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삼자교회의 재건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46-49)

삼자교회는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된 이후 형성된 교회로 일원화된 중국공

2007년), p62

산당의 지도를 실행하기 위한 대중운동의 일환인 삼자혁신운동을 통해 생겨 났다. 1954년 교회 대표자들은 북경에서 열린 “제 1차 전국기독교회의”에 참석하여 삼자애국혁신운동의 정신에 입각하여 “중국 기독교 삼자애국운동 위원회”를 건립했다.71)

1980년대 공산당의 정책 전환으로 통일전선이 부상하면서 삼자교회와 삼자 회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또한 문화혁명 당시 중단되었던 통일전선부, 종교 사무국, 삼자애국운동위원회 등이 재건되고, 1966년 이전까지 실행되던 중국 공산당의 종교 정책이 회복되어 1980년 4월 삼자교회가 재건되었다.

당시 중국교회의 자립, 토착화 운동은 기독교의 중국화, 경제적 자립, 관 리․행정의 중국화, 제도․조직의 중국화, 신학의 중국화라는 5가지 내용으로 그 방향이 모색되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의 부패와 물가 급등은 공산당 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 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전역을 공산화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모택동 은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면서 기독교를 공산당과 연계시키기 위해 삼자애국 운동(삼자운동)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20세기 초 중국교회가 일으 킨 삼자운동의 목적은 교회를 중국의 문화 위에 뿌리를 내리고 기독교가 중 국에 널리 전파됨과 동시에 중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뜻이 있었 다. 그러나 1949년 이후 두 번째의 삼자운동은 그 성격에 있어서 처음 것과 달랐다. 이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교회 지배, 정부정책의 수행을 위한 수단 이었다. 72)

삼자교회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중국기독교협회로 구성된 양 회의 소속이다. 삼자교회는 합법적인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삼자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에서 삼자교회는 공개적,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정부에서 기독교 신도들을 사회주의 중국건설에 동참 하고 적극적인 힘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인교회조직을 허락하여 기독교 신도 들이 그곳에서만 종교 활동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둘째, 사회의 조직체로써 삼자교회는 정부의 입장과 노선을 옹호 실천한 다.

71) 김의태, 상게서, p32 재인용

72) 남기해, “중국의 종교정책과 선교전략”(석사학위논문, 안양대학교, 1995년), pp27-29

셋째, 삼자교회의 존재와 활동은 정부의 정책과 관리, 통제를 따라야 한 다. 종교 사업을 담당하고 지시하는 부서들은 당의 통일전선사업부(약칭 통 전부), 정부의 종교사무국과 공안국이다.

넷째, 개별적 삼자교회의 특징과 상황은 각 지역의 상황과 종교 간부, 교 역자로 인해 결정된다.73)

결론적으로 삼자회와 삼자교회의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8명의 각 종교 지도자들 중, 기 독교계에서 공산당의 통치와 지도를 받아들이고, 이들과 협력할 것을 주장하 는 5명의 종교 지도자가 초청되었다. 이들은 회합 후에 교회 방문단을 만들 었는데, 이는 인민정부에 교회의 대표로써 의견을 제시하고 공동강령에 대해 해석하고 공동강령에 명기된 종교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1950년 5월 2일, 6일 및 13일에, 이 교회 방문단과 주은래가 만났 다. 이들은 신중국에서 기독교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담화를 나누었다. 그 리하여 7월 28일 중국의 기독교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 내용의 핵심은 서양 제국주의와 분리되어 자주 독립의 노선을 걷는다는 것과 중국 공산당의 지도 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은 제국주의와 분리 및 청산에 대 한 중국의 필요를 더욱 촉발시켰다. 이 전쟁으로 중국과 미국은 적대 관계로 급변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은 가택연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 12월이 되자 중국 공산당은 미국에서 오는 자금을 동경시켰으며, 북한을 돕고 미국 에 대항한다는 항미원조운동을 발기하여, 반미 정서를 고무시켰다. 동시에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이용된 것을 지적하면서 교회로 하여금 더욱 더 정부의 관리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51년 4월에는 북경에서 ‘미국으 로부터 보조를 받는 기독교 단체 처리회의’를 전개했으며, 새로운 기독교 지도 기구로써 ‘중국 기독교 항미원조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성립했다. 당시 이 기구는 이후 중국 교회의 유일한 지도 조직이 되었으며, 이에 따른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

73) 석명철, “중국교회에 관한 전략적 사고”(석사학위논문, 총신대학교, 2010년), pp9-10

운동위원회’, 즉 삼자회의 전신이 되었다.

넷째, 1954년에 정식으로 성립된 삼자회로 인해 1922년부터 각 교파와 기 독교 기구 대표들로 구성된 중화기독교협진회가 전국 교회를 연결하는 기능 을 상실하여 결국 1955년에 이 단체는 사역을 종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 국의 기독교 조직은 오직 삼자회 뿐이었으며, 중국 기독교는 철저히 공산당 이 통제와 지도하에 놓이게 되었다.74)

그리고 1980년 10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 정부의 영도 아래 기독교 신도들이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면서 국가의 법령 을 준수하고 삼자 원칙을 지지하는 주요 취지를 발표하였다. 1980년에는 남 경회의를 통해 종교에 대한 통일전선적 측면에서의 종교신앙 자유 정책을 추 진하게 되는데, 당시 이러한 종교의 개방 정책으로 등장한 가장 큰 문제점은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간의 대립과 충돌이었다. 1983년부터는 삼정정책-정점, 정편, 정인-을 마련하고 이 원칙에 근거하여 자유 전도와 교역 활동을 비롯 한 종교 활동에 대한 제한 정책을 시행했다. 삼정정책은 후에 또 하나의 정 책-정시-이 추가되면서 삼자교회에 구체적으로 시행되었다. 정점은 지정된 장소(삼자가 지정한 교회), 정편은 지정된 구역(삼자가 지정한 장소), 정인 은 지정된 목사(삼자가 지정한 성직자), 정시는 지정된 시간(삼자가 지정한 시간)이 그것이다. 1984년에 이르러서는 공산당과 종교사무국에 의해 강력한 핍박이 다시 전개되었는데, 많은 가정교회들이 삼자회에 가입하게 된다.75) 제 6차 전국회의에서의 당시 삼자교회의 현황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삼자교 회 성도는 1천 만 명이며, 교회 예배당은 1만 2천 개, 예배 처소는 2만 5천 곳이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76)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46-49)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