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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개체화와 이념

지금까지 쇼펜하우어의 일관된 주장에 따르면, 자연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표 상이라는 것과 사물이 객관화될 때는 주관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인식 주관에 의 해 세계는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입장은 의지와 표 상이 하나라는 것,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물자체인 의지가 근거율의 지배를 받는 표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의지가 표상으로 나타나는 즉, 객관화되는 첫 번째 단계에 서 이념이120) 드러나며 이 이념을 통해 의지의 개체화가 진행된다. 여기서 개체화 란 이념을 본으로 삼는 사물들이 시간, 공간,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 다. 이런 개체화의 과정을 거쳐 사물은 다양한 표상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다 시 말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사물들은 의지의 객관화 단계에 의해 현상으로 드러 나는데, 이 객관화 단계에서 구체적인 개체화 과정을 거쳐 다양한 사물들로 가시화 된다. 본래 하나였던 의지가 시간, 공간, 인과율에 의해 개체화되어, 근거율의 지배 를 받는 다양한 표상으로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즉, 의지를 다양성으로 서 로 나란히 잇달아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121)이고 이때 작용하는 개체화의 원리는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119) 이때의 실체 개념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과 비교해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하느님이 곧, 실체 요, 곧 자연이다.’라고 하였으며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다. 특별한 사물들은 하느님의 속성이 변화한 모습이거나,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속성이 어떤 정해진 방법으 로 표현되는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양상들이 하느님 안에 있는 사물이라고 보이는 한, 이 양상들의 총체는 소산적 자연이며, 하느님은 능산적 자연이라고 한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 서양철학사(하), 강성위 옮김, 2002, 188쪽.

120) 쇼펜하우어는 “이념을 그것의 근원적인 의미 즉, 플라톤의 의미로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WG, 145쪽.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이념이 경험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점을 해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도 의지의 객관화 과정 중 이념이 개체화되 는 방식에서 이념의 단일성과 다양성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개체화의 원리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념(Idee)’이라는 개 념이다. 쇼펜하우어는 객관화의 단계에서 사물들이 다양하게 개체화될 때 이념이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이념은 시간, 공간이 라는 개체화의 원리의 지배를 받지는 않지만, 의지가 객관화의 각 단계에서 다양한 존재로 개체화될 때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원상의 역할을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념도 의지의 객관화 단계에 주어진 것이지만, 이념 자체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기 이전의 단계이다. 자연에서의 개체들은 다양한 단계에서 이념을 통해 존재하 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각각의 단계에서의 이념은 다수가 아니라 하나라는 점 으로, 이때의 이념은 다양한 현상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이념의 존재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그러한 의지의 객관화에는 많지만 특정한 단계가 있어서, 그 단계에 따라 점 차 명백성과 완전성을 더해가며, 의지의 본질이 표상으로 들어가는, 즉 객관으로 나타 나는 것을 기억한다. 말하자면 이들 단계가 바로 특정한 종이거나, 또는 유기적이거나 무기적이거나 모든 자연적인 물체의 원래적이고 변하지 않는 형식과 특성들일 뿐만 아 니라 자연법칙에 따라 드러나는 보편적인 힘들인 한에서, 우리는 이들 단계가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이념은 모든 무수한 개체와 개별적 인 사물에서 나타나고, 이러한 모상에 대해서는 원상이라는 관계를 갖는다.122)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이념의 존재 특성을 근거로,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생 명의 본질에 대한 해석을 전개하지만 유기체의 생명을 일반적인 힘에 귀결시키는 환원주의123)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생명은 열과 전기의 단순한 작용이

121)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이 개체화의 원리임을 전제한다. 사물을 구분하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 은 사물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체화의 원리에 대한 논란 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형상의 개별화의 원리는 질료라 고 본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은 질료와 형상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세시 대에는 이것이 보편자와 개별자의 문제로 변형되어 논의되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사물의 종 적인 본질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실현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사물에 앞서 있는 것”

으로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인식을 찾아내는 것으로 모든 것 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구될 수 있다”고 하였다. 둔스 스코투스는 보편자를 존중하지 않고 개 별자와 보편자를 동등하고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종의 동일한 공통 본성은 개별자에 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상),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02, 228쪽, 584~691쪽 참조.

122) WV, 289쪽.

123) 박이문은 헐(C. Hull)의 주장에 주목하여 환원주의를 이해한다. 헐에 의하면 환원이라는 말은 철

라고 하는 견해와, 열과 전기가 물자체이고 동식물계는 그것의 현상이라는 견해, 즉 “유기체란 결국 물리적이고 화학적이며 기계적인 힘들의 현상의 집합체”124)라 는 주장에 반대한다. 이것은 대장장이가 망치와 모루를 사용한다고 해서 대장장이 를 망치와 모루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자연의 생명력이 무기적 자연 의 힘들을 이용한다고 해서 유기적 생명체가 결코 그 무기적 힘들로 이루어진 것 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동물이나 인간이라는 유기체 는 특정한 단계에서 의지가 직접 객관화된 것으로 전기, 화학 현상, 기계 작용 속 에서 의지를 객관화시키는 단계의 이념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의지의 객관성의 보다 높은 단계를 낮은 단계에 환원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의지의 객관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단계의 이념 속에서 무기적 자연의 힘과 유기적 자연의 힘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 은, 쇼펜하우어는 여러 단계의 객관화의 이념 속에서 의지가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해서 각 단계에 나타나는 이념을 단일성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념이 개체화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념을 단일한 것으로 오인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객관화의 각 단계에서의 이념의 존재를 언급하 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념의 동일성과 다양 성의 모순된 성격은 쇼펜하우어 철학이 지닌 문제점이기도 하다.125) 우리는 이러한 이념을 자연 속에서 다양한 사물들의 존재 근거로서, 객관화의 각 단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의지의 세계보다 표상 세계에 가깝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 단계에서 나타나는 이념의 역할, 그리고 의지의 객관화와 이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자나 과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그것은 대체로 인식론적 환원, 물리적 환원, 이론 적 환원으로 구분된다. 이 중 물리적 환원을 존재론적 환원으로 철학의 영역에 적용할 수가 있다.

물리적 환원에 의하면 어떤 사물의 체계는 그 구성요소로 분석되며, 이런 구성요소에 의한 설명은 그것들의 속성에 의해 다시 설명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서로 환원된다는 말은 생명을 물질의 형태로 보느냐 물질이 생명의 형태로 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박이문, 과 학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이언스북스, 1993, 152쪽 이하 참조.

124) WV, 253쪽.

125) 이러한 이념의 존재 특성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념이 개별적 사물들의 공통적인 특 성을 지닌 ‘보편자’이지만, 이념이 의지가 객관화되는 과정 중에 주어진다는 점에서 다양성, 다수성 을 지녀야 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 특성은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존재 특성을 분유와 임재라는 관점에서 논의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과 유사하다.

의지의 객관화의 보다 낮은 단계에서, 그러므로 무기물에서는 의지의 현상들 가운데 몇 개가, 인과성을 실마리로 하여 각기 현존하는 물질을 제 것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충

의지의 객관화의 보다 낮은 단계에서, 그러므로 무기물에서는 의지의 현상들 가운데 몇 개가, 인과성을 실마리로 하여 각기 현존하는 물질을 제 것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