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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思想의 背景

문서에서 東學의 敎育 思想 考察 (페이지 10-17)

Ⅱ. 東學思想의 背景과 本質

1. 東學思想의 背景

1) 社會的 背景

양반을 지배 계층으로 하는 身分制 사회였던 조선사회는 1830년대 이후 돈으로 벼슬을 사고 족보를 속여 양반 행세를 하는 돈 많은 농민, 상인들이 나타나고 과 거의 신분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소작농으로 전락해버린 양반들도 나타났다.

양반들의 세력 균형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朝鮮王朝의 兩班 官僚 政治는 일부 소수 양반들에 의해서 독점되어 양반사이의 세력이 깨어지게 되면서 대립과 분열 이 격화되어 원래적인 체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양반사회는 17세기 이후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여 19세기 중엽에 와 서는 純祖, 憲宗, 哲宗의 3대 60여 년 동안 국가의 통치를 외척이 독점하고 운영한 勢道政治8)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하여 軍國의 機務, 百官의 任命은 물 론 왕명 출납까지 간섭하여 권력을 남용하였으며, 정치체제는 정치기강의 문란에 따른 官僚制度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純祖代에 老論을 배경으로 한 外戚 安東 金氏의 이른바 戚黨政治는 일가 친척 까지도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며 그 횡포와 부패는 극에 달하였다. 또한 대 를 이은 집권은 과거제의 문란을 가져오고 과거의 시행이 뇌물로써 합격이 결정 되었으며 직접 관직을 賣官賣職하는 폐풍을 초래하였다.

科場의 엄격하지 못한 것이 근래와 같은 일은 없었다. 팔방에서 모여드는 선비

8) 변태섭(1996),「한국사통론」, 삼영사, pp.356∼358.

-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 헌종, 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에 의한 세도 정치가 3대 60여 년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약화되고 정치적 파탄은 더 욱 촉진되어 외척이 정권을 독단하게 되었다.

가 처음에는 관광을 위하여 한양으로 올라오는 꼴이고 나중에는 모두 실망해서 돌아가는 꼴이다. 9)

과거제도의 부패와 파탄, 空名帖의 발매와 願納錢에 의한 품직, 수령 제수의 賣 官賣職 현상은 지방에 있어서도 돈을 수령에게 바치고 벼슬을 사는 이른바 賣任 取錢의 폐풍으로 발전하였다.

매관매작(賣官賣爵) 세도자(勢道者)도 일심(一心)은 궁궁(弓弓)이오 전곡(錢穀)쌓인 부첨지(富僉知)도 일심은 궁궁이오

유리걸식(流離乞食) 패가자(敗家者)도 일심은 궁궁이라 10)

양반 세도가들은 경제적 부까지도 장악하게되어 국가의 기본 수취체제인 三 政11)의 紊亂이 가속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미 극한 점에 달한 三政의 紊亂으로 지방 관리들은 축재에 전념하게 되었고 향리들과 결탁하여 농민을 착취함으로써 농민 생활의 절대적 부담과 함께 농촌 사회 피폐를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 날 삼정이 모두 결함과 폐단이 심하여 백성이 살아가기 어렵게 됬다. 그들 가운데서도 還穀이야 말로 백성에게 ‘뼈를 베는 폐단’으로 되어 있다. 심하면 아예 나누어 주지도 않은 쌀을 갚아내라고 마구 독촉하게 되니 이것은 이미 환곡도 아 니다. 12)

또한 설상가상으로 19세기 전반에는 水害와 饑饉13)들이 겹쳐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를 동요하게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농민들의 政治意識과 社會意識도 성장하여 그들의 불만 의식이

9) 순조실록,「권 20」, 순조 17년 10월 戊午. ; 이강일(1992), “東學의 人本主義 敎育思想”, 석사학위논문,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p.6에서 재인용.

10) 龍潭遺詞, 夢中老少問答歌, 天道敎中央總部.

11) 삼정이란 田政, 軍政, 還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삼정 중에서도 민생에 가장 폐해가 큰 것은 환곡이었으며, 특히 환전, 환곡의 회수(貸與錢의 回收)에 큰 폐단이 있었다.

12) 備邊司騰錄, 哲宗3년, 10月 22日.

13) 1841년 겨울에는 나쁜 질병이 돌았고 1846년 6월에는 지진이 일어났으며, 이해 9월에 는 전국적으로 수해가 심하였다. 특히 1830년과 40년대에는 3,4년 간격으로 일어나던 수 해가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거의 해마다 일어났고 이듬해 1851년 7월에는 전국에 걸쳐 수재가 심하여 다음해 2월에는 서울과 삼남지방에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다. 최동희 (1974), “水雲의 基本思想과 그 狀況“, 「韓國思想史叢書Ⅳ」, p.160 ; 정대성(1999), ”水 雲 최제우의 敎育思想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 p.12에서 재 인용

팽배하게 되어 마침내 전국 각지의 民亂14)으로 발전․확대 되었다.

月出夜無東 日落夕不西 달이 동쪽에 솟으나 밤은 동쪽이 없고,

해가 서쪽에 떨어지나 저녁은 서쪽이 아니라.15)

따라서 정치․사회적인 혼란과 불만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은 末世에 대한 탄식 으로 이어졌으며 이를 극복할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게 되었다.

한편 19세기 중엽 조선사회는 내부적 모순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전해온 다 른 사회적 불안이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즉 西勢東漸의 위협이 19세기에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19세기에 와서 서구 열강은 中國과 日本을 무력으로 개항하 게 하였는데 1840년 淸나라를 상대로 아편 전쟁을 일으켰던 英國은 그에 승리한 대가로 1842년 南京條約을 체결하여 홍콩을 할양받고 강제로 제 항구를 개항케 하더니 마침내 1860년 英佛 연합군이 北京마저 침공했다. 日本도 1854년 美國의 함포 위협아래 굴복하여 개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16) 또한 北方에서는 러시아가 남하하여 연해주 일대를 자기의 영토로 확보하고 있었다. 위와 같이 동양은 서구 열강들의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었고 이러한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朝野 는 크게 불안해하였다. 이 같은 서양 세력의 영향은 조선에도 미쳐 서양인들이 충 청도 해안에 나타나서 무역을 요청하였고, 1845년에는 다도해 수역을 측량하는 동 시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또 이듬해인 1846년에는 프랑스 군함이 충청도 해안에 출현한 일도 있었다.17)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민심을 크게 동요시키고 조정을 불 안케 하여 관민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14) 천재와 질병 조선후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민중의 불안과 분노는 민란이란 형태로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는 데 이에 대한 대강은 다음과 같다.

- 1800(순조 즉위) : 경상도 안동에서 60여명의 농민들이 관아 습격.

- 1808(순조 8년) : 함경도 단천에서의 농민들이 府使 축출 사건 - 1811(순조 11년) : 홍경래의 난.

- 1833(순조 33년) : 미곡상과 관리들의 농간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영세 시민들이 폭동.

- 1841(헌종 7년) : 경주 농민 수 백명 환곡을 부정하는 복합(伏閤) 상소.

- 1862(철종 13년) : 2월, 경상도의 진주 민란, 4월, 전라도 익산 군민 3천여명의 관아 난입 사건과 제주도에서 세 차례에 걸친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 밖에 같은 해에 전국에 걸쳐 모두 70여회의 농민 봉기가 있었다.

15) 東經大典, 詩文, 偶吟, 天道敎中央總部.

16) 한우근(1983), 「東學農民蜂起」, 일조각, p.52.

17) 이기백(1979), 「한국사 신론」, 일조각, p.314.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 니 이 또한 상해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 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 안민의 계책이 장 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18)

그러나 당시의 위기 위식은 오랫동안 仇怨의 관계에 있던 日本의 침략19)으로 인하여 西勢의 침범 이상으로 더욱 위협적인 것으로 느껴지게 하였다.

가련(可憐)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가련하다 전세임진(前世壬辰) 몇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개벽(開闢) 아닐런가 요순성세(堯舜聖世) 다시와서 국태민안(國泰民安) 되지마는 기험(崎險)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기험하다 개같은 왜적(倭賊)놈아 너희신명 돌아보라

너희역시 하륙(下陸)해서 무슨은덕(恩德) 있었던고 ...(중략) 세상사람 뉘가알꼬 그역시(亦是) 원수(怨讐)로다20)

이처럼 內憂外患으로부터 받았던 민심의 어지러움과 政治․社會的 불안과 동요 속에 민중을 구제하고 국가 안위의 방향을 염원하여 생성된 것이 바로 東學運動 이며 思想이었던 것이다.

2) 思想的 背景

東學의 성립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적 배경 외에 사상적 궁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조의 在來思想으로는 儒敎․佛敎․道敎를 비롯하여 기타 民間信仰이 있었으나 기성의 사상은 민중들에게 아무런 전망과 구원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儒敎思想은 당쟁과 양반차별, 男․女 差別論의 合理化思想으로 활용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극에 달하니 이미 實學과 같은 학문상의 큰 도전을 받

18) 東經大全, 布德文, 天道敎中央總部. “ 是故 我國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 是亦傷害之數也 西 洋戰勝功取 無事不成而 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歎 輔國安民 計將安出 ”

19) 1875년(고종 12년) 9월 일본 군함 운양호와 우리나라 강화도 포대간에 일어난 포격 사 건, 일명 강화도 사건, 이 사건의 결과 일본측의 강요에 의해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 간 에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비로소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이 일어나게 되었 다. 이홍직(1968), “운양호사건”,「국사대사전」, 지문각, p.990.

20) 龍潭遺詞, 安心歌, 天道敎中央總部.

고 있는 무력한 사상이 되고 말았다. “佛敎思想 역시 조선 초부터 시작된 崇儒政 策에 밀려 이미 사회 교화적 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되어 버렸다. 道 敎 역시 風水圖讒思想化하여 토류와 민간에 유행하는 土俗信仰과 구분이 잘되지 못하였다.”21) 오히려 壬辰倭亂 이후 조금씩 전파되어 오던 天主敎가 강렬한 개화 매력을 타고 핍박 속에서도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이것 역시 이질적인 사상으로부터 오는 위협은 민심을 동요하게 하는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민심은 마침 이 때 일어난 黃詞永 帛書 事件22)으로 인하 여 天主敎의 배후에 서양의 무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水雲은 이와 같은 총체적 사상 공동화 현상에 대하여

水雲은 이와 같은 총체적 사상 공동화 현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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