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당사자 일방이 부담하는 계약상 의무 중 어떠한 경우 배임죄 성립이 가능한 타인의 사무가 되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사안을 모두 포섭할 수 있는 일관된 구별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위 Ⅲ.1.에서는 이를 다양한 기준으로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살펴보았는데, 아래에서는 이 글에서 살펴본 최근 대법원 판결의 태도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도출된 다양한 사실관계를 가능한 논리적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기준을 새로운 관점에서 유형화해보았다. 크게 계약의 내용대로 이행이 완료되지 않은 경우의 채무불이행(또는 불법행위)과 계약의 내용대로 이행이 완료 된 경우의 채무불이행(또는 불법행위)이 그것이다.
가. 계약의 내용대로 이행이 완료되지 않은 경우
계약상 일방 당사자가 계약상 이행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의무를 불이행하는 경우, 예를 들어 대금지급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이를 이행하여야 할 의무는 원칙적으로 계약 당사자의 자기의 사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계약상 이행의무를 이행하여야 할 의무라고 하더라도 만약 남아있는 계약 및 의무의 내용, 계약이행의 정도 및 채무불이행이 된 시기, 당사자 간의 의사 및 당사자 간의 관계 등에 비추어 타인의 재산보호가 신임관계의 전형적ㆍ본질적 내용이 되는 주된 의무가 된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동시에 배임죄에 있어서 타인의 사무가 될 수 있다.
판례가 지명채권 양도인이 양수인을 위하여 양수채권 보전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 는 자에 해당하고,28) 주류제조면허의 양도인은 면허의 취소신청을 하고 그와 함께 양수인이 면허신청을 하여서 면허를 받도록 그 기회를 부여하는 등 양수인이 면허를 얻는데 필요한 모든 협력을 할 의무가 있고 이는 자신의 사무인 동시에 양수인의 사무이고,29) 부동산 이중매매나 이중 근저당권 설정에 있어서 등기이전에 협력할 의무를 자기 사무임과 동시에 상대방의 재산보전에 협력하는 타인의 사무에 해당한다 고 보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위 지명채권 양도와 관련된 사안에서 판례는 ‘양도인이 채권양도 통지를 하기 전에 타에 채권을 이중으로 양도하여 채무자에게 그 양도통지를 하는 등 대항요건을 갖추어 줌으로써 양수인이 채무자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되면 양수인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므로, 양도인은 이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양수인으로 하여금 원만히 채권을 추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의무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하면 서 양도인의 이와 같은 적극적(아마도 대항요건을 갖추어 주어야 할 의무를 의미할 것이다)ㆍ소극적(타에 채권을 이중으로 양도하고 대항요건을 갖추어주지 않을
28) 대법원 1999. 4. 15. 선고 97도666 판결.
29) 대법원 1979. 11. 27. 선고 76도3962 판결.
의무를 의미할 것이다) 의무는 이미 양수인에게 귀속된 채권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고, 그 채권의 보전 여부는 오로지 양도인의 의사에 매여 있는 것이므로 채권양도의 당사자 사이에서는 양도인은 양수인을 위하여 양수채권 보전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 는 자’라고 설명한다.
즉, 대항요건을 갖추기 이전이라도 지명채권 양도로 인하여 양수인에게 그 채권이 귀속되기는 하였으나, 양도인은 그 계약의 이행 과정에서 아직 대항요건을 갖추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양수인에게 계약과 관련하여 이행할 의무가 여전히 남아 있 고, 대항요건을 갖추어줄 의무는 양수인이 대항요건이 없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만큼 양수인의 권리 보전에 중요한 요건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이행 여부가
‘오로지 양도인의 의사에 매여 있는’ 것이므로 이는 타인의 사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약상 의무 중에서도 특정한 의무의 경우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만큼 상대방의 권리 보전에 중요한 요건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이행 여부가 오로지 의무자(행위자)의 의사에 매여 있는 경우 그 의무는 타인의 사무가 된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계약상 의무로서 또 다른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이중매매에서 중도금을 수령한 양도인이 제1양수인에 대하여 가지는 부동산소유권 이전의무라고 할 수 있다.
중도금을 수령한 양도인은 양수인으로부터 잔금을 수령하고 부동산 소유권을 이전하여줄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의무는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만큼 상대방의 권리 보전에 중요한 요건이 된다. 동시에 부동산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가지는 경제적 의미나 부동산 이전을 통한 부의 재분배 효과, 부동산의 경제적 가치 변동 가능성 등 양도인과 양수인 간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를 고려해보았을 때 이는 그 이행 여부가 오로지 양도인의 의사에 매여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이중매매의 사안에서 대법원이 중도금을 수령한 양도인을 타인의 사무처리자로 이해하고 배임죄의 성립을 인정하는 것 역시 이러한 요건에 따라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위 2015도1301 판결에서 대법원은 ‘통상의 계약에서의 이익대립관계를 넘어서’
채권자의 재산을 보호 또는 관리하는 의무가 있는 경우 배임죄에서의 신임관계를 인정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대법원은 성실한 이행을 통한 당사자 간 일반적인 계약상 권리의 이익을 누리는 것을 넘어설 정도의 중요한 이익이 되는 이행의무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정도의 의무가 존재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배임죄에서 요구하는 대내적 신임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 계약의 내용대로 이행이 완료된 경우
당사자 간 계약의 내용대로 이행이 완료되어서 계약상의 의무에 구속되지 않는 경우에는 내부적 신임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매매계약에 있어서 대금을 모두 수령하고 매매계약의 목적물을 이전함으로써 그 소유권이 완전히 이전된 이후에는 채무불이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소유권이 이전된 타인의 목적물에 대하여 재산상 침해행위를 한 경우에는 대내관계에서의 신임관계 위반이 아니라 민사상 불법행위 또는 절도 등 기타 형벌법규의 적용대상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보권설정계약을 체결하고 담보권을 설정한 후 그 설정자가 담보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배임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은 ‘금전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채무자가 그 소유의 동산을 채권자에게 점유개정에 의하여 양도한 경우에는 이른바 약한 양도담보가 설정된 것이라고 볼 것이므로, 채무자는 채권자(양도담보권자)가 담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이를 보관할 의무를 지게 되어 채권자에 대하여 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의 지위에 있게 된다’고 판시하였다.30)
또한 ‘자동차에 대하여 저당권이 설정되는 경우 자동차의 교환가치는 그 저당권에 포섭되고, 저당권설정자가 자동차를 매도하여 그 소유자가 달라지더라도 저당권에는
30) 대법원 1983. 3. 8. 선고 82도1829 판결.
영향이 없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저당권설정자가 단순히 그 저당권의 목적 인 자동차를 다른 사람에게 매도한 것만으로는 배임죄에 해당하지 아니하나(대법원 2008. 8. 21. 선고 2008도3651 판결), 자동차를 담보로 제공하고 점유하는 채무자가 부당히 그 담보가치를 감소시키는 행위를 한 경우 배임죄의 죄책을 면할 수 없다’고 하였다.31)
위의 사례들은 모두 담보권설정계약에 따른 담보권설정자의 의무의 이행은 완료된 경우이다. 물론, 82도1829 판결에서는 양도담보로 제공된 것으로서 그 목적물을 보관하는 자의 지위에서 보다 쉽게 타인의 재산보전에 협력할 의무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2도11665 판결의 경우 원칙적으로 저당권 설정자가 저당권의 목적이 된 자동차를 타인에게 매도한 것만으로는 배임죄가 성립 하지 않는다고 하여 저당권설정자에 대하여 담보목적물의 관리 및 보호에 관하여 저당권자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의 지위에 있음을 부정하지만, ‘부당히 그 담보가치를 감소시키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배임죄를 인정하고 있다.32)
이와 같은 대법원 판례의 취지는, 비록 계약상 의무에 따른 신임관계를 찾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특히 담보권설정자와 담보권자 간에는 사실상의 위탁, 대행 관계에 있는지, 그밖에 재산의 보전에 협력할 내부적 신임관계가 있다고 볼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를 검토하여 배임죄 여부를 판단하여야 하며, 계약관계가 종료하였다거나, 계약상 의무를 모두 이행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일률적으로 신임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소비대차 등으로 인한 채무를 부담하고 있는
31) 대법원 2012. 9. 13. 선고 2010도11665 판결.
32) 대법원이 ‘타인의 사무’ 여부가 아니라 ‘부당히 담보가치를 감소시키는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32) 대법원이 ‘타인의 사무’ 여부가 아니라 ‘부당히 담보가치를 감소시키는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