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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3.1혁명에 대한 연구는 북한과 달리, 주 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민족주의 세력(임시정부)의 관점을 계승 발전시 켰다. 대체로 민족대표 33인의 3.1혁명선언을 중심으로 그 전개과정을 구 체적으로 논증한 연구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51)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 을 중심으로 냉전시기 북한의 연구에 대한 비판이 대한민국의 3.1혁명 연

49) 위의 책, 184-187쪽

50) 위의 책, 188-195쪽. 북한은 『조선전사』 이후 2011년에 『조선통사』를 발간하였다. 한 일합병이라는 용어가 등장 하는 등 몇 가지 서술에 용어의 차이점이 보이지만 그 내용 은 기존의 책들과 대동소이하다.

51) 이에 대해서는 이정은, 「3·1운동 연구 100년 : 인식 재확대를 위하여」, 유관순 연구 20, 백석대학교 유관순 연구소, 2015 참조.

구의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52) 특히 동아일보에서 발간한 『三

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강만길의 그것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기 때 문이다. 강만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3·1운동이 일제 강점기 우리민족운동의 최대성과 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결국 3.1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략) 3.1운동이 적어도 민족운동으로서는 일단 성공했다고 봅니다. (중략) 임시정부라는 체제하에서나마 일 단은 국민주권국가체제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 겠느냐는 것이고 그 점에서 3.1운동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항 일운동 측면에서는 사실 실패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항일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선총독부를 쫓아내 고 이 땅에 독립 국가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 요.58) (중략)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의 우리 민족운동내지 항일 운동을 역량 있게 이끌어나갈 만한 체제가 되지 못했다. 민족운동 전선, 항일운동 전선에 분열을 가져 온 셈입니다.59) (중략) 식민지 통치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문화운동적인 측면, 자치운동적인 측면, 이런 방향으로 일부가 나간 게 아니냐, 그렇게 되니까 일제 는 3.1운동에서 한번 고조되었던 민중적인 측면이 그 이후에는 역 사의 표면에 대단히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 아니냐, 그 표 면에 나선 민중적인 측면의 운동이 결국은 좌익운동으로 연결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에 있어서 지난날 그것을 주동적으로 이끌어온 소위 지도세력과 민중적 측면의 세력 사이 에 분열과 대립이 나타난 것입니다.60) (중략) 3.1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층의 역할이 해방과 더불어 완전히 제거되었느냐 하는 문제

58) 강만길·이만열·진덕규, 「三·一運動의 主役 은 누구인가? <座談>」, 『基督敎思想.

237』, 1978, 109쪽.

59) 위의 글, 110쪽.

60) 위의 글, 112쪽.

도 우리가 한번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3.1운동의 의의를 높 이 평가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지도세력 이 3.1운동 이후 걸었던 길은 전혀 무시한 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만 평가가 된다면 해방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61)

이러한 강만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죈다. ① 민중과 대립한 민족 대표 33인은 3.1혁명 이후 민중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② 3.1혁명의 주체는 민중이었다. ③ 민중은 좌익(공산주 의)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④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을 이끌어나갈 역량이 없는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전선·항일운동 전선에 분열의 원인이었다. 이 는 간단히 말하면, 민족대표 33인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3.1혁명 의 중심인 민중의 활동이 공산주의자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임시정부는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대일 항쟁기와 국권회복 이후 현재까지 북한(공산주의 세력)의 입장과 같은 선 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2)

그런데 강만길의 이러한 주장이 지수걸의 논문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눈과 귀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수걸이 학맥 상으로 연결된 강만길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해가 가 는 대목이다. 기왕에 축적된 3.1혁명의 연구를 “1948년 단정 수립을 합리 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일방적으로 강조한63) 지수걸은 1989년 간행된

『3·1민족해방 운동연구: 한겨레신문 주최 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 심 포지움 논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61) 위의 글, 112-113쪽.

62) 이러한 강만길의 입장은 『고쳐쓴 한국사』(창작과 비평사, 1994,42-46쪽)에서도 확인 된다.

63) 지수걸, 위의 논문, 11쪽.

“이 본문집(『3·1민족해방 운동연구』: 글쓴이)에 수록된 개별 논 문들의 결론을 중심으로 하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검토해 보려 한다. 미리 견해를 밝히자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3·1운 동의 분수령적 의의, 다시 말하자면 이 운동을 계기로 민중이 민족 해방운동의 주도권을 점차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 하려고 한다. 현 단계 민족주의운동의 과제를 염두에 두면서 3·1 운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참된 교훈이 무엇인가를 되 물어 보고자 한다. 3·1운동을 통해서 지게 된 민족해방, 민중해 방의 민족사적 과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3·1운동의 교 훈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64)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북한의 3.1혁명 연구 방법론(계급사관)이 남한 의 연구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1980년 대 권위주의 체제의 반민주주의적인 억압구조와 이에 대한 대항 논리를 북한의 이론에서 찾았던 대학 강단의 ‘진보’를 자처하는 일련의 젊은 학 자군이 앞장섰던 시대적 배경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연구는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함께 하고 있던 지수 걸 등 13명이 필자로 참여한 『3·1민족해방운동연구 : 한겨레신문 주최

64) 위의 논문, 13쪽.

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 심포지움 논문집』65)이다.

이나 김일성 일가부치를 떠올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67)라고 읽히는 주장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수걸은 다음과 같이 공산주의 세력의 주장을

‘연상’케 하는 더욱 과격한 주장을 이어갔다.

“3.1운동은 우리에게 남겨준 엄정한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 첫째는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진정한 주체는 노 동계급을 핵심으로 하는 민중뿐이라는 것, 둘째는 민중의 역량은 확고한 조직과 과학적 이론으로서만 발휘된다는 것, 그리고 셋째 제국주의와의 투쟁에 있어서는 오로지 전면적 비타협적인 투쟁만 이 궁극적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 등이다.74)

이처럼 북한의 인민이 민중으로 바뀐 것 이외 크게 다른 점이 없는 지 수걸의 주장은 거의 대일항쟁기 공산주의 세력과 북한의 그것과 깊은 학 문적 연관성이 없다고는 보기 어렵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자신들의 정치 적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3.1혁명을 이용한 것처럼, 북한도 김일성 체제 의 완성을 위해 3.1혁명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 이 점에서 지수걸 등 의 주장은 계급사관 또는 민중사관에 입각한 ‘정치 행위’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사실에 기반한 ‘학문 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임지현·이성시·이영훈·박지향 등 중심이 된 반민족주 의를 표방한75)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핵심인사 윤해 동도 다음과 같이 3.1혁명에 대한 지수걸과 유사한 평가와 인식을 드러냈 다.

“전체적으로 보면 북한에서는 민족운동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3·1운동과 그에 전후한 민족운동사 전체를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74) 위의 논문, 36쪽.

75) 신운용, 위의 논문 참조. 윤해동 등의 반민족적 성향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롬, 2004, 휴머니스트)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최후 단계와 그 쇠퇴몰락의 단계로 이해하고, 그 역사적 제한성을 명확히 한 데 비하여, 남한에서는 그 역사적 위상의 규명과 이해 에는 등한하고 오히려 민족사의 정통성이라는 정치적 입지에 근거 하여 민족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 협소화하여 그 역사적 역할의 제한성의 규명을 방기하고, 그 과학적인 역사이해를 방해하고 있 다.76)

여기에서 윤해동은 지수걸과 같은 방식(계급사관)으로 3.1혁명에 대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계급사관에 따라 3.1혁명을 평가하 고 인식한 글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다. 무엇보다 위와 같은 윤해동의 주장은 현재 ‘반민족주의’ 성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에서 주목된다.77)

그리고, 『3·1민족해방 운동연구』 등에서 구사된 ‘부르조아 계급,’ ‘부르 조아 계급의 헤게모니’, 자연발생적 민중봉기, ‘민족해방운동’ 등의 용어78) 에서 확인되듯이 『3·1민족해방운동연구』는 북한의 3.1혁명 연구에 ‘강력 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장의 영향 으로 3.1혁명 민족대표의 역사적 역할과 의미를 폄하하는 현상이 사회 곳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보건데, 설민석 등에서 보이는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몰이해’, ‘비학문적인 태도‘, ‘맹 목적 추종’ 현상은 “이른바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결 과가 아니다.”라고 단정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홍이섭79)·강재언80) 등이 북한 역사 서술 내용에 대해 비판하였다

한편, 홍이섭79)·강재언80) 등이 북한 역사 서술 내용에 대해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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