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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그 사실의 성격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다. 그리고 역사가의 의미부여는 역사의 발전방향과 맞을 때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85) 위와 같음.

김성수에 대한 평가는 한국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극심한 시각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김성수에 대한 대부분의 긍정적인 시각은 김 성수와 특수관계에 있는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처음부터 김 성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가로막는 한계로 작용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일각에서 주도되던 김성수연구와 평가를 비판적으로 되짚어 보고 냉정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실을 바탕으로 김성수의 친일 의식 형성과 전개를 기술하였다. 김성수는 일제의 논리에 경도된 와세다 대학의 초대 총장인 오쿠마를 모델로 교육사업에 매진하였다. 하지 만 그의 사업자금이 소작농 착취와 일제 협력으로 축적된 것이었다 는 점에서 결코 그를 민족자본가라 볼 수 없다.

김성수가 본격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시점은 1935년 소도회 이사로 참 여하였을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김성수의 행적은 일제의 침략적 황민화 정책과 긴밀히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

누구나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은 인물의 선택은 그 민족의 미래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 다. 김성수는 항일전쟁기 국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 한 평가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가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 서 김성수와 가장 가까웠던 송진우의 행적은 김성수를 평가할 때 하나의 시금석이 된다. 송진우는 김성수와 달리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지 만, 특히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된 이후 시골로 숨어들어 일제 와 협력을 거부하였다.86)

86) 송진우는 1940년 1월 1일 이후 매일신보의 친일 관련 기사(매일신보 1945년 1월 6일자, 「運動推進委員」와 1945년 6월 9일자, 「總力戰先驅思想戰士 必勝陣 昨日, 言論報國會 感激發會式-役員)에서 두 번 나온다. 그런데 전자의 기사에서 여운형과, 후자의 기사에서 안재홍ㆍ홍명희ㆍ여운형과 함 께 나온다. 안재홍ㆍ홍명희ㆍ여운형의 경력으로 볼 때 송진우가 친일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경우 송진우의 이름을 일제가 도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면 김성수의 이름은 1936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매일신보 에 무려 46여 회나 등장하고 있다. 이 중에서 김성수의 직접 쓴 글로 보인 것은 3편이 보이고 인터뷰와 언급을 보도한 기사는 8회 정도 보인다.

반면에 김성수의 사회활동 물적 기반을 마련한 그의 동생 김연수 는 김성수 이상으로 일제와 밀착된 친일행위를 하였다.87) 물론 동생 김연수의 친일행위88)는 김성수의 활동과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김성수에 대한 미화 작업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김성수의 존재는 단순히 역사청산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김성수와 관련하여 지적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친일파로 죽은 김성수를 살려내어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기득권 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세력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87) 이에 대해 반민특위는 다음과 같이 김연수의 죄상을 기록하였다. “피의자 김 연수는 단기 4266년(필자: 1933)도에 관선 도평의원 임명을 계기로 단기 4272 (필자: 1939)경 만주국 명예총령사에 임명되고 단기 4272년 중추원 칙임참 의에 임명되었으며 단기 4274년경 국민총력맹 후생부장에 임명된 자임. 또 학병권유연설, 국방헌금 등 일본 침략전에 협조한 것은 부인 못할 사실로 반 민법 제4조 2항, 3항에 해당하는 자이다(정운현 편역, 김연수(金䄵洙)」, 󰡔풀 어서 본 반인특위 재판기록󰡕Ⅰ, 선인, 2009, 109-110쪽).

88) 수당 김연수 선생 전기편찬위원회는 “수은(필자: 김연수의 호)의 온 생애를 통한 경제활동의 목표에는 언제나 민족의 자존과 민족경제의 자립이 있었 다.”라고 평가하였다(수당 김연수 선생 전기편찬위원회, 「수당을 다시 생각 하는 까닭」,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 : 수당 김연수 선생 일대기󰡕 , 주식회 사 삼양사, 1996, 7쪽). 이처럼 김연수에 대한 미화 작업수도 지속적으로 진 행되었다. 김연수의 친일행위는 윤해동,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친일파 99인󰡕, 19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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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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