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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문서에서 2.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 (페이지 33-38)

지금까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과 권력구상을 자주독립국가 건 설운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기 이래 조선 공산주의운 동 내부의 파쟁과 조직‧사상적 폐해가 조공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운동을 실패 하게 한 주요한 원인이라는 문제의식 하에 그 원인을 규명해 보았다.

해방과 더불어 신속하게 움직인 것은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던 공산 주의자들이었다. 8‧15 당일 석방된 이들은 서울 계동에서 혁명자대회를 열고 여러 파벌을 규합해 조선중앙공산당(장안파)을 결성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 는 1937년 이래 민족해방운동 전선에서 탈락한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이

73) ≪大衆日報≫ 1945년 12월 7일자.

74) 조선공산당대표 박헌영, 「獨立同盟, 我黨協力」, ≪解放日報≫ 1945년 12월 21일자; 뺷이정박헌영전집뺸(2), 119-121쪽.

때문에 1945년 8월 18일 박헌영이 상경해 활동을 개시하자 장안파공산당은 크게 동요했다. 일제 말기까지 지하에서 투쟁을 계속했던 그는 화요회 및 경 성콤그룹 등 자신이 이끌던 조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재건 파)를 결성하고 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장안파와 재건파는 계동 열성자대회를 통해 통합을 모색했다. 열성자대회 는 장안파가 주최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측면에 불과했다. 물밑 작업을 통해 장안파의 상당수를 장악한 재건파는 장안파에 대한 전격적인 흡 수를 기도, 이를 관철시켰다. 대회 과정에서 제기된 조선공산당 黨史의 평가 에 관한 논쟁은 당의 건설적인 재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 나 무리하고 일방적인 진행으로 통합의 장이 되어야 할 열성자대회는 새로운 분열의 계기를 제공한 대회로 얼룩졌다. 장안파는 자신들의 투쟁전선 탈락에 대한 반성이나 해명을 회피했고 재건파 또한 동지의 아픈 과거를 감싸 안는 포용력을 발휘하는데 인색했다.

공산당 재건과정의 조급성은 인민공화국의 선포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재건 파는 조공이 재건되기도 전에 건준과 협력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공산 주의에서 통일전선이란 조직‧사상적인 자기세력화가 선행된 뒤에 제기되는 것이 순서임을 감안할 때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조공은 인민공화국을

‘인민정부론’에 기초하여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구성원 전체가 망라되는 민족통일전선으로 구상했다. 그러나 인민정부에의 참여요건의 하나 로 조공에 대한 지지를 제시함으로써 인민정부의 대중적‧계급적 기반의 범위 를 좁히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남한 내 배타적 유일정부임을 자처하는 미군정의 부인과 각료의 태반이 취 임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인민공화국이 인민정부의 완결체일 수는 없었다. 권 력의 완결체로 간주하지 않는 한 인공을 광범위한 민중적 기초 위에 민족통 일전선으로 확대 강화하는 것은 조공이 당면한 급선무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조공은 미군정의 후원 하에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촉중협 참가를 시도했다. 독 촉중협 속에서 인민공화국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 여의 조건으로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요구한 미군정과 이승만의 요구로 조공 은 독촉중협 참여를 포기했고 인민공화국을 광범한 대중적 기초위에 명실상

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강화하려던 조공의 계획은 위기를 맞았다.

중경임정과 인민공화국은 다른 정치사상과 상이한 계급적 기반에 더하여, 양자 모두 정부권력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통일전 선 결성을 추구하고, 대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등 핵심적인 경제정책이 동일한 점에서 보면 협력의 가능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협력의 가능 성이 배제된 데에는 이념과 정책, 완고하게 법통만을 내세우는 임정의 고집, 인적 구성의 이질성 등 못지않게, 임정이 8‧15 해방 직후 민족 구성원 사이 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조공의 박약한 역사의식에도 있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도 혁명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계급이 갖는 다는 것은 공산주의 이론의 상식에 속하는 것인데도, 프롤레타리아혁명 을 외치다 느닷없이 임정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안파공산당의 행태는 이러 한 혼란상이 극에 달한 사례였다.

8‧15 해방에서 같은 해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는 조공 이 민족통일전선운동 등의 정책과 노선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선택과 결정 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과거 공산주의운동의 파벌의식과 자파 우월주 의, 편협한 교조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의 폭을 크게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고접수일: 2월 19일, 심사완료일: 3월 11일]

주제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공화국, 중경임시정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미군정, 박헌영,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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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mbodiment of Korean Communist Party‘s power and 'Korean People's Republic’

Lee, Hyun-joo

The Communists in Seoul and Kyung-ki Province, August 15, organized Korean Communist Party(Changan group, 장안파) by gathering a faction through a Revolutionist Conference. A majority of them have been the Communists left out from a campaign line since 1937. For this reason, August 18 1945, when Pak, Hun-young came up to Seoul and started activities, Changan group Communist Party was disturbed. Pak, Hun-young formed Reconstruction group(재건파) and took up rebuilding the Communist Party by organization that he led such as Kyungsung Com-group(경성콤그룹) and Hwayo group(화요회) etc. Changan group and Reconstruction group groped for unification through the Kyedong enthusiast Conference(계동열성자대회). Reconstruction group that overwhelmed most of Changan group by contacting it secretly tried absorbing it and achieved that task. Kyedong enthusiast Conference that should be unity place, however, got dishonor that it offered a chance new schism because of its compulsory and one-sided process.

The impatience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s reorganization process also emerged in the proclamation course of Korean People’s Republic.

Reconstruction group had publicized Korean People’s Republic with Preparatory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건국준비위원회) before Korean Communist Party was reorganized. Korean Communist Party embodied Korean People’s Republic as National united front including all people except the-Japanese group and traitor, being based on ‘People’s Government theory(인민정부론)’. But, it brought about a fault narrowing the extent of personnel and class base of the people’s government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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