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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필자는 안중근의 종교사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 을 살펴본 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계봉우의 평가와 같이 ‘대종교가’였다. 그는 천주교신자 이면서도 동시대의 천주교계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한국독립 운동사에 길이 빛날 하얼빈의거를 단행하였다. 그런데 안중근의거는 단순히 한국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 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공고화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여긴 그의 주체 적 종교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민권을 ‘천명의 본성’으로 확신한 안중근은 난신적자의 제거와 문 명독립국의 쟁취를 민권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민권의식

재교육과 새로운 여론 형성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러므로 교육자들, 특히 청 소년 교육에 헌신하거나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 애호의 새로운 감정을 기려 주는 것이 자신들의 가장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하겠다.”

88) 위의 책, 269쪽. “세계적 혹은 지역적 기존 국제기관들은 분명 인류를 위하 여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것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전 향상을 도모하며 어 떤 형태의 전쟁도 미연에 방지하려는 현대의 중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인류 공동체의 국제적 기초를 놓으려는 최초의 시도라고 생각된다.”

은 ‘김중환의 웅진군민 돈 5천 냥 갈취사건’과 ‘이경주사건’ 등에서 표출되었다. 이는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에 기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안중근이 독립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합’이었다. 이 는 그가 단순히 반일독립투쟁의 이론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 다. 그에게 단합은 인류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라는 하느님의 명 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화는 안중근이 추구했던 최종 목표였다. 평화는 그에게 하느님의 뜻이고 동시에 명령으로 귀결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 서 그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평화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 해 무엇인가 해야 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의거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영원한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공동은행의 설립, 공동군 대의 창설, 문화의 상호이해를 실행할 수 있는 평화회의를 만들자고 주 장하였다. 동양평화는 천주교 교황의 권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고 본 그는 평화회의를 교황이 보장하면 성공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천주교의 가르침이 이미 안중근 의 활동과 사상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천주교사에서 안중근을 평가할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가 한국천주교 토착 화의 전범이라는 평가를 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평화란 정의의 실현이자 사랑의 결실.”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몇십년 전에 이미 구체적으 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평화는 그에게 하느님의 속성이었다.

때문에 안중근은 일본을 회개시키기 위해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봉우는 안중근을 박애정신의 극치라고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죽기 전에 빌렘 신부와 가족에게 보낸 유언장에서 “천당 에서 만나자.”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도 죽어서 꼭 천당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89) 이와 관련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주여. 주여”한다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며 힘들여 일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 안에서 형임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말과 실천으로써 실제로 사랑하며, 이로써 진리를 증명하고 하늘 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는 것이다.90)

그러나 한국천주교의 안중근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뮈텔주교의 그 것에 갇혀 있는 인상이 짙다. 이에 대해 1993년 김성태 신부는 “한국 천주 교회가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어떠한 선언을 공표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교계지도자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 체가 다함께 역사적 안목에서 안중근의사가 순국 전에 고해성사를 보았듯이 반성할 때가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91)라고 지적 하였다. 이제야 말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하느님의 명령 을 실현하기 위해 살겠노라.”라는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끝으로 세계는 여전히 민권(인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계속 전쟁이 일어나고 민 족과 국가 사이에 반목이 심화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의미 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은 오늘날 미래를 열 사상적 에너지 임에 틀림없다. 안중근의 종교사상은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안중근사상을 평가해야 한다.

89) 국사편찬위원회, 「안중근의 옥중 서한 및 서면광경에 관한 건」, 󰡔한국독립운 동사󰡕 자료 7, 528∼529쪽.

90) 앞의 책, 277쪽.

91) 김성태, 위의 논문,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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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 2014년 1월 20일 심사완료일 : 2014년 2월 21일 게재확정일 : 2014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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