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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각성

Ⅲ. 조희룡의 예술정신

1. 자아의 각성

조선시대의 예술을 재도론적 관점에서 감계(鑑戒)나 계몽의 수단, 혹은 인 의예지(仁義禮智)를 겸비한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하기 위한 수기(修己)의 과 정으로 보고, 예술을 도(道)에 대해 종속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예 술을 재도론적 가치로부터 분리된 독자적 영역으로서 볼 것인가의 문제는 조선후기 문예사조, 특히 조희룡의 글씨와 그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큰 틀에서 보면 조선시대 예술은 성리학적 이념에 종속적인 것 이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회화가 자아의 각성과 창작자의 진솔한 심의(心 意)보다 사대부의 도덕적 완성을 위한 수양 혹은 효용에 그 가치를 두었다 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후기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데, 여항 문인들조차 자기 신분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개아를 추구하기보다 사대부 문화에 흡수되는 현상들이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희룡도 재도 론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희룡은 기존 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고 여항문인화가로서의 신분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예 술을 통한 성리학적 보편이념의 실현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의 감성과 개아를 중시하며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였다.

자신의 처지와 신분적 한계에 관해서 조희룡은 “나에겐 금마석거(金馬石渠)

의 상(相)이 없고, 일구일학(一邱一壑)의 상도 없다”32)고 하였고 “한 심지의 향을 사르고 한 편의 글을 읽으며, 두어 줄의 글자를 쓰고 몇 폭의 난을 그 리는데, 이것은 곧 늙음을 보내는 생활 경제이니, 또한 산림종정(山林鐘鼎)의 밖에 있다” 라 하여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긍정하면서 벼슬에 연연하지 않 는 산림처사(山林處士)임를 자처하고 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고관 대작의 삶 못지 않게 자유롭게 책을 읽고, 서화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희룡의 신분에 대한 자각은 곧 자아의 각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독서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나타났다. 일찍이 명나라의 화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으면, 가 슴속의 온갖 더러운 것이 제거되어 절로 구학(邱壑)이 마음 속에 생기고 산수의 경계가 만들어져 손 가는 대로 그려내니 이 모두가 산수의 전신(傳 神)이다”33)라 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독서는 회화 이전에 갖추어야 할 덕(德)이었다. 조희룡 또한 서화창작 이전에 독서의 안목을 갖추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자신이 “세상의 온갖 복잡한 일들 중 에 가장 떨어버리기 어려운 것은 문자결습(文字結習)이니 이 결습을 몰아 내기는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도 어렵다”34)고 할 정도로 늘 책을 가까이 하 였다. 다음의 글들에서 조희룡이 서화의 기본적인 덕으로서 독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매 독서의 안목이 아니면 그것을 얻을 수 없으 며, 좋은 것 훌륭한 것을 성취시킬 만한 손이 아니면 그것을 이룰 수 없 다. 이 눈은 그 빛이 횃불과 같으며 이 손은 그 힘이 큰솥을 들만한 것으

32) “吾無金馬石渠相 無一邱日壑” 「한와헌제화잡존」9항. ‘금마석거’는 출세한 벼 슬아치들이 출입하는 곳을 말하며 ‘일구일학’이란 말 그대로 언덕과 골짜기, 혹 은 은사(隱士)들이 소요하는 곳이다.

33) “讀萬卷書, 行萬里路, 胸中奪去塵濁, 自然邱壑內營, 成立鄞卾, 隨手寫出, 皆爲山 水傳神.” 동기창 著, 변영섭 외 譯(2003),「화안(畵眼)」, 시공사, p.11.

34) “世諦之中, 最難壩擺却者, 文字結習. 此習鷗除, 難於治病.” 「석우망년록」37항.

로, 이러한 솜씨와 안목이 미치는 곳에서 하나의 세계가 주조된다35)

난을 그리려면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하여 문자의 기운이 창자에 뻗치고 뱃속을 떠받치고 있어서 열 손가락사이로 넘쳐 나온 뒤라야 가능하다. 나 는 천하의 서적을 읽지 못했으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36)

결국 조희룡에게 독서의 안목과 새로운 서화세계의 주조는 스스로에게 부 여한, 꼭 이루어야 할 당위(當爲)였다. 하지만 이는 ‘잠총(蠶叢)37)의 언덕과 골짜기에다 가벼운 수레가 다닐 수 있는 익숙한 길을 여는 것’처럼 고난에 찬 것이었으며, ‘철적도인(조희룡)이 수레를 타고 홀로 가야할’ 고독하고 외 로운 길이었다.

조희룡의 자아에 대한 각성은 자연스럽게 역대 인물 가운데 이념적 리(理) 를 추구했던 학자나 관료보다는 개성적 문(文)을 추구했던 문인묵객 성향의 소동파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 이어졌다. 이는 소동파가 삿갓을 쓰고 나막 신을 신은〈동파입극상(東坡笠屐像)〉을 걸어 두고, 분향하고 차를 올려 벗들 과 함께 그의 생일을 기념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희룡은 소동 파의 문장을 일컬어 “남화노인(장자)과 더불어 하늘과 땅 사이를 홀로 자유 로이 왕래한다”38)고 하여 감탄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소동파가 만 년(晩年)에 혜주로 유배 간 사실을 자신의 유배 경험에 빗대어 어떤 동질감 과 위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39) 조희룡은 양주팔괴(揚州八怪)40)의 개성

35) “作書作畵, 非讀書眼, 無以得之, 非濟勝手, 無以成之. 此眼其光知炬, 此手其力扛 鼎, 手眼所及, 鑄一乾坤.” 「한와헌제화잡존」123항.

36) “欲寫蘭, 讀破萬券, 文字之氣, 撐脹拄腹, 溢出十指間然後, 可辦. 余未讀天下書, 何以得之?”「한와헌제화잡존」3항.

37) 당나라 이백(李白)의 “송우인입촉(送友人入蜀)”에 ‘듣건대, 잠총의 길은 험난 하여 쉽게 갈 수 없다(見說蠶叢路, 崎嶇不易行)’라고 했는데, 이는 매우 험난한 길을 말한 것임. 「석우망년록」31항, 주1참조.

38) “坡公文章, 與南華老人, 獨往獨來於天地之間.” 「석우망년록」21항.

39) 한영규(2000), 전게서, p.50.

40) 보통 왕사신(汪士愼), 황신(黃愼), 금농(金農), 고상(高翔), 이선(李鱓),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 8인을 일컽는 말이다. 양주팔괴의 공통적인 특색은 전

적 화법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화려하고 감각적인 매화그림을 그렸던 나 빙(羅聘 1733~1799)41)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그의 풍성하고 화려한 매 화그림은 아마도 개성적 화법을 추구하던 조희룡에게 신선한 미적 자극이었 을 것이다. 또한 은일고사(隱逸高士) 및 신선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탈 속(脫俗)적인 성향을 보이게 하였는데, 이는 그가 경세(經世)나 이학(理學)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 비이념적 성향의 다양한 지식을 추구했던 점을 생각 해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글이나 그 림에서는 경세에 대한 관심, 지식인으로서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8세기 이후 여항문인 중에는 마치 자신이 사대부인 듯 의사(擬似) 사대 부 의식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주로 서화의 수련을 통해 사대부와의 동질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희룡은 이러한 의식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각과 함께 독서를 강조하며 기 존의 문인화적 틀을 벗어나 창작자의 진솔한 심의를 중시하는 성령론에 기 초하여 새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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