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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하는 주체의 생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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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림은-인용자] 담배를 피워 물곤, 소리 죽여 울었다. 무서웠던 것이다. 공포 때 문에 그는, 브레이크와 바퀴축 사이에 끼인 것처럼 온 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 그는 차에서 내려, 찌부러진 풍선에 가스를 불어넣듯 건들거리며, 가장 먼저 그의 눈에 걸려든 사내에게 다가갔다. (…) 그는 사내의 꼬나문 담배를 향해 손바닥을 날렸 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뜨거운 담뱃불 끝에서, 고무공처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 껴졌다. (…) 사내는 입을 감싸 쥐며 무릎을 꿇었다. (…) 사내의 입에서 핏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 (…) 이제야 찌부러졌던 것이 좀 펴지고,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억누를 수 없는 공포를 대신 뒤집어쓴 사내는 기다시피 해서 자기 차에 오르 고 있었다.(목화밭:28)

한창림은 ‘원초적인 수컷다움’을 가진 삼촌을 두려워한다. 이 공포의 기원을 발견하 기 위해 칸트적 신체와 사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남시는 광기(분열증자의 속성)와 대립하는 인물로 칸트를 내세운다. 칸트는 허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정신 의 지배(철학)에 장애물이었다. 여기에서 칸트는 신체와 정신을 둘로 나누고, 그 대립 하는 이항관계 속에서 신체는 정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사유한다. 신체가 요구하는 것 들(성욕, 신체적 불편함)을 버려둔 채,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강한 의지력으로 그것을 인내하여 정신(이성)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어야 했다. 이것은 주체 의 자율성과 통합성을 위협하는 내적·외적 자극으로부터는 거리를 취하다가 그 자극에 대해 무감해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44)

삼촌을 쫓는 건 그의 머리가 아니라, 그의 육체였다. 한창림의 머리가 아니라, 육식 원숭이의 육체였다.(목화밭:307)

이와 마찬가지로 한창림 또한 자신을 ‘정신(이성)’에 위치시키고, 자신의 신체를 부정 하는 방식, 즉 대립하는 이항관계 안에서 파악한다. 한창림이 느끼는 공포와 공포를 해 소하는 방식은 칸트가 느끼는 고통과 그를 극복하는 방식과 같다.

공포의 감정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자, 한창림은 대립관계에 있는(자기와 분리된 타 자)에게 폭력을 가한다. 한창림은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지 못한다. 타자의 경험은 한창 림의 경험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한창림의 공포는 한창림의 통제 가운데 타자에게 전이된다. 한창림은 폭력을 도구로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다. (삼촌은 통제권 획 득에 대한 환상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명령한다.) 한창림은 외부와 내부에서 출현하 는 자극을 수용하는 대신, 그 자극과 감정을 쫓아냄으로 자신의 통제권을 획득한다. 이 때 한창림은 ‘수컷다움’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공포가 자신의 통제권을 획득해야 하는 동인으로 기능한다면 증상 또한 자기 통제권 의 상실로 간주된다는 측면에서 동일하게 작동한다. 정신분석은 환자의 원망(願望)과 맞물려 환자의 통제권을 찾아주기 위해 환자의 증상을 정상/비정상으로 범주화하거나 증상에 이름을 붙인다. 환자는 증상의 범주화, 명명을 통해 다스려야 할 객체를 생성한 다. 이때 환자는 증상을 다스리는 주체와 규율화해야만 하는 객체로 분리된다. 대립하 는 신체/정신, 치료하는 주체/치료받아야 하는 객체의 이항관계들은 주체가 다른 대상 44) 김남시, 『광기, 예술, 글쓰기』, 자음과 모음, 195~201쪽.

들 또한 대립하는 이항관계로 파악하게 만든다. 그 끝에는 배제의 원리가 출현한다. 가 령 ‘남자-여자’의 생물학적인 관계는 표준에 위치한다. ‘남자-남자’, ‘여자-여자’, ‘남자 가 아닌 남자-여자가 아닌 여자’(현동적인 차이에서 파생한 수많은 n개의 성들의 관 계)등의 관계는 비표준에 위치한다. 문제는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항관계가 표준과 비표준을 집요하게 구별하며, 비표준을 표준으로 규율화하기 위하여 통제의 집합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비표준을 배제(혐오)하기 위한 포함이다. 포함과 배제의 원 리는 자기 동일성에 지배되는 집단의 통일성과 총체성45)을 보여준다.

포함과 배제의 원리는 자신의 신체를 넘어서 가족, 국가까지 넘어 연장된다. “그가 특별히 아끼는 목록 중의 으뜸은 아내였다.”(목화밭:284) 타인의 고통에는 그렇게 둔감 한 한창림과 박태자가 부부사이에서 보여주는 보살핌은 윤리가 아닌, 통제의 연장, 포 함의 원리에 포섭된 사물에 가깝다.

작가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부부 관계를 통해 주체/대상의 이항관계를 비판한다. 이 는 칸트의 부부 계약론과 함께 읽을 수 있는데, 칸트는 성관계에서 동반되는 육체적·

성적 자극은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이를 위해 성적 자극의 해소는 ‘대상’(물건) 이 필요하고, 그 ‘대상’(물건)과의 섹스는 상대방 또한 나를 사물화하는 상호교환 속에 서만 윤리적이다. 칸트가 말하는 부부의 사회적 계약관계는 상대의 성기 사용에 있어 서의 상호성과 평등성을 사회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성기 사용에 있어 생겨나는 인간의 사물화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46)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대립하는 이항관계를 생성하는 한창림과 같은 주체를 정의할 수 있다. 먼저 주체는 통제권을 획득해야 하는 주체성을 지향하며, 대상들을 ‘사물화’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고착화시킨다.

대립하는 이항관계 아래에서 한창림은 내부·외부 자극에 끊임없이 고통받는 주체이 며, 그 고통을 쫓기 위해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분투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분투의 결과로 노예였던 한창림은 또 다른 누군가의 주인으로 기능한다. 이는 또 다른 예속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45) 들뢰즈·가타리는 ‘자기 동일성’을 재현한다는 층위에서 집단이 추구하는 통일성과 총체성을 비판한 다.“우리는 고대 조각상의 조각들처럼 완성되고 다시 모여, 기원에 있는 통일체 같은 통일체를 만 들기를 기다리는 저 사이비 파편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는 기원의 총체성도 목적 지의 총체성도 믿지 않는다.”(안티:84)

46) 김남시, 『광기, 예술, 글쓰기』, 자음과 모음, 2016, 217~221쪽.

하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이론 아래에서 한창림은 고정된 주체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 라 흐름이 막혀 있거나 정체되어 있는 과정으로 사유될 수 있다. ① 주체는 과정(흐름) 으로 파악된다. ② “편집증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아바타이다.”(안티:35) “[편집증 적 주체, 분열증적 주체] 두 집단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 본성 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안티:225) 여기에서 한창림은 자신의 존재 정의와 다른 환상, 즉 ‘수컷다움’과 같은 고정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일한 주체성을 향한 환상과 존재의 당위 가운데서 한창림은 고통 받는다. 분열 증적 주체로의 분화 가능성은 또 다른 탈출구와 정당한 욕망의 사용에 달려 있다. 정 당한 분열증적 운동은 하나의 고정된 주체성을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정과 흐름이 며, 그 흐름에는 상이한 정체성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유는 한창림의 해방을 야기할 수 있다.

제3장 분열증적 주체의 도주선

―『불쌍한 꼬마 한스』를 중심으로

2장에서 살펴봤듯이 경험적 자아를 토대로 형성된 주체성은 또 하나의 예속으로 기 능한다. 주체성의 낙인 안에서 ‘나’는 남자로 인정받고, 표준으로 위치한다. 그 표준에 위치할 수 없는 자들은, 남자로 분류될 수 없고, 그저 비-남자의 범주(난민, 여자, 트렌 스젠더 등 다양한 소수)로 배제된다. 정신분석과 가족주의가 생산해내는 구조와 그 허 구적 기표들에 분열증적 주체들은 경기(驚氣) 어린 몸짓을 보인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의 욕망과 구분되는 욕망이지만, 사회와 문명에는 그저 위협이고 제거해야 할 광기일 뿐이다. “분열증적 과정 및 이 과정과 병자로서의 분열자의 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결 핍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신경증화[ 편집증적 주체로 변형-인용자]하려는 시도가 있 기 때문이다.”(안티:597) 이제 사회는 배제의 낙인을 부여 받은 소수들을 경계선 밖으 로 밀어낸다. 국가와 사회는 분열증적 주체들을 포획하려 하지만 그들은 포획에서 탈 주하는 형태의 운동을 보인다. 분열증적 주체들의 운동을 사유하기 위해 들뢰즈·가타 리의 개념, 소수-되기 운동을 중심으로 백민석 소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불쌍한 꼬마 한스』의 화자는 아무개이며, 아무개는 어렸을 때 마주친 ‘생선가시에 가까운 어떤 것’47)과 만난다. 아무개는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갖지만 아무도 그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개만 시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으며 남들은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아무개는 자기만 볼 수 있는 생선가시와 그것과 함께 나 타나는 ‘전이감’을 문제 삼는다.

47) 아무개에게 생선가시는 “생선가시에 가까운 어떤 것”(캔디/한스:393)을 명명될 뿐, 결코 생선가시 는 아니었다. 이때 백민석이 말하는 생선가시는 ‘동물-되기’를 극단적으로 구현한 형태로 봐야한다.

‘동물-되기’는 동물과 주체의 교감과 횡단 과정이다. 이때 횡단 이후의 주체는 동물과 인간의 어떠 한 특성도 갖지 않는 새로운 종의 형태로 태어난다. 생선가시는 앙상한 가시의 형태만을 가지며, 계통적으로도 동물에 분류될 수 없으며, 어떠한 동물들과도 유사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유사성 과 모든 구조를 걷어낸 은유적 기표로 기능한다. 이하 “생선가시에 가까운 어떤 것” “고양이에 가 까운 어떤 것”을 명명할 때는 각각 “생선가시” “고양이”로 한다.

저건 마치 생선처럼 생겼는걸, 저건 아가리고, 저건 꼬리지느러미야. 아! 저건 생선 이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것의 정체를 내 얼마 되지 않는 지식 속에서 찾고자 했다.

내 얼마 되지 않는 지식에 의하면, 그것과 가장 근사한 형상은 생선이었다. 그것은 둥 그랬고, 길쭉길쭉한 가시 같은 것들이 그 내부를 얼키설키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지식이란게 저녁 밥상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가시 한 줄 흐트러뜨리지 않고 살만 고스란히 발라 먹은 어떤 생선의 잔해를 떠올리고 있었다.(캔디/한스:199)

나[ 아무개-인용자]는 내 몸이, 공중으로 3센티미터쯤 들어 올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3센티미터쯤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3센티미터쯤 내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 았다. 뭔가가 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것 같다는.(캔디/한 스:194)

무슨 놀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벌칙에 내가 걸렸다. 나는 흙바닥에 쓰러졌 고, 무언가 커다란 것이 내 얼굴을 덮쳤다.

…(중략)…

아무튼 몸 좋은 그 여자아이는, 분별을 잃을 정도로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조신하는 것 도 잊어버리고 내 얼굴을 대번에 깔고 앉았으니까.

‘아, 숨 막혀. 그것 좀 치워주지 않을래’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활짝 펼쳐진 그 엉덩 이는 내 얼굴을 다 가리고도 남았다. 나는 숨 막혀 발버둥쳤다. 온몸을 비틀어댄 덕에, 겨우 두 눈만 밖으로 빼낼 수 있었다. 그때였다.

주위 낙엽수들의 높다랗게 뻗은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빛바랜 가을 하늘이 보였다.

나뭇가지들이 엉성하니 엉켜 있는 사이로, 하얗게 바랜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을, 그 것[생선가시-인용자]이 가르지르고 있었다. 그것이 하늘을 느릿느릿 휘저어 가고 있었 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캔디/한스:217∼218)

전이감은 생선가시와 함께 지각되며, 아무개가 추상적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생선가 시와 전이감은 아무개가 원하는 순간에 발현되는 것도 아니며, 특수한 상황48)과 그에 따른 정서적 차이에서만 발현된다. 아무개는 수동적으로만 생선가시와 전이감을 지각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환각이 주체를 파멸의 잠재성을 가진다면, 생선가시와 전이감은 아무개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아무개가 사서에게 생선 가시의 정체에 대해 물었을 때, 사서는 “네게 무슨 해를 끼쳤니, 그게?” “무언가 네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이란다.”(캔디/한스:203) 라고 답한다.

아무개 또한 생선가시와 전이감을 현실에 존재하는 언어와 물질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과 능력이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정도였다.

아무개는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생선가시와 전이감을 현실에서 설명할 수 있는 정 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아무개는 그 병원의 간호사인 선애를 우연히 만난다. 선애 또한 아무개의 생선가시와 전이감과 같은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다. 선애는 아무개와 몇 번 만난 후에, 아무개의 생선가시와 전이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 기한다. 선애 또한 1994년 고양이를 보고 난 다음부터 빨라졌다49)고 스스로 설명한다.

그 후에 선애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고 미국으로 떠난다. 아무개는 선애가 미국 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소설은 마무리 된다.

48) 전이감은 ‘선애가 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아무개가 외로움을 느꼈을 때’, ‘아무개가 성적 쾌락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생선가시의 발현과 함께 발생한다.

이는 아무개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때 발생한 생선가시와 전이감은 아무개를 수동적인 상태로 만든다.

49) 나는 선애 씨 뒤를 쫓아 계속 뛰었다. (…) 그녀의 키는 1미터 60센티미터 쯤 되었다. 내 키보다 10센티미터쯤 작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와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 내 뜀박질 속도 는 그리 느린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너무 빨랐던 탓이다. 그녀는 글자 그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캔디/한스:399~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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