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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종교사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신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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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운용

*

66)

Ⅰ. 들어가는 말

Ⅱ. ‘대종교가’ 안중근과 박애주의

Ⅲ. 주체적 종교의식과 ‘민권’⋅‘단합’⋅‘평화’의 의미

Ⅳ.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안중근사상

Ⅴ. 나가는 말

【국문요약】

필자는 안중근의 종교사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살펴보 는데 이글의 목적을 두었다.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계봉우는 안중근을 ‘대종교가’로 평가하였다. 안중근은 천주교신자이면서도 동시대의 천주교계와 다 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하얼빈의거를 단행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한국독립과 동양평화의 공고화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여긴 그의 주체적 종교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

(2)

민권을 ‘천명의 본성’으로 확신한 안중근은 난신적자 제거와 문명 독립국 쟁취를 민권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민권의식은 ‘김 중환의 웅진군민 돈 5천 냥 갈취사건’과 ‘이경주사건’ 등에서 표출되 었다. 이는 물론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안중근이 독립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합’이었다. 이 는 단순히 반일독립투쟁의 원리로만 작동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 게 단합은 인류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화는 안중근이 추구했던 최종 목표였다. 평화는 그에게 하느님의 뜻이고 동시에 명령으로 귀결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 서 그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세계평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무엇인가 해야 했던 것이고, 그것은 바로 의거로 귀결되 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영원한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공동은행 의 설립, 공동군대의 창설, 문화의 상호이해를 실행할 수 있는 평화 회의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동양평화론은 천주교 교 황의 권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고 본 그는 평화회의를 교황이 보 장하면 성공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천주교의 가르침이 이미 안중근 의 활동과 사상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천주교사에서 안중근을 평가할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가 한국천주교 토착 화의 전범이라는 평가를 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평화란 정의의 실현이자 사랑의 결실”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몇십년 전에 이미 구체적으 로 실천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평화는 그에게 하느님의 속 성이었다. 때문에 안중근은 일본을 회개시키기 위해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봉우는 안중근을 박애정신의

(3)

극치라고 평가하였다.

안중근은 죽기 전에 빌렘 신부와 가족에게 보낸 유언장에서 “천당 에서 만나자.”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도 죽어서 꼭 천당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여. 주여”한 다고 모두 천국에 들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 며 힘들여 일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한국천주교의 안중근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뮈텔주교의 그 것에 갇혀 있는 인상이 짙다. 김성태 신부는 1993년 “한국 천주교회 가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어떠한 선언을 공표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교계지도자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다함 께 역사적 안목에서 안중근의사가 순국 전에 고해성사를 보았듯이 반성할 때가 이르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제 야 말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실현하기 위해 살겠노라.”라는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민권(인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민족과 국가 사이에 반목이 심화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의 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은 오늘날 미래를 열 사상적 에너 지임에 틀림없다. 안중근의 종교사상은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 신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주제어 : 안중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동양평화론, 계봉우, 대종교가, 한국천주교.

(4)

Ⅰ . 들어가는 말

안중근의 의거와 사상에 대한 연구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논의되 는 경향을 보이다가

1)

1993년 이후에는 천주교의 이상 실천 결과로 보는 시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

이러한 입장은 주로 천주교 측의 이론가들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3)

특히 노길명은

1) 조동걸,

안중근의사 재판기록사의 인물 김두성고-구한말 연해주지방 의병 사의 단면

」, 󰡔춘천교육대학논문집󰡕 7, 1969; 신용하; 「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 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윤경로,

「안중근사상연

구-의병론과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 󰡔민족문화󰡕 3, 한성대 민족문화연구 , 1985;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2.

2) 안중근의 종교상에 대한 연구는 크게 1993년 한국교회사연구소 100회 심포 지엄을 중심으로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993년 이전의 시기 로 논문은 다음과 같다. 이주호,

「신앙인 안중근론-평신도사도직운동의 선

구자

,

최석우신부회갑 논총

』, 1982. 제2기는 1993년 한국교회사연구소

100회 심포지엄으로 이때 다음과 같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최석우, 「안중근 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

」, 󰡔교회사연구󰡕 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노길명,

「안중근의 가톨릭신앙」, 󰡔교회사연구󰡕 9; 홍순호, 「안중근의 동양평화

론」, 󰡔교회사연구󰡕 9; 조광,

「안중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 󰡔교회

사연구󰡕 9. 제3기는 1993년 이후이다. 김춘호,

안중근의 의거(義擧)는 정당 한가?-사회윤리적 관점에서

」, 󰡔신학과 철학󰡕 2,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00; 황종렬,

「“천명」

인식 살기의 두 유형: 통합형과 분열형」,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안중근 토마스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한 신학적 응답), 분도출판사, 2000; 김춘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사회적 차원-

현대‘살인’(환경파괴)과 현대적 ‘살인’(안중근의거)」, 󰡔가톨릭신학과 사상󰡕

35, 가톨릭대학교, 2001; 정인상,

안중근의 신앙과 윤리

, 󰡔교회사연구󰡕

1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차기진,

「安重根

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

󰡔교회사연구󰡕 16; 윤선자,

민족운동과 교회

」, 󰡔한국근대사와 종교󰡕 국학

자료원, 2002; 황종렬,

안중근편 교리서에 나타난 천

세계이해

」, 󰡔안

중근의 신앙과 사상󰡕,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5; 신운용,

「안중근의거의

사상적 배경」,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안중근의사가념사업회 안중근연

구소, 2009; 김동원,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사상적 성격

」, 『

안중근 연 구의 성과와 과제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10.

3) 특히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안 의사의 의거는 義에 굶주린 나

(5)

안중근과 천주교의 관련성을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모든 애국적인 활동은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이 세상에 구현시키려는 종교적 동 기와 깊은 관련이 있는 활동이며 운동이었다.”

4)

라고 평가하였다.

누구보다도 일찍이 안중근의거의 배경을 천주교사상과 관련된 것 으로 본 이는 계봉우

5)

이다. 안중근을 ‘대종교가’라고 평가한 그는 안 중근의 진면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누구든 예수를 믿고자 하거든 공과 같은 종교가가 되어라. 또 누구든 종 교가가 되어 남을 위하여 피를 흘리고자 하거든 공과 같이 죽어라. 공은 영 생의 면류관을 썼나니라. 공은 에덴동산의 생명과(生命果)를 받았느니라.

공은 영구토록 영화스러운 보좌(寶座)에 예수와 함께 앉으니라.

6)

이러한 계봉우의 주장은 종교성에 대한 착목 없이 안중근을 평가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안중근의거의 배경이 그의 종교적 지향점과 관계가 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동양 평화론」의 저술목적도 천주교의 이상세계(도덕세계)를 펼치는데 있 는 것이다. 그에게 도덕세계의 핵심적 요소는 바로 ‘민권’⋅‘단합’⋅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특히 안중근은 신문⋅재판⋅「동양평화론」에서 의거의 목적을 평 화를 담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안중근의 평화론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는 크게 평화를 종

머지 행한 행동으로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한 안 의사의 의거 는 곧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행위로 보인다”(한국교회사연구소,

안중근기 념 학술 심포지엄 토론 내용 녹음 자료

」, 󰡔교회사연구󰡕9, 132쪽).

4) 노길명, 위의 논문, 23쪽.

5) 윤병석,

「桂奉瑀의 韓國史 著述과 󰡔만고의ᄉᆞ 안중근젼󰡕」, 󰡔실학사상연구󰡕15

⋅16, 무학실학회, 2000년; 조동걸, 「

북우 계봉우의 생애 및 연보와 저술

」, 󰡔

한국학논총󰡕,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6.

6) 󰡔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자,

「만고의ᄉᆞ 안즁근젼」.

(6)

교성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과 1900년대 지식인의 현실인 식이라는 틀에서 보아야 한다는 시각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대표 적인 인물은 홍순호

7)

와 신운용

8)

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기 영

9)

이다.

그런데 몇몇 논자들이 안중근의 평화론이 천주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데 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이 글의 목적을 안중근의 종교사상 핵심이 천주교 교리에 있음을 밝히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데 두었다.

이를 위해 우선 계봉우의 평가를 중심으로 안중근이 대종교가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하여 안중근이 ‘대종교 가’였다는 사실과 동양평화론도 박애정신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이었 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안중근의 종교의식이 주체적이 7) 홍순호는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에

대한 화해와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동양평화뿐만 아니라 세계인류 공영의 사회건설을 위한 안 의사의 용기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정의 사랑 평 화를 토대로 하고 인류간의 사랑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안 의사 자신의 독 자적인 사상체계를 「동양평화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이 이상주의적이면서 주체적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가톨릭 신앙이 독자적 행동주의와 결합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 다”(홍순호, 위의 논문, 58쪽).

8) 신운용은 안중근이 동양평화론 저술목적을 “종교적 절대성을 근저로 하면 서 물질문명(사회진화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도덕세계회복에 두었 다”고 하면서 그 특징을 “구체성, 실천성, 개방성, 평화지향성, 현재성, 미래 ”라고 하였다(신운용,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의 ‘극동평화론’」,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참조).

9) 최기영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을 지나치게 독창적인 견해로나 천주교의 영향을 강 조하는 등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1900년대 후반기 지식인의 현실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천착할 필요가 있다”(최기영,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

한 논형

」, 󰡔교회사연구󰡕 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64쪽). 특히 동양평화론

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안창호를 들고 있다(최기영,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 일조각, 2003, 110쪽).

(7)

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민권’⋅‘단합’⋅‘평화’의 의미를 중심으로 그의 종교사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한다. 더 나아가 한국독립과 동양평화가 천명(하느님의 명령)의 실천방법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사실을 기술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현대 세계의 사목 헌 장」 등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정신이 안중근의 활동과 사상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술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천주교사(史)의 안중근 위치를 보다 분명하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 ‘대종교가’ 안중근과 박애주의

계봉우는 안중근을 대상무가(大尙武家)⋅대교육가⋅대시가(大詩家)⋅

대여행가라고 하면서 특히 ‘대종교가’라고 평가하였다.

10)

그는 기독 교의 특징을 “예수교는 평등주의이며 진화주의며 부강(富强)주의며 단합주의며 자유주의며 중혼(重魂)주의며 겸선(兼善)주의며 박애주의 니라.”

11)

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천주교)의 특징을 안중근이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무엇보다 계봉우는 안중근이 대종교가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 하고 있다.

12)

우선 그는 “신부 홍석구에게서 영세를 받고 모든 가족과 더불어 계명(誡命)을 정성껏 지켜 진리를 자세히 연구하다가 보호조약 이 됨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몸을 희생에 바침은 평등주의니라.”

라고 하였다. 평등주의를 그의 종교적 특징으로 들고 있는 계봉우는

‘평등주의’란 “국권회복을 위해 몸을 바치는 것.”

13)

이라고 규정하였다.

10) 󰡔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자,

「만고의ᄉᆞᆞ 안즁근젼」.

11) 위와 같음.

12) 위와 같음.

13) 위와 같음.

(8)

그런데 이 평등주의는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볼 때 바로 ‘평화주의’

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즉, 그에게 평화의 의미는 “모두가 자주 독 립하여 갈 수 있는 것”

14)

이었다. 말하자면 국제정치질서는 ‘자주’와

‘독립’을 근간으로 유지된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자주와 독립이 확보 되지 못하면 국제평화와 국제질서상의 평등성도 깨어진다는 것이다. 계봉우는 안중근의 다른 종교적 특성을 “청년자제를 교육하여 지 식과 도덕을 기르며 실업을 권면하여 농사하는 이는 농사하고 장사 하는 이는 장사하게 함은 진화주의니라.”라고 하여 ‘진화주의’라고 주 장하였다. 대한제국의 미래는 교육에 있다고 확신한 안중근은 삼흥 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운영하였다. 또한 동생 정근에게 실업 에 종사하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15)

계봉우는 이러한 안중근의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안중근의 진보에 대한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조 부치 타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은 “한국의 진보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고 있으며, 한국을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진보)를 가능케 한 이토를 죽인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

16)

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안중근은 “일본이 위생 교통시설의 완 비, 학교의 설립 등을 내세워 한국의 진보를 돕고 있다고는 하나 이 는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며, 수많은 인명을 살 상하면서도 이를 한국을 위한 것이라고 거짓 선전을 하였으며, 의거 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이토를 단죄함으로써 일본 을 각성시키고 침략행위를 중지시키려는 방편이었다.”

17)

라는 평화논 리를 내세웠다. 이처럼 안중근에게 진보란 독립과 평화라는 ‘하느님

14) 위와 같음.

15) 국사편찬위원회,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541쪽.

16) 신운용 편역,

안중근신문조서 제6회」, 󰡔안중근신문기록󰡕(안중근 자료집 3),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2010, 106∼110쪽.

17) 위와 같음.

(9)

의 명령’이 실현된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계봉우는 “평양군기(軍器)를 앗아 뺏고자 함과 이범윤(李範 允)의 군사를 합하여 회령 등지에서 싸움함과 청년을 교육하여 후비 병(後備兵)에 채우고자 함은 부강주의니라.”

18)

라고 하여 안중근의 국 내진격작전의 전개를 부강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범윤 과 최재형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한계성에 직 면하여 ‘부강주의’의 방안으로 ‘단합’이라는 해법을 제시하였다. 결국 단합이라는 시대정신은 1908년 국내진공작전을 가능케 했던 원동력 이었다.

19)

안중근은 거병을 망설이고 있던 이범윤을 만나 “조국 흥망이 조석 에 달렸는데, 다만 팔짱끼고 앉아 기다리기만 한다면 재정과 군기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올 것입니까.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까.”

20)

라고 설득하여 국내진 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하늘에 순응하고.”라는 안중근의 말 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거병이 ‘하느님의 뜻이자 명령’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21)

따라서 안중근에게 국내진격작전은 하느님의 뜻 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결국 안중근의 부강주의도 하느님의 뜻인 한국 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계봉우는 “7ㆍ8 형제를 모이어 동의회(同義會)를 만들어 유지(有

18) 󰡔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자,

「만고의ᄉᆞᆞ 안즁근젼」.

19) 신운용,

「안중근의 의병투쟁과 활동」,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140쪽.

20) 안중근,

안응칠역사

」, 󰡔안중근의사자서전󰡕, 안중근의사숭모회, 1979, 119쪽.

21) 국내진공작전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안중근의 주장은 “현재 이등박문이 그 공을 믿고, 망녕되이 건방지고 눈 앞에 아무도 없는 듯이 교만하고 극악해 져서 위로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함부로 죽이며, 이웃 나라의 의(誼)를 끊고, 세계의 신의를 저버리니, 그야말로 하늘을 반역하는 것이라, 어찌 오래가겠 습니까. (중략)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벌을 받게 되 는 것이니 어찌 각성하지 않을 것입니까”(안중근, 위의 책, 117∼118쪽)라고 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

志)동포를 많이 연락함은 단합주의니라.”

22)

라고 하여 안중근이 대종 교가가 될 수 있었던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재형과 이범윤이 중 심이 된 동의회는 적전분열로 치닫고 있던 러시아 한인사회가 스스 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국내진격작전 을 펼쳤다. 안중근은 동의회에서 활동하면서 최재형과 이범윤 세력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단결을 이끌었던 것이다.

23)

또한 계봉우는 “동지 열두 사람으로 더불어 손가락을 끊고 맹세할 때 에는 그 피로써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쓴 것은 자유주의니라.”

24)

라고 하여 안중근의 ‘정천(正天)동맹’을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그렸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2일 김기룡⋅황병길⋅백규삼 등 10명의 동지들 과 단지동맹이라고 불리는 정천동맹을 결성하였다.

25)

그런데 정천동맹은 안중근의 종교성이 반영된 단체명이라는데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정천(正天)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 유지 라는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안중근 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앙을 역사의 현실에 구현하는데 진력한 종교 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종교적 열정은 특히 “너희(필자: 정근 공근)는 나 의 생사를 위하여 근심하지 말라 성경에 이르기를 나무 잎사귀 하나 가 떨어져도 다 하나님의 명함이라 하였으니 우리들은 다만 하나님 의 명을 기다릴 뿐이라 함은 중혼주의니라.”

26)

라고 한 계봉우의 안중 근 평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안중근이 당시의 신학을 섭렵하였다 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27)

그는 사람들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22) 󰡔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자,

만고의ᄉᆞᆞ 안즁근젼」.

23) 이에 대해서는 신운용,

위의 논문

」,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참조.

24) 위와 같음.

25) 신운용,

안중근 세력형성과 정천동맹(단지동맹)」,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163∼70쪽.

26) 위와 같음.

(11)

서양물질문명의 해악을 질타하면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영혼 불 멸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하였던 것이다. 뿐 만 아니라 그는 물질문명의 한계성을 도덕세계의 부활로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였기 때문에 계봉우는 “안중근의 종교적 열성을 안중근 이 “안중근이(필자) 그대들(필자: 안중근에게 천국에서 만나자고 한 일본인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다 세이지(鎌田 正治))은 다만 세상법률만 알고 천국법률은 알지 못하니 천국에 들어 가고자 하거든 마땅히 천주를 믿고 그 법률을 잘 지키라 함은 겸선 주의니라.”

28)

라 하여 안중근의 종교적 열성을 겸선주의라고 주장하 고 있다. 이처럼 ‘도덕시대’의 부활을 시대의 과제로 삼았던

29)

안중근 은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복음의 전파라는 평신도의 책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30)

무엇보다 계봉우는 “조용히 형벌을 받는 당장에 3분 동안 기도하 고 동양만세를 세 번 부름은 박애주의니라.”

31)

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가 안중근의 종교사상의 핵심을 ‘박애주의자’로 규정한 사실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가 안중근의거의 궁극적인 목적이 ‘박애주 의’의 실천에 있음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안중근의 박

27) 차기진, 위의 논문 참조.

28) 위와 같음.

29) 안중근, 위의 책, 54쪽.

30) 안중근의 복음 전파는 의병투쟁 과정에서 일제에 쫓기면서도 “두 형은 내 말을 믿고 들으시오. 세상에 사람이 만일 천지간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 인 천주님을 신봉하지 않으면 금수만도 못한 것이오. 더구나 오늘 우리들은 죽을 지경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속히 천주 예수의 진리를 믿어, 영 혼의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떻소. 옛글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 도 좋다 하였소. 형들은 속히 전일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 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어떻소.”(안중근,

안응칠역사

」 133∼136쪽)라고 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31) 󰡔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자,

「만고의ᄉᆞᆞ 안즁근젼」.

(12)

애주의는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구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안중근은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 었고 이토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 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 으므로 이토를 죽여도 자살하는 따위의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32)

라 고 하여 한국독립의 공고화와 동양평화의 유지에 의거의 목적이 있었 음을 분명히 하였다. 바로 안중근의 박애주의 핵심은 독립과 평화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에게 독립과 평화는 하느님 사랑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독립과 동양평화는 안중근에게 천명(하느님 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었고 절대성을 갖는 것이었다. 안 중근은 한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33)

때문에 동포형제가 죽어가는 데도 수 수방관하는 것은 ‘더 이상 없는 죄’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34)

순국하 는 그 순간에도 동양평화 만세 3창을 간절히 바랬으며

35)

죽어 천당 에 간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36)

계봉우가 안중근의거를 ‘박애주의의 극치’라고 극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안중근의거가 바로 한국을 넘어서 “일본을 살리라.”라는 하 느님의 명령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

32) 신운용 편역,

공판시말서 제1회」, 󰡔안중근⋅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공판 시말서󰡕(안중근 자료집 9), 28쪽.

33) 신운용,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극동평화론’」,

󰡔안중근과 한국근대사󰡕340쪽.

34) 신운용 편역,

안중근 제10회 신문조서」, 󰡔안중근 신문기록󰡕(안중근 자료집 3), 190∼191쪽.

35) 국가보훈처,

「安重根 死刑執行에 관한 要領」, 󰡔아주제일의협 안중근󰡕 제3권,

776쪽.

36) 국사편찬위원회,

안중근의 옥중 서한 및 서면광경에 관한 건

」, 󰡔한국독립운

동사󰡕 자료 7, 528∼529쪽.

(13)

가 동양전체를 위한 거사였다는 점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포로로 잡은 일본인들을 석방하였던 것이다.

37)

그런데 하느님의 명령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고 해서 동양 평화가 영원히 담보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까닭에 안중근은 동 양평화의 정착을 위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또 한 이는 「동양평화론」의 저술 목적이 바로 박애주의의 구체적 실천 방안 제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저술 목적을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 장하였다.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환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上策임은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연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깎고 友誼를 끊어 스스로 蚌鷸의 형세를 만들어 漁夫를 기리는 듯 하는가. 韓淸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 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 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議論이 韓淸 양국인의 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몇 억 황인종 중의 허다 한 유지와 강개남아가 어찌 袖手傍觀하고 앉아서 동양전체의 까맣게 타죽 은 참상을 기다릴 것이며 또 그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義戰 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談判하는 자리를 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니 諸公은 눈으로 깊이 살필지어다.

38)

여기에서 안중근은 제국주의 서양 침략세력에 맞서 의로운 동양이 단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침략행위를 수수방관하는

37) 안중근, 위의 책, 133∼136쪽.

38) 󰡔동아일보󰡕 1979년 9월 19일자,

「安重根의사 東洋平和論」.

(14)

것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역천행위로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하얼빈에서 의전을 결행하였고, 여순에서 재판을 통해 담판을 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하느님의 명령으로 동 양평화 강구방책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결국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저술 목적은 한국독립의 공고화와 동양평화 의 유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항구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알려주는 데 있는 것이다.

Ⅲ . 주체적 종교의식과 ‘민권’ ⋅ ‘단합’ ⋅ ‘평화’의 의미

종교적 열망으로 가득 찬 안중근은 “원컨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 포 형제자매들은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허물을 깊이 참 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의자(義子)가 되어, 현세(現世)를 도덕시대로 만 들어 다 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 상을 받아 무궁한 영복(永福)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번 바라오.”

39)

라고 하며 전 교에 진력하였다. 이는 그가 천주교를 새로운 시대를 열 열쇠로 보았 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현세에서 천주교의 가르침을 구현하여 그 시대를 ‘도덕의 시대’로 만들고자 한 안중근의 목표는 내세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하던 당시 천주교인들의 경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면에 서 주목된다. 이러한 종교의식은 향후 민권⋅민족의식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다.

40)

그러나 천주교계의 현실은 안중근의 종교적 열망이 구현되기에는

39) 안중근, 위의 책, 54∼55쪽.

40) 신운용.

「안중근의 민권⋅

민족의식과 계몽운동

」,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91∼

93쪽.

(15)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었다. 빌렘신부의 경우에서 보듯이 신부들의 전횡은 안중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는 그가 “거룩한 교회 안에 서 이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당연히 경성에 가서 민 주교에게 청원하고 만일 민 주교가 안 들어 주면 당연히 로마부 교황에게 가서 품해서라도 기어이 이러한 폐습은 막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

41)

라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안중근은 신부들의 부당한 처신과 대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시정하려는 평신도의 권 리를 주장하는 등 종교적 주체의식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안중근이 서양 신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난 계기는 바 로 뮈텔주교에게 천주교대학 설립 건의와 한국인이 학문이 있게 되면 교회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론을 꺼내지 말라.”

42)

라는 뮈텔주교의 반응이었다.

이에 그는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고 영어를 배 우는 자는 영국의 종이 된다는 논법으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자는 프랑 스의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프랑스어를 그만두겠다.”

43)

라 고 종교적 자주성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그는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통용할 것이니.”

44)

라는 종교의식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 언어관을 드러냈다.

이 사건은 안중근이 종교적 제국주의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는 도덕시대의 부활을 추구한 안중근이 제국주의적인 서양신부들 의 주장에 경도되어 내세지향과 구복신앙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천 주교의 현실에서 일정하게 벗어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그가 주체적 종교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 한 맥락에서 그는 1907년 간도행을 만류하는 빌렘신부에게 “국가(민

41) 위와 같음.

42) 안중근, 위의 책, 141쪽.

43) 위의 책, 57쪽.

44) 위와 같음.

(16)

족)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

45)

는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보다 철저한 천주교 신앙의 실천의지를 역설적으로 표 현한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역사 현실을 외면하고 있 던 천주교계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안중근 이 천주교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 철저하게 천 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안중근의 종교의식은 ‘김중환(金仲煥)의 옹진군민 돈 5천 냥 갈취사건’과 ‘이경주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얻은 그의 결론은 대한제국기에 만연되어 있던 ‘부패’를 해결하 지 않고서는 결코 민권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46)

그의 민권사상은 “천명(天命)의 본성(本性)으로 천주가 태중에서부 터 불어넣은 것.”

47)

이라는 ‘천부인권론’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그의 민권론은 만민평등이라는 천주교의 교리 위에 형성된 것임에 분명하다.

48)

안중근은 ‘민권실현’의 핵심을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제거와 문명 독립국의 쟁취에 두었다.

49)

이는 민권이 구현되어야만 문명독립국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50)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난신적자’를 응징하기 위해 ‘김중환(金仲煥)의 옹진군민 돈 5천 냥 갈취사건’과 ‘이경주사건’ 등에 관여하였던 것이다.

51)

이와 같이 그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민권’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 았다. 하지만 그는 “민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45) 국사편찬위원회,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1977, 543쪽.

46) 안중근의 민권의식은 신운용,

안중근의 민권

민족의식과 계몽운동

참조.

47) 안중근, 위의 책, 42쪽.

48) 차기진, 위의 논문, 󰡔교회사연구󰡕 16, 23쪽.

49) 안중근, 위의 책, 82쪽.

50) 신운용, 위의 논문, 93쪽.

51) 위의 논문, 93∼94쪽.

(17)

갖고 있었다.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다하였을 때만이 민권을 얻을 수 있다.”

52)

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사제단의 폭압에 대해 평신도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탐관오리에 대해 민권을 내세웠던 것이다.

안중근은 1905년 해외이주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상해를 방 문하였다. 이 때 그는 민영익의 박대와 서상근(徐相根)의 독립운동에 대한 무관심을 보고서 “우리 한국 사람들의 뜻이 모두 이와 같으니 나라의 앞길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

53)

라고 한국의 현실을 탄식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국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 한국 사람들을 독려하고 침략세력에 대한 응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때문 에 그는 1907년 8월 간도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의 한인사회의 분열을 목격하고서 안중근은 1908년 3 월 해조신문에 ‘인심단합론’을 투고 하였다.

54)

여기에서 그는 단합에 대해 ‘자기를 단합하는 것’, ‘자기 집을 단합하는 것’, ‘국가를 단합하 는 것’으로 분류하면서 ‘몸과 마음의 연합’, ‘부모처자의 화합’, ‘국민 상하의 상합’이라고 단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한국의 비 참한 현실의 원인을 불합병에서 찾고 그 불합병의 뿌리가 만악의 근 원인 교오병(교만)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 치료책으로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존경하고 책망을 참아내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자기의 공을 타인에게 돌리는 자세 즉, ‘겸손’

을 처방하였다. 물론 이는 뒤틀린 현실에 대한 구원책으로 당시 천주 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론이기도 한 것이다.

55)

“교우의 힘에 의해 한국독립의 길보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릴 뿐”

56)

이라고 천주교인들의

52) 안중근, 위의 책, 101쪽.

53) 위의 책, 102쪽.

54) 󰡔해조신문󰡕 1908년 3월 21일자,

긔서

」.

55) 조광,

「安重根

愛國啓蒙運動

獨立戰爭」, 󰡔교회사연구󰡕 9, 1994, 86쪽.

56) 국사편찬위원회,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539쪽.

(18)

분발을 촉구한 데서 보듯이 그는 교회의 일치를 넘어 민족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안중근에게 천주교의 이론은 시대를 구할 이론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단결’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데 의미 가 있다. 즉, 이는 서양 침략세력에 대해 동양의 단결을 강조하는 동 양평화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동 양평화론」 첫머리에서 “합하면 성공 흩어지면 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

57)

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청국의사 서원훈(舒元勛)⋅안태훈 충돌사건

58)

에 대한 감 상을 “청나라 의사의 행위가 이와 같을 진대 우리백성의 생명을 어 찌 지킬 도리가 있겠는가(如淸醫之所爲면 我韓民生이 豈有支保之道 乎잇가).”

59)

라고 표출한 데서 보듯이 약소국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 고 있었다.

또한 “지금은 민족세계인데, 어째서 홀로 한국민족만이 남의 밥이 되 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소.”

60)

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중근은 국제질서를 민족간의 경쟁으로 보았던 것이다.

61)

물 론 국제관계의 본질을 경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는 데에 안중근사 상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는 서양의 현실을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62)

라고 하여 도덕 즉 하느님의 본성을 잃고 말았다고 분석하였 다. 그는 경쟁을 멀리하고 오직 평화를 지키는 것이 국제관계의 본연 의 모습이라고 보았고 이는 곧 하느님의 명령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57) 󰡔동아일보󰡕 1979년 9월 19일자,

「安重根

의사

東洋平和論」.

58) 이에 대해서는 신운용, 위의 논문, 96∼97쪽 참조.

59) 서울대규장각, 󰡔外部訴狀󰡕, 552쪽.

60) 안중근, 위의 책, 101∼102쪽.

61) 안중근, 위의 책, 101쪽.

62) 󰡔동아일보󰡕 1979년 9월 19일자,

「安重根의사 東洋平和論」.

(19)

그런데 안중근은 “서양은 전기포, 비행기, 침수정과 같은 사람을 해하는 물질을 만들고 청년들을 훈련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령들을 희생시켜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 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63)

라고 서양의 물질문명의 포악성을 신 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학문에만 힘쓰고 자기 나라만 지키는 데만 힘을 쓴 동양과 달리 서양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보았던 것 이다. 이는 “서양과 일본은 역천하였고 동양은 순천하였다.”라는 그 의 현실인식과 상통하는 것이다.

안중근은 한국과 중국의 사람들이 지난날의 원수진 심정을 하루아 침에 잊고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마음 즉 박애정신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데 앞장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일본을 도와 러시 아를 물리쳤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계봉우는 이러한 안중근의 주 장을 바로 박애정신의 발로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의 이론적 근거를 천주교의 그것에서 연유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안중근은 한국독립의 공고화와 동양평화의 유지를 내세우는 일왕 의 논리가 천명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64)

말하자 면 ‘평화’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여긴 그는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를 천명 즉 평화의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동양평화의 유지와 한국독립의 공고화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일제에 결국 망할 수밖에 없으므 로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경고하였 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이유에 대해 안중근은 “이토 히 로부미를 살려두면 동양의 평화를 해칠 뿐이다. 동양의 한 분자인 나 로서 이러한 악한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믿고 이토 히로

63) 위와 같음.

64) 신운용,

「안중근의거의 사상적 배경」,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263쪽.

(20)

부미를 살해한 것이다.”

65)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인 평화를 지키는 것이 동양인이자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하느님에 도 전하는 이토를 제거하였다는 것이 안중근의 종교사상임을 알 수 있다.

동양평화 유지라는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고 더 나아가 하 느님의 사랑의 대상인 일본인이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이 일본을 구하 려는 박애주의 곧 하느님 사랑의 증표인 평화를 증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안중근은 “눈을 바로 가진 자는 진실을 진실 로 보고 있다.”

66)

라고 하였고, “일본인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안중근 의 날을 외칠 것.”

67)

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내 가 이번에 한 행위가 죄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68)

라 고 한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평화가 곧 하느님의 명령 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69)

그런데 종교적 절대성을 갖는 평화가 지상에 정착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체제가 필요하다고 안중근은 여기고 있었다.

70)

그것은 바로 여순에 일본을 포함한 동양의 안정을 위해 경제적으로 공동의 은행 을 세우고 군사적으로 공동의 군대를 창설하며 문화적으로 상호이해 를 증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총괄할 수 있는 ‘평화회의’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화체제는 패권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부터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안중근은 천주교 교황이 보장하 는 형식을 취한다면 동양평화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65) 국가보훈처⋅광복회,

「청취서-안중근의사 日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면담

내용-」, 󰡔21세기와 동영평화론󰡕, 1996, 52쪽.

66) 국가보훈처⋅광복회, 위의 책, 52쪽.

67) 안중근, 위의 책, 203.

68) 국가보훈처⋅광복회, 위의 책, 54쪽.

69) 신운용, 위의 논문 참조.

70) 동양평화론의 전반적인 내용은 신운용,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 부미의 ‘극동평화론’」,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참조.

(21)

처럼 안중근은 평화체제의 구축을 하느님의 명령으로 절대화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천주교라는 종교와 제도에서 찾으려고 하였 던 것이다.

Ⅳ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안중근사상

안중근을 대종교가라고 한 계봉우의 평가는 “신학연구는 계시진리 의 깊은 지식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와의 교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71)

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시각에서 본다면 대단 히 정확한 지적이다. 사실 안중근의 신학은 제국주의적 성향을 띤 서 양 신부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땅에 서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일제의 침략을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야보고서 2: 17).”이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행동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그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성태 신부는 안중근의 신앙을 ‘행동신앙’이라고 평가하였다.

72)

그의 지적 은 안중근의 종교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안중근의거와 종교사상은 천주교의 ‘공동선’과 맞닿아 있 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동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공동선이라고 하면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생활상 여러가지 조 건들의 총체를 말한다. 그런데 상호 의존관계가 날로 긴밀(緊密)해지고 점

71)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現代 世界

司牧 憲章(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969, 245쪽.

72) 김성태,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논평」, 󰡔교회사연구󰡕 9, 32쪽.

(22)

차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가기 때문에 오늘날 공동선은 더욱 세계적인 것으 로 확대되고 인류전체에 관계되는 권리와 의무까지를 내포(內包)하게 되었 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나 다른 집단들의 필요(必要)와 정당한 요구(要求)를 고려(考慮)해야 하며 인류 가족 전체의 공동선까지를 고려해야 한다.

73)

말하자면 공동선은 국가(집단)와 개인의 자기완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총체라는 것이다. 안중근은 대체로 국제사회의 자기완성을

‘평화’로, 국가의 자기완성을 ‘독립’으로, 개인의 자기완성을 ‘민권’의 보장으로 보았던 것 같다.

또한 안중근 신학의 최종적 목표는 도덕세계의 구축이었다. 도덕 세계는 국내적으로 민권의 확립, 국외적으로 독립의 공고화, 국제적 으로는 평화의 정착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으로 공동선의 구현과 일 치하는 것이다.

74)

이와 더불어 안중근의거는 한중일을 포함한 동양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동선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중근은 공동선의 완결성을 추구하였다는 측 면에서 공동선의 전범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안중근이 민권을 ‘천명의 본성’이라고 보았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공권력의 월권행위로 국민 이 억압을 당하는 경우라도 국민은 객관적으로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공권 남용에 항거하여 자연 법과 복음이 보여주는 한계 내에서 자신과 동포의 권익을 옹호할 수

73)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위의 책, 203쪽.

74) 공동선에 대해 교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意義)를 발견하며, 공 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보다 완전하게 보다 쉽게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 건들의 총체를 내포한다. (중략) 각기 제 의견만 고집함으로써 정치 공동체가 파괴되는 일이 없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하며, 이 권력은 기계적이거나 폭군적 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와 책임 의식에 뿌리박은 도덕적 힘으 로서 전국민의 힘을 공동선에로 향해 주는 권력이라야 한다”(위의 책, 256쪽).

(23)

있다.”

75)

라고 밝혔다. 선구적으로 민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구 체적으로 실천하였다는 사실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종교사상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아울러 안중근은 일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계는 필연적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종속되 어 하나를 이룬다.”

76)

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일 본 등의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 그의 생각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때문에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세력을 바로 잡지 않 으면 한국⋅중국⋅일본 등의 동양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세계가 잘 못된다고 판단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의 일치를 방해하는 존재였 기 때문에 제거해야 했고, 세계를 살리기 위한 방법론으로 「동양평화 론」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일치의 촉진은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일치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의 성사(聖事)와 같은 것으로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와 전인류 일치의 표지(標識)요 연장이기 때문이다.”

77)

라는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앞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안중근은 한국독립을 하느님의 명령으로 확신하였 다. 안중근에게 ‘독립’은 하느님의 또 다른 속성이었다. 이러한 안중 근의 종교사상은 “어떠한 인간의 법률도 교회에 맡겨진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자유를 알리고 선언하며 최종적으로는 죄 에 기인하는 온갖 노예 상태를 배격한다.”

78)

는 교회의 선언과 일치하 는 것이다.

79)

75) 위의 책, 256∼257쪽.

76) 위의 책, 182쪽.

77) 위의 책, 219쪽.

78) 위의 책, 218쪽.

(24)

특히 제2차 바티칸공회는 “계획적으로 국민전체나 국가나 소수의 이민족(異民族)을 전멸(全滅)하는 것은 이는 무서운 범죄로 규탄(糾 彈)되어야 하는 가장 악독한 행위로 이를 응징하는 사람들의 용기는 최 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

80)

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된 ‘최상의 찬사’를 받을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안중근은 평화를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인식한 점에서 안중근 종 교사상(신학)의 핵심은 평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화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세력(敵對勢力)간의 균형 유지 만도 아니며, 전제적(專制的) 지배의 결과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 는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인간 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現實化)가 바로 평화인 것이다. 인류의 공동선은 본질 적으로 영원한 법칙에 지배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은 시 대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므로 평화는 한번도 영구히 얻어진 것이 아니고 언제나 꾸준히 건설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위에 인간의 의지는 약하고 죄의 상처를 입었으므로 평화를 얻으려면 각 사람이 끊임없 이 야욕을 억제하고 정당한 권력이 계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개인의 복지(福祉)가 안전하게 확보되고 사람들이 정신과 재능의 자원을 서로 신뢰로써 나누지 않고서는 지상에 평

79) 또한 제2차 바티칸 공회는 약소국의 방위수단의 동원(독립투쟁의 이론적 근 )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람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참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치하여 평화를 찾아 건설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 폭력을 쓰지 않고 약자에게도 가능한 방위 수단(防衛手段)을 택하는 사람들을 동일한 정신으 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단, 그 방위수단이 타인이나 타 공동체의 권리와 의 무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위의 책, 262쪽).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을 그 주 민들과 함께 무차별 전멸시키려는 전쟁 행위는 모두 다 하느님과 인간 자신을 거역하는 범죄이므로 단호히 단죄하기를 주저치 말아야 한다”(위의 책, 265쪽).

80) 위의 책, 263쪽.

(25)

화를 가져올 수 없다. 타인과 타국민, 그리고 그들의 품위를 존경하려는 확 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이렇게 평화는 정의의 내용을 초월하는 사랑의 결실이다.

현세의 평화는 이웃에게 대한 사랑의 결과이며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형화의 모상이며 결실이다. 강생하신 성자는 평화의 임금 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일치를 재건하시고 당신 육신 안에서 미움을 죽이시고 부활로 현양되시어 사람의 성신을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부어 주셨다(밑줄: 필자).

81)

요약하면 평화란 ‘정의의 실현’이며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안중 근에게 정의는 민권, 단합, 평화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82)

이러한 의 미에서 평화에 대한 교회와 안중근의 개념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 동의 은행설립으로 경제의 통합을, 공동의 군대창설로 군사적 대립 의 해소를, 2개 국어 이상의 교육으로 문화의 공유를 이루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경제문제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평들과 온갖 형태의 종 속 상태에서 인류가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전제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협력의 확립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83)

그러면서 하느님의

81) 위의 책, 261∼262쪽.

82) 안중근에게 동양평화의 의미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문제에 있다.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과 같이 한국의 독립을 공고하도록 하는 것은 나의 종생의 목적이며 또 필생의 일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 레라도 일신의 생명 재산의 안고(安固)를 빌지 않는 것은 없다. 하물며 인간 된 자는 그것을 위해서는 십분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신운용 편역,

「공판시말서 제3회」, 󰡔안중근⋅우덕순 ⋅조도선⋅유동하 공판

기록-공판시말서󰡕(안중근 자료집 9), 1976, 96쪽).

83) 위의 책, 268쪽. “국가와 국가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악조건이 개재하고 있으 므로 그것을 극복하고 예방하며 폭행의 방종을 억제하기 위하여 국제기관 (國際機關)들의 협력과 조정(調整)을 강력히 추진하고 평화 촉진을 위한 조

(26)

창조원리에 따라 자원의 공동분배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84)

또한

“경제사회 생활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온전한 사명과 전 사회(全社會)의 공동선은 존중되고 촉진되어야 한다.”

85)

라는 선언에 서도 알 수 있듯이 공동선의 구축이 경제문제의 핵심적인 과제인 것 이다. 안중근도 일본의 경제적 열악함이 침략을 유발하였다는 분석 을 바탕으로 일본과 동양의 경제가 안정되어야 평화가 보장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적 위협과 충돌의 회피문제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 기의 위협으로 여러 국가에 강요하느니 보다 여러 국가들의 상호 신 뢰에서 발생해야 할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군비 경쟁에 종지부를 찍 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군비 축소를 실제로 시작하려면, 일방 적으로 할 것이 아니고 협정으로 보를 맞추어, 유효하고도 진실한 보 장 밑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86)

라고 천명하였다. ‘공동의 군대보유’를 주장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구체적 실천방안의 하나로 서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문화공동체를 구상하였다. 또한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서 평화가 시작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경멸 불신 증오 이 데올로기들로 유발된 사람들의 분열과 대립으로 깨진 평화를 유지하 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필요하다.”

87)

라고 하는 제2차 바티

직체 구성의 쉴 줄 모르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84) 위의 책, 251쪽.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람을 동반하 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한다. (중략) 누구나 이 재 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外的)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한다.”

85) 위의 책, 245쪽.

86) 위의 책, 266쪽.

87) 위의 책, 267쪽. “적의(敵意)와 경멸(輕蔑)과 불신(不信)의 감정이나 인종적 증오(憎惡)와 안고한 이데올로기들이 인간들을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는 한, 그들이 아무리 평화 건설에 힘쓰더라도 아무 소용도 없다. 여기서 정신의

(27)

칸 공의회의 선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보다 앞선 이론이라는 면에서 그의 종교사상의 선구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안중근은 평화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평화회의’의 창설을 주장 하였다. 이 또한 전인류 공동체의 국제적 기초인 국제기관들의 평화 유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

88)

과 궤를 같이 한다는 면에서 주목되는 대목이다.

Ⅴ . 나가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안중근의 종교사상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 을 살펴본 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계봉우의 평가와 같이 ‘대종교가’였다. 그는 천주교신자 이면서도 동시대의 천주교계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한국독립 운동사에 길이 빛날 하얼빈의거를 단행하였다. 그런데 안중근의거는 단순히 한국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 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공고화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여긴 그의 주체 적 종교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민권을 ‘천명의 본성’으로 확신한 안중근은 난신적자의 제거와 문 명독립국의 쟁취를 민권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민권의식

재교육과 새로운 여론 형성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러므로 교육자들, 특히 청 소년 교육에 헌신하거나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 애호의 새로운 감정을 기려 주는 것이 자신들의 가장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하겠다.”

88) 위의 책, 269쪽. “세계적 혹은 지역적 기존 국제기관들은 분명 인류를 위하 여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것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전 향상을 도모하며 어 떤 형태의 전쟁도 미연에 방지하려는 현대의 중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인류 공동체의 국제적 기초를 놓으려는 최초의 시도라고 생각된다.”

(28)

은 ‘김중환의 웅진군민 돈 5천 냥 갈취사건’과 ‘이경주사건’ 등에서 표출되었다. 이는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에 기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안중근이 독립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합’이었다. 이 는 그가 단순히 반일독립투쟁의 이론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 다. 그에게 단합은 인류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라는 하느님의 명 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화는 안중근이 추구했던 최종 목표였다. 평화는 그에게 하느님의 뜻이고 동시에 명령으로 귀결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 서 그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평화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 해 무엇인가 해야 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의거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영원한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공동은행의 설립, 공동군 대의 창설, 문화의 상호이해를 실행할 수 있는 평화회의를 만들자고 주 장하였다. 동양평화는 천주교 교황의 권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고 본 그는 평화회의를 교황이 보장하면 성공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천주교의 가르침이 이미 안중근 의 활동과 사상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천주교사에서 안중근을 평가할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가 한국천주교 토착 화의 전범이라는 평가를 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평화란 정의의 실현이자 사랑의 결실.”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몇십년 전에 이미 구체적으 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평화는 그에게 하느님의 속성이었다.

때문에 안중근은 일본을 회개시키기 위해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봉우는 안중근을 박애정신의 극치라고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죽기 전에 빌렘 신부와 가족에게 보낸 유언장에서 “천당 에서 만나자.”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도 죽어서 꼭 천당에 갈 것이라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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