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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미국의 봉쇄정책

Ⅰ. 서론

2. 냉전과 미국의 봉쇄정책

1990년대 초, 국제정책 전공 교수이면서 미국정치 전문가인 언스트 오토 쳄필 (Ernst-Otto Czempiel)은 “냉전은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힘과 영향력 분배에 관한 미국과 소련간의 갈 등이었다.”고 요약한다.22)

19) 서중석(1999),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 p. 643.

20) 과거 뉘른베르크 도쿄 국제군사재판소나 유고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는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한 한시적 기 구에 불과하여 그 효과가 제한적이었던 데 반하여 이번 국제형사재판소는 국제적 협약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기대가 크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협약채택에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은 큰 걸림돌이다. 한국은 주 한 미군과 미국의 형편을 고려하는 한 협약 가입에 있어서 난처한 입장에 놓이리라고 본다(한겨레신문, 1998.

7. 21 사설).

21) 크리스티안 슈미트 호이어 (2004), 전게서, p.80.

22) 마리아 휘버(2004) ,“냉전의 뿌리-히로시마에서 제주까지”, 「제주 4‧3의 기억」, 각, p.103.

냉전의 기원은 1‧2차 대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끝났으나 제1차 제2차 대전이 라는 두 번의 대유혈극은 전통사회에 대해 회복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제2차대전 이 끝나자마자 내란, 폭동,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공포가 대전 중의 주축국과 동맹국 간의 갈 등을 대신했으며, 전적으로 임시적인 필요에 의해 형성된 동맹국 간의 긴장관계는 뿌리깊은 적대감으로 대치되었다. 세계의 방대한 지역에 있는 각 국가들에게 전쟁은 굶주림, 고통, 그리 고 무질서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 갈등과 경쟁이 국가들을 파괴시켰으며 그리스와 아시아에서는 내란이 확대되어 갔다. 서반구 이외의 지역에서, 폐허로부터 부흥에로의 열망은 전쟁에 말려들었던 모든 나라들에게는 명백한 명제였다. 전후의 갈등은 세계문명의 구조에 영 향을 미침으로써, 미국의 양 대전에의 개입동기와 전후의 목적을 위태롭게 했다.23)

근대전쟁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클라우제비츠(Clauzewits)는 “전쟁이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War is the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라고 정의했다. 그에 의 하면, 전쟁은 “정치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실로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며 정치적 교섭의 계속 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전쟁이 특이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쟁이 가지는 수단으로서의 특이성 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24) 그렇다면 양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정치적 목적과 그 정책 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 후의 미국 외교정책을 정치경제학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다룬 콜코는 한국전쟁을 정치의 연속으로서 과학적 규명을 시도하였다. 콜코의 견해에 의하면 전쟁 기간 중 미국에 의 하여 추구되었던 목적은 교활하면서도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즉, 기본적으로 미국의 목적은 미국의 기업이 세계 어디에서나 제한을 받지 않고 무역하며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세계를 재 편성하는 것이었다. 미국 기업은 정치적으로 신뢰성이 있으며 자본주의가 안정된 국가, 그리고 천연자원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이 보편적 질서는 좌익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전 세계에 보수적이며 궁극적으로 미국에 종속됨을 보장하는 정치적 통제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은 또한 기본적으로 미국자본주의와 상충될지도 모르는 제3세계의 독립과 발전에 대한 제한을 필요로 하였다.25)

미국은 전장(戰場)이 아니었던 덕분에 전쟁의 엄청난 파괴와 경제적 혼란을 피할 수 있었고, 전시 호황에 힘입어 만성적인 불황을 극복했으며, 더 나아가 세계 공업 총생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룩해 냈다. 미국인은 그러한 경험과 결과를 바탕으로 미래는

‘미국의 시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아무런 대가 없이 실현될 수 있는 23) 김주환 편(1988),「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p.4.

24) 상게서, p.2.

25) 상게서, p.13.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전쟁 후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기는 했지만 엄연한 현실로 다가온 소련‧좌파‧혁명적 민족주의 등의 힘과 영향력의 급속한 성장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만만 치 않게 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당면 문제는 2차대전 이후 새로운 세력관계 및 국제 정치환경의 변화, 그리고 그것을 기본적으로 규정한 국가간‧지역간 경제력 및 국제 경제환경의 변화 등을 미국이 줄기차게 추구해 온 개방된 세계 경제질서 위에서 안정시키고 조직하는 일 이었다. 개방된 국제 경제질서야말로 미국 기업이 세계 곳곳에서 제약받지 않으면서 활동하고 이익을 얻는 데 적합할 것이며,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어떠한 힘의 배치나 미국의 번영 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라고 미국 관리들은 생각했다. 그러 나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이 중심이 된 그러한 세계질서의 재편은 결코 달가운 것일 수는 없었 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연합국 간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결국 그 갈등은 미‧소 혹은 자본주 의와 공산주의 진영간의 이념적 대결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좌익의 존재는 세계 도처에서 제2차 대전 후의 지배적인 양상이었으며 이는 미국이 전쟁기 간 중에는 거의 생각지 못했던 요인이었다. 좌익세력 때문에 미국은 자신의 주요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들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의 탄생이 제1차 대전의 주요 산물이었다면, 아시아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좌익이 부상하고 강화된 것은 제2차 대전의 주요 산물이었다. 미국 지도자들은 좌익이 권력을 장악하 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를, 그리고 만약 좌익이 그런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면 어 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고려해야만 했다. 동시에 그들은 소련의 장래에 대한 문제에 대처해 야 했다. 그들은 소련과 좌익을 동일시했다. 소련의 존재는 유럽 자본주의와 제1차 대전 후의 전통질서를 극히 약화시키는 것이었으며, 잠재적으로는 미래의 자본주의를 갉아먹는 촉매였던 것이었다.26)

맨 처음 태평양전쟁에 소련의 참전이 거론된 것은 1945년 2월의 얄타(Yalta)회담에서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서 소련 수상 스탈린 (Joseph Stalin)에게 참전을 요청했다. 1945년 4월, 스탈린이 소‧일 중립협정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고 발표한 뒤 일본 정부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동시에 3대 군사강국(미, 영, 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정부는 외교기관 및 정보기관을 통해 일본의 평화 이니셔티브를 알고 있었다. 워 싱턴이 단일 정치제 요구를 포함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결코 동의할

26) 김주환 편(1988), 전게서, p.15.

수가 없었다. 즉, 지속적인 천황의 존재에 대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에 게 천황은 국가원수뿐만 아니라 신이었다. 국무성 차관 조센 그류는 주일 미국대사로 근무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일본 사회의 안정을 위한 천황의 근본적인 역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루즈 벨트에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만에게 1945년 5월 초순 조건부 항복의 변경을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만은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그는 제임즈 번즈와 같은 강경파들에 동조하여27) 미국의 새 대통령이 여전히 외교정책에 있어 강력한 권위가 있음을 입증해야 했다.

애초 나치 독일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된 20억 달러의 핵무기 프로젝트는 이렇게 해서 계속 되었고, 그것은 전쟁 기간 내내 핵심 정책이었다. 알페로즈에 따르면 트루만과 번즈는 소련이 원폭의 위력을 보자마자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정책을 완화시키고 자유선거와 개방무역을 수용 하기를 희망했다. 사실 트루만은 계획된 포츠담회담을 원폭실험이 시간표대로 진행될 때까지 연기에 연기를 거듭했다.28)

트루만이 선언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원폭 투하로 전쟁은 끝났다.”였다. 이것은 미국 관리들이 일본이 곧 항복하려고 했다는 것을 몰랐다는 해석에 관해 역사학자들 간에 엄 청난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핵 폭탄을 투하하는데 대한 자신들의 설명을 주장해 온 전통주의 학자들에 의해 확신되고 있다.

그러나 1965년 수정주의 학파의 갈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가 행한 자료와 기억에 의한 최초의 광범위한 평가는 1945년 여름 일본이 항복 직전에 있었고, 미국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 음을 보여준다.29) 이미 1944년 늦여름에 미군은 B-52기가 쉽게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몇 개 의 섬을 점령했고 해상 봉쇄는 최초의 결과를 보여주며 경제적, 군사적 자원의 극단적 결핍의 증가를 가져왔다. 미군 수뇌부는 일본의 보급 문제를 보고했지만, 워싱턴은 여전히 민간인 12 만여 명을 죽인 1945년 도쿄 공습을 결정했으며, 1개월 뒤 거의 같은 수의 미군과, 7만여 명의 일본군, 15만여 명의 민간인들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이다.30)

그후 1947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유럽경제의 부흥을 도모하고 미국과의 무역을 촉진시키며

그후 1947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유럽경제의 부흥을 도모하고 미국과의 무역을 촉진시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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