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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미국의 대한정책

(1)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구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의 대한정책은 한마디로 ‘무관심의 정책(policy of indifference)ꡑ으로 일관되어 왔다고 요약할 수 있다.44)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국은 전후 아시아정책과 관련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체계적 정보 축적이 점차 절실해졌고, 다 른 한편으로 전후 대한정책 마련의 현실적 필요성이 점차 강화되었다.

1943년 2월 12일 미 상무부의 보고서에는 “아시아 대륙과 일본을 직접 연결시키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은 군사전략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고, 앞으로도 그러 할 것이다.”라는 결론이 있었다.45) 또한 같은 해 8월에 국무부의 극동담당국은 극동지역에서의 소련의 목표를 분석한 보고서를 헐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얼지 않는 항구를 갖고자 하는 오랫동안의 염원 때문에 소련의 근본적인 목표 중의 하나는 “한반도나 북중국지 역의 부동항구를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만주에 서 활동중인 한국인들과의 관계를 강화시키고 있는 소련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소비에트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46) 미국은 2차대전 발발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정보수집을 강화 하였다. 태평양전쟁기에는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정식화하고, 이는 미국정부와 군 부에 의해 한국에 대한 ‘전략적 사고’로 정형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형성된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이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특히 중요하다.

미국의 대한국 전후 구상이 구체적 과제로서 다른 연합국과의 사이에서 거론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반에 들어가서이다. 전황이 미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미국은 일본의 점

44) 차상철(1969), 「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정책」 , 지식산업사, p.14.

45) Charles Henning, Department of Commerce, “Preliminary Economic Survey of Korea,“ for Division of Economic Survey of Korea," for Division of Economic Studies, Department of State, August 2, 1943, Harry S. Truman Papers, Edwin. A. Locke, Jr. Files, Box 1.

46) “Memorandum by Joseph W. Ballantine and Max W. Bishop”, August 19, 1943, FRUS, 1943 : The conference at Washington and Quebec (Washington,. D.C. : USGPO,1970, pp 628~629.

령 하에 있는 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47)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 치는 1943년부터 루즈벨트에 의해 구상되기 시작했으며, 1943년 12월 1일 다음과 같은 ‘카이로 선언’으로 나타났다.

(미‧영‧중) 3강국은 한국민이 노예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상기하면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한다.48)

이것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이에 관한 제안을 하고 나서였다.49) 그후 트루만이 홉킨스를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스탈린과 소련의 대일전 참여 문제를 토의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의 동의를 얻게 된 것이다.50)

트루만의 회고에 의하면 1945년 5월 28일 “스탈린이 중‧영‧소‧미 4개국 하에서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ꡓ는 것이다.51) 이는 신탁통치를 실시키로 한 루즈벨트의 구 상이 트루만 행정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52) 트루만이 루즈벨트의 대 한국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하더라도, 한국 신탁통치의 문제는 이미 루즈벨트처럼 식민지 해방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보다는 대소전략의 관점에서 추진되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이 강조되어 가는 것이 트루만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53)

그러나 얄타회담 이후 루즈벨트의 죽음, 폴란드 문제를 둘러싼 미‧소의 대립 등 상황의 변 화에 따라서 신탁통치라는 미국의 기본방침은 유지되기는 했으나, 그 의미가 달라졌다. 즉 트 루만 정권 하에서는 소련의 한국 지배를 저지하기 위한 대소 전략상의 고려를 우선시켜 가면 서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신탁통치 정책의 의미가 부각되어 갔다.54)

1945년 7월 5일에 작성된 미 육군성 보고서에는 한반도를 소련의 작전 구역으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점령만은 미‧소가 공동으로 행하고, 연합국의 신탁통치에 의해서 소련의 예상되는 기도를 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되어 있다.55)

47) 최상룡(1988). 「미군정과 한국민족주의 」, 나남신서 , p.43.

48)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December 4, 1943, p.393, 49) 최상룡(1988), 전게서, p. 32.

50) 심지연 엮음(1986),「해방정국 논쟁사」, 한울, p.45.

51) Harry S. Truman (1955), Memoirs 1945, Years of Decisions, New York: The New American Library, p.294.

52) 심지연 엮음(1986), 상게서, p.45.

53) 최상룡(1988), 상게서, p.36.

54) 상게서, p.27.

55) U. S. Congress. House Committee on Foreign Affairs(1950).Background Information on Korea, House Report No. 2495 pp 2~3,

얄타회담 이후 주목해야할 점은 소련에 대한 서방의 불신감이 깊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군사적으로는 미국이 소련의 한국에 대한 단독 작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포츠담 회담 기간 중에도 미국의 군사 지도자들은 소련에게 한반도에의 진격을 요청하였다. 7월 24일 미・영・소의 합동 군사회의에서 미국의 마샬 육군참모총장은 소련의 안토노프 장군에게 당분간 한국에 대한 육해공군의 합동작전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게는 1945년 11월 예정인 쿠슈 침공과 1946년 예정인 도쿄지역 침공이 한국에 대한 상륙작전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었기 때 문이었다.56)

미국의 군사지도자들은 한편으로 만주‧한국에의 소련군 상륙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 소련에 의한 단독적 군사행동이 가져오는 정치적 결과를 경계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국 측의 이와 같은 내심의 초조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포츠담 회담(7월 17일~8월 2일)에서 미국의 예상에 반해서 한국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내놓지 않았다. 미국은 그 무렵 원자폭탄 실험의 성공으로 소련의 대일 참전 전에 종전의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소련에게 얄타회담에서의 합의사항 이상의 것을 약속하려고 하지 않았다.

3국의 참모장 회의에서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논의하고, 미군과 소련군이 작전상 의 혼란을 빚지 않기 위해, 작전구역을 설정하는 일이 합의되었다. 그리고 공군과 해군의 작전 구역 설정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았으나, 한국을 점령하기 위한 육군의 점령 지역에 관한 토의 는 없었다.57)

한국의 육상에 있어서 작전 범위의 설정이나, 그것과 당연히 결합되는 한국의 분할 점령의 방책은 대일전이 바야흐로 종결하려고 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도 구체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 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소 양국은 한국에 대해서는 간신히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라는 기본정책에 합의한 상태에서 소련이 참전했다. 8월 8일 소련은 대일 선전 포고를 시작으로 만 주의 요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막상 참전하자마자 소련군은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 며 빠른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일본의 항복 이전에 소련이 한반도 전 체를 석권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1945년 8월 10일 밤 국무‧육군‧해군 3성 조정위원회에서 38도선을 긋고, 그 이북의 일본군(관동군 소속)은 소련군사령부에, 그 이남의 일본군(대본영 소 속)은 미태평양육군사령부에 각각 항복하여 무장해제를 시키도록 하는 제안을 소련 측에 통보 하였다.58)

56) 차상철(1969), 전게서. p. 49.

57) Harry S. Truman, Harry S. Truman (1955), Memoirs 1945, Years of Trial and Hopes, New York: The New American Library, p.317.

58) 송건호‧박현채 외(1985), 「해방40년의 재인식Ⅰ」, 돌베개, p.280.

한편, 포츠담회담이 끝나고 4일째인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8월 9일에는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원폭의 위력은 일본의 신속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어 쩌면 원폭의 위력은 미국의 전시 지도자들에게 가공할만한 무기를 갖고 있다는 ‘자만심’을 갖 게 하고, 소련의 남진을 저지할 용단을 내리게 했는지도 모른다.59)

미국은 이미 전쟁 도중에 소련과의 대결을 의식하여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했던 것이며, 그 결과가 38선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38선은 법적으로는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편의적인 선에 불과했지만, 그 선을 그은 당사자인 미국의 의도가 한반도의 분단을 확고히 목표하고 있었던 이상 실제적으로는 국경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60)

물론 미국이 처음부터 분단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획책했다기 보다 신탁통치에 이르 기까지의 잠정적인 분할선으로 생각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분할 점령 자체가 대소 전략상 의 고려에서 태어난 이상, 소련과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할 점령이 고정화될 것이라 는 전망을 갖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신탁통치에 대한 미・소의 구체적 합 의가 없었던 시점에 있어서는 분할선도 잠정적 성격밖에는 갖지 않았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한국 신탁통치안 자체도 소련 세력의 저지를 위한 유효한 조치로써 고려되고 있었던 점이다. 따라서 전후의 미・소 냉전이 진행됨에 따라서 38도선이 미・소 냉전의 분할선으 로서 고정화될 가능성은 당초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61)

더구나 미국은 한국내의 좌익세력이 매우 강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미국은 무장투쟁 독립군의 대부분이 좌익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을 자주적이거나 통일된 상태 로 방치해서는 소련 측으로 기울 우려가 많다고 판단하였다.62)

당시 한국에 가장 가까운 미군의 위치는 오키나와이고, 군부는 거리가 먼 것과 인원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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