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유포론이란 그 동안 양역 징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한유자(閒遊者)를 대상으로 징포하
로 궁궐 안에서 생활하는 국왕이 일반 백성을 접촉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국왕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백성들과 접촉하였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차가 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상언(上言)을 올리거나 쟁을 두드려 호소하는 격쟁 (擊錚)이라는 방법으로 의견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궁궐문 밖으로 나와 특정한 정책 결 정 과정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소통의 방식은 영조대에 시작된 것으로,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궁궐문 앞에서 만난 사람은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약 30여 차례 이상을 궁궐문 밖으로 나왔다. 조선 후기 궁궐은 동궐(東闕)이라 통칭되던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이궁(離宮)이라 명명되는 경희궁(경 덕궁으로 불리다가 1760년 경희궁으로 개칭됨)이 주로 활용되었는데, 국왕은 이들 궁궐 을 오가며 국정을 운영하였다. 영조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비롯해 창덕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뿐만이 아니고 이미 상당부분 불 에 타 복원되지 않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에 나아가서도 다양한 계층의 백 성들을 만났다.
1757년 1월 창경궁 홍화문에서는 “굶주려 누르스름한 얼굴빛과 갈가리 헤진 옷을 입은 역사 속 행정개혁과 소통 : 국왕 영조(英祖)의 소통 방식, 임문(臨門)
국왕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생활 속의 고통이나 민폐를 언급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확답받기도 하였다.
동궐도 : 창덕궁과 창경궁 일원을 그린 그림
몰골”을 한 지방에서 떠돌아 서울로 올라온 유민을 만나서는 참담한 실정을 토로하기 도 하였다. 그리고 세자에게 백성을 우선하라고(以民爲先) 경계한 바 있다. 유민 이외에 도 영조는 양반을 비롯해 일반 서민, 사궁민(四窮民)인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늙고 아 내가 없는 사람, 젊어서 남편을 잃은 사람, 어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을 만났으며, 시전(市廛) 상인이나 제주 표류민이나 지방의 향리(鄕吏) 등을 만난 바 있다.
국왕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생활 속의 고통이나 민폐를 언급 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확답받기도 하였다. 1752년(영조 28) 12월 19일 신시(申時:오후 3~5시) 창덕궁 선화문에 임시로 자리가 만들어지고 국왕이 자리하였다. 이 자리는 국 왕 영조가 공인(貢人)과 시전 상인을 만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로, 영의정 이종성, 우 의정 김상로, 병조판서 김상성 등 많은 관리들이 동석하였다. 모임이 시작되면서 국왕은 공인과 시전 상인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마침 공인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잠시 다른 국정이 논의되다가 공인들이 도착하였다는 어영대장 홍봉한의 보 고를 받은 영조는 평시서 관원들에게 그들을 데리고 들어오도록 하고는 미리 나무로 만 들어 설치한 벽도 허물도록 하였다. 공인과 시전 상인들이 들어오자 국왕 영조는, “너희 들이 느끼는 병폐와 고통을 말하라”라고 하면서 만일 오늘 다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기회가 없을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날 공인과 시전 상인의 면담은 시전 상인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입전(立 廛:선전이라고 함) 상인은 당시 사치를 금하기 위해 문단(紋緞) 사용을 금지한 것과 관 련해, 문단을 금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문단에 대해서는 법 적용이 이루어 지지 않기를 요청하였다. 영조는 이를 호조에 지시해서 변통하도록 하겠다고 답변하였 다. 이어 백목전(白木廛) 상인들의 발언이 이어졌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전포에는 커다 란 폐단은 없다고 하면서 당시 군영의 군사들이 행하던 난전(亂廛)으로 인한 폐단을 언 급하였다. 이를 들은 영조는 백목전 상인의 발언이 지극히 우직하다고 하면서 승지로 하 여금 성명을 묻도록 하였다. 백목전 상인의 이름은 홍종석으로, 영조는 병조에 명해 그 에게 관직을 주도하였다.
이어 은전(銀廛)을 비롯해 면주전(綿紬廛), 지전(紙廛), 내어물전(內魚物廛), 생선전(生 鮮廛) 등 상인들의 발언이 계속되었으며, 각 시전 상인들의 말을 들은 영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안에 따라 해당 부서에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발언자 가운데 일부는 앞서 홍종석의 예처럼 소임을 주도록 하였는데, 상전(床廛) 상인 최창덕(崔昌德)은 호위대장 청의 소임을 주도록 하였고, 잡곡전의 서세운(徐世雲)은 어영대장의 집사로 삼도록 지시
하였다. 시전상인에 이어 공인들의 진술이 이어졌는데, 제용감공인, 예빈서공인, 장흥고
랑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구제하지 아니하면 민심은 원망할 것이요 천명도 떠날 것이니, 비록 임금이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곧 독부(獨夫)일 뿐이다.”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 어서 8월 28일에는 임금이 직접 지은 임문휼사민(臨門恤四民)의 30운(韻)의 칠언 고시 (七言古詩)를 내리고 이를 홍화문(弘化門)에 게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숙종 대나 영조 대, 정조 대에 동포(同胞)라는 표현이 자 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군주들이 백성들을 바라보는 인식을 대표적으로 표현 한 것이 적자(赤子)론이 아닌가 한다. 적자는 갓 태어난 아이의 몸 색깔에서 유래된 용 어로, 그 만큼 어려서 무지하고 아무일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백성이므로, 국왕이 이들을 어린 아이처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적자론이 조선시대 국왕의 인식이 기저임 은 물론이지만, 숙종 대 이후에 이르면 동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였다. 동포란 한 배 에서 태어난 자식이란 뜻으로,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역사상 유명 해진 것은 중국 북송 대의 성리학자 장재(張載)가 체계화하면서 부터다. 다만, 이 표현 은 일종의 통합(統合)을 강조하는 논리로써, 이 시기 국왕들에 의해서 동포는 모든 백성 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영조는 각종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유생으로 대변되 는 당시 지배신분층에게 신분에 따른 피차가 있을 수 있으나 자신에게는 삼공(三公)이 나 사(士) 모두 적자(赤子)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백성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대민 의식의 변화가 영조로 하여금 궁궐문 밖으로 나와 백성들과 소통하게 하였다. KIPA
영조가 1775년에 직접 지은 시인 ‘어제휼민(御製恤民)’, 1749년에 지은 임문휼사민이라는 시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