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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神理)와 인품의 추구

Ⅲ. 조희룡의 예술정신

4. 신리(神理)와 인품의 추구

조희룡은 목숨이 다 되어도 따라서 다 되지 않는 것은 오직 ‘심성(心性)’

이라고 보고 이 심성을 존양하여 주리게 함이 없어야 된다고 하였다. 이러 한 그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회화관에도 투영되어 그림의 묘체(妙諦)를 시 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닮음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신리에 있는 것으로 보 았고, 인품은 그림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림에 퇴당(頹唐)한 붓놀림이 있어도 그 산만함이 싫어지지 않고 조심스럽 게 먹을 아껴도 그 구속이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핵심은 그 사람의 정 신과 운치(神理)에 있는 것이고 붓과 먹에서 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74)

73) 추사는 “題趙熙龍畵聯”에서 ‘…대개 품격의 높고 낮음은 그 솜씨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뜻에 있는 것이니,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비록 청록이나 이금(泥金) 어느 색채를 쓴다 해도 다 좋다…’ 라 하여 솜씨를 상당히 낮추어 보았다.

74) “畵有頹唐放筆, 而不嬚其漫, 有矜愼惜墨. 關捩, 在神理, 不當於筆墨求之.” 「한와헌 제화잡존」51항.

‘빈 들보 위의 제비 진흙’과 ‘봄 풀 돋아난 연못’은 그 정신과 신리(神理) 가 어찌 말과 글자 사이에 있는 것이겠는가? 서화 또한 그러하다. 원래부 터 자취와 상(象)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아는 사람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뿐이다.75)

원대(元代)의 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은 “내가 그림이라고 부르는 것 은 단순히 서둘러 휘두른 ‘낭만적인 붓’(逸筆)에 불과하다. 형태의 닮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린다”76)고 하였 다 . 그리고 소동파는 형사(形似)를 어린아이의 논리에 비유하며 낮게 평가 하고 그 대신 ‘상리(常理)’77)를 강조하였다. 평소 소동파를 높여 보았던 조 희룡 또한 궁극적으로 그림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붓과 먹이 아니었다.

그가 그림에서 진정 구해야 할 것은 곧 신리였다. 설령 붓놀림이 조금 산 만하고, 먹을 너무 조심스럽게 쓴다고 하더라도 신리가 드러나면 족하다.

이와 함께 조희룡은 서화가 사람의 일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옛부터 문장과 훈업을 이룩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좋아하여 문득 평생 작용하는 하나의 도구로 삼았으니, 어찌 죽은 종이와 해어진 비 단 사이에 구구하게 지내는 것뿐이겠는가? 그 우의(寓意)하는 것 역시 크 다”78)고 하여 서화에 깃든 ‘뜻’을 중요시하였다.

신리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굳이 그 뜻을 찾 아본다면, 정경융합(情景融合)의 경지, 즉 주관적 정의(情意)와 객관적 물경 (物景)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79) ‘경(景)’으로부터 우리의 마음(情)이 촉발

75) “‘空梁燕泥’․‘春草池塘’, 其神理, 其在言語文字間? 書畵亦然. 原不在跡象之內, 此可與知者道也.”「화구암난묵」28항.

76) 임어당 편역, 최승규 譯, 전게서, p.129.

77) 소동파는 상리(常理)를 사물의 본질적인 이치로 보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을 볼 경우, 무엇이든 짧은 시간에 들어와 박히는 인상이 대상의 중요한 정수이므로 화가는 이를 재빨리 포착해야 한다고 보았다.

78) “書畵, 何與於人事? 古來, 文章․勳業之人, 莫不好之, 便作生平作用之一具, 豈 區區於古紙․敗絹之間而已哉? 其寓意者, 亦大矣.” 「석우망년록」34항.

79) 조기영(1990), “화의론 연구,” 「원우론집」, 제17집, 연세대학교 대학원 p.332.

되고 ‘정’이 피어남으로써 ‘경’은 생명을 부여받는다. 즉 경과 정이 불가분 의 관계를 맺을 때 정감이 피어나고 운치가 생기는데 이를 신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리는 결코 대상의 닮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 음 속 형상의 진솔한 드러냄을 통해서 가능하다. 결국 신리를 제대로 드러 내기 위해서는 대상과 닮게 그려서도 안되고 닮지 않게 그려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으나 유리 가운데로 좇아서 볼 수 있다. 시험 삼아 내 얼굴을 비추고 또 하나의 유리로써 마주 대해 비추어 보자. 비친 것으로써 전하여 비추면 내 얼굴은 이미 그 참됨을 잃게 된다. 하물며 얼 굴을 붓과 먹에 전하고, 붓과 먹을 채색에 전하고, 채색을 비단에 전한다 면 비단천이 어찌 그 닮음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동인(同人)들에게 들어 보이면 혹 닮았다고 하고 혹은 닮지 않았다고 하지만 닮아도 나이고 닮 지 않아도 나인 것이다.

얼굴 위에 삼세(三世)가 있으니, 삼세라는 것은 불교의 이른바 과거, 현 재, 미래이다. 예전의 풍만한 뺨과 밝은 눈은 과거요, 지금의 허연 귀밑머 리와 거친 얼굴은 현재이며, 이로부터 수명을 얼마나 얻을는지 알 수 없 으나 훗날의 삽살개 눈썹과 닭 살갗은 미래인 것이다. 지금의 허연 귀밑 머리와 주름진 얼굴로써 예전의 풍만한 얼굴과 밝은 눈을 보자면 이미 별개의 사람이니, 그림 속의 내가 닮거나 닮지 않은 두 명의 내가 됨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현재의 나를 닮지 않았다고 과거의 나와 닮지 않음 을 어찌 알겠는가? 또 미래의 나와도 닮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는 가? 미래의 나를 우선 볼 수 없으니 과거의 나를 보지 못하는 것과 무엇 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닮거나 닮지 않은 사이에 처하여서 두 나를 서로 보겠는데, 금정안의 상이 없으며, 위대하고 널리 통달한 상이 없으며, 금마석거의 상 도 없고, 일구일학의 상도 없으니 그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가히 손을 이끌어 함께 금석서화의 사이에 숨을 뿐이다.80)

80) “吾不見吾面, 從琉璃中見之, 試以琉璃照吾, 又以一琉璃對而照之. 以照傳照, 吾

우리의 얼굴에는 삼세(三世)가 있으니 과거, 현재, 미래가 그것이다. 지금

는가. 산수화․화조도․인물화가 모두 정신과 기운을 가장 집중시키는 곳이 있는 법이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 원래 이치가 다르지 않다.83)

고개지(顧愷之 345~406)가 일찍이 배해(裴楷 ?~3세기초중경)의 초상화 를 다 그렸는데도 닮아 보이지 않더니 귀 밑 뺨에 털 세 개를 더 그리고 나니 그제야 사람들이 모두 배해의 얼굴인지 알아보고 미소지었다는 일화 와 맥이 통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소동파가 “사람은 어디엔가 그 특징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이는 눈에 있고, 어떤 이는 코나 입에 있다”고 한 이 야기와도 같은 맥락이다.

조희룡이 회화에서 신리를 강조한 것 못지않게 중요시 했던 것은 창작자 의 인품이었다. 그는 “인품이 높으면 필력 또한 높다”84)라 하여 인품을 존 양하여 평생토록 주림이 없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음의 글에서도 인 품을 강조하는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무릇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마음에 부족함이 있어도 남들에게 감상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밝은 달을 가슴으로 삼고 곧은 먹 줄을 창자로 삼아야 된다. 이는 곧 마음이 텅 비고 밝아서 안으로 살펴보아도 흠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85)

가슴속에 높고 맑은 기운이 있으면 붓을 통해 이 기운이 전해지며 이것은 남의 것을 답습해서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밝은 달을 가슴으로 삼 고 곧은 먹줄을 창자로 삼아 마음이 텅 비고 밝아서 흠이 없어 자기 자신 에게 비추어 보았을 때 부족함이 없어야 비로소 남들에게 감상될 수 있음

83) “嘗見古人畵絡緯嫏, 項前二鬚, 騰騰隆上, 如一身全力, 赴注於此 余寫梅蘭, 得此 理, 全樹全叢, 每在一枝一葉之出色處, 奚獨是也. 山水花鳥人物, 皆有神氣最注處.

細大, 原無二致.” 「한와헌제화잡존」80항.

84) “人品高筆亦高.” 「한와헌제화잡존」253항.

85) “凡作畵, 有歉於心, 而冀爲人所賞者, 多矣. 余所云明月爲懷, 直繩爲腸, 方可. 此, 乃襟懷曠朗, 內省不疚之謂也. 此, 可以小喩大耳.” 「한와헌제화잡존」83항.

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조희룡에게 자유롭고 독창적인 정신과 함께 높 은 인품의 추구는 좀 더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서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이 다. 일찍이 송대 문인화가 곽약허(郭若虛 1070~1080)는, 기운은 대상에 내 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인품, 주관에 달린 것이라고 보았는데,86) 화면 의 상(象)과 흔적보다는 작가의 정신과 내면을 중시하는 태도라 할 수 있 다. 형사(形似)보다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이러한 생각은 동시대를 살았던 소동파의 문인화론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이어져 문인화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었고 조희룡 또한 이를 수용하고 창작의 원리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희룡 회화관의 특징을 이루는 부분은 법식을 거부하는 태도 로 다음의 글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화가는 대부벽․소부벽의 여러 준법을 이 돌에 펼쳐서는 안 된다. 마음을 비우고 붓 가는 대로 따르면 우연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다시 얻으려 해 도 얻지 못한다. 하루에 백 개의 돌을 그려도 각각 다르게 이루어지는 법이 다. 붓 또한 그 방도를 얻지 못하는데 마음이 어찌 관여할 수 있겠는가. 흉 중에 정해진 격(格)이 있으면 그림쟁이의 마계(魔界)에 떨어질 뿐이다.87)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마음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흉중에 정해진 격(格) 즉, 법식에 그림이 좌우된다면 참다운 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그림쟁이 의 마계에 떨어질 뿐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붓 가 는 대로 따르라는 그의 충고는 “붓을 내릴 때 오로지 기이한 생각에 의존 하여 억지로 고치고 꾸며도 그 이치를 이루지 못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눈 썹을 찌푸리게 할 따름이다. 기이하기를 기대하지 않고서 기이한 것, 그것 이 기이한 것이다”88)라 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구속을 거부하

86) 조기영(1990), 전게서, p.329.

87) “畵家大小斧劈諸法, 不可施於此石. 虛心聽筆, 偶然得之, 不可得. 一日百石, 各具一

87) “畵家大小斧劈諸法, 不可施於此石. 虛心聽筆, 偶然得之, 不可得. 一日百石, 各具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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