대 준공20주년 Home coming day에 참석하느라 전각초등학 교 분교 자리쯤에 이르니, 정면에 반짝이는 영천군의 돔이 보였다. 그 돔이 ‘어서 오십시오! 이제 좌회전해 서 천문대로 올라가세요!’하는 이정표 같은 감흥을 주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초입부터 도로의 구비 마다 공사로 생겼던 그 많은 생채기가 거의 다 아물어가고 있었다. 천문대 경내에 당도하니 패이고 할퀸 자국들이 치유되고 있었다. 자연의 본색이 살아나고 있었다. 천문대 만든다고 파헤칠 때 아팠던 마음이 이 제 다소 위안이 됐다. 보현산천문대 운영진의 부단한 관리의 결실일 것이다. 자연의 복원력도 위대해 보였 다.

37. 보현산천문대 발족

1994년 7월 1일 금요일에 보현산천문대를 발족시켰다. 구성원은 부장: 오병렬, 선임연구원; 김강민, 박 영득, 전영범, 천무영, 한원용, 연구원; 경제만, 문일권, 박병권, 박장현, 육인수, 선임기술원; 장정균, 기술 원; 윤영제, 선임행정원; 윤한배, 선임기능원; 노진형, 장비호, 행정기능원; 정백숙 등 총 17명이었다. 보현 산천문대의 건물공사가 지연됐다. 발령을 받고 일부는 현장으로, 일부는 본대에 남아서 일을 했다. 같은 해 9월 15일에야 태양관측실과 Coating동이 완성됐다. 전화도 개통됐다. 이 두 건물을 임시 사무실로 하 고 이사를 했다. 엉성한 대로 보현산천문대의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보현산천문대의 특성상 광학특정연구사업의 활성화에 집중했다. 전영범을 중심으로 한 천체사진관 측기술개발, 천무영을 중심으로 한 CCD제작기술개발, 김강민을 중심으로 한 분광기제작기술개발, 한원용 을 중심으로 한 적외선관측시스템 개발, 한인우를 중심으로 한 1m 자동망원경 개발 및 박영득을 중심으로 한 태양플레어망원경의 모니터링 시스템 개발 연구에 진력(盡力)했다.

38.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선 안 될 사람

인사(人事)는 잘하면 만사(萬事)요 못 하면 망사(亡事)라고 한다. 1992년에 보현산천문대 몫으로 광학관 측분야 전공자를 더 채용하려 해도 인재가 없었다. 과학기술처는 산하 연구기관의 논문 실적 올리기를 독 려했다. 나는 보현산천문대 사업에 배정된 정원 일부의 전용(轉用)에 동의했다. 천문대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이론천문학자 4명을 특채했다. 파격이었다. 천문대의 논문실적을 올리자는 취지였다. 갖출 것 다 갖춘 인재라서 기대도 됐다. 여기까지는 win-win인 듯했다. 2년 반쯤 지나서 그중 한 인재가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면서 천문대장의 기관운영에 관한 건의 일부를 ‘진정서’로 과학기술처장관에게 보냈다. 필 화풍파(筆禍風波)였다. 진정인 나름의 의견 수렴이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인재영입 사업을 보현산천 문대 건설사업을 관장한 내가 주도했다. 그런데 그는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나에게 항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유감이었다. 사람은 생각이 다 다르다. 누구나 장단점도 있다. 합의가 존중을 받는다. 대다수의 동 의를 구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행함은 독선이기 쉽다. 정당한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시비곡직(是非曲 直)은 정상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성취 여부를 떠나서.

인사에는 1. 꼭 필요한 사람 2. 있으나 마나 한 사람 3. 있어선 안 될 사람의 3원칙을 가지고 인사지원 자가 어느 항목에 해당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는 인사의 철칙이다. 인사의 정곡(正鵠)을 찌르 는 말이다.

국립천문대설립사업의 태초 이래로 이 3원칙을 등한시했던 나의 인사(人事)나 인사 추천은 모두 패착 (敗着)이었다. 무릇 인사권자는 지인지감(知人支鑑)에 밝은 눈을 번뜩여야 한다.

39. 슈메이커-레비9 혜성이 목성과 충돌하는 우주 쇼!

보현산천문대의 1.8m반사망원경 설치를 끝낼 즈음에 1994년 7월 17일~22일에 진귀한 우주 쇼가 벌어 졌다. 슈메이커-레비9 혜성이 목성의 중력에 끌려 목성과 충돌했다. 1km 내외의 21개 혜성 조각이 목성 을 향해 차례차례 돌진했다. 지구 반대쪽의 목성 면에 충돌해서 충돌 순간을 볼 수는 없었다. 전 세계의 망원경들이 충돌 수 시간 뒤의 흔적을 촬영했다.

보현산 관측 팀도 시험을 막 시작한 1.8m반사망원경을 목성을 향해 조준(照準)했다. 우리의 망원경으 로 혜성과 목성의 충돌 흔적을 촬영하는 역사의 기록에 참여했다.

17일부터 1.8m반사망원경의 CCD 카메라로 혜성의 목성 충돌 흔적을 매일 찍었다. 첫날은 열심히 찍 었으나 눈으로 확인된 게 없었다.

18일 카메라의 자동셔터장치가 고장 났다. 수리하다 못했다. 수동으로 20시 28분 20초에 1개의 충돌

흔적을 찍었다. 첫 히트(Hit)! 지구 2개 정도의 크기였다.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얻었다. CCD로 얻은 데이 터를 컴퓨터로 화상 처리한 사진을 만들었다. 이 사진이 1.8m반사망원경의 “First Light”이었다. 이 첫 사 진을 얻으려고 천무영, 박병권, 육인수, 문일권이 1.8m반사망원경과 씨름하며 고생했다.

19일 21시 5분 28초에 또 1개의 흔적을 촬영했다. 곧바로 산 아래의 ‘삼륭건설’ 현장 사무실로 가서

19일 21시 5분 28초에 또 1개의 흔적을 촬영했다. 곧바로 산 아래의 ‘삼륭건설’ 현장 사무실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