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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南 玲, Nam Young)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운영위원

문서에서 당사자의 당사자의 당사자의 (페이지 53-58)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하고 대한항공 객실승무부에서 근무한 후 결혼을 했다. 자 폐성장애를 가진 아들을 양육하면서 오진과 정보 부족으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한 경험을 토대로 2006년 국립특수교원의 강사로 4년에 거쳐 교장, 교감 및 유치원 원장들에게 특수학급에서 학부모 와 교사가 힘을 합쳐 특수교육대상자와 원적학급 교사를 지원하는 모델을 제공함으로 학교 내 지도 자의 인식을 개선하고 특수학급 지원을 강화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강북 장애인 복지관’

및 장애인복지관, 종합사회 복지관,‘함께 웃는 재단’ 및 복지재단, 각 지역 특수교육센터 등에서‘생 애 주기로 본 가족지원’과 ‘장애아의 형제자매 지원’ 및 ‘학령기 이후 사회 전환과 직업 훈련 및 준 비’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며 당사자의 부모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양육 기술을 지도하고 자녀의 문제 행동에 대한 고충을 완화시키며 생애주기에 걸쳐 어떤 교육과 지원이 필요한 지에 대해 사례 중심 으로 교육하고 있다. ‘함께 웃는 날’, ‘꿈꾸는 사람들’,‘세계장애동향’등에 기고하며, ‘자폐친구들의 거침없는 하이 킥’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출판하고 ‘자폐학회’ 등에서 사례 중심의 강연을 하고 있 다. 또한 SBS, CBS, 참새 TV 등 방송 출연과 Facebook, 블로그 등 인터넷 기반의 활동을 통한 인식 개선과 자폐성장애 인식개선 글로벌 캠페인인 Light It Up Blue 캠페인 확산을 위한 노력을 기 울이고 있다. 2010년 발달장애 성인기 전환과 중장노년 생애 모델을 만들기를 목표로 삼고, 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일대의 제반 지원 기관과 주거, 여가 영역에 걸쳐 실체적 답사를 하고 돌아와 ‘한 국전환교육 연구소(KTIL)에 합류해 특수교사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연구에 참여하고 함평 영 화학교와 대전 및 광주교육청과 함께 ’자립생활 체험 캠프‘를 진행했다. 이후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의 국제교류 및 협력 운영위원으로 일하며 ‘Autism Speaks'의 어드바이저로 합력하여 GAPH in Korea(Global Autism Public Health Initiative) 교류를 담당하고 있으며 ‘세계 자폐성장애 인식의 날’

과 인식캠페인인 ‘Light It Up Blue(파란불을 켜요)'를 도입시켜 보건복지부와 함께 기념 인식 개선 에 앞장서고 있다. 2013년 12월부터 2015년까지 알바니아 및 말레이시아의 건축가와 교류하며, `친 자폐적 건축 환경 가이드라인(Autism -Friendly Architectural Guidelines)’를 번역해서 서울시립어린 이 병원 발달센터 건립을 위한 건축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현재 빛이나 소리, 색채 등 건축환경이 발달장애인에 미치는 영향 연구지원을 하고 있다. 2015년 4월부터 WHO-Autism Speaks의 '부모 양육 기술훈련(Parent Skills Training) 연구사업' 도입에 견인차 역할을 해 전문가위원 들이 프로젝 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연결 및 지원을 했다.

대만 International Conference for 2014 World Autism Awareness Day 및International Symposium on Autism Spectrum Disorders, 말레이시아(International Seminar On Autism Malaysia, 샹하이 IMFAR(Imternational Meeting for Autism Research 및 ALN(Autism Leadership Network) Conference에 참가하여 관련 데이터 수집과 연구와 협력을 촉진하며, 당사자와 가족에게 자원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에 합류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전문가들과 협력을 통해 발달 장애를 가진 어린 자녀를 둔 가정들을 지원해 국가 시스템 안에서 잘 적응하고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힘쓰면서 아들과 같은 성인발달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다가 부모 사후에도 같은 수준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생활 모델을 만들고 제도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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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바라본 교사상

- 특수교사가 아니라 ‘선생님’입니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남영

우선, 단국대학교의 개교 7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단국대학 교 개교70 주년 기념 대학원 특수교육학과 홈커밍 학술 세미나’의 강연 대주제로 ‘당사자의 입장 에서 바라본 특수교육’을 정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시며 ‘부모가 경험한 특수교육’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대학원장님의 요청을 받고 기쁜 마음이 참 컸습니다. 한국 특수교육계에 당사자와 부모에 게 귀를 기울이는 분들이 이렇게 많아지신데 대한 감사와 더불어 앞으로 이어질 변화에도 기대가 큽니다.

제게는 올해 26 살이 된 듬직한 아들이 있습니다. 정규직으로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을 다니며 혼자서 출퇴근하고, 밥을 사먹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는 청년입니다. 아빠보다 훨씬 옷도 잘 갖춰 입고 빈대떡도 잘 부치며 할아버지 간병을 하는 엄마를 위해 설거지를 ‘스스로’ 해주는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혼잣말을 수시로 중얼거리기도 하고 스스로 정한 규칙이 굉장히 많으며 꼭 지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 강한 그는 ‘자폐성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독특하고 키우기 힘들어 소아정신과에 데리고 갔던 36개월에 ‘반응성 애착장애’로 진단 을 받았습니다. 이후 장애인 등록을 하려 ‘고기능 자폐’ 혹은 ‘전반적 발달장애’로 재진단을 받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아쉽지만 공교육 안의 ‘특수 교육’은 꿈도 못 꾸고 사교육과 각종‘치료’를 받았을 따름이었습니다. 구립어린이집에서도, 병설 유치원에서도,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에서 4 학년까지 아이를 ‘특수교육’과 관련짓지 못 한 제가 참 아둔하고 미련해서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거쳐 온 교육기관마다 제게 조언을 해주시며 조심스레 학교 내 ‘특수교육’을 권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제 아이는 특수교육 대상이 아니라 심리치료 대상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우기며 유치원 과정과 학교 교과 과정을 힘겹게 좇아가는 동시에 모래놀이며 다른 놀이 치료와 직업치료 중심으로 방과 후 시간을 채웠습니다.

학급 친구들을 좇아가려 시간과 공을 서너 배는 더 들였지만 초등학교 3 학년 1학기가 되자 아이와 저는 완전히 지쳤고 격차를 메울 수 없을 지경에 다다라 비로소 일반 교과학습에 백기를 들었습니다. 자폐성장애나 지적장애를 가진 아동에게 ‘조기 중재’가 관건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가슴을 쳤으나 그나마 일반 교육과정에 따라가기 위해 발달이 늦은 아들을 가르치려 수많 은 과정을 쪼개고 나누어 연습을 시켰기에 이후 모든 배움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 연습 중 가 장 큰 부분은 가정이나 학교생활에 관련된 기술이 차지했으니 불행 중 다행으로 여깁니다.

어찌 보면 출발부터 특수교육에서 시작한 것이 나을 수도 있었지만 미련을 접고 ‘특수교육’이 무 엇인지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집안의 반대로 재진단을 받지 못 했으나 사실상 초등 학교 3학년 무렵엔 아들이 ‘자폐증’(당시엔 그렇게 불렀지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학교에서 찾을 길은 단 한 가지, ‘특수학급’이었습니다. 떨리는 가슴 붙잡고 ‘특수반’이란 곳의 문 을 열고 들어가 선생님을 뵙자마자 눈물을 와락 쏟았습니다. 당시 일기장에 쓴 오글거리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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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백합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강-을 건넜다. 내 아이는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이다.’

이미 머리로 깨달았던 사실을 비로소 가슴이 받아들이니 의외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지금의 활동을 보시면 제가 이같이 늦게 학교 내 특수교육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 하실 거라 여깁니다. 너무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사실상 초등학교 5 학년부터 특수학 급에 통합하기까지 법적, 제도적 배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하려 들 었으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요. 물론 제 잘못만은 아닙니다. 당시의 유행병 같은 진단 오류와 정보 부족이며 제도적 뒷받침의 부재 탓이 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아이와 제가 받은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고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기 위해 너무 힘들었으 며, 저희 모자뿐 아니라 수많은 가정이 비슷한 아픔을 겪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장애 인식’과 ‘수용’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 쓰린 경험을 통해 드러냅니다.

일반학급에서 특수학급으로 벽을 완전히 넘어가는 데는 ‘가족의 인식 부족’과 제도의 불합리성 으로 인해 거의 2 년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아이는 일반학급에서 전체 수업을 받아야 했지 만 저는 특수학급 선생님과 긴밀하게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몰래 수업 외 활동을 특수학 급에서 시작했습니다.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짐 한 덩어리를 맡으셨음에도 기꺼이 특수교육의

‘가갸거겨’를 제게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바로 이 대학의 졸업생이십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는 장애인과 제 아이를 일치시키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사교육과 치료가 아니라 학교교육이 중심이 되는 생활을 굳히기까지 제 고집을 감내하시고 참으 며 설득해 주신 ‘박은희’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크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모자 생애 첫 특수교 사이십니다.

가족의 반대에 맞서 제대로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용기 주시고, 근거 자료를 찾아주시며 진단 절차도 상세히 알려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엔 그리 흔치 않던 ‘부모 교육’이 있을 때마다 알려 주고 ‘자폐학회’라는 것이 있다며 가보라 권유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권유로 찾아갔던 모 대학교 부설 복지관에서 ‘전환’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어도 장애가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 았지만 만약 평생 장애인으로 지내야 한다면 ‘모든 계획과 목표를 다시 정하고 마음을 아주 단단 히 먹어야 한다.’고 되뇌며 미친 듯 며칠을 보냈습니다. 스무 살이 되어 사회로 전환해야 할 ‘아 들을 지킬 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환’을 키워드 삼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제가 특수교육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참 길게 썼습니다. 이런 과정을 뼈저리게 겪었 기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후배 부모들이 저와 같은 미련함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반면 교사’가 되어 나섰습니다. 2006년 국립특수교육원의 ‘장애아동 양육사례발표’를 시작으로, WHO-Autism Speaks 부모양육기술훈련(Parent Skills Training)의 견인차 역할에 이어 개인과 개 인, 개인과 단체, 단체와 단체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세상으로 끌어준 역할을 하 신 특수학급 선생님 두 분을 만난 저는 행운입니다.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거나 새 학년이 시작될 때 모든 부모는 산통에 가까운 진통을 겪습니다. 어 떤 선생님을 만나 남다른 내 아이를 이해시키고 어떻게 더불어 1년을 보낼까 하는 고민으로 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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