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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둘러싼 엔트로피

문서에서 경계와 관계의 엔트로피 (페이지 21-26)

<러시아 무용수>의 외알 안경처럼 회흐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눈이다. 때로는 어색한 크기와 비율 때문에, 때로는 그 위에 포개 진 안경 때문에 그 눈은 보는 이에게 시각적 관람 너머의 어떤 감각적 동요를 일 으킨다. 2차원의 평면 작품이지만 토이버의 몸짓만큼이나 강렬한 눈짓으로 관객 에게 다가가는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다다 예술은 거리를 두고 관조하기만 하는 예술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총알이 관객을 쏘는 듯한 이벤트로 서 촉각적 충격 효과를 일으킨다고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38) 다다이스트들 스 스로도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장르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예술이 관객을 총 알 같이 강타하는 것이기를 꿈꿨다.39) 토이버와 회흐의 다다 작업은 퍼포먼스와 포토몽타주라는 다른 매체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신체의 촉각성이 강조되었다 는 면에서, 다시 말해 신체를 어떤 주술적 매혹의 기술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

37) Matthew Biro, 앞의 책, p. 207.

38) Walter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1936,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London: Pimlico, 1999, p. 231.

39) Dorothée Brill, Shock and the Senseless in Dada and Fluxus, Hanover: Dartmouth College Press, 2010, p. 97.

통점을 갖는다. 그 신체는 아티스트의 것이되 그들의 주체성과는 독립적인 행위 체로서 인식 및 지각 영역을 물질적으로 확장시킨다.

토이버의 퍼포먼스는 시각이라는 감각의 독재를 타파하기 위해 인류학에서 말하는 제의나 의례의 가면, 춤의 요소를 차용했다고 할 수 있다.40) 언어라는 틀 에서 벗어나 물리적이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신체의 움직임인 무용의 가능성을 간파한 것이기도 하다. 회흐의 포토몽타주 역시 무대 혹은 연극 적인 화면 구성에서 인류학이 대상화하는 타자가 뒤섞인 혼종적 신체가 정면을 바라보며 무용 동작 같은 포즈를 취함으로써 수행적인 광경을 이룬다. 무용가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고 신체의 동작이 무용의 그것과 유사해 보이는 경우가 많 은데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 여성의 활동적이며 자율적인 모습을 신체적으로 상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불안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몸짓이 사회 적 고정 관념에 따라 가장무도회처럼 벌이는 여성 예술가의 정체성 퍼포먼스를 가리키며 격변과 혼란의 시기에 그 정체성이란 것이 얼마나 유동적인 지를 암시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토이버가 1926년에 찍은 <다다 두상과 자화상>이라는 사진을 보면 현대적 패션 모자와 베일을 쓰고 있는 토이버가 자신의 얼굴 앞에 원시 조각상처럼 보이지만 “다다 1920”이라고 새겨진 <다다 두상> 하나를 들고 있다. 차분한 색조의 기하학적 도형들이 과감하게 배치된 조각상 뒤에서 토이버 의 얼굴은 반쯤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데 이는 ‘되기(becoming)’의 상태, 혹은 계 속해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여성 다다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발언 하는 듯하다. 그리고 마음은 신체에 의해 물리적으로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몸 바깥의 물질세계로 확장되며 그 물질 세계에 스며들어 작동함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탈 혹은 초상이라는 소재는, 복합적인 여러 겹의 정체 성 문제를 안고 분절되고 배제되었던 이들 여성 아티스트들의 삶을 그 수행 속에 서 문득 드러나게 하는 물활론적 속성을 발휘한다.

타문화의 가면이나 조각상에 대한 이들의 전유는 당시 사회의 남성 아티스 40) Rebecca Schneider, The Explicit Body in Performance, London: Routledge, 1997,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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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들을 비롯해 부르주아 계급 등 지배 세력의 시선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렇다 고 해서 유럽 식민주의의 인식 틀에서 완전히 비껴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나 와 상관없이 저 너머에 존재하는 타자의 ‘진짜임’과 그들의 사회적 ‘미개함’을 부 정하거나 반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이버와 회흐는, 전쟁 때문에 무장해야 하는 신체, 산업 노동으로 기계화되고 파편화된 신체, 자본주의 가 상업화하는 신체, 식민주의가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신체를 지배적 권력의 미학적 상상이 아니라 불안정하지만 즉물적인 자신의 신체적 수행으로써 드러냈 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매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토이버와 회흐는 조각, 회화, 직물, 무용, 사진 등을 넘나들며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미지의 해석에 다른 차원을 개입시키면서, 매체의 위계질서에 개입하고 매체의 수사를 재편했다. 당시 사진이나 영화 같은 새로운 대중 매체는 현실과의 일대일 대응관 계를 가지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포착한다는 믿음을 주었고, 이들 매체 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파편은 대중들이 이미지를 촉각적으로 수용하게 하면서 현실과 이미지를 동일시하고 그 괴리를 망각하게 만들었다. 꼭두각시 인형에서부 터 퍼포먼스, 포토몽타주까지 이어지는 토이버와 회흐의 작업에서 신체는 규율과 통제를 거부하면서, 신중하게 사전 조율되는 대신에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퍼포먼 스, 조직화되지 않은 요소들의 의도적 도치와 병치를 통해 혼돈 속에서 유희를 창출하고 그 안에서 현실에 대한 지표라는 매체적 역할을 배반한다.

신체라는 소통의 매체를 무질서와 잡음의 형국으로 치닫게 하는 토이버와 회흐의 작업은 새로운 근대성, 정체성 구축의 매개가 되기도 하고 장소가 되기도 하는 신체에 대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며 여러 종류의 어떤 ‘길들여짐’을 각성하 도록 한다. 독자적인 예술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의 동인으로서 이 들의 예술은 의미를 생산하는 데 있어 누가 기준과 범주를 정의하고, 누가 누구 를 위해 무엇을 수행하며, 또 어떤 환경 하에서 그것을 수행하며, 어떤 요소가 그 창조에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관한 수행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도 래한 사회문화적 위기감으로부터 잉태된 다다 예술은 의도적인 자기 부정이 내포 되어 있었다. “다다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다에 반대하는 이가 진정

한 다다이스트”라고 선언할 만큼 ‘반-예술’을 주장한 다다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다시 내릴 뿐만 아니라 전통적 ‘예술 노동’을 재정의하기에 이른다. 다다의 카바레나 클럽의 퍼포먼스, 선동적인 강연, 노이즈 콘서트, 즉흥적인 해프닝 등 달 라진 예술 노동은 다감각적 성격을 띠며, 이전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의 ‘총체 예술(Gesamtkunstwerk)’을 이어 받고 이후 플럭서스 아티스트 딕 히긴 스(Dick Higgins)의 ‘인터미디어(intermedia)’를 예견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다는 강박적으로 융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혼재를 지향 함으로써, 생각의 재현, 지시, 묘사의 도구가 아니라 행동과 상황을 생성하는 예술 이 새로운 형식과 전략을 도모함과 동시에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일 부러 잊기(unlearning)’라는 인식 변화를 일으키고 그로부터 수행성을 생산하도록 했다.

“모든 예술은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로 이뤄지는 법이다. 시각예술인 미술을 창조하는 퍼포먼스는 무대 뒤에서 이뤄지는 셈이지만, 그렇더라도 렘브란트의 회 화는 렘브란트의 퍼포먼스이다. 그래서 오늘날 무용가나 음악가가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41) 알프레드 젤이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언급했던 예술의 근원적 수행성, 즉 시대를 달리하는 창작자로부터 관 람자에게 작용하는 힘을 다다는 매우 적절하게도 상기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여 성 수공 영역의 매체와 근대 아방가르드 예술, 대중문화의 매체를 결합시킨 토이 버와 회흐는 신체를 존재의 공간이자 행위의 매체로 사용하면서 신체의 비물질성 을 물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지표가 아닌 조형 신체의 다감각적 예술 노동, 엔트로피를 높이는 수행적 행위로 다다를 실천했으며, 이는 예술이라는 영 역과 여성이라는 일상의 주변을 부단히 움직이며 당시 근대화와 산업화, 식민주 의 상황에서 급변하고 있던 유럽 사회의 문화적 지형에 작은 결절들을 맺히게 했 다. 그 마디를 이어가며 그려본 인류학적 좌표에서 발견한 것은 지리적, 사회적, 예술적으로 끼인 공간, 구분의 틈에서 확고했던 경계선을 흐려놓고 관계에 대한 확신을 유보시킴으로써 이들이 일으킨 균열, 그리고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41) Alfred Gell, 앞의 책, p. 95.

있는 그 파열음, 바로 두 여성 다다이스트들이 ‘주술적 매혹의 기술’을 발휘한 퍼 포먼스의 작용이다.

42)

* 논문투고일: 2015년 8월 15일 / 심사기간: 2015년 8월 16일-9월 19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5 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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