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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문제의식과 연구주제

현재 제주지역사회에 있어서 집안의 기제사의례(忌祭祀儀禮-이하 기제사) 는 매우 중요한 일상의 의례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1) 많은 지역주민들은 기제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기제사를 행사함에 주저하지 않는다.

기제사가 일반 민중들에게 보편적인 일상생활로 대두된 것은 2백년 남짓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기제사가 그다지 보편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제사는 조선이 개국한 지 1백년이 지난 뒤에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유교경전을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까지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조성윤, 1998). 그러던 기제사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17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에 의한 국 가 재정립의 차원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등의 사례(四禮)에 대한 활발한 논 의가 전개되면서 시작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18세기에 이르러 권력에서 소외 된 지방 사족들이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비책으로 이어지면 서 본격화되었다(安浩龍, 1997: 7). 그러나 기제사는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 로 모시게 되어 있었는데, 당상관 이상은 4대봉사(四代奉祀), 하급 관원은 3 대봉사(三代奉祀), 일반 평민들은 2대봉사(二代奉祀)를 모시도록 되어 있었 다(조성윤, 1998: 30-31). 따라서 기제사를 모두 모시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제사의 대상은 기제사 주관자의 신분에 따라 차등적이었다.2)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분제의 해체를 겪으면서 이미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과 상층 농민들 중 일부가 주자가례를 행하기 시작하였고 이 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면서 사대부와 동등한 생활방식을 추구하고 기

1) 기제사는 돌아가신 날 곧 기일에 행하는 조상숭배의 의례로 최근덕(1986:

179-180)은 기(忌)는 금(禁)으로 추모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는 의미라고 하였다.

2) 기제사 주관자를 두고서 주재자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제를 집행하는 범위에만 국한되는 의미여서 실상 기제사를 마련하고도 제를 집행하는 데 참여하지 않는 가구 주들도 있어서 폭넓은 범위의 언어로 주관자라고 표현하였다. 본 연구가 보고자 한 것도 제를 집행하는 제관들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제사를 마련하고 있는 가구 주들을 보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주관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제사에도 4대봉사의 보편적 계기를 마련하기 시작하면서 기제사는 일상의 의

니즘을 바탕에 둔 혈연 및 마을공동체의 관계로 설명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 인구추이는 1966년도 18.497명, 1976년도 32.031명, 1986년도 53.186명, 1996 년도 80.950명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송성대(1985: 24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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