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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두뇌작용

쇼펜하우어는 세계 자체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물음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 계가 어떤 방식인지,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오로지 의식 속에 나타난 것만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의식 속에 나타 난 재료들을 충분근거율을 통해 인식할 뿐이다. 인간의 인식 대상은 표상의 세계에 머물 뿐이며, 소위 칸트적인 물자체에 대해서는 인식할 만한 어떤 인식 수단도 갖 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연구하는 어떤 학문도 표상들의 관계를 밝힐 수 있을 뿐 세계의 본질은 알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학문의 대상과 한계를 다 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학문은 세계의 가장 심오한 본질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고, 결코 표상을 넘어 설 수 없으며, 오히려 요컨대 어떤 표상과 다른 표상의 관계를 알게 해주는데 불과할 뿐이다. 어떤 학문이든 반드시 두개의 주된 자료에서 출발한다. 그 하나는 언제나 도구 로써 형태를 취하는 근거율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로써 학문의 특수한 대상이다.37)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세계는 직관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으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현상이라면, 그것은 순수하고 적나라한 관념주의에 머물 것이다. 세계는 단지 가상일뿐이며, 인간적인 정신으로 꾼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처럼 현상의 개념을 좀 더 정확하게 심사숙고해 본다면, 현상의 배후에는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 실이 분명해진다.” W 바이셰델, 철학의 뒤안길, 이기상 이말숙 옮김, 서광사, 1990, 334쪽.

37) WV, 81쪽.

로 구성되어 있다. 직관적인 인식은 표상을 직접 결합하는 선험적인 원칙, 즉 근거

과적인 관계 속에 결합시키는 과정이 바로 오성작용, 즉 두뇌 작용이다. 칸트는 오 성을 인식작용의 중요한 원천으로써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쇼펜 하우어는 두뇌 작용의 하나로 규정한다.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가 두뇌를, 의지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 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의 하면 인식작용은 의지가 두뇌라는 기관을 통해 자신의 인식 의욕을 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식은 의지의 객관화의 이러한 단계에서 요구되는 보조 수단, 즉 메카네로서 개체를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나타난다. 사실 객관화되는 의지의 모든 노력이나 규 정이 어떤 기관을 통해 나타나듯이, 즉 표상을 위해 하나의 기관으로 나타나듯이, 인식 은 뇌수나 보다 큰 신경절을 통해 나타난다.42)

인식하고자하는 의지를 발현하는 작용은 신체의 일부분인 두뇌에서 일어나는 것 이므로, 인식 현상도 두뇌의 작용으로 설명 가능하다. 따라서 인식은 인간의 신체 중 두뇌에서 일어나는 표상화작용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표상을 직관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 오성과 이성의 작용도 모두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 나는 작용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에서 쇼펜하우어는 “나는 인식을 신체 일부의 단 순한 기능으로서 설정한다. 이 신체 부분 자체는 표상화된 인식 의욕이다. 의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43)라고 주장한다. 인식은 알고 자 하는 의지의 발현으로 신체에 나타나는 두뇌 작용의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쇼펜하우어가 이러한 오성작용을 두뇌를 가진 모든 생명 체에게 주어진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인식을 단순히 이론 적인 지식만으로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에 따르면 오성은 지각에 의한 정보들로부터 인식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모든 생명체에게 오성의 능력이 주어져있다. 쇼펜하우어는 오성을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동물이나 인간 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능력이라고 한다.44) 그러나 자연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지닌

42) WV, 266쪽.

43) WN, 67쪽. 이것은 신체의 목적론적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신체의 부분들은 의지를 발현시 키는 주된 욕구와 완전히 상응해야 하며, 그러한 욕구의 가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즉 치아, 목구 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욕이며, 물건을 잡는 손이다. 재빠른 발은 그것들로 표현되는 이미 보다 간접적으로 된 의지의 노력과 상응한다.” WV, 201쪽 참조.

오성의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능력 정도에 따라, 다양한 등급으로 나뉘고 복잡한 연 쇄관계가 형성된다. 자연 세계는 이처럼 오성의 능력에 따라서 단순한 인식에서 좀 더 복잡하고 고차원의 인식을 가진 것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에 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인, 이성에 의한 인식도 우선적으로 이러한 오성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오성과 이성의 관계를 “오성에 의해 직접 인식되고, 직관적으로 파악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성에 의해 추상적이고 성찰된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45)고 본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인간만이 지닌 인식 능력, 즉 이성에 의한 인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가 이성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는 우선 표상 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인 충분근거율에 대해 고찰하고, 이러한 충분근거율을 사용 하는 오성의 능력을 동물에게도 부여한다. 그러고 나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 의 능력, 성찰하고 반성하며 개념화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 인간은 충분 근거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동물들과 달리 이성을 사용하여 추상적 지식을 얻는, 학문을 정초하는 인식주관이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학문은 이성을 통해 사물 에 대한 추상적 인식을 얻는 작업이다. 이러한 추상적 인식과 학문의 관계를 쇼펜 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일반적으로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직관 적 인식으로서 획득이 되고, 이로 인해 전혀 다른 인식 방식, 즉 추상적인 인식 방식으 로 넘어감으로써 이성에 맡겨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지식, 즉 추상적 의식으로 고양된 인식과 본래적인 학문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같다. 모든 사람은 개별 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경험하고 고찰함으로써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어떤 종류의 대상들에 대해 완전한 추상적인 인식을 얻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자만이 학문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런 자는 개념을 통해서만 그 종류를 가려낼 수 있다. 그 때문에 모든 학문의 선두에는 하나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고, 이 개념을 통해

44) 쇼펜하우어가 동물에게도 오성의 능력이 있다고 한 주장에 대해 수잔네 뫼부스는 다음과 같이 해 석한다. “인식은 체험한 경험을 습득하여 적용하는 것으로 상상이 가능하다. 동물이 훈련 받거나 혹은 습득한 태도는 이들 동물도 혼란스럽고, 선별되지 않은 우연한 감각활동에 대한 능력이 있음 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인상들로부터 개별적인 반응 그 자체는 감각 그 자체로 부터 동기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오성에 의한 것이다.” 수잔네 뫼부스, 쉽게 읽는 의지와 표상으 로서의 세계, 공병혜 옮김, 이학사, 2002, 98쪽.

45) WV, 68쪽.

모든 사물의 전체에서 그 부분이 사유되며, 학문은 그 전체로부터 완전한 추상적인 인 식을 기대한다.46)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성에 의한 지식, 즉 추상적 인식을 얻는다는 것은 오성에 의해 파악한 인과관계를 다양한 개념으로 분류하고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러나 이성에 근거하여 전개되는 학문도 세계가 무엇인지를 찾을 뿐 세계의 본질과 궁극적인 존재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성에 근거한 학문들은 세계 자 체가 아니라 현상들, 즉 표상들 간의 상호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즉, 근거율에 따른 의미를 밝혀내고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 는 인식의 가치에 있어 이성을 오성보다 뛰어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다음의 언급에서와 같이 추상적 인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인식에 더 가치를 둔다.

대상의 가시성은 그 대상을 감지할 수 있음을 알려줄 때에만 가치와 의의를 가지듯 이, 추상적 인식의 모든 가치는 직관적 인식에 대한 그것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 때 문에 자연인은 단순히 사유된 것인 추상적인 개념보다 언제나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식된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47)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인간의 고유한 인식능력으로만 고찰하지 않고, 행동을 지도 하는 실천 영역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영위되는 실천적인 삶은 직관에 의한 구체적인 생활의 반영일 뿐이며 그 것의 이면일 뿐이다. 이성이 없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직관에 의한 것과 성찰에 의한 이중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 가담함으로써 동물에 비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인간의 고유한 인식능력으로만 고찰하지 않고, 행동을 지도 하는 실천 영역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영위되는 실천적인 삶은 직관에 의한 구체적인 생활의 반영일 뿐이며 그 것의 이면일 뿐이다. 이성이 없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직관에 의한 것과 성찰에 의한 이중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 가담함으로써 동물에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