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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이주의 땅

문서에서 오경훈 연작소설 연구 (페이지 101-108)

제주에서 한국전쟁은 4․3사건의 연장이면서 또한 많은 육지 사람들을 대면하게 되는 변화의 계기였다.145) 한국전쟁 진행 과정에서 최남단 섬이라는 지역적 특 성상 반공의 최후 보루로 인식되었던 제주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안전한 피난처 로도 꼽혔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을 전후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건너왔다. 특 히 1951년 1·4 후퇴 직후에는 제주로 밀려들어온 피난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 1951년 5월에 이르러서는 피난민 수가 당시 제주도 토착인구의 절반이 넘는 14 만 명을 웃돌았다.146)

절멸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제주는 전쟁 발발 이후 다시 군대 훈련 장소, 최 후의 피난 지역, 개발이 가능한 곳으로 여겨졌다. 전국에서 피난민의 이동과 거 주, 정착이 이루어짐에 따라 정부가 구상하는 피난민 통제와 구호대책의 틀에 제 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는 4·3의 폐해가 채 복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 쟁 후방 기지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육지의 문제를 해소한다는 차원에 서 정부에 의해 선택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준비는 철저하지 못했다. 이 당시부터 이미 정부의 ‘종합개발’ 시도가 논의되어오긴 하였으나 제대로 실현되지 는 않았다. 또한 개발과 피난이 동시에 벌어지던 상황에서, 새로이 들어선 공장 에 제주인이 아닌 피난민이 들어가기는 어려웠고 이 점에서 복귀하지 않고 피난 민들은 개발의 수혜를 거의 받을 수도 없었기에 남은 이들의 정착 과정은 스스로

145) 김아람, 앞의 논문, 73쪽.

146) 김동윤, 『제주문학론』, 제주대학교출판부, 2008, 168~169쪽.

고투해야 하는 과정이 되었다. 다만 1951년부터는 피난과 동시에 복귀가 이루어 졌기 때문에 피난민의 전체 규모가 줄어들었고, 제주에 왔던 피난민도 육지로 돌 아가기 시작하였다. 1953년 6월 말 제주도에는 약 2만1천여 명의 피난민이 있 었다고 추정된다.147)

제주도가 4·3의 후유증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다. 본토의 6·25전쟁으로 섬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물장수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을 따라 제주도로 피난을 내려왔다. 지장각동산 기 슭의 언덕골에 난민촌이 형성되어 그들은 여기에 살았다. 물장수로 불린 까닭은 그 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중국집에 산지천 물을 지게로 져 날라다 팔며 집을 도왔기 때 문이다.

당시는 제주시가 도시라곤 해도 읍(邑)에서 시(市)로 곧 승격할 때여서 시골이나 다름없었으며, 우식이 지장각 동산에서 사라봉 기슭까지 산자락을 타고 다니며 염소 를 먹여 ‘염소똥’이란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물장수는 이곳에서 중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떠났다. LST 미군함정으로 화물짝처럼 실려왔던 그들이었으나 떠날 때는 제법 어엿한 민간 여객 선 도라지호를 타고 갔다. 물장수와 줄곧 같은 반을 했던 우식은 부두로 나가서 오 랫동안 안벽에 서서 그를 전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우식의 얘기를 들으며 심석도 제주 항구를 내려다보는 이곳 지장각 동산 동네에서 소년기를 보냈던 지난날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떠올랐다.

(182~183쪽)

「빌린 누이」는 이렇듯 한국전쟁을 전후로 제주에 들어와 난민촌을 형성하여 살 아가던 이주민의 이야기가 서사의 다른 축을 담당하고 있다. ‘물장수’라 불리던 친구는 위의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 때 피난차 제주에 내려왔고, 건입동 금산물 윗편 지장각동산 부근에 자리한 난민촌에서 1년 정도를 거주하다 가 다시 육지로 올라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피난민들은 전쟁의 공포가 사그라들 때쯤 대다수가 곧바로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영구적인 정착지로 제주 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물장수’ 가족이 떠날 때는 제법 어엿한 민간

147) 김아람, 앞의 논문, 79~94쪽.

여객선을 타고 떠났다고 하는 데서 이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당당하게 제주를 떠났음을, 그런 그의 가족을 한껏 부러워하며 전송하는 ‘우식’의 태도에서 제주를

‘변방’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여전히 외지인과 내지인 모두에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제주에는 개발 또는 산업화와 관련하여 대규모 인구 유입 이 있었다. 한국전쟁의 폐해가 복구되어갈 무렵 제주도의 본격적인 개발은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발맞춰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63년 제주도건설개발연구위 원회가 설치돼 1964년 건설부 주관으로 특정지역 지정 겸 건설종합개발계획을 위한 조사가 실시됐다. 1966년부터 제주도가 특정지역으로 지정돼 산업이 개발되 고 용수, 도로, 동력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었다.148) 제주도의 개발이 전 분 야에 걸쳐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제주항 개발도 이때부터 국고투자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149) 해방 이후 1960년까지는 항만 건설에 대한 투자가 거의 없었다. 정부의 재정 형편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 개발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낮아 다른 산업분야와 마찬가지로 항만건설 역시 투자가 없었 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 서 제주항에 대한 투자도 아울러 이루어졌다(다만 1979년 이전까지는 비교적 소 규모 수준이었다). 이처럼 5·16 이후 제주도 개발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많은 외지인들이 제주도로 유입되었는데, 1960년대 이후 제주도 인구성장률은 전 국평균치를 훨씬 상회하였다.150)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49년 제주 인구는 약 25만 명, 1955년에는 28만여 명으로 집계되었고, 1965년에는 인구 30만 시대 가, 1975년에는 40만 시대를, 그리고 1987년에는 50만 시대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시기의 제주 인구 증가를 설명하는 주요 요인들로는 한국전쟁기 피 난민과 베이비붐 세대의 증가 및 1960~80년대까지의 제주관광개발 붐과 감귤산 업의 성장 등이 꼽힌다.151) 제주의 감귤산업은 1960년대 이후 개발 붐이 일어나 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국가 주도의 관광개발과 특작농업의 성공,

148) 염미경, 「개발과 이주 그리고 주거지 분화」, 『제주도연구』 35권, 제주학회, 2011, 13쪽.

149) 제주도관광협회, 『제주관광30년사』, 1995, 177쪽. ; 황경수, 『제주교통사 소고』, 온누리, 2004, 270쪽에서 재인용.

150) 염미경, 앞의 논문, 16쪽.

151) 염미경·문순덕, 「산업화시대 이주자 공동체로서 향우회의 역할과 변화」, 『한국민족문화』 61집, 부 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83쪽.

농촌근대화 열풍이 불어 1960∼70년대 우리나라에서 이농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제주도는 서울, 부산 등과 함께 꿈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땅’으로 인식되었다.152) 개발 열풍이 한창이던 1960, 1970년대 제주해협을 건너 제주도로 이주해온 사람 들은 이주 초기에 제주시에서는 제주항 부근 건입동에,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소 방서가 있는 서호동 대도 4로 일대에 밀집지역을 형성해 살았다.153)

한편 국제자유지역, 관광개발, 산업개발의 세 축으로 진행된 제주개발 계획에 서 정부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관광개발이었다.154) 이 시기 정부가 제주도를 국제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항만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개 발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태동, 1960년대를 거쳐 본격적인 국내외 관광지로 발돋움한 제주는 1970년대를 거쳐 관광산업의 급성장을 맞았다. 이에 맞춰 무역 항이자 관광지원항으로서의 제주항은 1960년대 이후 해마다 규모를 넓혀나갔다.

특히 1979년부터는 제주항에 대한 투자가 지금까지의 소규모를 벗어나 1979년 한해에만 50여억 원이 투입되는 등 투자 규모가 대형화되었다. 이처럼 제주항 개발에 대한 투자가 전례 없이 커진 것은 1978년 6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 주항을 국제항 규모롤 건설하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다.155) 따라서 곳곳에 막노 동을 할 수 있는 일터가 생겼고 제주도의 관문 제주항은 10여년 이상 날품일터 가 끊이질 않았다. 초기 이주인들은 이러한 막 일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 이 찾아갔는데, 제주항에는 서귀포에서 재배된 감귤이 육지로 운송되기 위해 줄 을 지어 도착했고 때문에 짐꾼들이 상시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제주도에 이주해 온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제주항 주변에 모여 살며 매일 지게꾼 일을 했다.156) 이들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전라도 사람들은 이주 초기 건입동 남쪽 고산지 대인 칠머리동산 부근에 ‘전라도동산’ 또는 ‘해남촌’이라 불리는 집단거주지를 이 루어 살기도 했다.157) 따라서 제주항 일대는 1980년대 이전까지 이주민과 주민

152) 염미경, 「개발과 이주 그리고 주거지 분화」, 22쪽.

153) 위의 논문, 10쪽.

154) 이상철, 「제주도의 개발과 사회문화변동」, 『탐라문화』 17호, 1999, 197쪽.

155) 황경수, 앞의 책, 271쪽.

156) 주희춘, 『제주 고대항로를 추적한다』, 주류성출판사, 2008, 336쪽.

157) 이들은 처음에는 제주항과 인접한 산비탈에 천막을 짓거나 판갓집을 짓고 살았고, 그 숫자가 늘어 나면서 제주 원주민들은 이곳을 ‘해남촌’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대다수 가구가 전남 해남 출신자 였기 때문이다. ; 염미경, 「산업화 시기 제주로 이주한 전라도 사람들의 지역 적응 전략으로서 지 연공동체 형성과 변화」, 『용봉인문노총』 58집,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1, 52~53쪽 참조.

이 섞여 사는 혼재된 공동체 구성과 함께, 개발의 열기가 한창이던 당대 제주사 회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 칠머리동산 부근 에 거주하였던 초창기 이주민들의 집단거주지는 대체로 도시의 하위계층을 형성 하였기에 당시 건입동은 비교적 발전한 도시의 풍경과 일부 슬럼화된 풍경이 공 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거주하던 유입인들 또한 그곳을 영구 정착지로 여기기보 다는 일반 경제적 상향 이동을 위한 경유 거주 지역으로 여겨 기반이 갖춰지고 나면 타 지역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1960년대 이후 관광개발의 열기가 치솟으면서 제주항 주변 공간의 모습도 그에 발맞춰 변화하였는데,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탑동 매립은 빠르게 그 주변을 관광지화 시켰다. 이로써 발전(임항도로변)과 낙후(건입동 안쪽 고산지 대)의 모습으로 이분화되기 시작했던 항구 주변의 무장소적 경관은 이런 관광산업 의 성행으로 더욱 그 격차가 두드러져갔다. 이런 가시적 차이는 개발의 외피를 입 은 새로운 형태의 식민성을 거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주입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것은 곧 다음 절에서 볼 무분별한 개발의 파토스를 불러왔다. 여기서 우리는 1960년대 이후 제주항을 중심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무장소성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크게 ‘장소[경관]의 획일화’와 ‘상품화된 가짜 장소의 생산’158)이 렐프가 말한 두 가지 측면의 무장소성이라 할 때, 전자의 획일화된 장소는 제주항 일대가 정부의 개발계획에 맞춰 경제적 상승을 위한 이주인들의 경유지로 인식되던 모습 을, 후자의 상품화된 장소는 타자지향성을 야기하는 관광지로 변모해간 모습을 보 여준다. 여기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주와 개발의 열기가 사회구조를 변동시 키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불균질한 발전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는 5·16 군사정권이 들어선 초기로 사회상은 아직 전근대적 모습을 벗어나 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지게꾼 리어카꾼이 많았으며, 숯장수 푼거리장수 물장수 들도 보였다. 고래술을 마신 자가 호기 부려 거리를 활보했고, 식당 앞에선 외상술을 마시고 시계나 외투를 저당 잡히려는 사람들이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였다.

(중략)

재종숙은 항구 옆의 동산, 전에 피난민촌이 있었던 ‘동대머들’ 언덕에 살았는데 워낙

158) 심승희, 「장소의 진정성authenticity과 현대 경관」, 앞의 책,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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