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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1945년) 이후 ‘3.1혁명’에 대한 평가·인식 및 그 의미/신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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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

평가·인식 및 그 의미

신 운 용*

Ⅰ. 머리말

Ⅱ. 해방 공간의 평가·인식과 그 문제점 1. 민족주의 세력

2. 공산주의 세력

Ⅲ. 1950년대-현재: 3.1혁명 평가·인식과 그 영향 1. 북한의 평가·인식과 김일성 일가의 등장 2. 남한의 평가·인식과 그 ‘전복’

Ⅳ. 맺음말

* 광복회학술연구원 교수

(2)

【국문요약】

글쓴이는 이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학계와 일반인 일부의 폄하 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국권회복 이후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 력의 평가와 인식을 살펴보았다. 해방공간에서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 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서로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학원 강사 설민석 등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폄하는 공주산주의 세력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 이글에서 밝혔다.

공산주의 세력의 3.1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3.1혁명은 부르조아 민족주의의 최후 단계로 민중의 계급적 자각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민족 독립투쟁의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공 산주의자들은 “이적행위자’ 또는 ‘인민배반자’라는 극단적 평가와 인식을 갖고 있으며,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반인민적 정부’라고 규정하였다. 이 는 현재 북측 정권의 평가와 인식으로 이어졌고, 북한의 3.1혁명의 역사 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김일성 일가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시각 에서 3.1혁명은 실패하였으며, 그 원인이 공산주의 세력과 김일성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의 ‘움직일 수 없는’ 해석이다. 사실 한국근대 민족 운동은 민족주의 세력·아나키스트 세력·공산주의 세력·종교 세력 등 으로 구성된 다양한 주체들이 전개하였다. 이 점에서 북한의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기술은 근본적으로 역사 왜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 다.

이러한 북한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지수걸 등이 참여한

『3·1민족해방 운동연구』 에 그대로 반영되어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큰 원인이 되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설민석과 같이 극단적으로 주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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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3.1혁명, 3.1운동, 민족대표 3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민족주 의, 공산주의,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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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남북의 근현대사 연구는 크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시각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다. 공산주의 계급사관에 입각한 북한의 역사서술은 김일성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민족주의 세력의 한국 근현대사의 역할과 의 미를 폄하 경시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민족주의 사관이 중심이 된 남 한의 역사서술은 근현대 공산주의 세력의 역할과 의미를 축소하는 결과 를 낳았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의 한국근현대사의 총체적으로 일정한 한 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은 3.1혁명01)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 다. 현재 남북에서 진행되고 있는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인식 과 평가도 이와 연동되어 있다. 그 결과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남북의 연구는 거의 공동의 인식과 평가 형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괴리되 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연구 상황 속에서 올해가 3.1혁명 100주년임에도 남 한에서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국근대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01) 1919년 3월 1일 독립투쟁을 기존의 거의 모든 연구에는 3.1운동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하지만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7년 ‘대동단결의 선언’과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

으로 주창된 국체의 변동(군주제에서 민주공화자로) 의지가 3.1혁명선언으로 재확인되 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독립신문』 1922년 7월 15 일자에 ‘3.1대혁명’,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전문에 ‘3.1대혁명’, 제헌헌법 초안 전문에

‘三一革命의 偉大한 獨立精神’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민족주의 세력은 1919년 3월 1일 의 역사적 사건을 3.1혁명이라는 용어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3.1운동’이라는 표현은 “혁명이라면 우리나라 政府를 顚覆하자는 것”이라고 인식한 이승만의 영향에 따른 것(『국회의사록(단기 4281년 5월 31일부터 7월 6일까지)』 1권, 193쪽)이다. 이점 에서 3.1운동보다 ‘3.1 혁명’이라는 용어가 향후 헌법개정 시 요구된다. 이에 대한 자세 한 내용은 신운용, 「국권회복(1945)이전 3.1혁명에 대한 평가-인식과 그 의미」, 『선도 문화』 27,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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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서 국권회복 이후를 중심으로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 에 대한 폄하 원인을 찾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 로 해방공간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평가와 인식을 살펴볼 것이다. 더 나아가 북한의 3.1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평가와 인식 에 주목하면서, 특히 1980년대 말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3.1혁명과 민 족대표 33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작업을 통해 3.1혁명과 민족대표 33 인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여 향후 3.1혁명 기념과 현양사업의 방향을 잡 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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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해방공간의 평가·인식과 그 문제점

1. 민족주의 세력

3.1혁명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은 대 체로 민족대표 33인과 참여 대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면서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소비에트와 같은 프로레타리아 독재 국 가 건설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던 공산주의 세력은 계급사관에 따라 “부르 조아민족주의 세력(민족 대표 33인)이 투쟁 노선에서 이탈내지 탈락하면 서 농민·노동자·학생이 주체가 되어 벌인 ‘민족해방투쟁’으로 보았다.

이는 한국 근현대 양대 세력이 타협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경직성을 드러 낸 것이다.

한편,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 신익희는 3.1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 인식하였다.

“민족 중심주의 첫째로 우리 민족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 다. 우리는 삼일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우리는 조선국의 독립국 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고 삼천만동포가 엄숙히 선 언하였든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에 드물게 보는 한 지역에서 오천 년 동안 한 조상의 피를 받은 단일민족이니 우리는 우리 민족을 중 심으로 우리 민족 자주의 독립국을 세우려는 것이 우리 전국민의 이상이었고 그러므로 『독립국과 자주민』 되기를 맹세하였든 것입 니다.02)

02) 신익희, 「三十二週年 三一節을 맞이하여(檀紀 四二八四年 三月 一日)」, 『增補版 申翼熙 先生演說集』, 국민대학동창회, 단기 4294년(1961),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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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신익희는 민족 자주의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의 구체 적인 실천 사례로 3.1혁명을 제시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조국의 국시인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적 자유를 위하여 언제나 칼을 들을 고귀 한 피를 바칠 각오를 하시오!”03)라고 한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신 익희도 해방공간에서 반공 태도를 취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3.1혁명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직을 맡아 활동한 그에게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04)

특히 민족주의 세력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인식은 조소앙의 그것에 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3.1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리 민족보다 더 단결이 강한 민족 다시없는 것을 나는 3·1 운동에서 발견하고 교훈 받았다. (중략) 3·1운동의 특장은, 첫째 국내외 각계가 용감히 합작한 것, 둘째 적의 헌병정치 하에서 기밀 이 전국적으로 존수된 것, 셋째 민족투쟁의 심벌이 될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독립국 자유이라는 문자에 대한 동경과 투쟁이 27년간 맥맥히 계속해온 것을 들 수 있다.05)

이처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이론가 조소앙은 민족주의 세력 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 듯이, 그는 “3.1혁명에서 민족의 단결력을 다시 보게 되어 민족독립투쟁 에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3.1혁명의 특징으로 반민족 세력을 제외한 전민족의 참여, 기밀준수와 조

03) 신익희, 「全國學生聯盟 第五回 全國代議員大會에 臨하여 (檀紀 四二八二年 十月 十七 日)」, 『增補版 申翼熙先生演說集』, 국민대학동창회, 단기 4294년(1961), 82쪽.

04) 신익희의 사상적 지향은 신운용, 「신익희 사상의 형성과 전개」 Ⅰ, 『숭실사학』 41, 숭실 사학회, 2018 참조.

05) 조소앙, 「3.1運動과 나」(1946년 2월 26일자, 『자유신문』), 『소안선생문집』 상, 1979, 횃 불사, 6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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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적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과 그 후 민족독립투쟁의 사상적 에너 지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3.1혁명에 대해

“3.1운동은 우리 독립국가의 선성(先聲)이오, 민족부흥의 출발이오, 전민 적 일치단결의 기록이오, 현대 민주주의적 각성의 발로이었다.”06)라고 평 가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와 인식을 바탕으로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자들과 대한 민국 정부는 다양한 3.1혁명 기념행사를 통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았던 것이다. 이는 첫째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대대적 조명과 그 후손

06) 조소앙, 「3.1운동 제21주년 기념선언」(1940.3.1.), 『소안선생문집』 상, 1979, 횃불사, 262쪽.

07) 『동아일보』 1946년 3월 1일자, 「光復先烈의 英靈 앞에 三千萬 다 함께 머리숙이자(鄭寅 普); 1946년 3월 1일자, 「己未年回顧 團結로 獨立完遂에 卅三人中 生存하신 權東鎭·

吳世昌兩先生談」; 1946년 7월 27일자, 「三三人 遺家族 總會」; 『영남일보』 1946년 3월 1 일자, 「三一運動紀念 殉節士追悼會, 오늘의 感激을 靈前에 告하나이다, 蒼天도 구버보 사 哀悼에 잠기시고 數萬배달겨레는 말없시 感淚橫溢」; 1946년 3월 1일자, 「社說: 三一 節과 先烈의 功勳」; 1946년 3월 7일자, 「三·一抗爭座談會, 政治的利益도 컷고 經濟的 効果도 甚大」 ; 『연합신문』 1949년 2월 18일자, 「偉大한 壯志追慕 三十三人中故人된분 들 三月一日서울運動場서 合同祭」; 1949년 2월 20일자, 「孫秉熙先生篇(2), 三一運動의 巨星, 遺家族訪问記」; 1949년 3월 3일자, 「燦然한 遺勳追慕 二十一位先烈合同祭」;

1949년 3월 3일자, 「故吉善宙氏篇, 三一運動의 巨星, 遺家族訪问記-困窮속에도 希望 과 즐거움 萬難을 克服코 싸우는 遺家族」; 1949년 3월 19일자, 「三一運動의 巨星, 遺家 族訪问記-八男妹거느리고 辛苦(一) 荊莿一路의 李鍾勳先生未亡人」; 1950년 3월 3일 자, 「崇高한 『피』의 抗爭 그날을 追慕!, 祭文도 哀切 故22烈士追念祭嚴修」 ; 『한성일보』

1950년 5월 10일자, 「風餐露宿40餘年 祖國光復에 平生献身, 中區乙 崔東旿」; 1950년 3월 5일자,「다듬다」三一運動의 回顧 새로운 革命의 洗禮, 펄펄날리는 太極旗 先烈들의 피흘린 功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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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생활환경 개선07), 둘째 기념행사준비와 내용08), 셋째 3.1혁명의 역사 적 의미 조명09) 등 크게 3가지 형태로 정리된다.

08) 『동아일보』 1946년 1월 27일자, 「三千萬은 獨立만을 切望 己未獨立宣言도 於焉卄八年 三一記念日 앞두고 行事準備-參加團體-獨立宣言記念全國大會 各政黨各團體서 活動- 宗敎團體도 參加」; 1946년 2월 13일자, 「獨立宣言記念展」; 1946년 2월 14일자, 「獨立 記念館建立 己未獨立宣言記念大會서 計劃」; 1946년 2월 17일자, 「追想되는 「己未三一」

先烈英靈追念 愛國歌 노피 불러 記念하라 學務局 各校에 記念式擧行 通牒」; 1946년 2 월 20일자, 「三月 一日을 國慶日로 二十日에 法令으로 全國에 宣布」; 『동아일보』 1947 년 3월 2일자, 「民族血祭의 燦然한 이 날! 두 돌맞이 己未獨立宣言記念大會 大地를 흔 드는 獨立萬歲의 소리 蒼空에 휘날리는 太極旗ㅅ발 뼈 끝에 사모친 獨立萬歲 소리! 이 땅, 이 百姓의 가슴에 또 사못첬다」; 1948년 2월 7일자, 「己未獨立宣言記念 各種行事 決定」; 1948년 3월 2일자, 「昨日 三·一節記念 悠久不滅의 獨立精神百萬市民繼承을 굿 게 盟誓 밝어지다!」; 1950년 6월 9일자, 「三一紀念碑推進委 創立總會」; 『연합신문』

1949년 3월 1일자, 「“용수”쓴 反逆輩도 二人, 三十三人指導者의 그 後」; 1949년 3월 3 일자, 「故吉善宙氏篇, 三一運動의 巨星, 遺家族訪问記-困窮속에도 希望과 즐거움 萬難 을 克服코 싸우는 遺家族」; 1949년 3월 3일자, 「燦然한 遺勳追慕 二十一位先烈合同祭」

; 1949년 3월 19일자, 「偉大한 壯志追慕 三十三人中 故人된분 들 三月一日서울運動場 서 合同祭」; 『한성일보』 1950년 2월 18일자, 「先烈의 三·一精神 온겨레여! 追慕하자, 33人中의 故人 第二囘合同追念祭」; 1950년 2월 28일자, 「歷史는 흐른다 나의 鬪爭記 錄 三一運動의 回想, 孫義菴의 三智囊 接觸謀議로 數朔걸려」; 1950년 3월 1일자, 「故 22先烈追念祭, 탑동공원서 一日擧行」.

09) 『동아일보』 1946년 2월 25일자, 「三一運動의 回想 (上)- 民族의 피를 홀린 自主獨立을 世界에 宣布」; 1946년 2월 25일자, 「三一紀念前記 (上) 「大韓의 自主獨立」 信地도 一點 方途도 一路 行裝도 一色」 ; 1946년 2월 26일자, 「三一紀念前記 (中) 子孫萬代에 誥함 獨立宣言書는 最高唯一의 大憲章」; 1946년 2월 27일자, 「三一紀念前記 (下) 「最後一人, 最後一刻」 「三一運動」의 理念과 指標의 核心(本社主幹 薛義植)」; 1946년 2월 27일자,

「三一運動의 回想 (下) 偉大한 組織力」; 1946년 2월 27일자, 「二十八日 三·一記念大講 演會」; 1946년 2월 28일자, 「三一運動의 史的意義 (上)」; 1946년 2월 28일자, 「人類平 等의 炬火 民族自存의 大憲章 獨立宣言書」·「三一運動 祕話」·「外國人이 본 三一運動 秩序整然히 進行 佛國人 孔安國神父談」; 1946년 2월 28일자, 「法廷에 나타난 三一抗爭 (上) 鐵石가튼 愛國의 志操 獨立自主를 血淚로 主張」; 1946년 3월 1일자, 「追憶! 古下宋 鎭禹先生 解放後 첫 三一節을 當하야[上](金俊淵)」; 1946년 3월 15일자, 「三一運動의 史的意義 (下) 피로써 結實된 獨立 씨는 卄七年前에 뿌려젔다(金道泰)」; 1947년 3월 1 일자, 「三一運動의 民族的意義[上]」; 1947년 3월 2일자, 「全國大會서 獨立宣言記念文發 表 子孫萬代의 記憶할 날」 ; 1947년 3월 1일자, 「地軸 혼든 萬歲聲 빛나는 三一運動小 史」; 1948년 2월 29일자, 「三·一運動의 意義(玄相允)」; 1948년 3월 2일자, 「三一小史

; 民族精神의 炬火 全世界에 昭照」; 1949년 3월 1일자, 「사모친 獨立의 悲願 죽엄으로 正義의 抗拒 記憶도 生生 卅一年前壯擧-往年의 鬪士들 回顧談 玄相允氏·李明龍·咸 台永·金道泰氏」; 1950년 3월 1일자, 「숨은 三一運動 祕史 三十三人 뒤이은 十二志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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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좌익 측의 ‘3.1운동기념준비위원회’와 우익 측의 ‘기미독립선언 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가 각각 따로 결성되어 해방공간에서 3.1혁명 기념식이 분열적으로 개최되었다. 하지만 3.1혁명을 둘러싼 좌우의 충돌 과 대립은10) 김규식11) 등의 호소에도 가속화 되어 결국 유혈참극12)으로 이 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친일인사들이 3.1혁명에 대한 소감을 표출한 데에

13) 대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반발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 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이는 3.1혁명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원인이 된 것이 분명하다.

10) 『동아일보』 1946년 3월 5일자, 「左右合流 各地에서 三·一記念行事擧行」; 1947년 2월 25일자, 「三一節記念 行事分裂은 遺憾 靑友黨談」·「不合流는 理解困難 民統談」; 1950 년 2월 28일자, 「打共一色으로 保導聯盟의 三一節行事」; 『한성일보』 1950년 3월 1일 자, 「歷史는 흐른다 나의 鬪爭記錄 三一運動의 回想, 몸은 비록 늙어도 내 마음 變할 수 있으랴」.

11) 『동아일보』 1946년 3월 4일자, 「悲痛한 態度로 新聞界에 警告 三一記念 行事報道에 對 하야 金奎植博士談話發表」·「三一行事問題 (上) 金博士의 警告 率直히 是認함」; 1946 년 3월 5일자, 「三一行事問題 (中) 輕率한 聲明書」; 1948년 2월 27일자, 「三·一記念式 에 韓獨黨은 不參」 ; 1949년 3월 1일자, 「三一運動과 各界의 所感 ; 共産主義에 抗爭 國家民族을 守護 李大統領談」; 『한성일보』 1946년 6월 7일자, 「韓龍雲禪師 大祥忌法要」

; 『부산신문』 1948년 6월 10일자, 다시보라 先烈의 偉勳, 3·1運動에 따릴 겨레의 抗爭 , 피로서 싼 聖史六·十運動二十二週年記念」; 『현대일보』 1948년 5월 19일자, 「孫敎祖 祈禱式, 今日擧行」; 『연합신문』 1949년 2월 26일자, 「故三十三人追念祭 式順과 部署決 定」; 『연합신문』 1949년 2월 20일자, 「孫秉熙先生篇(2), 三一運動의 巨星, 遺家族訪 記」; 1949년 2월 26일자, 「李昇薰氏篇, 三一運動의 巨星, “38線이 怨讐라고 생이지요”

(5) 妻子는 以北에 홀몸인 李昌鍊氏」; 1949년 3월 1일자, 「故羅龍煥氏篇, 三一運動의 巨星, 遺家族訪问記, 困窮한 生活속에도 希望뿐 힘없이 말하는 羅先生며누님」.

12) 『한성일보』 1947년 3월 5일자, 「3.1절기념 뒷이야기」. 3.1혁명 공동행사 결렬 책임을 민족주의 세력과 대한민국정부에 두는 연구(임경석, 「해방직후 3.1운동 역사상의 분화」

, 『史林』, 수선사학회, 2018, 121쪽)도 있다. 하지만 3.1혁명 공동행사 결렬은 민족의 화해와 통합을 이끌어내기에는 민족 내부의 역량이 충족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문제는 현재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3) 『동아일보』 1947년 3월 1일자, 「三一所感(朴鍾和)」; 『연합신문』 1950년 3월 1일자, 「己 未獨立運動 回想座談開催」; 『평화일보』 1948년 3월 1일자, 「삼일절기념특집 독립선언 기초자인 최남선씨에게 그 당시와 최근심경에 대한 보산 탐방기」.

(11)

이런 상황 속에서도 3.1혁명에 대한 일련의 연구서14)와 외국인 저술이 번역 소개되었다. 연구서는 대체로 민족주의 세력과 임시정부의 3.1혁명 평가와 인식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다니엘 파이버가 쓰고, 강영 수·정자언·강상이 공동 번역하여 출간한 『三一運動의 眞相 : 外國人이 본 三一運動의 原因과 結果及 其他附錄萬載及宣言書全文』15)은 객관적인 3.1혁명의 진상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2. 공산주의 세력

3.1혁명과 관련하여 북한의 평가와 인식에 대한 연구 성과는 그 동안 상당히 진척되었다. 여기에서는 해방공간 속에서 북한 3.1혁명 관련 움직 임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1950년 3월 7일자 『산업신문』

의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三월 一일은 민족이 다 같이 경축하고 선열을 추모하는 날인 것 이다. 그런데 북한 괴뢰집단에서는 이날을 노동절(勞動節)이라 改 稱하고 비상경계로 대중을 억압하여 三·一절행사를 일체 금지시 켰다고 하는데 소식통이 전하는 이 날의 북한 행사는 다음과 같다 한다. 卽 北漢傀儡集團에서는 의식적으로 勞動節이라 改稱하였을 뿐 아니라 三月 一日 밤 平壤放送에 의하면 二十八日 저녁 平壤에 있는 소위 國立劇場이라는 데서 겨우 몃百名이 集合하여 形式的으 로 記念式을 擧行했을 뿐이오 北漢一帶에 걸쳐 三·一節을 記念하 는 一齊의 行事는 禁止되었다 한다. 그리고 二月 二十五日부터 三

14) 『朝鮮解放史 : 三一運動篇 : 國史參考用』, 文友印書館, 1946; 李讚榮 編, 『『三一運動과 大韓民國臨時政府』, 國民出版社, 1946; 『大韓獨立運動과 臨時政府鬪爭史』, 계림사 단 기4279(1946); 池明世 編, 『三·一運動때 外國新聞에 나타난 朝鮮』 新光出版社 1948.

15) 다니엘 파이버 著 /姜永壽·鄭子彦·姜尙 共編譯, 『三一運動의 眞相 : 外國人이 본 三一運動의 原因과 結果及 其他附錄萬載及宣言書全文』, 革新社, 檀紀4279(1946).

(12)

月 二日까지 非常警戒를 實施하여 愛國同胞로 하여금 마음껏 慶祝 은 固捨하고 한마디의 大韓獨立萬歲조차 부르지 못하게 하여 아날 의 感激을 怨痛하게도 抑制當하고 말었다는 것이다(韓國)16)

위의 기사는 우익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북한에서 3.1혁명의 위상 이 어떠한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방공간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 한 북한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남한의 주류 세력과는 근본적 으로 같을 수 없었다. 이는 북한 공산정권이 전면적으로 3.1혁명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공간 남한의 공산주의자이 민족대표 33인과 민족주의에 대해 그다지 높이 평 가하지 않았던17) 이유가 설명된다.

이는 맑스·레닌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믿는 박헌영의 다음과 같은 3.1 혁명과 민족대표 33인의 평가와 인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東 學農民亂과 그 敎訓』 「三一運動의 意義와 그 敎訓」에서 “朝鮮獨立宣言文 은 이같이 無力하고 鬪爭性이 없고 또한 政治性이 弱하다. 이것으로써 三十三人의 非鬪爭性이 爲先 證明되고 말았다.”18)라고 민족대표 33인을 비판하였다. 여기에 확인되듯이 그는 3.1혁명에서 보인 민족대표 33인의 역할과 의미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3.1혁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한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기본적인 3.1혁명 에 대한 인식이었다.

더 나아가 박헌영은 “이러한 革命的 情勢는 何等의 準備도 없고 또한 無爲無能한 當時의 民族불주아지로 하여금 政治的 投機로 進出케 만들었

16) 『산업신문』 1950년 3월 7일자, 「3.1節을 勞動節로 北韓서 大衆을 欺瞞抑壓」.

17) 『전국노동자신문』 1946년 3월 1일자, 「사설-3.1운동의 의의 교훈」; 『해방일보 1946년 3월 1일자, 3.1기념일에 동포에게 고함」; 김일성, 「3.1절을 맞이하여 조선인민에게 고 함」(1946.3.1.), 『북한연구자료집』 1,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50-52쪽; 조선과학자 동맹, 「권두언」, 『조선해방과 3·1운동』, 청년사, 1946, 1쪽.

18) 이정 박헌영전집편찬위원회, 『이정 박헌영전집』 2, 역사비평사, 2004, 564쪽.

(13)

나니 그들이 三月에 人民運動이 全國的으로 展開됨을 보고 四月에는 벌 써 亡命家들이 모여서 中國 上海에 革命鬪爭하기 爲한 黨이 아니라 主權 을 잡는 벼슬로 官僚가 되기 爲한 臨時政府를 組織하고 有名無實의 大統 領以下 各 大臣이 世上에 發表된 것으로써 넉넉히 斟酌할 수 있다.”19)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당연히 민족대표 33인과 3.1혁명에 대한 대단히 부 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이는 “民族불조아지들이 日帝의 彈壓을 두려워 않 고 敢히 政黨을 가질만치 勇敢하였던가? 三·一運動以後로부터 民族을 背叛하고 反動的으로 나간 그들이니 더욱이 이러한 問題는 課題될 必要 도 없는 것이다.”20)라는 그의 주장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박 헌영의 주장은 그 자신의 독자적 인식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세력이 제 시한 1928년 12월 테제의 3.1혁명 평가와 인식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 는다.

심지어 박헌영은 3.1혁명을 실패로 단정하면서 그 원인을 ① 투쟁을 지 도할 전위가 결여된 점, ② 토지개혁의 과업으로 제기되지 못한 점, ③ 민 족대표 33인의 무저항주의, 평화적 수단과 방법(청원과 진정 호소)21) 등 을 들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三·一 指導者들의 卑겁性이 明白 한가? 日本帝國主義의 前例없는 野蠻的 殘忍性으로 우리 民族을 壓迫 搾 取하는 植民地統治者에 對해서 反抗하여 싸우지 말고 平和手段으로 「敵 을 責하지도 말고 排斥도 말고 秩序維持로 破壞하지 말라」고 다만 哀願과 陳情에만 그치라 하였으니 이것보다 더 利敵行爲의 戰術이 또 어데 있을 까?”(밑줄: 글쓴이)22)라고 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이적행위를 하였다.”고

19) 위의 책, 567쪽.

20) 위의 책, 566-567쪽.

21) 위의 책, 570쪽.

22) 위의 책, 571쪽.

(14)

극단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23)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역사가의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선동·선전’을 위한 ‘정치 구호’에 지나 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오히려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의 결단이 없었다면 3.1혁명과 같은 거 대한 한국사의 패러다임 전환은 상당히 늦추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 이다. 이점에서 박헌영의 주장은 한국사의 근대성이 대종교·천도교와 개신교 등에 의해 진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정치적 의도에 서 역사를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박헌영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최창익 등이 중심이 되어 1949년 간행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1949년 판)와 대체로 같은 맥 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민족해방투쟁사』는 3.1혁명의 국내적 배 경을 고종의 사망과 2.8독립선언에서 찾으면서, 국제적 배경으로 러시아 혁명을 들었다. 아울러 3.1혁명의 주체에 대해서도 농민·노동자·학생 순으로 설명하였다.24)

이러한 시각에서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민족

23) 박헌영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인식은 다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민족 대표 33: 글쓴이)이 三·一運動의 게게모니(헤게모니 : 편) 卽 그 領導者가 되기에는 너무나 無能하였고 또한 進步的이 아니었다. 그들은 體面에 못이기어 이 偉大한 反日 的 人民運動에 얼골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半心的이었다. 天幸의 境遇 「朝鮮의 獨 立이 列强에 依하여 承認」되는 때에는(이것은 當時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따라서 有 害한 幻想이었다) 政權을 잡아보겠다는 野望과 幻想에서 그들이 움지기었던 것이다.

三十三人事件公判時에(出廷은 四十六人) 當代의 「民族指導者」 崔麟 宋鎭禹 崔南善 等 거의 大部分이 敵의 公判에서 그들의 卑겁한 態度와 巧妙한 말로써 罰받지 않으려하는 非良心的인 答辯 等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半心的으로 이 運動에 關係하였으며 參加 하였든가를 可히 알 수 있는 것이다.(중략)三·一運動의 指導者 三十三人 或은 四十八 名들은 三大宗敎의 首領들이요 또한 社會的 地位와 그 이데올로기로 보아 民族불조아 지를 代表한 知識人 或은 政治家들이다.”(위의 책, 568쪽/ 밑줄: 글쓴이).

24) 최창익, 『조선민족해방투쟁사』, 김일성종합대학, 1949, 254-256쪽. 특히 박헌영은

「2.8독립선언문」을 “日本留學生의 宣言文이 具體的이며 또한 內容이 豊富하며 보다 鬪 爭的인 文句가 使用된 것은 事實이다.”(위의 책, 564-565쪽)라고하여 「3.1혁명선언문」

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이후 북한의 3.1혁명 관련 책자에서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 다.

(15)

대표 33인에 대해 “그들은 三月 一日 獨立宣言은 發表하였으나 이미 群衆 을 避하였고 그에도 不足하여 敵의 本營인 總督府에 電話로 降服을 告하 고 自進하여 投降하면서 賊警의 捕縛態度에 對하여 「우리가 일으킨 獨立 運動은 無抵抗이 第一義의 目的인 것」이라고 捕縛 없이 順히 捕虜되겠다」

는 것을 表示하였다. 이렇게 獨立을 宣言한 所謂 三十三人 指導層은 完全 히 人民을 背反하였다.”25)고 비난하면서 그 실패의 원인을 소부르죠아 지 식층의 ‘계급적 제한성’26)에서 찾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임시 정부에 대해서 최창익은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에서 “그들은 所謂 上海臨時政府를 組織하였다. 그러나 이 政府는 反人民 的 政府였다. 即政府構成이 賣國奴 民族叛逆者 李承晩分子들로 久成되였 다.”(중략) 小委 上海臨時政府는 朝鮮人民의 植民地解放과 民族的 愛國心 으로 構成된 것이 아니다. 實로는 地位와 權利를 貪하는 私慾으로 構成된 것이다“27)라는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최창익은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三・一運動은 失敗하였다.”28)라고 단정하면서 그 원인을 내외적 조건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내적 조건으로서 ① 무산자계급의 발전과 각성의 미약성과 진보적 계급 즉 근로대중의 전위적 정당의 결여, ② 소자산계급 혹은 지주에서 변신한 자산계급 출신의 무저항 비투쟁 평화적 외교적 청원과 임시정부 세력의 대신(大臣)이 되려는 욕망 등 반민족적 운동, ③ 군중무장이 없었던 점, 셋째, 반봉건투쟁과 결부되지 못한 점과 토지 소유제도의 근본적인 변경

25) 최창익, 위의 책, 258-259쪽.

26) 위의 책, 259쪽. 심지어 최창익은 “獨立을 達成하여 民族의 利益을 解決하려는 것이 아니고 大臣의 地位를 꿈꾸는 者도 있었다.”(위의 책, 261쪽)라고 민족대표 33인을 맹 비난하였다.

27) 위의 책, 264-265쪽. 뿐만 아니라 최창익은 임시 정부에 대해 “臨時政府는 反人民的 集團으로 되었으며 中國反動頭目 蔣介石의 走狗로서 眞正한 愛國運動者들과 가장 愛 國的 共産主義者자들을 虐殺하였고 朝鮮의 外交權을 팔아먹었다.”라고도 격하게 비난 하였다(위의 책, 266쪽).

28) 위와 같음.

(16)

의 결여 등을 들었다.29) 아울러 그는 외적 조건으로 ① 국제적으로 고립 무원의 조건에서 전개된 점, 즉 소련이 혁명 직후라 여력이 없었고 제국 주의자가 말한 민족자결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된 점,

② 일본 프롤레타리아트가 허약했던 점, ③ 일제가 제1차 세계대전 승전 국이자 5대 강국의 일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식민지 분할에 참 가한 점30)을 들었다.

아울러 최창익은 3.1혁명의 성격에 대해 ① 일제의 강점과 식민지적 억 압과 약탈에 대한 해방전쟁이자 반봉건투쟁, ② 러시아혁명과 연결된 세 계혁명운동의 일환라고 주장하였다.31)

더 나아가 최창익은 그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 전 위적 정당의 지도 아래 강력한 반일민족통일 전선의 토대에서 전개되어 야 하였다. ② 평화적 청원이 아닌 무장조직과 무장폭동에 의해서만 가능 하였다. ③ 자산계급, 소자산계급의 반동성과 동요성이 폭로되고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의 혁명성이 드러났다. ④ 민족 문제와 토지문제의 불가분 한 연계와 그 해결이 필요하였다. ⑤ 식민지 해방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전세계 근로인민들과의 결합 등 국제적 연결에서만 가능하다는 등의 많 은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32)

이와 더불어 최창익은 “3.1혁명 이후 무장 세력이 일제에게 큰 타격을 가했으며 3.1운동의 진행과정에서 발발한 중국의 5.4운동 등 기타 식민지 해방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33)라고 강조하면서 민족 대표 33인 등 이른 바 부르죠아 민조주의자들이 “일제와 야합하여 새로운 진정한 혁명적 계 급 노동계급을 핵심으로 하는 강력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

29) 위의 책, 266-268쪽.

30) 위의 책, 268-270쪽.

31) 위의 책, 272-274쪽 32) 위의 책, 274-275쪽.

33) 위의 책, 275쪽.

(17)

다.”34)고 강조하였다. 이는 3.1혁명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독립투쟁을 이 끌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를 전제로 한 교훈은 “공산주의 세력의 지도를 받지 않아 3.1혁명이 실패하였다.”는 주장을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때문에 경제균등(토지문제의 해결)과 민족적 자주권 해결을 주장한 조소 앙 등 민족주의자 세력35)은 공산주의 세력의 3.1혁명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3.1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 등의 이념 차이는 극복되지 못하고 ‘민족 파멸 전쟁’ 6. 25전쟁으로 치달 았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Ⅲ. 1950년대-현재: 3.1혁명 평가와 그 영향

1. 북한의 평가·인식과 김일성 일가의 등장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의 저자 최창익과 김승 화가 제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북한 당국은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중 3.1 혁명 부분의 일정한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계급사관에 따라 근대 의 시작을 1866년이라고 주장한 리나영(李羅英)이 이를 맡았다. 그는 『조 선민족해방투쟁사』의 3.1혁명부분을 약 1/2로 줄이고 김일성의 활동을 강 조한 조국광복회 활동과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시기를 대폭 늘려 1949년 판과 같은 이름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1958년 판)를 발간하였다. 이는 김일성 체제가 강화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1958년판의 목차는 1949년판과 비교하여 큰 변화가 없었다.

34) 위와 같음.

35) 삼균학회, 「韓國獨立黨 黨義解釋」, 『소앙선생문집』 상권, 1979, 횃불사, 217-218쪽;

「나의 주장」, 『소앙선생문집』 하권, 1979, 횃불사, 117쪽.

(18)

3.1혁명과 관련하여 1958년판에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노동자·학 생의 진출과 2.8독립선언이 강조되었다. 특히 1958년판에는 “이날 서울 에서 인민 대중의 혁명적 기세와 군중적 봉기에의 진출을 두려워한 소위 33인 《민족대표》들은 학생들과 약속한 《빠고다 공원》에는 나오지 않고 료리점 태화고간에 자기들끼리 비밀히 모여서 겨우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고 말았다. 이것은 당시 그들의 주관적 의도 여하를 불문하고 객관적 으로 투항 변절적 행동이였다(실지로 일부 소수의 애국 인사들을 제외하 고는 그후 이들 중 대부분이 곧 민족적 량심을 잃고 변절하였던 것이다)(

밑줄: 글쓴이)”36)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3.1혁명을 폄하한 설민석37) 등 의 주장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에서 현재 민족대표 33인의 폄훼된 평가 의 근원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 대목이 다.

아울러 리나영은 “인민들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은 부르죠아 민족주의 자들이 준비한 청원이나 평화적 시위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혁명적 투쟁 의 방법으로써만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38)라고 주장하였 다. 아울러 그는 “3.1운동을 통하여 조선 로동 계급은 경제적 투쟁과 함 께 정치적 투쟁 무대에 그 첫걸음을 내여 디디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중 략) 3.1봉기의 동력은 과거 일부 종교인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종교인들이였던 것이 아니라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각계각층 반일 애국 력량들이였다.”39)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10월 테제로 부터 이어지는 3.1혁명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목적 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1958년판에서도 3.1혁명의 ‘실패’ 원인과 역사적 의의를 기술하였는데, 이는 1949년판과 동일하게 3.1혁명을 부르

36) 리나영, 『조선민족해방투쟁사』 , 조선로동당출판사, 1958, 236쪽.

37) 문화일보, 1017년 3월 17일자, 「설민석 “꾸지람 달게 받겠다…33인에 대해 비판적 입 장은 여전”」.

38) 리나영, 위의 책, 237쪽.

39) 위의 책, 243-244쪽.

(19)

조아민족운동의 종결로 상정하는 등 대동소이하다.

북한 당국은 같은 시기에 3.1혁명이 담겨 있는 리나영이 집필한p µ¬(

하)』를 간행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과 구성은1958D 『조선민족해방투쟁 사』와 거의 같다. 이어서 북한의 과학원 력사연구소가 1959년 『3·1운동 40주년기념 론문집』(과학원출판사, 1959)과 1960년 『3·1운동 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북한의 3.1혁명 연구는 양적인 면에서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60년대에 들어와 1961년 북한의 ‘과학원 력사연구소 근세 및 최근 세사 연구실’은 『조선근대혁명운동사』를 간행하였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3.1운동’이라는 표현이 ‘3.1인민봉기’로 바뀐 점이 눈에 뛴다. 이는 김일 성의 「위대한 10월의 사상은 승리하고 있다」에서 보이는 ‘3.1봉기’라는 표 현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이는 계급사관에 따라 본격적으로 민족 대표를 3.1혁명사에서 제거한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북한정권이 민 족대표의 3.1혁명 역할과 의미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으 로 해석된다.

특히 3·1혁명의 배경과 관련해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는 「2.8 독 립선언서」를 ‘과대’하게 평가하였다.40) 반면,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종교단체 간부들은 민족적 독립을 투쟁으로써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제 국주의자들의 《호의》와 일제 강도배들의 《리성》에 호소하여 독립을 얻어 보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지도》는 조선인민의 반 일 투쟁을 앞으로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여 인민대중의 혁명적 진출 을 견제하는 데 급급하였다.41) (중략) 그런데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인민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겁내서 학생들과의 약속을 위반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독립선언을 한번 랑독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력사적인 3·1 인

4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근세 및 최근세사 연구실, 『조선근대혁명 운동사』, 과학원출판사, 1961, 193쪽. 이러한 기술의 배경에는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 위의 책,193-196쪽).

41) 위의 책, 194-195쪽.

(20)

민봉기의 막은 수도 서울 청년학생들의 주동적 역할에 의하여 열리게 되 였다.42)”라고 비난하였다.

더 나아가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는 “3.1 봉기 당시 부르죠아 민족주 의자는 토지 문제의 해결이나 기타 어떤 반봉건 투쟁 구호도 내놓지 않 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여 이전의 봉건 귀족들과 관료들에게 추파를 던짐 으로써 인민들의 반봉건적 투쟁 의식을 마비시키는 해독적 영향을 끼쳤 다.”43)(밑줄: 글쓴이)라고민족대표 33인을 폄하하였다. 이는 역사적 사실 과 거리가 먼 비판으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과 의미를 약화시키는데 초 점을 맞춘 결과이다.

1970년대 북한의 3.1혁명 연구는 퇴보적 양상을 보였다. 당시 남한에 서는 박정희 독재체제가 강화되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유일독재체제가 완성되어 ‘적대적 공생관계’가 구축되었다.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3.1혁명 관련 연구 성과로는 김형직(김일성 아버지)과 김일성이 3.1혁명 의 주역으로 등장한 『조선전사』 15(근대편 3/ 1980년)을 들 수 있다.

『조선전사』 15 제3장에는 앞서 살펴본 북한의 3.1혁명 연구서와 같은 맥락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제거되고 노동자·농민·학생이 혁명의 주축 으로 기술되어 있다. 『조선근대혁명운동사』와 같이 학생들의 활동을 강조 하기 위해 2·8독립선언을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이날 서울에서는 평 양에서 보다 좀 뒤늦게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부르죠아민족운동상층분 자들의 투항주의적인 행동을 박차고 반일항쟁에 떨쳐나섰다.”44)라고 기술 되어 있다.45) 이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이 민족개량주의자로 변질한 사실은

42) 위의 책, 195-196쪽.

43) 위의 책, 208쪽.

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15(근대편 3), 과학, 백과 사전 출판사, 1980년, 123쪽.

45) 1957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 연구소에 간행된 『조선사년표』(384쪽) 에는 “三·一 독립 운동 발발, 一일 서울 빠고다 공원에서 군중 대회진행- 「조선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수십만 군중이 시위 전개.”라고 하여 3.1혁명이 평양에서가 아니라 서울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21)

그들이 민족자본가의 리익의 대변자로부터 일제 및 그와 한 짝이 되어 있 는 예속자본가의 대변자로 굴러떨어졌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였다.

동시에 그것은 3.1봉기 후에 민족주의운동대렬이 급격히 와해상태에 빠 져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실증하여주는 것이였다.”46)라는 대목과 관련이 있는 기술로 민족대표 33인을 3.1혁명사에서 완전히 거세한 결과 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 신자로 숭실대학 출신 김형직과 3.1혁명의 관계에 대해서는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반일독립만세시위투쟁은 애국적 인 청년학생들 특히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 형직 선생님께서 일찌기 혁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반일독립운동의 믿음직 한 거점의 하나로 꾸려놓으신 평양숭실학교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주동 하였다.”47)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 “3월 3일 만경대 시위에서는 경 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여덟살 되시는 어리신 몸으로 거족적인 반일봉기대렬에 참가하시여 보통문까지 가시였다.”48)라고 김일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처럼 김일성과 김형직이 3.1혁명의 주체로 기술되었다는 사실은 김 일성 일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조선근대 혁명운동사』에 없던 ‘3・1인민봉기의 실패’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였다.

이는 북한의 3.1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기술님 을 알 수 있다.

『조선전사』에서는 3.1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① “슬기롭고 용감한 조선인민의 열렬한 애국적 투지를 꺾지 못하였으며, 나라의 독립에 대한 우리 인민의 절절한 저항을 말살할 수 없었다.” ②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인민의 민족적 각성을

46)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위의 책, 216쪽.

47) 위의 책, 120쪽.

48) 위의 책, 136쪽.

(22)

크게 높여주었다.” ③ “식민지예속국가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발전에 적 지 않은 고무적 영향을 주었다.”49)

그 ‘교훈’도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다. ① “3.1봉기는 탁월한 수령의 령 도, 혁명당의 지도가 없이는 어떤 혁명운동이든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한 교훈으로 남기였다.” ② “3.1봉기는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더 는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으며 부르죠아민족주의자가 민 족해방운동의 사상적 기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한 교훈으로 남기였 다.” ③ “3.1봉기는 민족적 독립과 사회적 진보를 위한 혁명운동의 승리 를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주체적인 혁명역량 을 튼튼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심각한 교훈으로 남기였다.” ④ “3.1봉 기는 무장한 ‘원쑤’들과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 맞서야 한다는 심각한 교훈으로 남기였다.”50) 이러한 3.1혁명에 대한 기술은 ‘공산혁명’을 위한

‘교훈’을 얻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2. 남한의 평가·인식과 그 ‘전복’

5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3.1혁명에 대한 연구는 북한과 달리, 주 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민족주의 세력(임시정부)의 관점을 계승 발전시 켰다. 대체로 민족대표 33인의 3.1혁명선언을 중심으로 그 전개과정을 구 체적으로 논증한 연구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51)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 을 중심으로 냉전시기 북한의 연구에 대한 비판이 대한민국의 3.1혁명 연

49) 위의 책, 184-187쪽

50) 위의 책, 188-195쪽. 북한은 『조선전사』 이후 2011년에 『조선통사』를 발간하였다. 한 일합병이라는 용어가 등장 하는 등 몇 가지 서술에 용어의 차이점이 보이지만 그 내용 은 기존의 책들과 대동소이하다.

51) 이에 대해서는 이정은, 「3·1운동 연구 100년 : 인식 재확대를 위하여」, 유관순 연구 20, 백석대학교 유관순 연구소,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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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52) 특히 동아일보에서 발간한 『三

·一運動 50周年 紀念論集』(1969)53)과 『3·1운동과 민족통일 :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1989)은 남한의 시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 성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한의 연구경향 속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한 안병 직과 성대경·강만길 등이 다른 시각(계급사관)에서 3.1혁명에 접근하였 다. 여기에서는 손병희를 ‘소극적 친일파’로 인식한54) 안병직, 3.1혁명의 중심이 ‘노동자 계급’이었다고 평가한55) 성대경보다56) 강만길57)의 주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살펴볼 지수걸의 3.1

52) 洪以燮, 「 「조선민족 해방 투쟁사」: 李羅英 <書評>」 , 『共産主義問題硏究』 1-1, 韓國反 共聯盟調査硏究室, 1964; 서대숙, 「3·1運動에 대한 北漢史觀」, 『3·1운동과 민족통일 :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 동아일보사, 1989. 한편 관변 측의 입장이 반영된 북한의 3.1혁명 인식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백진, 「北傀는 三·一運動을 어떻게 冒瀆하고 있나」, 『時事』 20, 내외문제연구소, 1963; 최준, 「三·一運動의 歪曲과 脫民 族史觀」, 『북한』 5, 북한연구소, 1983; 한재덕, 「엉뚱한 金日成의 三·一運動觀」, 「자 유」3, 1965; 박춘추, 「獨立運動의 歷史를 날조하는 北傀, 三·一獨立運動 六一周年 <

특집>」, 『정훈』 75, 국방부, 1980; 박인호, 「북괴가 날조한 3.1운동사 ; 3.1운동 발발 66주년 에 <特輯>」, 『자유공론』 216, 한국반공연맹 자유공론사 1985.

53) 동아일보는 김성수 등 동아일보 세력이 3.1혁명이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하여 동아일보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경향도 보인다(崔炯鍊, 「三一運動과 中央學校」, 『三·一 運動 50周年 紀念論集』, 동아일보사, 1969). 하지만 김성수는 3.1운동에 대해 방관적 인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역사 왜곡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신운용, 「김성 숙의 친일의식 형성과 전개」, 『선도문화』 13, 국제뇌과학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2 참조). 아울러 이병도(이병도, 「三一運動의 回顧」, 『신천지』 5-3, 서울신문사 1950) 등 의 친일세력이 3.1혁명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몰역사적이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54) 안병직, 「三·一 運動에 參加한 社會階層과 그 思想 」, 『역사학보』 47, 역사학회, 1969, 20쪽.

55) 성대경, 「3·1운동 시기의 한국 노동자의 활동에 대하여」 『역사학보』 47, 82-83쪽.

56) 지수걸은 안병직·성대경이 『역사학보』 47에 발표한 논문의 성격을 계급투쟁적 관점에 입각한 논문이라고 평가하였다(지수걸,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교훈」, 『3·1 민족해방 운동연구: 한겨레신문 주최 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 심포지움 논문집』(한 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편), 청년사, 1989, 26쪽).

57) 강만길, 『月刊讀書』. 41, 1980; 「三·一運動의 主役 은 누구인가? <座談>」, 『基督敎思 想. 237』,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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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강만길의 그것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기 때 문이다. 강만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3·1운동이 일제 강점기 우리민족운동의 최대성과 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결국 3.1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략) 3.1운동이 적어도 민족운동으로서는 일단 성공했다고 봅니다. (중략) 임시정부라는 체제하에서나마 일 단은 국민주권국가체제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 겠느냐는 것이고 그 점에서 3.1운동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항 일운동 측면에서는 사실 실패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항일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선총독부를 쫓아내 고 이 땅에 독립 국가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 요.58) (중략)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의 우리 민족운동내지 항일 운동을 역량 있게 이끌어나갈 만한 체제가 되지 못했다. 민족운동 전선, 항일운동 전선에 분열을 가져 온 셈입니다.59) (중략) 식민지 통치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문화운동적인 측면, 자치운동적인 측면, 이런 방향으로 일부가 나간 게 아니냐, 그렇게 되니까 일제 는 3.1운동에서 한번 고조되었던 민중적인 측면이 그 이후에는 역 사의 표면에 대단히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 아니냐, 그 표 면에 나선 민중적인 측면의 운동이 결국은 좌익운동으로 연결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에 있어서 지난날 그것을 주동적으로 이끌어온 소위 지도세력과 민중적 측면의 세력 사이 에 분열과 대립이 나타난 것입니다.60) (중략) 3.1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층의 역할이 해방과 더불어 완전히 제거되었느냐 하는 문제

58) 강만길·이만열·진덕규, 「三·一運動의 主役 은 누구인가? <座談>」, 『基督敎思想.

237』, 1978, 109쪽.

59) 위의 글, 110쪽.

60) 위의 글,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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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우리가 한번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3.1운동의 의의를 높 이 평가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지도세력 이 3.1운동 이후 걸었던 길은 전혀 무시한 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만 평가가 된다면 해방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61)

이러한 강만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죈다. ① 민중과 대립한 민족 대표 33인은 3.1혁명 이후 민중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② 3.1혁명의 주체는 민중이었다. ③ 민중은 좌익(공산주 의)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④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을 이끌어나갈 역량이 없는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전선·항일운동 전선에 분열의 원인이었다. 이 는 간단히 말하면, 민족대표 33인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3.1혁명 의 중심인 민중의 활동이 공산주의자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임시정부는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대일 항쟁기와 국권회복 이후 현재까지 북한(공산주의 세력)의 입장과 같은 선 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2)

그런데 강만길의 이러한 주장이 지수걸의 논문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눈과 귀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수걸이 학맥 상으로 연결된 강만길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해가 가 는 대목이다. 기왕에 축적된 3.1혁명의 연구를 “1948년 단정 수립을 합리 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일방적으로 강조한63) 지수걸은 1989년 간행된

『3·1민족해방 운동연구: 한겨레신문 주최 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 심 포지움 논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61) 위의 글, 112-113쪽.

62) 이러한 강만길의 입장은 『고쳐쓴 한국사』(창작과 비평사, 1994,42-46쪽)에서도 확인 된다.

63) 지수걸, 위의 논문,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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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집(『3·1민족해방 운동연구』: 글쓴이)에 수록된 개별 논 문들의 결론을 중심으로 하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검토해 보려 한다. 미리 견해를 밝히자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3·1운 동의 분수령적 의의, 다시 말하자면 이 운동을 계기로 민중이 민족 해방운동의 주도권을 점차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 하려고 한다. 현 단계 민족주의운동의 과제를 염두에 두면서 3·1 운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참된 교훈이 무엇인가를 되 물어 보고자 한다. 3·1운동을 통해서 지게 된 민족해방, 민중해 방의 민족사적 과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3·1운동의 교 훈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64)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북한의 3.1혁명 연구 방법론(계급사관)이 남한 의 연구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1980년 대 권위주의 체제의 반민주주의적인 억압구조와 이에 대한 대항 논리를 북한의 이론에서 찾았던 대학 강단의 ‘진보’를 자처하는 일련의 젊은 학 자군이 앞장섰던 시대적 배경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연구는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함께 하고 있던 지수 걸 등 13명이 필자로 참여한 『3·1민족해방운동연구 : 한겨레신문 주최

64) 위의 논문,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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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 심포지움 논문집』65)이다.

이와 같은 연구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이른바 ‘민 중’을 강조하는 강만길과 지수걸 등의 연구 경향이 북한의 주장과도 근본 적으로 같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일정하게 맞닿아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수걸은 3.1혁명을 계급사관의 입장에서 보겠 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66) “3.1혁명의 날에는 민족대표 33인보다 “민중

65)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3·1민족해방운동연구 : 한겨레신문 주최 3·1운동 70주년 기념학술 심포지움 논문집』, 청년사, 1989. 여기에 지걸수·정연태·조민·이 상윤·조재희·박찬승·권태억·고정휴·정태헌·노경채·임경석·김철·이지원 참 여하였다. 이들은 「책을 내면서」 공동연구자 일동의 명의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민족해방운동의 원동력은 노동자, 농민, 소부르조아, 애국적 민족 부르조아이 며, 이 가운데 주력은 노동계급을 핵심으로 하는 민중이라는 것, 둘째 민중의 역량은 확고한 조직과 과학적 이론으로써만 발휘된다는 것, 셋째 제국주의와 투쟁에서는 오로 지 전면적, 비타협적 투쟁만이 궁극적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 등이다.”(위의 책, 6-7 쪽) 여기에서 『3·1민족해방운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공산주의 세력의 계급사관 의 범주에서 3.1혁명을 평가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3.1혁명에 대한 이들의 평가와 인식은 아무런 학문적 반성 없이 『3·1민족해방운동연구』와 대단 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외 계급사관의 관점에서 3.1혁명을 조명한 대표적인 연구자로 윤해동(「3.1운동과 그 전후의 부르조아민족운동」, 『남북한역사인식 비교강의』, 일송정, 1989)·윤덕영(「3·1운동과 1910·20년대 부르주아민족운동」, 『북 한의 한국사인식』, 한길사. 1990)·김보석(「광주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청년·학생조직」

, 『역사비평: 3.1운동 70주년 민족해방투쟁의 주체와 성격을 새롭게 밝힌다』 6, 역 사비평사, 1983)·정용욱(「3·1운동에 나타난 노동자·농민의 진출」, 『역사비평』 4, 역 사문제연구소, 1987)·이준식(「1930년대 초 함경도지방의 무장농민투쟁」, 위의 책)·

윤석수(「조선공산당과 6·10항일시위운동」, 위의 책)·김광운(「원산총파업과 노동운동 의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 위의 책)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 제연구소 소속 일부 연구자는 계급사관의 입장에서 3.1혁명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고 전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북한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로 보인다. 특히 계급사관 관점에서 역사 연 구를 하던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의 연구자들 가운데 2000년대 이후 일본 의 교과서 문제를 전후로 식민지근대화론과 독도공유론의 이론적 근간이 된 ‘자유주의 사관’과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전향한 사례(신운용, 「한국 학계의 ‘반민족주의’ 논조와

‘독도공유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Ⅰ-배성준의 독도공유론을 중심으로」, 『단군학회』

38, 단군학회, 2018; 「한국 학계의 ‘반민족주의’ 논조와 ‘독도공유론’에 대한 비판적 검 토 Ⅱ-이신철의 독도공유론을 중심으로」, 『단군학회』 39, 단군학회, 2018 참조)는 한 국 현대 사학사 분야에서 앞으로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다.

66) 지수걸, 「3.1운동과 국내 공산주의 계열의 민족해방운동」,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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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김일성 일가부치를 떠올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67)라고 읽히는 주장 을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민중들의 역사창조 역량을 최대화하는 쪽으 로 ‘3.1운동사상’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68) 주창하였던 것이다.

특히 지수걸은 “3.1운동은 불분명한 지도부, 자연발생적 민중봉기, 무 계획적인 운동전략 등 많은 한계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69)라고 3.1혁명을 평가하면서 조선공산당 과 북한의 3.1혁명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긍정적 으로 기술하였다.70) 더 나아가 그는 민족주의 세력(임시정부 세력)의 3.1 혁명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자기 세력의 반민족성과 반민중성을 은폐 하기 위한 것.”71)이라는 일방적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그의 주장은 윤덕영이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의 주장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72)

더 나아가 지수걸은 3.1혁명의 「의의」 부분에서 “민족대표들은 민족자 결주의, 즉, ‘윌슨의 정의감’과 ‘열국의 자비심’, 그리고 ‘일본의 이성’에 기 대를 걸고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처음부터 부질없는 몽상에 불과했다. (중략) ‘민족대표’들의 이 같은 외세 의존적인 태도는 민중에게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73)라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 는 북한과 같은 관점에서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폄훼’를 거침없이 하였던 것이다.

67) 위의 논문, 286-287쪽.

68) 위의 논문, 288쪽.

69) 지수걸,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교훈」, 3쪽.

70) 위와 같음.

71) 지수걸 위의 논문, 23쪽.

72) 이는 윤덕영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의 소장연구자들의 인식은 많 은 점에서 북한학계의 인식과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민중의 역할에 주목하여 3.1운동 을 자발적인 민중들의 운동으로 보고,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의 한계와 제한성을 비판 하며, 3.1운동을 계기로 민족해방운동에서 민중들의 주도권과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 이 강화되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거의 일치된다.”(밑줄: 글쓴이/「3.1운동과 1910·20년 대 부르주아민족운동」, 『북한의 한국사인식』 2, 한길사, 1990, 156쪽).

73) 위의 논문, 32쪽.

(29)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수걸은 다음과 같이 공산주의 세력의 주장을

‘연상’케 하는 더욱 과격한 주장을 이어갔다.

“3.1운동은 우리에게 남겨준 엄정한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 첫째는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진정한 주체는 노 동계급을 핵심으로 하는 민중뿐이라는 것, 둘째는 민중의 역량은 확고한 조직과 과학적 이론으로서만 발휘된다는 것, 그리고 셋째 제국주의와의 투쟁에 있어서는 오로지 전면적 비타협적인 투쟁만 이 궁극적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 등이다.74)

이처럼 북한의 인민이 민중으로 바뀐 것 이외 크게 다른 점이 없는 지 수걸의 주장은 거의 대일항쟁기 공산주의 세력과 북한의 그것과 깊은 학 문적 연관성이 없다고는 보기 어렵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자신들의 정치 적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3.1혁명을 이용한 것처럼, 북한도 김일성 체제 의 완성을 위해 3.1혁명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 이 점에서 지수걸 등 의 주장은 계급사관 또는 민중사관에 입각한 ‘정치 행위’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사실에 기반한 ‘학문 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임지현·이성시·이영훈·박지향 등 중심이 된 반민족주 의를 표방한75)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핵심인사 윤해 동도 다음과 같이 3.1혁명에 대한 지수걸과 유사한 평가와 인식을 드러냈 다.

“전체적으로 보면 북한에서는 민족운동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3·1운동과 그에 전후한 민족운동사 전체를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74) 위의 논문, 36쪽.

75) 신운용, 위의 논문 참조. 윤해동 등의 반민족적 성향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롬, 2004, 휴머니스트)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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