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거사불교의 확산과 禪宗의 復興
3. 曹溪宗 성립에 끼친 거사불교의 영향
조계종은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대의 종단이다. 조계종의 종헌법에 의하 면, 선종을 처음 전래한 道義를 宗祖로 하여 中闡祖로 普照知訥, 中興祖로 太古普 愚를 여기고 있다.192) 조계종의 기원이나 성립‧법통‧종조 등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고려시기에 형성된 종파로 중국의 육조선이 고려적인 풍토 에서 형성된 선종계열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193)
일반적으로 고려에서 조계종이 발생한 배경에는 문벌귀족과 결합해서 번성했던 교종세력 대신 선종사찰을 후원하여 불교계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한 무신정권과 선종세력의 결합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 즉 무신정권의 정치적 의도 와 마찬가지로 선종세력 역시 이전의 불교계의 폐해를 인식하고 개선하고자 무신 정권의 후원 아래서 신앙결사운동을 수행하였다. 이는 기존 개경 중심 불교계의 폐단을 비판하는 산간 불교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으며,194) 결과적으로 는 조계종의 성립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172년(명종 2)에 세워진 坦然의 「高麗國曹溪宗堀山下 斷俗寺大鑑國師之碑」와 1185년(명종 15)년 세워진 예천의 「용문사중수기」를 들 수
192) 대한조계종 종단 종조: http://www.buddhism.or.kr/bbs.
193) 신진욱, 「최씨무인정권과 조계종과의 관계일고」, 동국사상20,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1987, 150 쪽.
194) 김두진, 앞의 책, 2009, 228쪽.
있다. 「용문사중수기」에는 대선사 조응이 1125년(인종 3)에 조계선에 중격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지눌의 수선사 개창 이전부터 조계종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조계선은 승과의 조계종 승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시기 이미 조계 종이 성립되었으며 국가적으로 공인, 독자적인 승과를 시행해왔다는 것을 의미한 다.195) 또한 「楡岾寺事蹟記」에는 “1189년(명종 19)에 조계대선사 익장이 금강산 유 점사에 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계종은 지눌에 의해 개창되었다기 보다는 이 전 시기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한 선종이 선적종으로 통칭되어지다가 의천의 천태종 창립 이후 정체성 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독립적인 종단체제를 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196)
고려 중기에 이르러 세력이 약화된 선종세력은 의천의 천태종 개창 이후 선종 내부에서 교선일치를 받아들이는 천태종계의 입장과 순수 선종 자체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선적종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이 과정에서 천태종세력이 선종 9산의 승 려들을 많이 흡수함으로써 기존의 선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천태종 세력과의 구 분을 짓고 재부흥을 꾀하고자 선적종 세력이 조계종으로 개칭하여 불리게 된 것으 로 볼 수 있다. 즉 조계종은 구산선문을 일컫게 된 명칭으로 볼 수 있다.197) 특히 이 시기 이러한 해동천태종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모습은 가지산문의 원응국사 학일에게서 역시 확인할 수 있다.
학일과 같은 기존의 계통을 고수한 선적종 세력이 조계종으로 개칭함으로써 그 성격을 견고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이란 명칭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몇몇 의 비문에서 보일 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즉 조계종은 일찍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려사회에서의 영향력과 존재가 미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교종세력이 정권과의 결탁을 통해 불교계와 사회에 영향을 미쳤 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종세력, 즉 조계종 세력이 본격적으로 고려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지눌의 수선사 개창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조계종의 본격적인 부흥은 사굴산문계의 선승인 지눌이 1182년(명종 12)에 보제 사에서 개최한 談禪法會에 참석하여 불교계의 타락을 비판하고 이를 계기로 도반
195) 이영호, 「12세기 초기의 한국 선종 상황과 조계종 성립시기 소고」, 불교학보59, 동국대학교 불 교문화연구원, 2011, 131쪽.
196) 김영태, 한국불교사개설, 경서원, 1988, 294-296쪽.
197) 신진욱, 앞의 논문, 1987, 151쪽.
10명과 함께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하였다. 이후 거조사에서 정혜결 사문을 작성하여 호국 기복불교나 우상불교에서 벗어나 정법불교로 복귀하였다.
형식불교를 탈피하여 수행불교로의 진전과 궁중불교, 귀족불교에서 벗어나 대중불 교의 건설을 지향하였고, 공보산의 보제사에서 결사 명칭을 수선사로 바꾼 것이 다.198) 지눌은 정혜결사로 새로운 산문을 성립시켰다고 여겨지는데 공보산 보제사 를 조계산 수선사로 명칭을 바꾸면서, 외형상 산문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199)
한편, 명칭 변경에는 정치 세력의 영향 또한 미쳤다. 지눌이 정혜사에서 결사할 당시 이미 근처에는 혜조국사(혜소)가 개창한 정혜사가 존재하였다. 이후 왕명에 의해 지눌의 정혜사는 수선사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의 영향 도 있었을 것이다. 즉 최씨 정권이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종세 력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려 전기부터 이미 조계선이란 명칭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나 하나의 계파로서 성격을 지니고 성행한 것은 보조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지눌에 의해 수선사가 개창되고 이후 조계종이 성립되기까지는 최씨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함께 하였다. 또한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주로 문벌귀족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서 서히 성장해 온 지방사회의 향리와 이해가 일치한 독서층이었다.200) 때문에 당시 지방사회의 광범한 지지를 가져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이전 문벌귀족사 회에서 불교가 가지던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성격과는 차별화 된 모습을 보이는 것 이기도 했다.201)
조계종은 왕실과 문신귀족 등과의 결탁을 통해 세속화된 교종세력과는 달리 산 간, 지방적 불교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결과적 으로 무신정권과 결합하게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최씨정권에 이르 러서는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교종세력의 반발이 빈번했는데, 그들은 본인들의 정 권유지를 위해 불교계를 회유하고자 선종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결국 이전 시기에 교종세력이 정치세력과 결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정치적 후원을 받았던 것은 불교사상이 고려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 김두진, 앞의 책, 2009, 226-228쪽.
199) 황인규, 앞의 논문, 2013, 16쪽.
200) 김두진, 앞의 책, 2009, 230쪽.
201) 진성규, 앞의 논문, 1992, 43쪽.
한편, 지눌의 결사운동은 백련결사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쳐 고려사회 전반적인 흐 름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백련사의 결사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了世는 지눌의 수 선사 결사에 직접 참가한 인물이면서 영향을 받았다. 즉 요세가 정혜사 결사에 참 가했던 경험을 배경으로 백련결사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사 이후에도 수 선사와 밀접한 연관을 지녔는데, 특히 수선사 2세인 진각국사 혜심과 교유하였으 며, 수선사의 영향을 받아 교선일치의 경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02)
즉 고려 전기사회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선종계가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에 의한 것이었다면 본격적으로 조계종이라는 하나의 산문으로서 자리 잡는 것에는 지눌의 결사운동에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불교계의 모순을 반성하고 선종세력 을 중심으로 일어난 불교계의 정화운동, 즉 결사운동은 결국 조계종으로써 자리가 확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이를 주도한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비롯되었 으며, 그 배경에는 무신정권의 지원 역시 있었음을 알 수 있다.203)
최씨정권의 지원에 대하여 조계종을 개창한 지눌의 경우 종파를 뛰어넘는 순수 한 결사운동을 진행하며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였다. 다만 2대 주지였던 혜심 의 경우 집정자였던 최우와 교유하는 등 긴밀한 관계하에 있었다. 즉, 민심을 수습 하기 위한 최씨정권과 이들의 지원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던 선종세력은 결사운동 을 통해 조계종으로 성립하였고, 무신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계속해서 사세를 확장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204)
이렇듯 무신정권의 비호 아래서 성장한 조계종과 고려 중기 사회에 등장한 거사 불교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사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조류는 당시 문벌귀족사회의 몰락과 이후 야기된 무인정권으로의 정치적 변화, 곧 교종 중심에서 선종세력이 재부흥함으로써 사상의 흐름과 변화를 예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지원으로 선종세력이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서는 거사불교와 선종세력과의 관계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조계종과의 연관성을 살 펴볼 필요가 있다.
거사불교의 등장은 단순히 정치세력의 변화만을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거사불교
202) 김두진, 앞의 책, 2009, 248-249쪽.
203) 황병성, 앞의 논문, 1991, 97쪽.
204) 신진욱, 「최씨 무신정권과 조계종과의 관계일고」, 동국사상20,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1987,
204) 신진욱, 「최씨 무신정권과 조계종과의 관계일고」, 동국사상20,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