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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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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공산당의 권력구상과 ‘조선인민공화국’*

李賢周**

53)

1. 머리말

2.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 1) 당 재건과정의 두 계열 2) 黨史 평가논란과 당 분열

3. 인민공화국과 민족통일전선 방침 1) ‘인민정부론’과 인민공화국 2) 조공의 민족통일전선 방침 4. 맺음말

1. 머리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제국주 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계급적 기반과 이념, 노선을 달리 하는 정치세력들이 경쟁적으로 자주 독립국가 건설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사회주의세력이었다. 한국에서 사회주의운 동은 1918년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이 탄생한 이래 3‧1운동을 거쳐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립을 계기로 주요한 민족해방운동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 잡 았다.1)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 이후 국내 민족운동세력 대부분이 투쟁전 선에서 사라지는 가운데 끈질기게 투쟁을 계속한 것도 이들이었다. 중경 임시 정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그룹, 미국의 이승만 등 해

* 이 논문은 2005년도 국가보훈처의 학술회의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 국가보훈처 연구관

1) 이현주, 뺷한국사회주의세력의 형성: 1919-1923뺸, 일조각, 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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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민족운동세력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도 이들이 자주독립국 가 건설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세력이 해방 후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1945년 8‧15해방에서 한국에 대한 소련의 정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12월 모스크바3상회의 전까지는 조선공산당이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데 있 어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선택과 결정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이 연구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실패’가 일제 식민지시기 이래 누적된 조직‧

사상적 폐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그 원인과 경과를 규명 해보려고 한다. 특히 해방 직후 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가 이후 의 운동과정에서 재생산되고 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2) 그러나 조선공산당사와 해방 후의 당내문제, 민족통일 전선의 문제가 유기적인 연결 속에서 충분히 검토되지는 않았다.

이를 위해 먼저 일제 말에서 해방 전까지 공산주의운동을 개관하고 이것이 조선공산당 재건과정에 어떻게 계승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또한 당이 재 건되는 과정과 분열상,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드러나는 정부수립 구상을 규명할 것이다. 그리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전략을 검토할 것이다.

2) 李景玟, 「社會主義者朝鮮解放-朝鮮共産黨再建過程-」, 뺷朝鮮民族運動史硏 뺸(5), 1988; 李庭植, 「조선공산당과 인민공화국」, 뺷한국현대사와 美軍政뺸, 한 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1; 서중석, 뺷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뺸, 역사비 평사, 1991; 신주백, 「8‧15해방과 조선공산당 재건-조직문제를 중심으로」, 뺷일 제하 사회주의운동사뺸, 한길사, 1991; 윤덕영, 「解放直後 社會主義陣營國家 建設運動-1945년 ‘朝鮮人民共和國’을 중심으로」, ≪學林≫ 14, 연세대학교 사 학연구회, 1992; 정용욱, 「조선공산당 내 ‘대회파’의 형성과정」, ≪國史館論叢≫ 70, 국사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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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

1) 당 재건과정의 두 계열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기원은 러시아혁명 발발 이듬해인 1918년으로 거슬 러 올라간다. 3‧1운동 전 이미 노령 연해주에서 조선공산주의운동이 싹텄고 코민테른의 조선지부로서 해방 직후 재건되는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의 역사 도 1925년에 시작된다. 1928년 말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조직이 붕괴될 때까지 조공은 1920년대 이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민족통일전선운동 등 합 법‧비합법의 민족해방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 력한 통제와 억압 아래에서, 특히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 지는 시기에 모든 해방운동은 억압 받았고 사소한 표현의 자유마저 금지되었 다. 이 때문에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비합법의 형태로 지하에서 분 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공산당은 대중적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운동을 중지하고 일 본제국주의 진영으로 투항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3)

이때 등장한 세력이 경성콤그룹이었다. 경성콤그룹은 1939년 이재유그룹 에 가담했던 이관술, 김삼룡이 비밀결사를 결성해 활동하다 이듬해 3월 박헌 영을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이 그룹에는 이재유계의 이관술‧

김삼룡‧이순금‧이현상 등과 화요회계의 박헌영‧권오직‧장순명이 참여했고, 김태준과 정태식 등 지식인들이 가담했다. 서울상해계의 이인동‧서중석 등도 가세했고 젊은 층으로 김응빈‧이주상‧이복기‧이남래 등도 참여했다. 경성콤 그룹의 지역적 기반은 서울과 인천에 집중되었지만,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마 산, 대구, 부산에도 조직책을 두었다.4) 이들은 전향이나 변절을 하지 않은 공 산주의 각 파벌의 인물들을 망라한 조직으로 평가되었다.

3)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8.20), 뺷이정박헌영전집(2)뺸, 역사비평사, 2004, 50-51쪽.

4) 정용욱, 「조선공산당 내 ‘대회파’의 형성과정」,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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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 경성콤그룹에 대한 일제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조직자 김삼 룡이 검거되고 최고책임자 박헌영은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두 지도자가 검거 된 뒤 잔존한 경성콤그룹은 홍인의와 김한성 등 소장파에 의해 지도되었으나 이들도 이듬해 3월과 12월에 검거되면서 조직은 와해되었다.5)

경성콤그룹의 와해로 침체되었던 공산주의운동은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시점에서 다시 활발해졌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1944년 1월 소련혁명 기념 일에 소련‧독일 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스탈린이 일본의 중국침략을 규탄하고, 필리핀에서 미군이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고무되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조선에서 날로 가중되는 일본제국주의의 박해가 오히려 이들로 하 여금 “우리 전위부대의 공세가 결사의 일로를 돌진”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하에 산발적으로 잠복해 있던 공산주의서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 다.6)

당 재건운동도 재개되었다. 1944년 7월 하순 각 비밀그룹의 대표 자격으로 조동호‧정백‧이영‧최원택 4인이 돈암정에 모여 공산당 재건준비를 위한 간부 로 자신들 외에 정재달을 가입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며칠 뒤 정재달과 어구선이 검거되면서 당 재건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영과 조동호‧최원택‧

정백‧정종근‧김두수도 이때 검거되었다. 스탈린단은 정백으로 하여금 화요회 계의 조동호를 만나 공산당 재건을 진행하게 하고 정종근은 경성콤그룹의 박 상준을 만나 합류에 관해 협의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별개 조직형태로 평남, 황해, 강원지방을 위시해 각도 간부까지 구성했다.

화요회계도 조동호‧정재달‧최원택‧홍남표‧이승엽 등 5명으로 간부를 구성

5)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역사비평≫ 13, 1991여름호: 「최후의 재건 운동조직, 경성꼼그룹」, 뺷1930년대 국내민족운동사뺸, 선인, 2005 참조.

6) 鄭栢,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뺷朝鮮共産黨文件 資料集뺸(1945-194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5-6쪽. 김일수와 김 태준 등 공산당 재건사건, 청진일철사건, 성진고주파사건, 신의주결사대사건, 협동당사건, 성대이공사건, 안양사건, 함흥파옥사건, 포천사건, 개성사건 등 일 본제국주의에 대한 각종 저항이 시도되었다. 또 경성콤그룹의 김태준‧서중석 서클, 이영‧정백 등의 스탈린단, 조동호 그룹 외 여운형과 이걸소 등 건국동맹 의 지하운동도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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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천과 황해도, 경상북도에 지방기관을 조직했다. 경성콤그룹은 다수가 감옥에서 보석‧석방된 뒤 연락이 끊겼고 김태준이 지도하던 변재호의 영등포 노동자조직이 활발하게 움직였는데, 이들은 8‧15 직후 박헌영과 연결되었다.

이정윤의 서클은 경인지역 노동자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김일수와 연결되었고 노동자출신의 최상덕과 신용우 등이 호남지방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김일수 와 서중석 등의 서클은 출판공 박광희 등의 조직투쟁의 성과로 노동자조직을 확보했다. 가히 “8월 혁명을 예고한 山雨欲來風滿樓”의 상황이었다.7) 그러나 8‧15 전에 조공은 재건되지 못했다.

해방과 더불어 신속하게 움직인 것도 이들이었다. 8‧15 당일 석방된 공산 주의자들은 서울 계동에서 ‘재경혁명자대회’를 열었다. 앞서 7월 말에 공산당 준비부를 협의했던 조동호‧이영‧최원택‧정재달‧정백 등 5인 외에 서중석‧홍 남표‧이승엽‧최용달 등 9인이 모임을 갖고 이정윤과 이현상을 추천, 11인을 간부로 선임했다. 이들은 화요회계(조동호‧홍남표‧정재달‧최원택‧이승엽), 스 탈린단(이영‧정백), ML계(이정윤), 서중석그룹(서중석), 경성콤그룹(이현상) 등 여러 파벌이 연합한 성격을 띠었다. 비서부(조동호)‧조직부(정재달)‧선전부(정 백)‧정치부(간부전체) 등 간부도 인선했다.

당의 명칭으로 ‘조선공산당준비총국’과 ‘조선중앙공산당’이 제안되었다. 이 들은 논의 끝에 “혁명이 진행되는 비상사태에서 준비기관으로는 강력적 추진 이 어려움으로 무산계급의 최고형태로서 대중의 선두에서 결정적 실천을 행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에서 조선중앙공산당을 채택했다. 하지만 시급한 상 황이었음을 감안해도 당이 급조된 것이라는 지적은 면하기 어려웠다. 이를 의 식해 조선중앙공산당은 ① 공산주의단체 외에 개인을 당으로 들어오도록 할 것, ② 당 대회를 열어 정식 중앙을 선출할 것, ③ 각 그룹의 상부만 결합되었 고 하부는 합동하지 않은, 즉 당 준비성격을 실행할 것, ④ 해외로부터 우수 한 지도자가 들어오면 중앙을 변경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조선중앙 공산당은 8월 17일 재경혁명자대회를 열고, 이튿날 당면의 혁명단계를 프롤 레타리아혁명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정강 정책을 발표했다. 경성지구위원회와

7) 정백,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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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청년회, 도 기관이 조직되었고 현준혁과 김덕영이 각각 조선중앙공산당 평안남도책과 황해도책으로 임명되었다.8)

그러나 1945년 8월 18일 박헌영이 상경해 활동을 개시하면서 조선중앙공 산당(이하 장안파공산당)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조선공산당의 창당멤버이고 화요회계의 중심인물로서 경성콤그룹의 최고 지도자였다. 박헌영은 1941년 1월 이관술‧이현상‧김삼룡 등이 체포되자 대구로 피신하였고 경찰의 추적을 피해 여러 차례 거처를 옮 기며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숨어있었다. 8‧15 직전까지 전남 광주에서 벽돌 공장 노동자로 은거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흩어진 조직원들과 연계를 구축하 는 등 활동을 쉬지 않고 있었다. 이는 앞서 장안파공산당 조직을 주도했던 상 당수 공산주의자들이 중일전쟁 이후 투쟁전선에서 탈락했던 것과 대비된다.

박헌영은 8월 18일 서울로 올라와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을 소집했다. 이어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당면의 혁명단계를 부르주아민주주 의혁명으로 규정한 정치노선(‘8월 테제’)을 발표,9) 해방 당일에 ‘조선중앙공 산당’을 선포한 세력을 강력히 비난했다.

… 탄압의 시기에 기득의 영예에 만족하던 이런 자들은 합법적 운동의 시기, 즉 1945년 8월 15일에 하부조직의 창설이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당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기까지 하고 유해한 전통적인 파벌 활동을 반복 하며 인민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되려고 희망하였다. 그들은 흔들림 없이 오래 전 부터 지하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충실한 공산주의자들의 믿음직한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선공산주의운동은 분열되 었다. 이런 파벌주의자들의 활동은 공산주의운동과 정반대되는 것이 되었으며,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10)

오래 전부터 흔들림 없이 지하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충실한 공산주의자들

8) 정백,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한편, 조선중앙공 산당은 장안빌딩에서 선포되어 장안파공산당으로 불려졌다.

9) 박헌영, 「자필이력서」(1945), 뺷이정박헌영전집뺸(2), 58-59쪽.

10)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8.20), 뺷이정박헌영전집뺸(2),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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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믿음직한 그룹은 경성콤그룹 뿐이었다. 자신들만이 “탁류가 황포히 흐르는 금일에 있어 한 가지 맑은 물결이 새암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캄캄한 밤중에 밝은 등불같이 진정한 공산주의운동은 일본제국주의 하의 백색테러 시기로부터 현재까지 계속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그는 이 후 당 분열의 책임을 자격도 없으면서 서둘러 당 재건을 선포한 이들에게 돌 렸다. 박헌영은 장안파공산당의 중앙위원 취임을 거부하고 이들에 대한 회유 와 해체작업에 착수했다.

당 안팎에서 ‘당 조직이 원칙에 不合했다는 비난’이 높아가는 가운데, 8월 22일 장안파공산당은 간부회의에서 당이 조직상 원칙이 위반되므로 재경열성 자대회를 열어 당 조직문제를 결정하기로 하고 당의 해소를 결의했다. 이를 위해 정재달‧정백‧서중석‧이정윤‧이승엽 등 5인의 대회소집위원을 선출했다.

조동호‧홍남표‧정재달‧최원택 등 화요회계는 당의 해체를 주장하고 장안파공 산당에서 탈퇴했다. 경성지구위원회와 공산청년회는 당 해체에 반대했다. 그 러나 해소결의에 찬성했던 이영이 해소반대를 주장하고 정백은 대회에 물어 서 결정할 것을 주장하면서 장안파공산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9월 1일 장 안파공산당은 경성지구위원회 주최로 재경열성자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는 70 여명이 출석한 가운데 당을 존속시킬 것을 결의했다.11)

대회는 “해당론의 무원칙적 파벌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통일을 위해 3일 이 내로 당외 재경 서클을 망라한 열성자대회를 개최하여 거기서 중앙부 보강과 전국대회 소집을 토의”하기로 결정하고 9명의 연락위원을 선출12)했다. 그리 고 대회에서 선출된 연락위원들이 각 서클에 통일을 교섭하여 조공 재건위를 제외한 서클의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재건위 측은 열성자대회의 참가조건으 로 당 중앙의 구성과 당원심사에 대한 일체 권한을 요구했다. 장안파공산당은 이를 거절했으나 연락위원 가운데 재건위 측의 요구에 동조하는 인사들의 비 협조 때문에 당 조직 통일을 위한 회합은 휴회되었다.13)

11) 鄭栢,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9쪽.

12) 「당 통일 촉진에 관한 약보」, ≪戰線≫ 4, 1945.10.31. 이정식 편역, Materials

on Korean Communism, 1945-1947(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 of

Hawaii, 1977), pp.169-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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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에 다시 열성자대회가 열렸으나 11명만이 모인 가운데 3인 위원을 뽑아 조공 재건위측 2명, 장안파공산당 3인을 선임하여 이들로 하여금 두 파 를 통일시킬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재건위측이 11인 회합을 인정한 반면, 장 안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장안파쪽 위원 3인으로 안기성‧이승엽‧이정윤 이 선출되었는데,14) 이는 장안파공산당이 이들을 조공 재건위쪽과 가까운 인 물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제 1차 인민대표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2) 黨史 평가논란과 당 분열

통합협상이 난항을 겪자, 재건위쪽은 초조해졌다. 9월 6일 당이 통일 재건 되기도 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민공화국)이 출범하고 다수의 인물들이 여기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재건위는 장안파공산당에 대해 전격 흡수를 통한 와해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장안파공산당에서 통일‧재건될 당의 중앙위원 선출 전형위원으로 선임한 이정윤‧이승엽‧안기성의 3인이 앞장섰다.

이들은 조공 재건위쪽에 포섭된 사람들이었다. 정백도 장안파공산당 지도부의 이영과 최익한을 만나 쌍방의 통일을 제안하여 승인을 받는 한편 박헌영에게 도 같은 뜻을 전달했다.15)

1945년 9월 8일 계동에서 안기성의 사회로 열성자대회가 개최되었다. 대 회에는 이영‧최익한‧정백‧정재달‧이승엽‧이정윤‧현칠종‧안기성‧강병도‧조두 원‧권오설‧최원택‧이청원‧김두현‧홍인의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경인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모인 셈이었다. 장안파공산당이 주 도하는 열성자대회에 박헌영이 조공 재건위 측을 대표하여 참석하는 형식이 었다.16)

13) 이정식 편역, Materials on Korean Communism, pp.169-173.

14) 정백,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9쪽.

15) 정백,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9쪽.

16) ≪解放日報≫ 1945년 9월 25일자, 「熱誠者大會經過-分裂派行動批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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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는 먼저 장안파공산당의 열성자대회에서 선출하여 재건파에 보낸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 3인(이정윤‧이승엽‧안기성)과 재건파 대표와의 협의전말을 보고했다. 이들 3인의 전형위원이 장안파공산당원 가운 데 통일 재건될 당의 중앙위원이 될만한 후보를 박헌영에게 써주고 당 중앙 위원을 선택할 권리는 박헌영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에서 박헌영은 오늘의 정세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원칙적 결합과 분리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원칙적 결합을 기초로 한 통일로써만 당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통일과 중앙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원칙적 결합과 분리’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현재의 상황에서 좌익의 통일이 절박하 면서도 무원칙한 통합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명백히 한 것이다.

당 중앙의 건설과 관련해 박헌영은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역사 속에서 중앙 위원 선임의 원칙을 도출하였다. 조선공산당이 붕괴된 1929년 이후 당 재건 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검거가 끊임없이 자행되어 온 것에서 증명되듯이, 전시의 군사적 테러 밑에서도 그들은 지하운동을 계속 하였다는 것이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세계적 전쟁의 시기에서 조선공산 주의운동은 지하에서 통일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여기서 당 중앙 건설의 조직 원칙은 명백해진다.

지하운동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그룹들과 출감한 전투적 동지들이 중심이 되고 서 당이 재건되는 것이오, 동시에 여기에는 어느 파를 물론하고 당원이 될만한 자 격을 갖춘 분자는 모두 입당하여 통일적 당 깃발 밑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중략) 과거의 파벌두령이나 운동을 휴식한 분자는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해도 이번 중앙에는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당은 새 로 재건될 것이다.17)

당 재건의 원칙을 명분으로 장안파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 이다. 박헌영은 특히 1929년 당 재건운동 이전시기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

17) ≪解放日報≫ 1945년 9월 25일자, 「熱誠者大會經過-分裂派行動批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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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3‧1운동 이후 1920년대 공산주의운동에는 참 여했지만 1928년 말 당이 와해된 이후 재건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장안파 공산당의 지도자들을 겨냥했다.

당연히 장안파공산당 쪽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이청원은 이 모임은 진 정한 열성자대회로 볼 수 없으며,18) 8월 15일에 이미 조직된 조선중앙공산당 (장안파공산당)과 앞으로 조직될 당에 대한 태도와 방침을 밝혀줄 것을 요구 했다.19) 이영도 박헌영에게 장안파공산당 지도부에서 ① 전국적 통일, ② 각 서클 통합을 위한 구체적 방법, ③ 원칙적 통합을 서약해야 한다는 결의가 있 었음을 환기시키며 이러한 결의를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보다 강력한 저항이 최익한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당 통일의 시야가 일 방적이어서는 안 되며,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역사를 무시하고 장안파공산당과 대립하는 당을 만들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박헌영의 보고 내용을 강하게 비판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주의운동사를 언급하면서 1929년 이전의 역사를 제외시킨데 대한 예리한 지적이었다. 일제하 조선공산 당사의 평가와 관련된 논란을 촉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장안파공산당의 일원 이면서 장안파공산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이정윤을 아나키스트라고 성토했 다. 이정윤은 대회 모두 발언에서 장안파는 대중적 토대가 전무하고 방침과 규율이 없으며, 소부르주아적이고 파쟁적이므로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최익한은 재건위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에 대해서도 경제주의적이고 아나 키스트적이라고 비판했다. 사회자에게 박헌영의 보고 내용에 대한 가부를 거 수로 가결할 것도 요구했다.20)

정백은 안기성‧이정윤‧이승엽 세 사람만으로 열성자대회를 대표할 수는 없 으므로 장안파공산당에서 23인의 협의자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는 당 통일 이 계급의식의 통일이 되어야 하므로 권모술수에 의한 기계적 통일이 되어서

18) 鄭栢,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9쪽.

19) ≪解放日報≫ 1945년 10월 12일자, 「運動統一强調-熱誠者大會經過 報告」().

20) ≪解放日報≫ 1945년 10월 12일자, 「運動統一强調-熱誠者大會經過 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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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건파에서 박헌영과 장안파에서 간부 여럿이 다시 만나 성의 있는 결합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그러나 홍증 식을 필두로 다수가 박헌영에게 즉각 전권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 데 열성자대회의 분위기는 재건위측의 의도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21)

박헌영은 운동의 시야가 전체적이어야 한다는 최익한의 지적은 옳으며 당 사를 언급할 때에도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고 시인했다. 이정윤의 발 언에 대해서도 이정윤의 의사가 과거운동은 하나도 쓸 것 없다고 말한 것이 라면 잘못이지만 장안파공산당에 국한된 비판이라면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 중앙이 건설될 때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당원으로 들어올 것을 기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장안파공산당 일부의 격렬한 반대 속에 대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 채택을 강행했다. 첫째 당 건설에 대한 박헌영의 견해를 지지하고, 둘째 당 중앙을 선출함에 있어서 노동자 농민의 기초조직을 가진 공산주의 각 그룹과 연락해 협의하되 연락은 박헌영에게 일임하며, 셋째 당이 건설된 후 강령과 전략전술을 규정하기 위해 빠른 기간 안에 당 대회를 소집하도록 힘쓰며, 당 면과업의 수행을 위해 행동강령을 속히 작성해 발표한다22)는 것이다. 그러나 이영과 정백‧최익한‧이청원 등은 계동 열성자대회의 불법성을 거론하며 결의 안 채택을 끝까지 반대했다. 1945년 9월 11일 조공 재건위는 당이 통일 재건 되었음을 선포했다.23)

21) 정백,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9쪽.

22) ≪解放日報≫ 1945년 10월 18일자, 「我田引水格排擊-熱誠者大會經過報 」().

23) ≪解放日報≫ 1945년 9월 19일자. 그러나 그 성립의 일방성과 편파성 때문에 계동 열성자대회는 조선공산당의 재건‧통일이 아닌, 이후 새로운 분열의 계기 를 제공한 대회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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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민공화국과 민족통일전선 방침

1) ‘인민정부론’과 인민공화국

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권력구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성 립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조공조차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많은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인민공화국의 성립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공 재 건파 계열의 조선공산당 성장과정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 방 후의 한국현대사를 걷잡을 수 없이 분열시켰다고도 한다.24)

인민공화국이 조공의 주도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점에서는 대체적으로 의견 이 일치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성립배경과 과정, 주도세력에 대해서는 해명되 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인민공화국 성립 이틀 후 계동 열성자대 회에서 행한 박헌영의 보고를 살펴보기로 한다.

… 일본제국주의는 무장한 채로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 한편으로 북부조선 에서 소비에트연방의 붉은 군대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 을 선언하였고 미국군은 미구(未久)에 서울에 들어오려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 지주와 대뿌르주아지들의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운동은 권모술책을 가지고 좌익 내부에 그 손을 뻐처오고 있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이러한 중요 모맨트에 당하야 만일 좌익이 분열 상태로 통일되지 못하는 날에는 그것은 반동세력의 진영을 강 화함인 동시에 좌익의 무력(함)을 폭로하며 전조선의 인민을 위하야 불행을 가져 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행동의 통일을 위한 특별 콤미씨(협의회)가 성립되었 고 이 콤미씨는 최대한도의 포용력을 발휘하야 각 단체, 각 파벌, 각 계급에 접근 하야 신교(信交), 성별을 초월하고서 가장 넓은 범위의 통일민족전선을 결성하기 에 노력한 결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에 노력하였다. 또한 인민중앙위원 회를 선거 발표한 것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 좌익통일의 큰 성공인 것이 틀림 없는 것이다.25)

24) 李庭植, 「조선공산당과 인민공화국」, 80쪽.

25) ≪解放日報≫ 1945년 9월 25일자, 「熱誠者大會經過-分裂派行動批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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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진주를 앞두고 재건위와 장안파공산당의 통일이 시급함을 역설한 것이다. 남쪽에는 아직도 일본군이 무장한 채로 있고 미군이 아직 진주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뿌리를 둔 우파세력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좌파의 통일이 긴급하며, 특별 협의회를 열어 ‘인공’을 결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특별 협의회는 1945년 9월 6일 인공을 선포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말한다. 이 대회에는 조공 재건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장안파공산당도 참여했다.26)

좌익진영의 통일을 위해 인공을 수립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박헌영은 인 공의 성립을 민족주의진영까지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보다 좌익진영 통일의 연장 선 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에 앞서 정부조직부터 선포한 사실로도 명백하다.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전선이란 조직‧사상적인 자기세력화가 선행된 뒤에 제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공이 인민공화국의 성립에 깊이 관여한 정황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미군정의 주간 정기보고는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의 ‘마스터플랜’을 써서 건국 준비위원회 여운형의 승낙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27) 남로당 출신인 박 일원에 따르면 1945년 9월 4일 경성의전병원 내과에 입원 중이던 허헌의 병 실에서 박헌영‧여운형‧정백 등 4인이 밀회하여 인민공화국 창립과 그 구성인 물을 협의 결정했다고 한다.28)

조공은 인민공화국을 항일투쟁의 역사적 산물로 보고 있다. 1925년의 조선 공산당 성립, 그 당의 지도하에 전개된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8년 원산 총파업 및 1929년의 부산 대파업, 1927-1931년의 신간회운동, 또 국외에서 1930년대 김원봉 등에 의해 지도된 무장투쟁, 1944년 여운형의 건국동맹,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건준에 이어 근대후기 조선민족운동의 정통을 이어 받은 것이 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이다.29)

26) 정백, 「八月 十五日 朝鮮共産黨 組織經過 報告書」(1945.11.7), 9쪽.

27) ⅩⅩⅣ Corps G-2 Summary No.41(unclassified).

28) 朴馹遠, 「南勞黨總批判」(1948), 뺷南勞黨硏究資料集뺸(2), 고려대학교 아세아문 제연구소, 1974, 335쪽.

29)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대하여’ (부)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원칙적 차이, 인민공 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탄생경로, 해방출판사, 1946, 38-39쪽; 崔相龍, 뺷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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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화국의 27개조 강령도 조공이 8월 테제에서 규정한 부르주아민주주 의혁명에 따른 개혁안이었다. 특히 당면한 민주주의 개혁의 핵심이었던 토지 개혁에 대해, 혁명적 토지국유화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적 토지소유 실 현의 준비과정으로서 3‧7제를 획득하게 한다는 운동방식을 제기했던 것은 전 형적인 사례이다.30) 이것은 인공이 조직적으로는 좌익진영 통일의 연장선에 서 탄생한 것이면서도, 내용상으로는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염두에 두고 있 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인민공화국이 전적으로 박헌영과 조공에 의해 기획 되고 여운형과 건준은 단지 승인만 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실무적 준비 나 정강정책의 작성 등은 조공이 깊이 관여했을 것이지만 55명에 이르는 중 앙인민위원 인선, 9월 14일에 발표된 인민공화국 내각의 구성을 보면 이러한 작업들이 조선공산당의 독자적인 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 심이 든다. 중앙인민위원회에는 공산주의자를 포함, 다양한 인물들이 포함되 어 있다. 내각에도 이승만(주석), 김구(내무부장), 김규식(외교부장) 등 귀국하 지 않은 해외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내 민족주의진영에서 김성수(문교 부장)가 포함되고 송진우가 배제된 것도 주목된다. 송진우의 배제는 건준이 출범할 때부터 갈등과 대립을 빚은31) 여운형의 의중이 개입된 흔적이 짙다.

여운형은 인민공화국이 선포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새 조선의 건설을 위해 8월 15일 이후의 치안유지를 위주로 노력하고 있다”

고 하여 인공이 건준을 계승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또 혁명가가 먼저 정부 를 조직하여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으며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비상조치 로 생겨난 것이 인민공화국이라고 강조했다. 인민이 승인만 하면 인민공화국 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합군이 진주만 하면 즉시 국권 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인민공화국 내각이었다고 한다. 그는 혁명기 에는 혁명단체가 조각하는 것이며 인민이 조각하는 것이 아님은 중국의 손문

韓國民族主義뺸, 나남, 1989, 87쪽에서 재인용.

30) ≪해방일보≫ 1945년 12월 12일자, 「조선공산당의 토지문제에 대한 건의」.

31) 金俊淵, 「政界回顧一年- 解放政治運動出發」, ≪東亞日報≫ 1946년 8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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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하여32) 인공 선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이렇게 볼 때 인공은 ‘역할분담’에 의한 조공과 건준의 공동작업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인민대표자대회의 대표성에 문제가 있 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운형의 발언은 인민공화국 내각의 조각을 자신이 주도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인민공화국 주석은 1940년대 초반 단파방송을 통해 이승만의 미국 내 활동과 역할을 알고 있었던 여운형과 허 헌에 의해 인선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33) 당시 이승만의 명성과 위상을 볼 때 그의 주석 영입 여부는 정권기관으로서 인공의 현실적 출범 여부를 가늠 할 수 있는 잣대였다.

조공은 인민공화국을 완결된 권력체로 보지 않았다. 박헌영은 미주둔군 사 령관 하지와의 대담에서 조공과 인민공화국은 아무런 특별한 관계도 존재하 지 않으며, 자신은 인민공화국이 장차 수립될 정부를 준비하기 위한 학교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민공화국은 미군정청에 대립하는 기관이 아니며 인민공화국은 한국에서 동맹국들의 군정기간이 종료될 때 수립될 미 래의 정부를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34)

조공의 권력구상은 민족통일전선의 이론으로 제기한 ‘인민정부론’에 집약 되어 있다. 이것은 조공이 정권수립을 가장 긴급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는 데 서도 알 수 있다. 전국적 범위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하며 해 방 후 새 조선은 ‘혁명적 민주주의의 조선’의 조선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 국민주당과 같은 반민주주의적 경향의 반동단체는 반동성을 폭로해 반대투쟁 을 일으키고 “정권을 인민대표회의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투쟁해야 한다. 이 를 위해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하며 민족 및 사회개량주의자의 영향 밑에 있는 인민대중을 공산당으로 획득하기 위해 그들의 개량주의적 본질을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정부’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고 도시소시민과 인텔리겐차의 대표와 진보적 요소

32) ≪每日新報≫ 1945년 10월 2일자.

33) 성기석, 뺷短波放送海外連絡運動擧證資料(1941-1943)뺸(국가보훈처 소장) 참조.

34) 「조선공산당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미 제24군사령관 하지중장의 회담」(1945.

10.27), 뺷이정박헌영전집뺸(2),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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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모두 참가하는 민족통일전선으로 결성되어야 한다. 이런 정부라야 근로인 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고, 이것이 점차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 권’으로 발전해 혁명의 높은 정도로의 발전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을 만든다는 것이다.35)

조공은 인민정부 건설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인사들의 범주를 네 부류로 제시했다. 첫째는 절대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과 친일파의 근절 을 철저히 주장하는 사람, 둘째는 조선 인민을 위해 민족을 위해 실천적으로 일하는 사람, 진정한 인민을 위한 일꾼으로 대중이 인정하는 사람, 셋째로 국 제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 넷째 일본제국주의자와 가장 격 렬한 싸움을 싸운 조공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 등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지주이건 자본가이건 상관하지 않고 뭉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침 없는 통 일, 무조건 통일에 반대하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전민족의 통일전 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36)

그러나 이것은 인민정부의 대중적 기반을 조공 지지세력으로 한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요소를 충족시키는 여러 혁명세력을 민 주주의적 토의 위에 정당히 평가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약법에 따라 1 년 이내에 국민총선거를 통해 ‘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조공의 마스터플 랜이었다.37)

미군정이 부딪힌 인민공화국은 그 실체를 간단히 부정해버릴 수 없는 존재 였다. 중앙에서의 활동력이나 지방에서 인민위원회 조직의 광범위한 존재, 일 본항복 후의 권력 공백기에 보여준 자치 경험 등은 이들의 실체를 중명하기 에 충분했다. 미군정의 한 관리는 미군의 물리력이 없었더라면 인공 세력은 어느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한국에서 살았 던 군정참모 H. H. 언더우드가 농촌지역을 여행한 후에 인민공화국이 남한에

35)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現情勢와 우리의 임무」(1945.9.20), 뺷이정박헌영전집뺸 (5), 67쪽.

36) ≪自由新聞≫ 1945년 10월 31일자.

37) ≪自由新聞≫ 1945년 12월 5일자;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聯合國에 멧세-지 朝鮮共産黨서 전송」(1945.12.5), 뺷이정박헌영전집뺸(5),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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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가장 강하고 활동적인 조직체라고 보고했을 정도로 인민공화국이 강력한 세력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38)

미군정은 남한에서 군정 이외 일체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천 명함으로써 인민공화국을 부정하였다. 미군정은 10월 10일과 12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인민공화국 부인성명을 발표했다. 인민공화국에 대한 부인은 지 방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의 물리적 탄압을 동반한 조직, 활동 전 반에 대한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부인이라는 점에서 조공에게는 심각한 타격 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민공화국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① (인민공화국에 대한 미군정의) 현재의 혼동과 오해는 친일파들의 비방적인 조언 때문이다. ② 명칭의 변경은 국호와 그것을 반대해 투표된 조직체에서 토론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③ 회의 후에 하지중장이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허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 외에 모든 점 들에 동의한다. ④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언급하는 것이 허락된다. ⑤ 미군 정의 이러한 태도는 대중을 혼란스럽게 한다.39)

인민공화국은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는 대신, 미군정의 인민공화국 부인 이 친일파들의 모략에 의한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 려 했다. 반면에 미군정이 중경 임시정부의 정부적 활동을 묵인하는 것에 대 해서는 형평성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인민공화국의 엉거주춤한 모습은 1945년 11월 20일에서 25일까지 서울에 서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 채택된 성명서에도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의 동경의 국호이며 의욕의 단체이나, 미군정의

38) 미군정 공보실의 W. F. 하트는 1945년 12월 언더우드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인민공화국의 세력이 자라고 있으며 모든 수준에서 정부로 조직화되어 있고 미군정의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떤 정당도 그들과 공존할 기회가 주 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U.S. Arm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II), 돌베개(

影印), 1988, p.17).

39) U.S. Arm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II),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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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존중하며 그에 협조하는 의미에서 미군정으로부터 개명교섭이 있은 후로부터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문자의 사용을 피해왔으며 또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0) 이것은 또한 당시 시점에서 미소간의 협조를 존중하는 소 련의 입장이기도 했다.41)

2) 조공의 민족통일전선 방침

(1) ‘독촉중협’ 참여전략

권력의 완결체로 간주하지 않는 한 인민공화국을 광범위한 민중적 기초 위 에 민족통일전선으로 확대 강화하는 것은 조공이 당면한 급선무의 과제였다.

이러한 조공의 의중은 1945년 10월 23일 정당통일운동의 결과로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중협)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공은 이미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인공 내각의 주석으로 발표해놓고 있었다.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인공은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조선인민공 화국 주석 이승만’을 환영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에서 인공은 “이승만 박 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의 的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 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의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 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의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라면서 ‘인공 주석’을 향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조공도 기관지를 통해 담화를 발표,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했다. 그에 대한 조공의 평가는 이승만이 “일평생을 두고 조선민족해방의 일념을 품고 수륙 수만리를 표랑하던 혁명가”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역사적 과도기에 처하 여 위대한 지도자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조선 민족에게 이승만은 ‘3천만

40) ≪解放日報≫ 1945년 11월 27일자, 사설 「전국인민위원회대표대회의 성과」.

41) 서동만, 뺷북조선 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뺸, 선인, 2005,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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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기대가 절대’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면서도 조공은 ‘기대가 큰 만 큼 책임도 중대할 것’이라고 하여 그에 대한 요구도 숨기지 않았다. 지도자라 면 세계정세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 입각하여 조선의 정세를 정당하게 파악해 민중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하며 절대다수의 민중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공 장과 농촌, 도시에서는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들을 줄 아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42) 이승만이 우익 진영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 견제였 다.

인민공화국과 조공의 환대에 이승만도 우호적으로 화답했다. 그는 10월 21 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산당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 했다. 자신은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공산주의에 대 해서도 경제대책을 세울 때 채용할 점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적 경 제정책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정치적 측면, 즉 계급투쟁과 사회주의혁명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해방 이전의 한국 공산주 의운동의 두 가지 경향을 지적했다. 공산주의가 경제방면에서 노동대중에 복 리를 주자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사회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책임하게 각 방면으로 격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 과 유럽의 해방된 국가에도 있는 일이었다. 각 지방에서 공산주의 당파를 확 장해 민간의 재산을 강탈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처럼 급격한 분자가 선두에 나서서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일도 있는 데, 이를 방임하면 국제적으로도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것이 공산당에 대한 이승만의 우려였다. 이는 또한 ‘과거’ 한인공산당의 예를 들어 현재 조공의 계급투쟁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효용성의 측면에 한해 공산당의 정책을 긍정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43)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대한 기대도 이승만에게 집중되었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정당통일운동의 상황을 여러 경로를 통해 보고받고 있었다. 개별 정당은

42) ≪解放日報≫ 1945년 10월 25일자.

43) ≪每日新報≫ 1945년 10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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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언론사와 각 지방의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보고루트는 다양했다. 이를 통 해 이승만은 귀국 후 최단 시일 안에 국내 정세를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정 확하고 풍부한 정보의 바탕 위에서 그는 “만일 내가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면 여러분의 협조와 원조에 힘입어 조국의 건국대업을 위해서 나설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이승만은 조선인이 자치해 나갈 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외국인들로부터 들었다면서 이를 불식하 기 위해서는 조선이 자치를 할만한 실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역설했 다. 조선인의 자치능력 부족이 일본인의 간악한 선전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이를 부인했으며 국무장관도 조선의 실정을 잘 양해하 였고 태평양방면 최고사령관 맥아더도 조선인들이 분열을 일삼고 자주능력이 없다는 것은 허위선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주둔 미군 사 령관 하지 중장과 아놀드 군정장관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정당이 상호 협력하여 통일하면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44) 정당통일운동 에 대한 미군정의 언질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승만의 미국 일변도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10월 23일 오후 2시 조선호텔에서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 대한신 민당, 신조선당, 대한민국국민당, 조선공산당, 귀일당, 대한민국인민정치당, 대 한민정당, 학병동맹, 국민당, 한국민주당, 각 청년단체 대표 등 50여 개 각 정 당 단체대표 2백여 명이 모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다. 회의 소집권한 이 이승만에게 위임되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이승만에게 감사의 뜻을 표 함과 동시에 통일문제 등에 대해서도 그에게 무조건 일임하고 절대 복종하겠 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조공은 이승만의 무조건적인 통일론에 제동을 걸었다. 중앙위원 이 현상은 조선 사람이면 통일을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통일의 문제를 옳게 해 결하려면 추상적인 이론보다 국제적 현실과 국내정세를 정확하고 철저하게 파악해 민중이 다같이 행복하고 한 깃발 아래 자유독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

44) ≪自由新聞≫ 1945년 10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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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주장했다. 통일에는 조공도 절대 찬성하지만 무조건 하고 통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50여 정당이 통일을 부르짖으면서도 통일되지 못한다는 것은 행동과 이상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인데, 세계를 통틀어 혁명적 단계에 들어간 이때 조선의 현실적 사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나아가 이현상은 “문 제는 둘 중에 하나다. 대한임시정부를 모셔다가 개조하느냐 그대로 두느냐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더욱 강화시켜 국내 해외를 망라하여 재조직하느냐에 있 다”고 하여 이승만으로 하여금 중경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중 하나를 선택 할 것을 요구했다.45) 조선학병동맹 등 ‘청년단체대표자회’ 소속의 19개 단체 들도 인공의 선포가 조선인의 총의인 만큼 이승만이 주석에 취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46)

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10월 23일 전체회의를 열어 이승만에게 독촉중협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인민공화국과 중경임시정부의 양 진영이 모두 납득 할 수 있는 조직체로 개편하도록 건의하기로 결의했다.47) 3일 뒤에는 여운형 과 안재홍이 긴급 회동하여 국내의 전선통일은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최고조인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없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고 같은 날 여운형 은 별도로 이승만과 회견했다.48) 여운형과 안재홍이 각각 인민공화국과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자들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회동이 갖는 의미는 컸다.

10월 31일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날 회동은 이승만 이 독촉중협 회장의 자격으로 조공 대표 박헌영을 돈암장으로 초청해서 이루 어졌다. 언론은 두 사람의 만남에 의의를 부여하면서 “통일에 대한 원칙문제 에 있어서 양씨가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대서특필했다. 조공이 줄 곧 요구했던 친일파 배제 요구를 이승만이 수용했다고도 보도되었다. 이승만 이 “성스러운 건국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을 시인하며 그러나 지금 은 바쁜 때이니 그들을 처단할 수는 없지 않나” 라고 함에 박헌영은 “우리도 지금 그들을 처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성스러운

45) ≪每日新報≫ 1945년 10월 25일자.

46) ≪自由新聞≫ 1945년 10월 24일자; ≪大衆日報≫ 1945년 11월 9일자.

47) ≪每日新報≫ 1945년 10월 29일자.

48) ≪自由新聞≫ 1945년 10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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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기관에서 친일파만 제외하면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선생과 함께 손을 잡 겠다”고 화답했다는 것이다.49) 공식 참가를 유보하고 있었던 조공의 독촉중 협 참가도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랬을까? 사실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통일운동의 방향과 친 일파 처리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은 근접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자 리에서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중대한 대화가 오갔다. 조공 측에서 작성한 아래의 대화록을 보자.

ଲ਎࠮: 하지 중장은 비합법적으로 조직되어 군정청에 대립하고 있는 조선인민 공화국을 강제로 해산시킬 것이라고 나에게 언명한 바 있다. 나는 조선인민공화 국을 조직한 사람들에게 정부를 해산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약속하여 군정청의 강 제적인 해산조치를 중지시켰다. 만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스스로 해산한다면 실제 로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존중해주지 않는 정부인 바에야.

ࢮෝઽ: 나는 어떠한 근거로 조선인민공화국의 해산을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떠한 근거로 조선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대립한다고 판단하는지, 미군정 하에서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마지막으로 어떠한 이유로 조선인민공화국의 존 재가 당신과 당신의 정치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ଲ਎࠮: (신경질적으로) 해산시키기 원한다면 해산시키되 그렇지 않다면 당신 뜻대로 해라.50)

이승만은 조공의 독촉중협 참가를 종용하면서 선결조건으로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요구했다. 해산 요구가 미군정청의 요청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것은 이 승만의 의중이기도 했다.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왜 이승만의 정치활 동에 방해가 되는지를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승만의 구상은 인민공 화국도 중경 임정도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좌익진영까지 끌어들여 독촉중협

49) ≪每日新報≫ 1945년 11월 2일자.

50) 「박헌영동지와 이승만박사의 회담」(1945.10.31), 뺷이정박헌영전집뺸(2), 66-68 쪽.

(23)

을 전 우익과 좌익을 망라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블록으로 만들려는 것이 었다.51) 이승만이 박헌영에게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요구한 이상 이승만의 인 민공화국 주석 취임도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1월 2일 조공은 독촉중협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일련의 물밑 대 화들이 오고간 뒤였다. 조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준수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 완전독립의 달성을 위해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친 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철저히 구축 숙청할 것, 둘째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내걸고 이 원칙 밑에서 모든 민주주의 요소의 집결로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 하고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을 선포할 것, 셋째 통일전선을 기초로 통일정권을 수립할 것이며 통일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 기본과업을 실시할 것, 조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존중할줄 알아야 한다. 넷째는 전조선 민족통일전선은 통일정 부를 지지하되 이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을 밟아 나가는 가를 항상 검토하여 자기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것이다.

그러나 독촉중협은 처음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조공은 독촉중협의 11 월 2일 회의를 예로 들어, ① 일본제국주의 잔존세력 구축과 친일파 민족반역 자 숙청 문제를 묵살했고, ② 11월 2일에 모인 정당대표들은 면밀한 심사도 없이 모 당간부 몇 개인의 독단적 의사로 무질서할 뿐만 아니라 회의 중 다수 투표의 권력 강탈을 목적하고 단체대표자가 아닌 자기단체 소속 군중을 회장 안에 끌어들이고 다수를 점령하는 동시에, 오히려 참가자격이 있는 단체의 대 표자는 접대위원과 순사, 미군헌병의 탄압으로 입장하지 못했으며, ③ 의사진 행이 민주주의적 동포애적 입장에서 의견을 발표할 기회를 주지 않을 뿐 아 니라 우익단체의 의사만을 내세우고 그들의 주장만으로 전체문제를 해결하였 고, ④ 4대 연합국에 보낸다는 결의서도 전체 의사라 볼 수 없는 문제를 취급 해 연합국의 그릇되지 않은 처치에 대해서까지 질문 혹은 논란하는 성질의 문구를 3천만 민족의 전언이라고 보냈다며52) 독촉중협을 비판했다.

조공은 특히 이승만이 기초한 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을 문제 삼았다. 결

51) 정병준, 「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역 사와 현실≫ 19, 1996, 155쪽.

52) ≪每日新報≫ 1945년 11월 4일자.

(24)

의문에서 이승만은 맥아더‧하지‧아놀드 등이 38선 분할을 원하지 않는 반면 미국 국무부의 정책 입안자들이 이를 주도했으며, 국무부의 정책이 친일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의문은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국제 주의적 대외정책 입안자들을 겨냥한 것인 동시에 그 대안으로 미군정 당국이 제출한, 독촉중협을 통해 중경임시정부를 활용하려는 방안을 피력한 것이었 다.53)

독촉중협 안에서 인민공화국 확대, 강화를 기도하고자 했던 조공의 입장에 서 이러한 문제제기는 당연했다. 박헌영의 문제제기에 따라 이승만‧여운형‧안 재홍‧이갑성‧박헌영 등 5인이 결의문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결의 문은 수속도 밟지 않고 문구수정에 그친 채 그것도 그대로 미국에만 발송되 었다. 조공은 박헌영이 11월 5일에 안재홍, 이갑성과 돈암장에서 만나 여운형 이 오기를 기다리다 여운형이 불참한 3인 회합에서 결의문의 내용을 수정해 야 한다는 박헌영의 주장대로 메시지 형식으로 다시 작성한 결의문을 보내기 로 했음에도 불구하고54) 약속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전체가 찬동하여 가결된 것을 뒤로 돌아서서 반대하는 것은 여럿을 위하여 옳지 않은 일이다. 반대가 아니라면 박헌영은 수정위원이 니까 당당히 수정위원회에 와서 좋은 의견을 말해야 될 줄 믿는다. 공산당의 제의는 신중히 듣고 있다”55)면서 조공의 비판을 일축했다. 결국 박헌영이 작 성한 새 결의안은 이승만의 분노를 일으키며 그의 결의안과 같이 배포되었고 독촉중협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커져가는 분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 었다. 박헌영은 12월 초 독촉중협과는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56)

이승만을 내세워 인민공화국을 해산시키고 독촉중협에 조공을 끌어들이려 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군정은 직접 조공과의 접촉에 나섰다. 1945년

53) ≪每日新報≫ 1945년 11월 7일자.

54)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獨立中協決議文朝鮮共産黨態度」(1945.

11.11), ≪解放日報≫ 1945년 11월 15일자.

55) ≪每日新報≫ 1945년 11월 6일자.

56) U.S. Arm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II), p.27.

(25)

12월 10일 군정장관 아놀드는 박헌영을 초대해 당면 문제와 군정 전반에 관 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놀드는 박헌영에게 미군정청의 통치기구를 표시한 도 표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에는 군정 산하의 기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과 일 본인들의 비율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처음에 약 1,000명의 일본인들이 근 무했지만 한국인들로 교체하여 현재는 일본인들의 수가 89명으로 축소되었으 며, 현재 군정청 기관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외에 일본인 전문가들- 기사, 기능 공 약 700여 명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놀드는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법무부가 가장 잘 조직된 부서로서 변호사 가 많으며 교육부의 중책은 김성수가 맡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 성수가 대지주로서 현재 극우 민족주의자로 처신하고 있으며 이전에 친일파 였던 그가 지금 친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면서 아놀드와는 판이한 시각을 드러냈다. 아놀드는 국방부의 중책도 한국인이 맡게 될 것이며 후보자를 물색 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는 또 박헌영에게 “우리는 군정청 사업에 합류시킬 한국인들을 아직 선발하지 못했다. 당신이 우리보다 사람들에 대해 더 잘 알 고 있을 터이니 직원들을 선발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며 미군정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아놀드는 박헌영에게 미군정이 구상하는 ‘국가평의회’에 참여할 것을 강력 하게 종용했다. 그는 백지에 ‘국가평의회-군정청 각 기관들-각부’라고 표기된 피라미드형의 조직도를 그려 보이며 이 프로그램이 미군 상륙과 동시에 준비 된 것임을 강조했다.

이 피라미드는 군정청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기구는 우리가 한국에 진주 한 이래 3-4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구성된 것이다. 도표의 맨 윗부분은 최고 지도 기관인 국가평의회이다. 이 평의회는 영향력 있는 각 정당의 대표자들로 구성될 것이며 이러한 상황이 제 정당의 통일단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조직될 국가평의 회는 일체의 행정기구들을 지도하게 될 것이며 간부들을 선발하고 배치하는 일을 맡게 될 것이다. 만일 1개월 내에 제 정당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평의 회는 타국의 후견에 맡겨질 것이다.

(26)

그는 런던에서 외무장관 회의의 의사가 개시되었고 이 회의에서 한국문제 도 논의될 것인데, 여기서 한국에서 제 정당‧사회단체의 연합체가 조직된 사 실이 승인되지 못한다면 국가평의회를 다른 나라의 후견에 맡기는 길 이외에 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독립을 원한다면 연합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박헌영과 조공이 머뭇거리지 말고 하루속히 독촉중협에 참여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박헌영은 조공이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다만 민족통일전선은 친일분자들을 배제하고 모든 진보적인 민주주 의 세력들의 대동단결에 기초하여 결성되어야 하며 좌‧우가 타협하여 세력균 형을 보장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익반대파가 이 원 칙에 동의하지 않고 우세를 도모하려 하기 때문에 통일전선이 아직 결성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헌영은 아놀드가 제안한 국가평의회가 군정청의 하부기구로 군정청의 지 시에 복종하는 것인지, 혹은 군정청 외부에 존재하면서 향후 조선의 민족정부 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아놀드는 그것이 군정청 내부에 있게 되건 외부에 있게 되건 연합체를 신속하게 결성하는 것이 중요 하며 연합체의 능력이 인정되면 군정청의 권한은 이 연합체에 위임될 것이라 고 하여 박헌영을 고무시켰다. 그는 국가평의회의 당면 임무로 ① 해외 귀환 한국인들에 대한 원조, ② 헌법제정, ③ 식량, ④ 재정, ⑤ 인플레 대책, ⑥ 일 본인 소유토지의 몰수, ⑦ 농업정책, ⑧ 미국과 의 무역관계 수립, ⑨ 미국으 로부터의 차관 도입, ⑩ 한국민족군대의 창설, ⑪ 남북통일, ⑫ 운수 및 체신,

⑬ 인사, ⑭ 국민교육의 이념적 방향설정 문제57) 등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사 실상 미군정을 대신할 새 정부의 출범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놀드의 제안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앞둔 미군정의 ‘절박한’ 호소였지만 조공은 신탁통치 파동이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조공은 독촉 중협에서 인민공화국을 확대, 강화해 이를 장차 조선에 수립될 인민정부의 초

57)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총비서 박헌영, 「박헌영 동지와 아놀드의 회담」(1945.

12.11), 뺷이정박헌영전집뺸(2), 110-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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