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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대사회 교육의 특징

3) 신라와의 교류

탐라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른 점이 많아 정확한 관계를 파악할 수가 없지만, 공적(公的)인 교류는 백제가 멸망(660년)한 후인 통일 신라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文武王) 2년(662년) 조(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국왕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하여 왔다. 탐라는 무덕 (武德)이래로 백제에 신속(臣屬)한 까닭에 좌평(佐平)으로써 관호(官號)를 삼았다. 이에 이르러 항복하니 속국이 되었다.’13)

이것은 백제가 망하고 난 후에 신라에 입조한 것이며, 신라에 입조했다 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에 신속(臣屬)하 여 조공을 받치며 공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무왕(文武王) 19년(679년) 2월조에는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을 경략(經略)14)했고, 애장왕(哀莊王) 2년(802년)조에는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 내와 조공하였다15)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탐라와 신라는

13)『三國史記』新羅本紀 文武王 二年條, 「耽羅國主 佐平 徒冬音律來降 耽羅 自武德以來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降爲屬國」

14)『三國史記』新羅本紀 文武王 十九年 二月條, 「發使略耽羅國」

15)『三國史記』新羅本紀 哀莊王 二年條, 「耽羅國遣使朝貢」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교류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신라가 탐라를 경략(經略) 해서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한 내용 이 없기 때문에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신라는 지리적 취약성과 고구려, 백제의 견제세력 때문에 외래문화(儒, 佛)의 수용이 늦었지만,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외래문화(儒佛文化)를 유리하게 소화, 섭취함으로서 특이한 교육 전통을 수립할 수가 있었다. 그 것이 바로 화랑도교육(花郞徒敎育)이다. 다만 교육과 관계해서 나타난 기록 을 보면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9년(640)에 그들의 자제를 당(唐)의 국학 (國學)에 입학시켰다는 것16) 등의 기록만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신라 사회 교육의 주종을 이룬 것은 화랑도교육이며, 학교 교육은 통일신라의 과제로 넘어간다(김환식외, 1991). 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학교 교육은 통일신라시 대인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국학(國學)이 설립되었고, 원성왕(元聖王) 4년(788)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신라의 교육은 유학(儒學) 교육에 기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신라가 사신(使臣)을 파견해서 탐라를 다스렸다면 통일신라의 국 가 제도가 탐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의 문물이 탐라에 유입되어 탐라에 또 다른 통치행위라든가 교육적인 행위 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16)『三國史記』新羅本紀 第五 善德女王條,「九年 夏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

2. 고대사회 교육의 특징

제주도 원주민은 북방대륙으로부터 이주해 온 여러 종족과 주변 여러 도 서지방으로부터 유이(流移)한 종족들로 복잡 다양하게 구성되고 있다. 제주 도에 표착(漂〔)한 여러 종족들은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절 해고도(絶海孤島)인 이 섬에서 살아가는 동안 서로 동화되고 융합하여 제주 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제주도는 이렇듯 북방대륙 계통과 주변 도서의 표류민이 혼합되어 성립된 까닭으로 그 문화는 북방적 인 것과 남방적인 색채를 동시에 띠게 된다.

이런 가운데 제주도 원주민들이 행하였던 교육의 원래적인 모습을 고대 제주도 사회의 공동체적인 생활양식에서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제주도는 1만 8천 신(神)이 있다고 했듯이,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를만 한 곳이다. 그만큼 제주인들의 생활은 무속 신앙에 의존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이러한 생활 속에 깃든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게 교육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 의 교육은 정치와 종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때부터 이미 신앙생활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남긴 동물 그림 등의 유물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그들의 행위가 소원 성취 차원이었든지 아니면 포획된 동물의 영혼을 생각했었든지 간에 그것은 일종의 기복(祈福)행위에서 비롯된 신앙생활과 연관되어 있으며, 교육이라 는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물론 제주도의 고대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자각 같은 것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설사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생활자체의 목적과 동일했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제주도 고대사회 교육의 목적은 보존(conservation)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Brubacher, 1947). 즉, 사회경험의 정립된 자본을 영속 화하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제주도 나름의 교육풍토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집단생존은 집단의 교육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 인의 목적이기도 했다. 개인은 집단의 교육목적들과 다른 것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단생존, Dilthey의 해석학(解釋學)에 있어서 생존 즉, 산다는 것은 일 반적으로 세 가지의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체험하는 것이며, 표현하 는 것이며, 이해하는 일이 그것이다(Dilthey, 1968). 따라서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정형(無定型)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형식들을 삶의 필연성으로 인정 하는 일이다.

우리가 집단생존이라는 고대사회의 삶의 양식에서 보존적인 교육목적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인간 생존의 이러한 철학적 함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존적인 교육목적은 고대 제주인들의 삶을 구체화 시키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 기서부터 비로소 교육은 구체적으로 관습이나 제도 등 일정한 형식 아래서 실현되고 전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