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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쇳말』의 내적 구성원리와 신뢰성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저자가 왜 이렇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접근법을 택했는지, 또 그 의도가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윌리엄즈는 개념보다 단 어 자체의 물적 형태와 변화와 내장된 의미의 다양성을 추적하고, 단어에 내장된

상충적이고 심지어 모순적 관계를 이루는 의미의 다양성이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전문화, 일반화, 추상화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데, 여기 에는 근대사회의 형성이 (리비스적이든 마르크스적이든) “전체적 삶의 과정”(a whole way of life)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비판적 관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추상화 과정에서 단어의 특정한 의미가 ‘하나의 올바 른 용법’으로 부상하면서 다양한 의미가 지칭하는, 결코 하나의 개념으로 담을 수 없는 실제의 현실이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이다.17) 저자가 보기 드물게 자신 의 의도를 드러내는 항목인 ‘criticism’을 예로 들자. “critic”은 판관을 의미하 는 그리스어 krités가 라틴어를 거쳐 16세기 중엽 영어로 유입된다. ‘criticism’

은 17세기 초에 등장하는데, 이 단어의 주된 의미는 “흠을 잡는” 부정적 판단이 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 문학적 판단행위를 의미하는 용어로 전용되는 데,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용어가 ‘비난’이라는 의미를 담지한 일반화를 지향 한 가운데, 다른 한편 “주도적이고 자연스럽기까지 한 반응”(the predominant and even natural response)으로 전문화된 의미가 생겨나는 과정이다. 윌리엄즈 는 이러한 의미변화에서 특정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자신감, 즉,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개인적 인상을 사회의 표준적 판단으로 표출하는 관행을 발견하며, 유사 한 의미변화는 ‘taste’(취향), ‘cultivation’(교양), ‘culture’(문화)에서도 발견된 다. 해제의 끝에서 윌리엄즈는 자신의 의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criticism과 흠 잡기(find-faulting) 간의 연관성뿐만 아니 라, 이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 criticism과 ‘권위적’ 판단이라는 의미 사이의 연 관성인데, 이때 후자는 외관상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criticism 은 모든 의사소통, 특히 보다 형식화된 유형의 의사소통에 대한 사회적 내지 전

17) ‘liberal’이나 ‘progressive’의 사례처럼 18세기 후반 이후 추상화가 크게 진행되면, 구체 적 현실과의 연계가 끊기면서 서로 적대적인 정치적 진영들이 자신들을 옹호하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다.

문적인 일반화된 수용과정을 의미하는 말이 됨으로써, 소비자의 위상을 취할 때 뿐만 아니라 실제적 반응을 의미하는 일련의 추상화된 용어들(judgement, taste, cultivation, discrimination, sensibility, disinterested, qualified 등에서처럼)을 통해 소 비자로서의 입장을 감출 때도 이데올로기가 된다.(86)

‘criticism’은 원래 일상적 활동이지만, 부르주아 계층에 속한 개인들의 특정 한 인상이나 반응이 [비평]이란 사회적 표준으로 일반화시킬 때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더 나아가, 개인의 특정한 반응을 [취향], [감수성], [수양]. [무사심]

등 추상화를 통해 은폐할 때도 변함없이 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이 경우 특히 중요한 것은 ‘소비’ 개념이다. 즉, ‘art’와 ‘criticism’은 원래 전체적 사회관계 내에서의 일상적 활동인데, 18세기 이후 미학적 대상을 삶의 전체과정에서 분 리시켜 감상의 대상으로 특정하는 행위의 전문화가 일어나고, 이어서 특정 계급 의 개인적 인상을 당대의 권위적 판단으로 격상하는 일반화를 통해 [비평]은 부 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소비활동이 된다. 단지 이 사실이 숨겨질 따름인데,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윌리엄즈는 이들 용어를 “다른 용어로 대체할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계급적 자신감이나 습관 자체를 부정하는 일 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일반적 과정으로 고양될 때,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은 반응의 특정성이고, 특정한 반응은 결코 추상적 ‘판단’이 아니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인 반응을 종종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조차도 그 모든 상황과 문맥과 적 극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갖는 일정한 실천이라는 점이다.(86)

이제 개념이란 의미구성체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윌리엄즈의 이유가 보다 분 명해진다. 이데올로기적 작동의 핵심은 근본적으로 “실제의 상황과 환경으로부 터 반응의 추상화,” 또는 “특정한 계급적 반응을 ‘판단’이라는 외견상 일반적 과

정으로 고양”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단어가 개념으로 추상화되어 독자성을 가지 면서 일상적 현실과 연결을 잃게 될 때 그 개념은 누구나—그러나 실제로는 지 배계급만이--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한 단어가 지시하는 여러 의미들의 복잡한 얽힘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런 얽힘은 ‘물적’ 생산과 ‘상징적’ 생산과의 복잡한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의미론은 당대 영국의 변화에 대한 저자의 인식 상황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전후 영국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가운데 노동자 집단의 생활수준이 일정 부분 향상되면서 계급 정체성이 약화되고 있었는데,18) 저자는 그 원인을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적 지배를 은폐하는 추상화된 개념의 지배에서 찾는 한편, 삶의 실제적 전체적 과정을 보여주는 일상적 언어의 다양성과 실천 을 통해 정체성 약화에 저항할 “한 뼘 더 강화된 의식”(an extra edge of con-sciousness)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정리하자. 윌리엄즈의 ‘역사적 의미론’은 (1) 단어를 중 심으로 역사적 의미변화를 고찰하기 위해 (2) 문학비평적 방법론과 단어의 물적 형태변화와 연관시켜, (3) 단어의 내적발전과 구조를 추적하고, (4) 이 과정에서 일반화, 전문화, 추상화 경향을 발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방법 론은 결국 언어의 살아있는 활력의 환기를 통해 언어의 전문화, 일반화, 추상화 를 통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려는 저자의 비평의식의 산물이었다. 그 런데, 이런 식의 서술방식은 독자—특히, 언어와 역사의 비환원적 결합방식에

18) 윌리엄즈는 『기나긴 혁명』의 결론에 해당될 긴 에세이 “1960년대의 영국”에서 노동자 집단에서 계급이 낡은 사고라는 느낌이 증가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사실이며 기존 의 사회체제를 승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노동당 내의 구좌파와 신우파 는 “지배적인 해석과 방향을 본질적으로 도전받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게” 함으로써 “새 로운 의식의 공동체, 새로운 의식의 패턴을 줄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레이먼드 윌리엄 즈, 1961, 『기나긴 혁명』, 성은애 역, 문학동네 (Raymond Williams, The Long Revolution, London: Chatto and Windus), 495쪽.

대한 요약적 지식을 원하는 개념사 전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러 약점을 노 정한다. 우선, ‘잠정적’이지만 현실에 괄호 치고 단어의 내적 관계의 변화를 살 피는 방법론에 유보 없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고, 일상적 언어의 활력으로 이 데올로기의 지배 맞서려는 전략의 효율성에 동의하기도 쉽지 않을 터이다. 또 한, 개념을 거부하고 전반적 사회조직과 지배적 관념이 서로 “녹아든”(in so-lution) “살아진 삶 전체”(a whole lived experience)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명시화된 방법론적 체계의 개발을 피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러나 저작 전체를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는) 저자의 방법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을 때 필자 스스로 겪은 것처럼 논지의 맥락을 잡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장점도 적지 않다. 개념 화되기 이전의 살아있는 언어적 활력을 중시하는 윌리엄즈 특유의 서술방식은

‘determine’의 예에서처럼 새로운 개념을 향한 사유를 촉발하고, ‘experi-ence’의 사례처럼 한 단어가 지칭하는 여러 개념들 간 차이를 명확하게 하거나,

‘culture’처럼 추상화된 근대적 개념에 담긴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장 점도 가지고 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용어사용 사례의 대표성일 터인데, 윌리엄즈의 용례 는 어느 정도 대표성을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 자세히 다루기는 어려울 터지만, 윌리엄즈의 표제어 ‘진보’(progress)를 코젤렉과 크리스티안 마이어(Christian Meier)가 집필한 『역사적 기본개념』의 [진보](Fortschritt) 항목과 비교해보 자.19)

『역사적 기본개념』의 [진보] 항목은 고전시대부터 19세기까지 “넓은 의미의 진보”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추적하는데, 두 집필자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사용 하는 [진보] 개념은 18세기 후반에 정립된다. 중세에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신과 의 합일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초역사적 [진보] 개념이 있었다. (i) 그런데, 종

19) ‘progressive’는 Keywords, pp.243-245에 실린 짧은 에세이이고, 이에 반해 [For-tschritt]는 Geschichtliche Grundbegriffe, 1975, Stuttgart:Klette-Cotta, vol. 2.에 게 재된 모노그라프이다.

말을 향한 미래가 개선될 수 있다는 함의는 근대의 과학혁명의 계기 속에서 열 린 미래로 전환된다. (ii) [진보] 개념은 [역사] 개념과 함께 출현하는데, [역사]는 현재와 미래가 구분된다는 점에서 ‘시간성’을 띠게 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두 개념은 근대세계로 오면서 경험과 기대지평 간 차의 확대를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주로 “Fortschrift”로 표기되는 [진보]는 (iii) 역사철학의 보편 적 개념이 되는데, 이때 “집합적 의미를 띤 단수 형태의 모습으로”으로 크게 3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첫째는 진보의 주체는 특정한 학문이나 예술의 독점물 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이 되며, (iv) 두 번째는 주체와 객체의 역할이 바뀐다.

이러한 보편화의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의 역할이 바뀌는데 이것이 두 번째 단 계다. 주체 소유격이 객체 소유격이 된 것이다. 진보가 주도적 역할을 위임받아

이러한 보편화의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의 역할이 바뀌는데 이것이 두 번째 단 계다. 주체 소유격이 객체 소유격이 된 것이다. 진보가 주도적 역할을 위임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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