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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시설의 성립과 변천

문서에서 나타난 建築的 特性에 關한 硏究 (페이지 32-116)

부산일본거류지 시기에 설립된 건축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관 청이나 공공시설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있어 몇 장의 사진으로 다양한 종류의 건축물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남겨진 자 료들을 토대로 건립된 위치나 그 규모를 짐작하고 참고로 하여, 이 장에서 는 거류지 당시에 세워졌던 건축들에 대한 설립배경을 포함한 기초자료조 사부터 시작하여 부산에서의 근대건축이 어떻게 생성․변화해갔는가를 보 여준다.

일본의 경우 1859년 서구에 의한 요코하마(橫濱)개항 이후 서구를 따르 는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메이지(明治)유 신이 나타나 건축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871년 공부성(工部省)내 공 학료(工學寮)로 시작된 일본인 건축기술자의 양성기관은 1877년 공부대학 (工部大學)으로 개칭하여 1879년 최초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후 일본인 건축가들은 서양의 양식주의건축을 모방하는데 역점을 두었고, 국위를 안 팎으로 과시하기 위해 관청집중계획(官廳集中計劃)을 계획하였다.43)

개항장이나 거류지 설치의 주된 목적은 통상과 무역이었고 이 활동을 위 해 상가나 주거 가옥, 감독을 위한 관청 건물들이 요구되었다. 거류지제도 를 처음 시행했던 서구제국(西歐諸國)은 단지 통상과 무역 활동의 편의제 공을 위해 활용하였으나 일본은 그 단계를 넘어 침략성을 부여하여 부산에 적용하였다. 거류지 설정 이후 가장 먼저 초량왜관의 관수왜가 부지 위에 그들의 국위(國威)를 과시하는 관리관청을 세웠고 그 건축물은 1910년 개 항장으로서 그 역할을 마칠 때까지 일본거류지 행정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근대적 개항 이후 대(對)일본과의 무역전개는 시기에 따라 단계적으로 변화를 보여왔으며, 일본이 한국의 무역을 독점하던 1883-4년까지는 조약 의 규정에 의해 수입된 일본상품에 대한 관세(關稅)가 부과하지 아니하고

43) 村松伸, 윤인석 역, 앞의 논문

민간의 소매상인이 무역 전체에 중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2 년 5월 한미통상조약(韓美通商條約)을 위시하여 1883년 9월에 한청상민무 역수륙장정(韓淸常民貿易水陸章程) 체결과 세관(稅館)설치는 일본도 외국과 동일한 위치의 무역관계로 들어감으로써 무역의 독점이 붕괴되었다.44) 이 이후 일본은 초기 소자본경영에 대한 경제체제의 변화가 요구됨을 느끼게 되어, 후진적인 거래체제에서 조직적인 경제구조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부 산에 통상과 무역을 위한 경제시설 설치가 요구되었다.

1885년 일본의 공부성이 폐지되고 관청건축을 1886년 임시건축국(臨時建 築局)이 맡아 이에 민간회사가 청부를 맡았다. 1887년 ‘일본토목회사’가 설 립되었고 이후 오오쿠라쿠미(大倉組)로 발전하여 관청건축에서 토목, 설계, 시공까지 독점하였고 학사(學士)출신을 고용하여 기술력을 가진 종합건설 업자의 시초가 되었다.45) 일본인 건축가의 해외진출은 부산일본거류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1903년 발행된 거류지 관련 지도46)에 살펴보면 대청정의 1등 도로변에 ‘오오쿠라쿠미(大倉組)’사옥이 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산일본거류지의 최초라고 볼 수 있는 신시가지계획인 부산일본영 사관령 내달(內達) 제2호 「인구증가와 신시가의 설정계획」(1902.5.9)으로 일본거류지의 각 지구 경계와 위치를 파악하여 측량을 계획되었다고 한다.

해외로 진출한 일본인 건축가들은 침략의 앞잡이로서 대만이나 한반도로 간 사람들이나 고용된 외국인(眞水英夫, 福井房一 등)과는 입장이 서로 달 랐지만 그들 건축가의 의식, 목표, 기술은 일본에 남아있던 건축가들과 마 찬가지로 큰 차이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47)

부산일본거류지에서의 통상과 무역은 초기에는 소자본업자들에 의한 양 국 물품간의 교환무역 수준이었고, 무역순환은 일본이 한국에서 쌀이나 콩, 소가죽 등 원자재를 수입하고, 영국에서 가공된 인도의 면포(綿布)같은 공

44) 彭澤周, 『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 東京, 塙書房, 1967, 277~278쪽, 재인용 : 부산상공회의소․부산경제연구원, 『부산경제사』, 1989, 303~304쪽

45) 村松伸, 윤인석 역, 앞의 논문 46) 손정목, 앞의 책, 103쪽 지도 47) 村松伸, 윤인석 역, 앞의 논문

산품들을 수출하였다. 여기서 화폐(貨幣)의 이용은 ‘한전(韓錢)은 일본통화

→한국으로의 수출품(면포)→한전→일본으로의 수출품(쌀․콩․소가죽 등)

→일본통화’라는 식의 순환과정을 필요로 하는 상품이었다.48) 그리고 이러 한 무역에는 선박의 이용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부산항을 중심으로 무역과 통상 관련업자들이 모여들었고 시가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1904년에 편찬 된 ‘경상도사정’에 의하면 당시 부산항은 일본에서 떠나오는 선박의 기항지 (寄港地)였다. 일본의 고베(神戶)를 기점으로 나가사키(長崎)에서 한국의 부 산과 인천, 청의 도시들에 이르는 국제적 항로49)와 일본의 오사카(大阪)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부산, 인천 등 일본거류지 여러 곳을 경유하는 항 로50), 그리고 2척의 기선(汽船)이 이루는 대가기선(大家汽船)에 의한 명령 항로와 그 외 2개의 기선항로와 연안선 항로51)가 더 있었다. 부산은 일본 의 무역중심지와 한국의 일본거류지 설치지역과의 교역이 용이하여 교통관 련 지점이나 취급상점이 항구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52)

부산항은 부산일본거류지를 한국과 일본 및 중국에 이르는 통상과 무역 을 위한 요지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또한 일본인 건축가 의 성장과 해외로의 진출은 거류지의 시가지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48) 부산상공회의소․부산경제연구원, 『부산경제사』, 1989, 296쪽

49) 부산에 설립된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 명령항로(命令航路)이다. 부산일본 영사관, 『경상도사정』, 1904, 제27 교통 및 통신

50) 부산에 설립된 오사카상선회사(大阪商船會社) 명령항로(命令航路)이다. 이 회 사는 항로를 3개선을 가졌는데 오사카~진남포선, 오사카~군산선, 오사카~성진선 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가 부산을 경유하였다. 부산일본영사관, 『경상도사정』, 1904, 제27 교통 및 통신

51) 동청철로회사(東淸鐵路會社)의 기선 2척이 포염(浦鹽)을 기점으로 부산, 원산, 장기, 인천 등을 경유하여 천진, 상해에 이르렀으며, 대천운수주식회사(大川運輸 株植會社)는 기선 1척으로 큐슈철도(九州鐵道) 연결선으로 부산과 당진간을 매주 2회,매월 8회 왕복하여 쓰시마의 이츠하라(嚴原)에 기항하였다. 연안선항로로 두 사조(頭司組)의 기선이 있어 진남포, 인천, 목포, 부산을 거쳐 원산까지 이르렀다.

부산일본영사관, 『경상도사정』, 1904, 제27 교통 및 통신

52) 교통관련 상점으로 일본우선회사지점과 오사카상선회사지점, 대지회조부(大池 回漕部), 유천길회조부(由川吉回漕部), 삼목회조점(三木回漕店), 국중상점(國中商 店), 부산운수조(釜山運輸組)가 있었다. 부산일본영사관, 『경상도사정』, 1904, 제 27 교통 및 통신

3-1. 관청(官廳) 및 공공시설(公共施設)

3-1-1. 관리청․영사관․이사청

근대적 개항 이후 일본은 거류지로 설정된 왜관영역에 중요한 시설물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건립된 건물이 과거 관수왜가의 부지 위에 건립된 관리청(官理廳)53)으로 화양식(和洋式)을 절충한 목조양풍건축(木造 洋風建築)으로 전한다54). ‘경상도사정’에 의하면 양풍 2층 건축(여기서는 樓 라고 표현함)으로 관원의 관사가 이와 연결되고 고지에 있어 조망이 훌륭 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79년 3월에 착공되어 10월 20일 준공하였고 다 다미를 깐 일본식 건축물이었으며 그 건물모습은 그림 3-2.와 같다. 1880년 4월 영사관(領事館)55)이 설치되었고, 앞서 언급한 관리청 부지에 2층 양옥 건물이 세워졌으며 후일 이사청(理事廳)건물56)로도 쓰여졌다. 부산거류지 설정 시기 일본의 건축은 대부분 의양풍57)(擬洋風)이 다수였다.

1906년 설치된 이사청은 부산일본거류지만 관할하는 앞서 영사관과는 달 리 한국땅에 행정관청으로 설치되었고 그 자체로 동래부(東萊府)의 위상을

53) 1873년 일본정부는 외무주재관을 파견하여 초량왜관의 관리를 감독하다 개항 이후 1874년 관리청을 두고 관리관을 파견하였다. 1880년까지 존속하였고 영사 관이 대체 되었다. 도영주․윤일주, 「1910년 이전의 부산의 양풍건축」, 항도부 산 제3호, 1963, 246~247쪽.

54) 관리청(혹은 이사관청, 관리관청)은 1879년 3월 1일 착공하여 1879년 10월 20일 준공되었다. 도영주․윤일주, 앞의 논문, 256․262~264쪽.

55) 목조 2층 구조로 크기는 321.95평, 1884년 5월 7일 착공하여 1884년 10월 3일 준공되었다. 1936년 시청사가 준공될 때까지 부산부청(釜山府廳)으로 사용됨.

도영주․윤일주, 앞의 논문, 256․264~267쪽.

56) 여기서 두 가지 이론이 나타나는데 건축물의 대지는 동일하다. 도영주․윤일주 의 논문에서는 1884년 영사관 건물이 그대로 이사청 건물로 쓰여졌고 이어 부 산부청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설과 김갑득의 논문에서는 부산이사청고시 제19 호 「부산이사청 사무를 부산금평정 및 부산경찰서 누상에서 취급하는 건」

(1909.6.29)과 부산이사청고시 제39호와 제40호 「부산이사청사무를 신청사에서 취급하는 건」(1909.12.26)을 근거로 1909년 신축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1909년 신축설의 이사청 건물은 321.95평의 목조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57) 의양식은 소위 ‘동량대목(棟梁大木)’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당시 일본인 의 가옥은 관아건물이나 공공건물을 제외하고 일본전통건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 도영주․윤일주, 앞의 논문, 247․252쪽

격하시키는 충분하였다. 이사청의 위상은 관할구역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최초 부산이사청의 구역은 경상도 동북부와 강원도 남부에 이르렀고58) 이 어 개정59)에 의해 표 3-1.과 같이 변경되었다. 이사청의 설치로 인해 동래 지역 행정중심은 거류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사청 책임자였던 이사관(理事官)은 통감에 의해 일본인이 임명되었고 이사관에 대한 한국 지방시정(地方施政)에 관한 권한은 통감부령에 의해 규정60)되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이사관은 한국인 이외의 외국인에 관한 사무를 통감의 명령을 계승하여 한국 지방관헌을 지휘 감독할 수 있으며, 한국 지방시정에 관하여 해당 지방관헌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그 사무의 집행에 방조감시(幇助監視)할 수 있으며 매월말일(每月末日) 통감에게 모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58) 통감부령 제6호 「이사청의 위치 및 관할구역」(1906.1.19)에 의한 내용, 통감부령 제28호에 의해 대구이사청이 신설되어 영역이 축소되었다.

명 칭 위치 관 할 구 역

부산이사청 (釜山理事廳) 부산

경상도 남부 일대의 지역

김해․밀양․영산․창령․현풍․고령․성주․지례의 각 군으로 서 서남부와의 경계선으로 함. 단 그 각군은 본관구에 속함.

강원도 남부 일대의 지역

평창․정선․삼척의 각 군으로서 북부와의 경계선으로 함.

단 각 군은 본관구에 속함.

59) 통감부령 제28호 「이사청의 위치 및 관할구역 개정」(1906.8.17)

60) 통감부령 제48호 「한국 지방시정에 관한 이사관의 집무규정」(1906.11.18)

표 3-1. 부산이사청 관할구역 내용현황 명 칭 위치 관 할 구 역

부산이사청 (釜山理事廳) 부산

경상도 남부 일대의 지역

북부는 대구이사청 관할에 접함. 서남부는 김해․밀 양․영산․창녕의 각 군으로서 마산이사청 관구에 접 함. 단 그 각 군은 본관구에 속함.

경상도 동부연해안 일대의 지역

서부는 영일․흥해․청하․영덕․영해의 각 군으로서 대구이사청 관구에 접함. 단 그 각 군은 본관구에 속 함.

강원도 동부연해안 일부의 지역

북부는 원산이사청관구에 속함. 서부는 평해․울진․삼 척의 각 군으로서 대구이사청 관구에 접함. 단 그 각 군은 본관구에 속함.

그림 3-1. 부산이사청 소재지와 관할구역

(1909년 당시)

부산이사청 관할구역

부산이사청 소재지 성진이사청

원산이사청 평양이사청

남포이사청

인천이사청

군산이사청

경성이사청

목포이사청

마산이사청 대구이사청

부산이사청 관할구역

부산이사청 소재지 성진이사청

원산이사청 평양이사청

남포이사청

인천이사청

군산이사청

경성이사청

목포이사청

마산이사청 대구이사청

그림 3-2. 부산일본영사관

[그림출전 : 최해군, 『부산에 살으리랏다』, 부산을 가꾸는 모임, 2000, 203쪽]

日本領事館 釜山理事廳[1880년 신축]

현재 없음 * 음식점 청림 부지사용 日本領事館 釜山理事廳[1880년 신축]

현재 없음 * 음식점 청림 부지사용

3-1-2. 전신국․경찰서․거류민단역소

부산에서의 전신국 개설은 1883년으로 제국전신국(帝國電信局 : 원래 명

칭은 부산우편전신국)이었으며 서정2정목 50번지의 토지에 신축 건물로 세 워졌다.61) 현재 그 자리에는 한국통신 소유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거류지 설정 이후 일본은 ‘문명의 기관(文明の一機關)’으로 표현하는 우 편국을 부산에 개설한 것은 1876년 2월 2일로서 ‘우편세를 내지(內地, 일 본)와 동일하게 상정하여 초량공관 즉 부산관리청 내에 설치한다’고 하였 다. 이와 함께 우편선(郵便船) ‘낭화호(浪花號)’를 전용선으로 하였다고 하 며 우편업무는 11월에 개시하였고 우편선은 매월 1회 운항하였다. 1883년 전신분국(電信分局)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1887년 전신분국과 우편국이 합병되면서 서정2정목으로 이전하여 ‘부산우편전신국(釜山郵便電信局)’이라 개칭하였고 실질적으로 서정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62)

그런데 1908년 지도63)에 의하면 조선전신국(朝鮮電信局)64)이 제국전신국 건물 맞은편에 표시되고 있으며 제국전신국은 일본우편국(日本郵便局)으로 기재되어있다. 도영주․윤일주의 연구65)에 의하면 부산에서의 우편국 역사 를 1876년 11월 1일 부산에 최초 제국우편국(帝國郵便局)이 창설되어 관리 청 건물 내에 설치되어 1884년 제국전신국과 우편사무가 합병되고 부산우 편전신국(釜山郵便電信局)이 되었다. 이후 1905년 5월 한일통신기관합동협 약이 성립66)되어 대한제국 소속의 통신기관부산우편사(通信機關釜山郵便 司) 및 부산전보사(釜山電報司)의 사무가 승계되어 부산우편국(釜山郵便 局)67)이라 개칭되어 통감부가 관리하였다고 한다.

61) 거류민총대에게 23원86전2리를 주고 사들인 토지에 섰으며 1883년 6월 1일 착 공서를 시달하였고 실지 착공일은 미상이며 1884년 2월 15일 준공하였고 목조 건물로서 면적은 63.75평이었다. 도영주․윤일주, 앞의 논문, 257․264쪽

62) 부산부, 『부산부사원고』5권 개항편, 민족문화, 1987, 191~192쪽

63) 통감부철도관리국, 『한국철도노선안내』, 1908년, 부산일본거류지평면도 64) 이 건물은 거류지 당시 행정영역에선 행정2정목에 속한다. 電信은 郵便局에서

취급하는 통신종류의 일종으로 電信事務를 당시에는 郵便局 혹은 郵遞所에서 취급하였으며 우편과 전신이 동시 혹은 분리되어 취급되기도 하였다.

65) 도영주․윤일주, 앞의 논문, 277쪽

66) 한일통신합동조약(韓日通信合同條約)이 체결됨에 따라 한국의 우편기관은 일본 의 손에 넘겨졌으며 이때 일본에 넘겨진 통신기관은 420개였다.

67) 통감부고시 제120호 「인천등 12개 우편국․제주등 5개 우편국출장소․인천정 차장등 10개 우편취급소․동래등 4개 우편전보수취소․인천등 19개 우체소의 위치명칭변경」(1906.10.26)에서 부산우편국은 경상남도 동래부 부산일본거류지 내에 위치한다고 명시.

문서에서 나타난 建築的 特性에 關한 硏究 (페이지 3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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