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나가는 글

문서에서 아카이브 다시 그리기 (페이지 27-30)

우연한 순간들을 포획해서 측정가능한 시간의 균일하고 직선적인 진행체계 로 구축하고, 유동적인 자연을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범주 속에 분류해서 공간화 하겠다는 서구 근대 아카이브의 야심은 사진의 매체적 실천에 의해 가장 적확히 수행되었다. 20세기 초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한국을

46) 강홍구가 위의 인용문에서 이야기하는 여백에 의한 “상상” 효과는, 과거를 현재 매순 간마다 구원하는 벤야민의 회억 실천과 일맥상통한다.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isophy of History”, Illuminations, ed. Hannah Arendt (Schochen Books, 1968), p. 254.

47) 김남시,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 p. 272.

포함한 전 세계의 많은 예술가들은, 서구 근대 지식-법-권력의 생산과 통제 체계 의 원활한 작동에 기여하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위해 우발성의 유동성을 길들이 고 측정가능하고 서술가능한 시간과 세계를 발명하려 한 19세기 역사학과 과학의 기획을 실패시키려는 예술실천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 서 구가 구축하고 전 세계에 이식한 이성중심의 지식-법-권력의 통제체계가 초래하 는 구체적 폐해들에 대한 예술가들의 의식적 성찰, 무의식 감지와 반응으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은 이미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서구와 대조적인 관점을 오랫동 안 유지해온 중국문화권 전통 속에 있다가 19세기에 갑자기 서구 근대와 만났다.

한국은 포스트모던을 넘어 포스트휴먼이 운위되는 21세기에도 한국적 모던의 문 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망각되고 부서진 과거들을 지금 여기 한 국의 매순간마다의 현재 속에서 인용하고 재배치하는 생성적인 실천이 충분치 못 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예술계에서 활발히 진행 중인 아카이브적 예술실천의 동향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시될 필요가 있다. 1990년대부터 디지털 사진장치와 기법을 활용해서 이미지를 관류하며 순환하는 지식과 권력의 작동체계의 은밀한 세부를 탐색해온 강홍구는, 서구 근대 아카이브의 주 매체인 사진의 한계를 다각 도로 실험하는 예술적 실천을 통해 아카이브에 연루된 다양한 문제를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강홍구의 사진그림 연작 ‘언더프린트’가 서구 근대 18-19세기 의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생성적으로 실패시키는 예술적 정치적 실천이라는 관점 에서 그 세부를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강홍구의 ‘언더프린트’는 구체적인 개 별자의 경험적 실천이 일어나는 시공간의 고고학적 격차를 압축하는 병렬 몽타주 적 재배치, 사진 인덱스의 반어적 활용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표현, 그리고 메시 지가 최대한 절제된 사진과 그림의 혼성매체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기억과 상상의 자율공간인 문인화적 여백의 재현장화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그의 예술실천은 잊혀진 과거를 감상자가 자신의 현재 속에서 되불러 내는 또 다른 예술실천을 생성시키면서, 기억-상상의 개별적 자치권을 감상자에

게 되돌려주는 정치성을 예술적 차원에서 획득하고 있다. 벽 사진 위에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망각된 과거의 파편들을 은밀하게 현재화하는 방식은, 인류의 시원부터 시작되어온 그리기 실천과 중국문화권에서 향유된 ‘천지만물과 함께하는 수행’으로서의 그리기를 환기시킨다. 그런 면에서 근래 한국에서 생산되 는 아카이브적 예술실천을 주로 서구 비평계에서 생산된 아카이브 담론과 해석에 근거해서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재고할 기회를 준다. 그의 ‘다시 그리기’는 미 술이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서, 인류에게 ‘그리기’라는 행위가 어떤 사회문화적-개인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과거를 망각하고 기원 없는 모 던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지역 거주자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매순간의 현재 속 에서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하고, 그 가능한 답으로서 한 가지 흥미로운 실천 사례를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 서구 근대 아카이브와 한국적 현실 및 예술실천을 대면시키는 방식이 다소 대립적인 측면이 있고, 동양 고전의 인용이 맥락상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자인한다. 하지만, 보다 세밀한 연구를 기약하고 미결 문제를 던져둔 다는 점에서, 이론적 정합성의 훼손을 무릅쓰고 거친 부분을 그대로 남겨두었음 을 밝혀둔다.

48)

* 논문투고일: 2016년 9월 15일 / 심사기간: 2016년 9월 16일-10월 11일 / 최종게재확정 일: 2016년 10월 15일.

문서에서 아카이브 다시 그리기 (페이지 27-30)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