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김성수의 친일의식 형성과 전개 (신운용)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김성수의 친일의식 형성과 전개 (신운용)"

Copied!
34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신운용*46)

Ⅰ. 머리말

Ⅱ. 친일의식의 형성

Ⅲ. 19335년 이전 친일의식의 전개

Ⅳ. 1935년 이후 친일행위와 그 평가

Ⅴ. 맺음말

국문요약

이 글은 김성수의 친일의식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면서 그러한 의식 이 역사현실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 었다. 김성수는 줄포에서 일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일본에 유학하였 . 제국주의 논리에 경도된 와세다대학의 초대 총장인 오쿠마 시게 노부(大隈重信)를 모델로 교육사업에 매진하던 그는 경성방직 동아 일보 보성전문학교를 창립하고 운영하였다. 그의 사업자금이 소작농 에 대한 편취와 일제에 대한 협력으로 축적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결 코 그를 민족자본가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성수의

*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

(2)

역사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김성수가 본격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시점은 1935년 소도회 이사로 참여하였을 무렵부터이다. 이때부터 김성수는 일제의 침략적 황민화 정책과 긴밀히 협조하며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은 인물의 선택은 그 민족의 미래와 직결된다. 이 점에서 김성수의 판단은 한국 근대사의 어두운 면을 장식하였다고 평 가할 수 있다. 그는 항일전쟁기 국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 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가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김성수와 가장 가까웠던 송진우의 행적은 김성수를 평 가할 때 하나의 시금석이 된다.

그런데 김성수에 대한 미화 작업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 도 계속될 전망이다. 김성수의 존재는 단순히 역사청산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김성수와 관련하여 지적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 는 친일파로 죽은 김성수를 살려내어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려는 세력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꿈틀거 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어: 김성수, 김성수의 친일행위, 김연수, 송진우, 동아일보, 반민특 위,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 머리말

우리는 민족운동가들의 헌신과 투쟁으로 1945년 일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된 나라의 앞날에 미ㆍ소에 의한 분단과 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 지 못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의 실현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와 일정한 협력을 통하여 군림하던 친일파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던 민들의 희망을 이승만은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전위세력으로 활용하였다. 그에 따라 친일의 상징이었던 동아일보와 조 선일보 세력은 그대로 해방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현재도 이들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친일세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이 글에서 다룰 김성수이 다. 그에 대한 일련의 미화 작업이 그동안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진행 되었다.1)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仁村 金性洙傳󰡕이다. 이 책은 김 성수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면서 시대적 배경도 아울러 기술하 고 있다는 면에서는 일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김성수의 모든 행위가 마치 민족을 위한 행위로 포장되고 있는 현실은 역사 왜곡으 로밖에 볼 수 없다.2) 심지어는 김성수를 ‘문화민족주의자’로 평가하는

1) 이현희, 󰡔대한민국부통령 인촌 김성수󰡕, 나남, 2009; 김중순 저ㆍ유석춘 역, 󰡔문 화민족의자 金性洙󰡕, 일조각, 1998; 동아일보사, 󰡔評傳 仁村金性洙󰡕, 삼화인쇄 주식회사, 1991; 동아일보사, 󰡔仁村 金性洙愛族思想과 그 實踐󰡕, 1982. 특히

󰡔仁村 金性洙의 愛族思想과 그 實踐󰡕에 친일경력이 있는 주요한ㆍ유진오ㆍ김 활란이 김성수를 찬양하는 글을 실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 명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친일파 미화 작업의 연장선에서 동아일보는 󰡔설산 장 덕수󰡕(이경남 저, 1981)를 발간하였다.

2) 이현희는 “최근 과거사를 다루는 한 국기기관에서는 인촌의 일제 강점 하의 행적을 문제 삼아 친일(親日) 혐의를 두고 그를 민족반역자로 몰고 갔다. 그 러나 그들 기관이 지적한 친일문제는 사실상 문제를 진실 위에서 보지 아니 하고 일제하의 언론이나 방송 등에 알려진 표면적으로 거명된 단순기록이나 잘못된 소문, 왜곡, 비방 등에 의존하여 표면적 사실만을 본 것으로, 착실한 검토 비판도 없이 인촌을 마녀사냥식으로 친일 민족반역자로 매도 혹평함은 언어도단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누가 그에게 자신 있게 정의(正義)의 돌을 던질 것인가? 이에 그의 친일문제를 철저히 사실에 입각해 개조식으로 해부 하고 해명하려는 시도를 이 책에서 의도하기로 하였다.”라는 김성수 옹호론 을 전개하였다(이현희, 위의 책, 28쪽). 물론 그의 책은 󰡔인촌김성수전󰡕에서 한발도 나가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동아일보의 논리의 연장선에서 “친일하 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식으로 김성수의 친일문제를 덮으려는 의도를 넘어 민족주의자로 만들려는 일련의 작업을 하였다.

(4)

이도 등장하였다.3)

그러나 민족주의를 “그 민족을 살리는 데 목적을 둔 모든 정치행 위.”라고 규정한다면, 김성수는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한민족 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을 민족주의자로 평할 수는 없 기 때문이다.

김성수가 이루어낸 모든 일이 일제의 한국지배정책에 반하여 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김성수에게 민족의 식이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김상훈(金尙勳)은 󰡔문화일보󰡕에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친일ㆍ반민족행위진상규명 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성수를 친일파로 확정하였다.4) 이러한 작업은 친일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른 사회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해방공간에서 친일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죄값’을 갚는 길임이 분명하다. 친일문제가 그 때 정리되었다면 한국 은 더 큰 발전을 이룩하였을 것이다.

하여튼 김성수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역사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검토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역사발전의 방향을 견 지하면서 김성수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성 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평을 열어놓은 일련의 연구성과를 주 목할 필요가 있다.5)

3) 김중순 저ㆍ유석춘 역, 위의 책, 3∼5쪽.

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담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발간󰡕, 2009, 70쪽; 민족문제연구소, 김성 」, 󰡔친일인명사전󰡕, 2010, 425∼427쪽.

5)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신준영, 「김성수의 친일행각」, 󰡔 월간 말󰡕 53, 1990; Cart J. 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settle and London, 1991(가터 j. 에커트 지음ㆍ주익종 옮김, 󰡔제국의 후 예󰡕, 푸른역사, 2008; 반민족문제연구소, 「김성수」,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5)

그러한 김성수의 친일의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는지 하는 문제에 천착한 연구성과는 없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각 시대단계별 로 김성수의 친일인식 형성의 배경을 주목하면서 그 의식이 어떻게 역사현실 속에서 전개되었는지 하는 것을 살펴보는 데 본고의 목적 을 두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김성수의 본격적인 친일의식이 줄포에서 의 경험과 일본 유학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 겠다. 이를 바탕으로 이러한 친일의식이 친일단체 소도회에 이사로 입회한 1935년을 전후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1935년 이전의 김성수가문이 제공한 경성방직ㆍ동아일보 창 립과 보성전문학교 인수 자금의 성격이 규명될 것이고 이는 김성수 의 경제 언론 교육활동의 의미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어서 1935년 이후 김성수의 친일행위를 상세하게 밝히면서 김성수 의 친일행위를 해방공간에서 이루어진 김상훈의 구체적인 비판과 평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하여 그의 친일인식 형성과정을 추적하면서 “김성수가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라는 주장의 허구성이 드러날 것이다. 필자의 이러 한 작업이 착종된 김성수에 대한 평가6)를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청년사, 1994).

6) 예를 들면 ‘인촌로’를 들 수 있다. 1992년에 고려대 병원 앞길을 ‘고대공대 뒷길’

에서 인촌로에 개명하였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새주소 사업을 하면서 개운사길 이 인촌길로 바뀌자 불교계에서 반발하였다. 이어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등으로 구성된 항일운동가단체협의회가 김성수가 고려대 학교의 설립자라는 명분을 앞세워 인촌로의 갈래 도로를 인촌길로 명명한 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연합뉴스󰡕 2011년 5월 23일자(인터넷판), 「개운사길인촌길 명칭 변경 논란」; 󰡔경향신문󰡕 2011년 5월 24일자, 「개운사길→인촌로 변경’에 개운사 반발」).

그런데 인촌길로 바꾼 근거로 정부는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인 김성수의 호

‘인촌’을 인용하여 부여하였다고 한다(http://www.juso.go.kr/openIndexPage.do).

하지만 인촌김성수전에도 ‘보성전문학교의 인수’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당 시 심한 경영난에 처해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그에게 맡기려고 했던

(6)

바라마지 않는다.

. 친일의식의 형성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仁村里) 에서 김경중(金暻中)과 고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나 세 살 때 큰 아버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1934)는 1906년 전라남도 창평(昌平)에 한문 영어 일어 산술 등을 가르치는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특히 고정주는 월동(月洞) 에 영학숙(英學塾)을 열어 그의 둘째 아들 고광준(高光駿, 25세)과 김성 수(16세)를 위해 서울에서 영어선생을 초청하였다.7) 이 때 김성수는 송 진우(宋鎭禹 17살, 1890∼1945)를 만나게 된다.8) 송진우는 일본유학 을 함께하였고 김성수의 중앙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동아일보 의 사장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김성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 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김성수의 현실인식과 관련하여 송진우는 ‘비분강개파’

이었지만, 김성수는 ‘냉정한 지성파’라고 평가되고 있다.9) 이는 이후 송

것이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당시의 거물 정객인 이용익이 설립한 것으 로 조선인이 세운 사학으로는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라고 하여(인촌 김성수전 338쪽)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더욱이 고려대학교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약사」에서도 “설립자는 이용익이 고 김성수는 김기중 김경중이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재산을 기부하여 보성 전문학교를 인수케 하였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문제는 마산에서 2008년 ‘장지연로’를 만들었다가 지역사회의 반발로 철회된 사실에 비추어보더라도 항일운동가단체협의회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9년과 2005년에 고대생들이 김성수 동상의 철거를 시도하였다는 사실도 인촌로를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이다. 7) 인촌기념회, 위의 책, 49쪽.

8) 위의 책, 56쪽.

(7)

진우와 김성수의 행적에 큰 차이를 보인 원인을 설명할 때 대단히 중요 한 대목이다. 즉 송진우가 일제에 저항의식을 깊이 품고 있던 반면 김성 수는 저항보다 일제에 순종적인 삶을 살았던 이유를 추적할 수 있는 단 서가 되기 때문이다.

양반관료와 지주계급의 착취, 그리고 일제의 침략이라는 이중고 속에 서 일어난 농민봉기는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김기중과 김경중은 군 수를 지냈다.10) 군수라는 경력은 김기중과 김경중의 치재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대금업을 하던12) 김성 수가문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은 결코 좋았을 리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점에서 군경의 보호를 받기 위해 1907년 도망치듯 인촌리를 떠나 줄포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3) 이는 김성수가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대목 이다.14)

그런데 여기에서 김성수가문의 성격과 관련하여 당시 줄포의 지리적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5) 줄포는 일본 상인들이 활개를 치던 곳으 로 전라도의 쌀을 일본으로 약탈해가는 통로였다. 김성수가문도 줄포의

9) 위의 책, 57쪽.

10) 에커트는 김성수의 할아버지 김요섭과 양아버지 김기중ㆍ친아버지 김경중이 벼 슬을 매관매직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고 있다(가터 j. 에커트, 위의 책, 57∼58쪽).

11) 김용섭,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일조각, 1992, 179쪽.

12) 인촌기념회, 46쪽.

13) 김용섭, 위의 논문, 177쪽.

14) 󰡔인촌김성수전󰡕(58∼59쪽)에서는 김성수가문이 향리를 떠나 줄포로 이전한 이유 를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화적떼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화적떼는

‘의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김성수가문은 군수 등의 관리출신이었다.

동학군이 전국을 휩쓸 무렵의 관리들은 대체로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대해 부정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김기중ㆍ김경중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줄포로의 이전은 김성수가문이 인촌리에서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15) 자세한 내용은 김용섭, 위의 논문, 180∼185쪽 참조.

(8)

일본인 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축적된 자금으로 다시 토지를 사들여 1920년대에는 2만 석 이상의 대지주가 되었다. 물론 이는 일제의 협력과 보호로 가능했던 것이다.16) 이러한 점에서 김성수가문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고 또한 이후에 전개되는 김성수가문의 축재와 이를 통한 국내 산 교육언론장악의 의미도 추론할 수 있다.

일제의 보호에 있던 줄포에서의 재산 축적과 줄포에 출몰하는 의병에 대한 일제 헌병대의 진압 상황17)은 김성수의 일본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는 일제를 자신의 가문을 보호해주는 존재로 여겨 일제에 대한 분노보다 동경을 더욱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일 본인과 가깝게 지낸 박모(朴某)라고 하는 사람이 일본에 대한 환상을 심 어주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18)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 청연암(靑蓮庵)에서 송진우ㆍ백관수 (白寬洙, 1889∼1950)와 함께 공부하였고 목포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서도 영어 등을 배웠다. 또한 대한협회에서 후포(後浦)로 파견한 금호학 교(錦湖學校) 물리교사 한복리(韓承履)에게도 영어를 배웠으며,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임걱정󰡕으로 유명한 홍명희(洪命熹)19)에게서 일본의 발전 상을 들었다. 특히 홍명희는 김성수의 1908년 10월 일본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20)

결국 그의 도일은 송진우와는 달리21) 줄포에서 심어진 일본에 대한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항일의 수단이 아니라 일본

16) 김용섭, 위의 논문, 183∼185쪽.

17)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7일자, 「고부의병」; 김용섭, 위의 논문, 177∼178쪽;

김중순 저유석춘 역, 위의 책, 38쪽.

18) 인촌기념회, 위의 책, 59∼60쪽.

19) 홍명희(洪命熹)에 대하여 다음의 글이 참고 된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9; 장세윤, 「벽초 홍명희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한국독 립운동사연구󰡕 1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20) 인촌기념회, 위의 책, 57쪽.

21)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古下宋鎭禹先生傳󰡕, 동아일보출판국, 1965, 32쪽.

(9)

에 대한 동경으로 일본행을 결행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그의 일본 에서의 행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목이다. 이 점에서 일 제의 대한제국 병탄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도쿄 유학생들의 반 일투쟁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부산에서 출발하여 시모노세끼(下關)를 거쳐 도쿄(東京) 홍명희의 집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홍명희의 안 내로 도쿄를 돌아본 김성수는 일본의 모습에 압도되었다.22) 이 때 김성 수는 일본을 타도의 대상이 아닌 순응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던 것 으로 판단된다.

김성수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18세가 되던 해인 1908년 에 세이소꾸(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1909년 4월 그는 송진우 와 함께 긴죠(錦城)중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대학입학을 준비하였다. 그 리하여 1910년 4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상황 속에서 송진우는 울분을 못 이겨 분노하여 결국 귀국하고 말았다. 또한 홍명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23) 이에 반하여 김성수는 나라가 없 어지는 비극에 직면하고서도 어떠한 행동으로도 나서지 않고 끝까지 학 업에만 충실하였다. 정치학에 관심이 깊었던 송진우와 달리 그는 경제학 에 집중하였다. 이는 일제의 한국침탈이라는 민족의 현실보다는 자신만 의 미래설계에 치중했던 그의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실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그는 다음에서 보 는 바와 같이 1911년 가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교로 진학하여 대학의 낭만을 즐기는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때는 나는 한창 붉은 피에 끌는 청춘이엇다. 早大 本科에 드러간 것이 21 살때요, 졸업한 것이 23살때이엇스니 내사지에 흐르는 放奔한 정열과 내 五官 22) 인촌기념회, 위의 책, 69쪽.

23) 장세윤, 위의 논문, 참조.

(10)

을 싸고도는 로-맨틱한 정조는 막으내야 막을 수 업섯겟지 안켓느냐. 아마 이 뒤로도 早稻田大學時代는 나의 청춘의 회상과 아울너 영원히 내 가슴에서 사라 지지 안을 것이러라.24)

위에서 볼 수 있는 김성수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 며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하던 국내외 민족운동가들의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는 그가 제국주의로 무장한 와세다의 교수들25) 논리에 빠져들어 민족현실보다는 일본을 중심으로 사고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증거이다.26) 특히 제8ㆍ17대 일본 총리 2번, 외상을 5번 이나 역임하는 등 대외침략의 선봉장에 섰던 와세다대학의 초대 총장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27)에 대해 그는

우리가 학교다닐 때에도 설비와 건물이 빈약하기 그지업섯다. 유지비로는 학 생들에게서 바더드리는 월사금 이외에 별로 업섯다. 듯건대 처음에는 대학을 운

24) 김성수, 「大學時代學友」, 󰡔삼천리󰡕 6-5, 1934.

25) 김성수는 다음과 같이 일본인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大學時代에 내가 가장 흥미와 열심을 기우린 學科經濟科엇다. 그 때의 교수는 浮田和民氏든가 殖民政策은 지금 拓務大臣으로 잇는 永井柳太郞氏가 가르첫고 高田早苗, 塩澤 昌貞, 田中穂積등 諸博士가 政治史와 其他 各科를 가르첫다”(김성수, 위의 글) 그런데 이들은 대체로 大隈重信와 정치노선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적극 지지한 국주의자들로 파악된다. 김성수는 이들의 논리에 저항하거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후 그의 행보와 관련하여 살펴볼 때 대체로 이들의 주장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26) 에커드, 위의 책, 72∼73쪽. 이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듯이 친일경력이 있는 인 물을 꺼리지 않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崔泰旭군은 지금 滿洲가서 滿蒙日 報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慶南 密陽사람으로 기개도 잇고 經倫拘負도 잇는 분 으로 졸업한 후 20년 동안을 서로 音信을 막하여 본 적이 업섯다. 일전에 그는 서울 올너와서 내 집을 차저주엇다. 우리는 녯날 學窓時代와 갓치 서로 숭허물 업는 舊情을 이약이하고 갈나젓다. 그리고 金淵穆군으로 말하면 平安道 平原郡 永柔사람으로 지금 昭和水利組合副委員長인지 副組合長인지 한 지위에 잇스 면서, 實業界에 활약하고 잇다”(위와 같음).

27) 한용진, 메이지기(明治期)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한국교육론」, 󰡔교육학 연구󰡕 29, 2006, 참조.

(11)

전식히기 위하야 大隈總長이 매년 1,500원을 보조하엿다는데 이 돈을 가지고 학교를 유지하여 나가든 당시 당로자의 고심은 내가 지금 교육사업에 손을 다 어 보면서부터 더욱 절실히 늦기는 바이다.

早稻田大學은 그동안 500만원의 돈을 밧갓헤서 기부로 거더드리어 금일의 大를 이루어 노앗다. 이 교문에서 뒷날 日本憲政을 운전하든 수백의 유명한 정 치가와 또 사회 각 방면의 인재를 배출식히여 日本의 문명을 건설식힌 그 국가 적 공로를 생각하면 오직 경복할 뿐이다.

大隈伯은 모든 政治的 功勞가 埋沒되는 날이 온다할지라도 早稻田大學올 통한 교육사업가로서의 공적은 萬古不杍하리라.28)

라고 평가하였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육사업과 관련된 그의 의식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오쿠마를 한국침략에 앞장선 침략자로 인식하기보다 본받고 싶고 존 경해야 할 인물로 받들었던 것이다. 특히나 그가 오쿠마를 “그 국가 적 공로를 생각하면 오직 경복할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던 사실에서 그에게 국가란 바로 일본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시기(18세∼24세) 를 제국주의를 선(善)으로 강조하는 일본의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은 그가 일제의 침략논리에 경도될 수밖 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9)

28) 위와 같음.

29) 에커트, 위의 책, 70∼76쪽. 김성수는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와세다 출신 장덕수 (張德秀)ㆍ현상윤(玄相允)ㆍ최두선(崔斗善)ㆍ양원모(梁源模), 동경제국대학교 출신 박용희(朴容喜)ㆍ김준연(金俊淵), 구라마에(藏前)고공(高工) 출신 이강현 (李康賢) 등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였다고 한다(인촌기념회, 위의 책, 79쪽). 그런데 여기에서 김성수와 함께한 이들이 대체로 항일투쟁에 소극적 인 인물들이거나 이후 친일경력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인물이라는 데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김성수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 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성수는 일제의 논리에 경도되어 독립투쟁보다 는 부일 성향을 보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이후 중앙학교ㆍ동아 일보경성방직한민당의 핵심으로 활동하며 김성수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들이다. 특히 장덕수와 현상윤은 뚜렷한 친일 행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12)

. 19335년 이전 친일의식의 전개

오쿠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24세가 되던 해인 1914년 와세다대 를 졸업하고 같은 해 7월 귀국하여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백산학 교라는 학교의 설립을 총독부와 교섭하였으나 실패하고 친부와 양부의 도움으로 중앙학교(中央學校)를 1915년 4월 27일 인수하였다. 본과 3년, 교원양성을 위한 특과 1년 6개월인 이 학교는 유근(柳瑾) 교장, 안재홍 (安在鴻) 학감, 김성수 평교사(1917년 3월 교장 취임, 1918년 3월 사임) 로 시작되었다.30)

그런데 여기에서 중앙학교의 인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중앙학교 성격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학교 승계를 인가하지 않던 총독부가 제국주의 성향의 와세다대학의 은사이 자 당시 와세다대학교 이사와 와세다대학교의 제4대 총장(1931∼

1944년)을 역임한 타나카 보즈미(田中穂積)의 간여로 학교승계를 허 가받았다는 것이다.31)

전자에 대해 살펴보면, 기호학회의 후신인 중앙학회가 중앙학교를 운 영하였다. 김성수는 학교와 학회의 관계를 정리하는 조건으로 인수하였 . 물론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중앙학교는 더 유지되기 어려운 상태였지 만 학회와의 관계단절은 중앙학교의 역사성에 흠집을 내는 것과 마 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이는 중앙학교가 이제 더 이상 민족교육에 치 중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후자의 경우, 중앙학원 운영권 인계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던 총독부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타나카가 김성수에 대해 일정한 보장을 하

(민족문제연구소, 「장덕수」ㆍ「현상윤」, 󰡔친일인명사전󰡕 3, 친일인명사전편찬 위원회, 2009, 318∼322쪽ㆍ917∼919쪽).

30) 중앙백년사편찬위원회, 󰡔중앙백년사󰡕, 중앙교우회, 2009, 174쪽.

31) 인촌기념회, 위의 책, 105쪽.

(13)

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김성수가 반일성향을 갖 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충성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을 보증했 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것이 그 어떤 설명보다도 타당하다.

김성수는 송진우와는 달리,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 는 첫째, 105인사건으로 안창호의 대성학교가 폐교되는 전례에 비추어 중앙학교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둘째 송진우ㆍ현상윤 등이 그를 보호하 였기 때문이라고 󰡔인촌 김성수전󰡕에 설명되고 있다.32)

그러나 국내에서 30여 명의 중앙학교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일 제에 연행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심지어 3.1운동 당일 경성을 떠나 줄 포로 내려가 있는 등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립투쟁보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시작하는 등 경제활동에 열을 올 렸다.33)

3.1운동으로 압력을 받은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사실 일제의 지배술책 결과로 태어났다. 동아일 보사는 1920년 4월 1일에 첫 호를 발행하고 김성수가 1920년 7월 사장 으로 취임하였다. 동아일보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한국인에게 심어 넣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다.

탄생 자체가 민족의식의 확장과 독립추구라는 시대적 당면과제와는 거 리가 멀었던 것이다.34)

32) 위의 책, 135쪽.

33) 경성방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 된다. 특히 에커트는 경성방직을 민족기 업으로 보지 않고 일제의 협력자로 보았다(가터 J. 에커트 지음ㆍ주익종 옮김, 위의 책). 반면 주익종은 에커트의 견해를 반박하여 경성방직을 옹호하였다(주익 종, 󰡔대군의 척후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 김연수󰡕, 푸른역사, 2008).

이에 대해 정안기는 에커트와 주익종을 비판하는 중간적 견해를 밝혔다(정 안기, 「식민지기 조선인 자본의 근대성 연구-경성방직(주)과 조선방직(주) 과의 비교 시점에서」, 󰡔지역과 역사󰡕 25, 부경역사연구소, 2009; 「식민지 경 성방직의 경영사적 연구초기경영(1919∼26)을 중심으로」, 󰡔아세아연구󰡕

126,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6).

34) 장신은 1937년을 기점으로 민족지에서 친일지로 성격의 변화를 보였다고 주장하

(14)

또한 1921년 3월 25일 중앙학교는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되어 ‘중앙고 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꿨다.35)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일제를 배경으로 한 김성수의 지배력 확대라는 결과를 가 져왔다는 사실이다. 김성수가 진정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민족교육을 목적 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면 굳이 일제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 고등 보통학교 인가를 요청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일제의 허가를 받 는 데 목을 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총독부를 배경으로 자신 의 입지를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신청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하나는 고등보통학교의 성격문제이다. 중앙학교도 물론 일제의 통제를 받았지만, 고등보통학교보다는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 나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교육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 교육령(1911. 8. 23, 칙령 제229호) 제11조에는 “고등보통학교는 남자에 게 고등보통교육을 하는 바인 즉 상식을 양(養)하여 국민 될 만한 성격 을 도야(陶冶)하며 그 생활에 유용한 지식기능을 수(授)함.”36)이라고 되 어 있다. 따라서 고등보통학교로의 전환은 민족교육의 사실상 불가능함 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경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어와 일본사를 중심으로 한 교육은 일왕에게 충성하는 ‘국민’을 기르겠다 는 의지의 표출이라고 해석된다.37)

고 있다(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ㆍ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70, 역사문제연구소, 2005).

35) 중앙백년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233쪽.

36) 修文書館 編, 「第八編 敎育 朝鮮敎育令」, 󰡔(朝鮮現行)法規大典󰡕, 修文書館, 1911, 1쪽.

37) 일제의 교육정책은 다음의 글들이 참고 된다. 박철희, 「일제강점기 중등교육 을 통해 본 차별과 동화교육」,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삶과 민족운동󰡕, 한일 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2005; 강명숙, 일제시대 제1차 조선교육령 제 정과 학제 개편」, 󰡔韓國敎育史學󰡕 31-1, 한국교육사학회, 2009; 장규식, 제2 차 조선교육령기 사립 중등학교의 정규학교 승격운동과 식민지 근대의 학교 공간」, 󰡔중앙사론󰡕 32, 중앙사학연구소, 2010; 유봉호, 「일제에 대한 민족

(15)

그런데 여기에서 김성수가 경성방직ㆍ동아일보중앙고등보통학교 등 의 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그 의 활동에 대한 성격 규정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자금은 주 로 김경중과 김기중이 제공한 것이다. 김경중은 그 재산을 1918년부터 1924년까지 큰 폭으로 늘려,38) 마침내 1924년에는 2,000정보가 넘는 대 지주가 되었다.

당시 재산을 단기간에 불리는 방법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대한 협력과 소작농에 대한 편취를 전제하지 않고 거의 없었다는 것이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성수가문의 재산증식은 줄포항을 거쳐 군포항에서 일본으로 나가는 쌀 판매와 소작농 착취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는 바이다.39) 결국 김성수의 경성방직ㆍ동아일보의 창설, 중앙학교 인수에 들어간 돈의 성격은 순수한 민족자본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1926년 6.10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중앙고등보통학교 의 학생들이 “조선민족아 우리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이 천만동포야, 죽음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 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최남선 최린.”이라는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학교 학생들이 구속되는 상황 속에서 김성 수는 학생들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더구나 전단의 내용을 강력히 부인하였다.

이와 같은 김성수의 경향성은 1927년 2월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 적 해방의 실현”을 기치로 내세운 신간회가 출범할 때 동아일보 세력의 불참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성수가 1927년 12월 30일 조선을 떠나는 사이토에

적 저항기의 중등교육」, 󰡔한국교육사학󰡕 16,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 1994.

38) 김용섭, 위의 논문, 194쪽.

39) 김용섭, 위의 논문, 193∼227쪽; 가터 j. 에커트, 위의 책, 53∼55쪽.

(16)

게 “각하가 조선에 계실 때 여러 가지 두터운 정을 입고 특히 경성방직 회사에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을 참고 견디지 못하여 깊이 감사 의 인사를 올립니다.”40)라는 친일의식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글을 보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1929년 2월 23일 김성수는 김기중ㆍ김경중의 재정지원을 받아 재 단법인 중앙학원 설립을 하였다. 그런데 중앙학원 정관에 “본 재단법 인은 조선교육령에 의해 조선인에게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목적함”이 라고 되어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교육령(1911. 8. 23 일, 칙령 제229호) 제2조에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 하여 충량(忠良)한 국민을 양성함을 본의로 함.”41)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교육령은 일왕에 충성하는 ‘황민의 양성’

이라는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 김성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조선교육령의 목적 인 황국신민, 즉 일왕의 신민을 길러 내기 위한 학교로 변모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성수의 교육방침은 중앙학원의 민족의 식으로 가득 찬 학생들과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42)

1929년 10월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11월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 이 동맹휴업을 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있는 상황 속에서 김성수는 12월 서울역을 출발하여 1년 8개월 동안 세계일 주 길에 올랐다. 이는 김성수관계 전기류에서 미사여구로 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43) 특히 이광수는 세계 일주에서 돌아온 김성수를 민족주의자

40)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Ⅲ, 2008, 423쪽.

41) 修文書館 編, 위의 책, 1쪽.

42) “본 재단법인은 조선교육령에 의해 조선인에게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목적함. 제 19조에 본재단법인은 제1조의 목적을 달하기 불능하게 되었다고 인정할 시 는 이사전원의 일치결의에 의하여 주무관청의 허가를 득하야 해산함을 득 함”이라고 한 것을 󰡔인촌김성수전󰡕에서는 일본인학생의 입학을 일제가 강 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엉뚱한 변명을 하고 있다(인촌기념회, 위의 책, 313쪽).

(17)

로 둔갑시켰다.44) 이에 대해 유광렬은 이광수의 김성수론의 잘못 9가지 를 지적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7. 金性洙의 모든 활동은 민족애의 衷情에서 나온 것이요 그 박게 아모 이 기적 동기가 업슴을 아마 누구나 承認할 것이다」라 하엿다. 논자의 이 「아마 누구나 승인할 것이다」라는 것을 필자는 그 반대로 「아마 누구나 승인 아니 할 것이다」라고 하려 한다. 모든 생물은 자기의 생명을 표현하려 하고 그 생명의 표현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상 향락이거나 모다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것 은 철학상 생명론의 ABC이다. 그러면 이씨의 말대로 하면 金씨는 무생물이라 는 결론에 도달한다.

라고 하는 등 이광수의 김성수론 허구성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45) 이러한 김성수의 세계 일주를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 유광렬의 비판은 김성수를 민족주의자로 미화하려는 세력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다.

김성수의 이와 같은 행적은 1930∼40년대의 그의 친일행위를 평가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30∼40년대의 국내의 항일민족투 쟁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친일행위과 항일독립투쟁에 대해 부정적 인 시각을 드러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성수의 친일행 위는 일제의 압박이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ㆍ 육ㆍ산업을 장악하려는 권력욕의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32년 3월 26일 김성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의 이름으로 보성전문학 (현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였다.46) 그런데 김성수의 전기류에서는 김성

43) 위의 책, 314쪽.

44) 이광수, 「人物月旦, 金性洙論」 , 󰡔동광󰡕 25, 1931.

45) 유광렬, 「李光洙씨의 「金性洙論」을 駁함」, 󰡔삼천리󰡕 3-10, 1931.

46) 위의 책, 보성학교 재단(천도교)은 학교의 명칭을 고치지 않는 조건으로 김성수 에게 학교를 넘겼다. 이는 보성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천도교 측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1946년 8월 고려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어 지켜지

(18)

수의 보전인수를 마치 민족교육을 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47) 또한 최근까지도 김성수를 민족주의자로 둔갑시키는 작업이 지속되고 있다.48)

그러나 김성수의 친일행위를 보건대, 보성전문학교의 인수를 “민족의 미래를 위한 고심에 찬 선택”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는 와세다대학을 세워 유명해진 오쿠마를 존경했던 그가 교육권력을 얻고 자 했던 욕망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김성수가 민족주의 성향을 띤 보성전문학교의 학생교직원들과 같은 지점을 동시에 응시할 수 없 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학 도병으로 나가서 일제를 위해 죽으라.”라고 선동한 이유의 일단이 설명 될 수 있다.

. 1935년 이후 친일행위와 그 평가

친일성향이 내재되어 있던 김성수가 본격적으로 친일로 전향한 시점 을 밝혀내는 작업은 김성수의 친일궤적을 추적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성수가 소도회(昭道會)의 이사를 맡았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다. 소도회는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 내의 ‘사 상범(독립운동가) 선도’와 ‘사상범의 전향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 .49) 따라서 김성수가 소도회의 이사를 맡았다는 사실은 김성수가 본격 적으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부터 친일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친일 의 길로 들어서는 경향이 있었는데 김성수가 중일전쟁 이전에 이미 친일

지 못했다.

47) 위의 책, 322쪽.

48) 이현희, 위의 책.

49) 소도회에 대해서는 홍성찬, 일제하 사상범보호단체 ‘소도회’의 설립과 활동」,

󰡔동방학지󰡕 135, 2006 참조.

(19)

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일본 유학기에 일본에 압도되어 항일독립 의식을 구체적으로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 다. 오히려 일제와 일정한 협력 속에서 교육사업과 실업을 통하여 자신 의 욕구를 실현하는 데 매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반일성향이 농후한 송진우와 지속적인 마찰을 불러일 으킬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50) 또한 바로 여기에 전시체제 속에 서 김성수가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 은 성립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김성수는 1936년 일장기가 제거된 손기정의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 린 이른바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51)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7일 제4차 정간을 당하였지만, 김성수가 동 아일보 사장을 백관수로 교체하고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52)을 받아 들여 1937년 6월 3일자부터 속간되었다. 이러한 그의 부일 성향은 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하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53) 그는 심지어 주택의 철문 등 약 2백 관을 떼어 마차에 싣고 일해군무관부로 찾아가 ‘적격멸(敵擊滅)’의 탄환에 보태 라고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54)

이와 같은 김성수의 친일행위는 크게 ① 시국강연회 활동, 일제 관 변단체 참여, 학병지원 강요언론활동 등으로 집약된다.

김성수의 대략적인 친일 시국강연회 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37년

50) 이에 대해 이광수는 “金性洙도 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요 宋鎭禹는 그보다 한층 더 我가 세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時로 충돌이 생기고 雷霆霹靂이 일어날 듯한 대충돌이 생긴다고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이광수, 「人物月旦, 金性 洙論」, 󰡔동광󰡕 25, 1931).

51) 인촌 기념회, 위의 책, 388∼389쪽.

52) 이에 대해서는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 동아일보의 선택」, 󰡔역사 비평󰡕 70, 2005, 179∼182쪽 참조.

53) 민족문제연구소, 김성수」, 󰡔친인인명사전󰡕 1, 425쪽.

54)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자, 「普專金校長의 垂範」 .

(20)

7월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일제의 선전활동에 동참하여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과 8월 2일에 하였다.55) 1937 년 9월 춘천ㆍ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열린 학무국 주최의 전조선시국 강연대회에서 시국강연을 한 사실이 있다.56)

이와 같은 그의 친일행위는 두 가지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 는 당시 그가 한국 사람들을 일제의 침략 도구로 전락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이러한 행위를 마다치 않은 이유는 민족독립보다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심이 컸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민족을 어떠한 가치보다 앞세웠다면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일각에서 그를 민족주의자로 규정하 는 것은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김성수의 대략적인 일제의 친일 관변단체 참여와 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57) 같은 해 8 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경성부방면위원,58) 10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의 의례 및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59) 1939년 4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이 가담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60)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 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전환되는데 이 때 이사와 평의원,61) 1941년 8월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

55) 󰡔매일신보󰡕 1937년 8월 6일자, 「全朝鮮巡廻 時局講演會 연사를 각지에 파견키 로 되어 社會敎育課主催」.

56) 󰡔매일신보󰡕 1937년 9월 1일자, 「時局巡廻講演 五十九名演士派遣 九월六일부 터 전선각지에」.

57) 민족문제연구소, 위의 책, 426쪽.

58) 위와 같음.

59) 위와 같음.

60) 위와 같음.

61) 󰡔매일신보󰡕 1941년 11월 27일자, 「銃後奉公强調-磯矢朝鮮軍 參謀講演-國民 總力聯盟 理事事」.

(21)

62),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실행위원,63) 1941년 9월 홍아보국 단과 임전대책협의회가 통합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64)과 10월 이 사ㆍ평의원65), 1941년에 들어와서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66) 조선 사회사업협회 평의원67)으로도 참여하였다.

특히 김성수가 참여한 단체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조선임전보국단의 강령에서 엿볼 수 있다.

, 我等은 皇國臣民으로서 皇道精神을 宣揚하고 思想의 統一을 期한다.

, 我等은 戰時體制에 卽하고 國民生活의 刷新을 期한다.

一, 我等은 勤勞報國의 情神에 基해서 國民皆勞의 實을 거두기를 期한다.

, 我等은 國家優先의 井神에 基해서 國債의 消化貯蓄의 勵行物資의 供出 生産의 擴充에 邁進하기를 期한다.

, 我等은 國防思想의 普及을 圖하는 同時에 一朝有事之秋에 義勇防衛의 實을 거두기를 期한다.68)

김성수는 한국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데 혈안이 된 단체의 이사로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참여가 능동이건 피동이건 ‘반 민족행위’임이 분명하다. 이에 반하여 김성수의 최측근이자 동아일보의

62) 󰡔매일신보󰡕 1941년 8월 25일자, 「全鮮에서 代表參集 昨日, 興亞報國團準備委 員會開催」.

63) 장신, 위의 논문, 283쪽.

64) 민족문제연구소, 위의 책, 426쪽.

65) 󰡔매일신보󰡕 1941년 10월 23일자, 「二千萬總力의 愛國運動 實踐에 歷史的發足 昨日, 빛나는 臨戰報國團結成」 .

66) 민족문제연구소, 위의 책, 426쪽.

67) 위와 같음. 조선사회사업회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 된다. 愼英弘, 「朝鮮社 會事業協會の設立に關する一考察」, 󰡔朴鐘鳴先生還曆記念論文集 朝鮮の曆史 と現狀 󰡕 , 綠蔭書房, 1988.

68) 󰡔매일신보󰡕 1941년 10월 9일자, 「皇道精神宣揚 一大愛國運動展開-臨戰報 國團趣旨書ㆍ綱領ㆍ規約」; 김동환, 「臨戰愛國者大獅子吼!!, 臨戰報國團 結成에 際하여」, 󰡔삼천리󰡕13-11, 1941.

(22)

핵심인사인 송진우는 반민족단체에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김성수가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 러한 친일행위를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 이다.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김성수의 친일 언론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43년 11월 6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 참석하여 학도병 지원율이 저조한 원인은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에 있다 고 강조하였다.69) 김성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하였다.70)

김성수는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先輩附託-文弱痼疾

69) 󰡔매일신보󰡕 1943년 11월 8일자, 「必勝決戰場으로!-學徒出陣座談會-本社主-②千載一遇好機會-學徒보다도 父兄奮起促求」. “지금 연맹사무총장도 말씀한 바와 같이 반도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전 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 그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늘 말하는 바와 같이 너무도 문약에 흐른 폐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분개하실지도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삼백년 동 안 조선 사람은 전장에 참가한 경험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평시에도 조선 사람은 피난소만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 못 할 사실일 것입니다. 피난에는 지리산(智異) 금상산(金剛山)이 좋다느니 귀 에 익도록 들어온 말인데 이것이 제이의 천성으로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퍽 부끄러운 일이나 사실이 사실인 만큼 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존망을 걸고 싸우는 이 때 조선 사람은 냉담하게 이 를 보고 있지나 않은지 내지인 측에서는 분개할지도 모르나 사실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병정이 되면 죽는 것인 줄로 알고 겁을 먹는 자도 있는데 결국 이런 것은 모다 문약한 데서 오는 것이므로 먼저 그 의지를 굳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총독훈시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나는 학생에 게 늘 강제된 것이 아님으로 더 분발해서 나가야 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 러나 결국 결심을 주저하는 학생이 많아서 시골 있는 부모에게 협의하도록 돌려보냈습니다.

또한 결점만 말하는 것 같은데 조선 사람은 두뇌와 체력에 결코 내지인에게 뒤지지 않지만 무용정신에는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점 내지인에게 퍽 뒤떨 어집니다. 이러한 시국 긴박한 때에 있어서는 제이의 천성이 방해가 되어 실로 곤란한 일이 많습니다.”(현대문: 필자).

70) 강덕상, 󰡔朝鮮人學徒出陣󰡕, 岩波書店, 1997, 166∼170쪽.

(23)

버리고 尙武氣風助長하라」에서 “완전하고 위대한 신민(臣民)이 되어 황 도(皇道)를 선양하는 것이 즉 우리들의 최종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라 고 선동하였다.

일제는 전쟁수행력을 증강하기 위해 문과를 폐쇄하고 이과로의 전환 을 강요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안1943년 10월 13일 발표하 였다.71) 이에 대해 김성수는 󰡔매일신보󰡕 1943년 10월 14일자 「萬般準備 다 할 -金普城學校長談」에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안’을 옹호 하였던 것이다.

1943년 10월 20일 육군성령 제48호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 로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는72)등 일제의 폭압정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3년 11월 초순 총독부 경무ㆍ학무국장이 김성수를 비롯한 보성전문의 보직교수를 불러 학도지원병의 저조함을 질타하였 다.73)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법문계대학 전문학교 교장 회의에 참석하 74) 일제의 전시동원시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11월 5일 오후 2시 부터 조선군사령부 에가미(江上)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학 도병 지원을 강요하였다.75)

무엇보다도 김성수의 친일성향은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자 「制 이 軍裝으로 凜凜한 姿態-學徒여 聖戰에 나서라(3)-大義에 죽을 때-皇 됨의 責務는 크다에 잘 드러나 있다.76) 위의 글을 정리해보면

71) 󰡔매일신보󰡕 1943년 10월 26일자, 「一億必勝戰鬪配置 半島學徒蹶起하라 大 學,專門敎長會議 小磯總督訓示要旨」

72) 󰡔매일신보󰡕 1943년 10월 14일자, 「半島敵前敎育態勢確立-理工界敎育擴充-文 科界私專理科界轉換」; 󰡔경성일보󰡕 1943년 10월 14일자, 「敢然, 義務敎育 實施 半島學徒に軍途開く-學園決戰化方策決る」

73) 장신, 위의 논문, 286쪽.

74) 위의 논문, 287쪽; 󰡔매일신보󰡕 1943년 11월 4일자, 「하나도 落伍者업게-法文系 大學, 專門校長會談開催」

75) 󰡔京城日報󰡕 1943年 11月 6日字, 「大東亞の指導者-江上中佐普成專門で獅子吼」.

76) “평소부터 자주 제군에게 말하여 온 나의 생각을 제군의 출진을 앞둔 오늘날

(24)

완전한 인간은 곧 윤리적 인간이고 이는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구현된 . 그 의무는 바로 ‘출전’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교육자의 양심으 로 학생들에게 의무를 다하기 위해 출전하여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인은 황민으로서 3천년동안 의무를 다해왔기 때문에 권리를 주 장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은 30년밖에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일 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본인보다 솔선하여 대동아전 쟁에 나가서 죽어야 한다.

이처럼 그는 철저하게 ‘황민’으로서 살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의무를 다하라」는 데 그칠 것이다.

(중략) 그러면 「義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하는 나의 말에 대하여 제군은 당연히 어떠한 의무인가를 명시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중한 제군을 제군의 부모로부터 훌륭한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 을 받은 자로서 조금도 허위와 양심에 없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중대책임 을 가진 나는 이곳에 대담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나 새로운 여 명을 맞이하여 인류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성전에 대한 제군과 우리 반도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제군은 이 땅에 생을 받아 이때까지 그만한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갖추기까지는 가지가지 은택을 입고 있다. 국가와 가정과 사회의 은택은 모다 이것이다. (중략) 대동아의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 때 우리는 대동아건설의 일분 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의 일분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제군 이 위에 말한 의무를 다할 때에 비로소 제군은 제군이 이 땅에 살아 있을 것이고 제국의 일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빛나는 대우 즉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하여온 이래 제군이 자주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사회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삼천 년이라는 오랫동안 금일의 제국의 광영을 빛내는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니 우리는 겨우 그 동안 삼십년밖에 안 된다. 삼천년 과 삼십년의 차를 가지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중략) 우리 는 단시일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래 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할 없을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 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니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현대문: 필자).

참조

관련 문서

대장암 검진의 목적은 대장암을 조기에 발견하여 대장암 관련 사망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암 검진 방법은 민감도와 특이도가 높으면서도 위험도 혹은 합병증이

TOE에 대한 평가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사람은 자기 마음을 고치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장성순의 <달> (도판 19) 에서 보여지는 화면은 입체파적으로 해체한 구성이 강하 게 나타나고 있다. 1>과 같이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흰색과

본 논문의 목적은 1960년대 한국 간첩영화의 성격변화를 반공병영국가로의 이 행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첩영화는 하나의 독립

한국기업에서 인적자원개발 의 투자가 고령층을 대상으로 실시하여야 하 는 것이 고령화 사회에서 한국 사회 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가 될

전체의 이익이다 즉 사회 공평과 정의가 최운선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공행정. 원가 계산을 해야 하지만 목적은 아직도 사회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민.

본 논문의 목적은 생태여성주의 주제를 보여주는 두 소설이 어떻 게 포스트모던 목가의 형식을 드러내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전통적으 로 목가는 문명의 공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