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트남역사-반랑국~안남시대
베트남 북부에 있는 주(州). 북쪽으로는 타이응우옌(Thai Nguyen)주·랑선(Lang Son)주, 동쪽으로는 꽝닌(Quang Ninh)주, 남쪽으로는 박닌(Bac Ninh)주·하이즈엉(Hai Duong)주, 서쪽으로는 수도인 하노이(Ha Noi)직할시와 각각 경계를 이룬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베트남 원주민은 약 30만년전 선사시대부터 거주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4천년부터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2천년 전에는 철기문화가 시작하였다고 보고되기도 한다.
특히 기원전 2천 년 전부터 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국가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고대 베트남의 청
동기 기술이 절정에 달한 7세기의 동선문화(Dong Son culture)의 유물 및 유적이 발굴되면서 전설상의 반랑국의 존 재가 확인된다. 베트남인들은 기원전 2천년전 반랑국의 흥왕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긴다. 한편 베트남인의 선조는 중국 의 화남지방에 거주했던 월족(越族)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도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이전에 독자적인 토착문화를 이루 어 왔다고 한다.
기원전 275년에 반랑국을 멸망시키고 안 즈엉 브엉에 의하여 어우락 왕국이 세워졌고, 어우락 왕국은 진나라의 장수
인 찌에우 다에 의해 합병되어 남비엣(남월: 南越, 오늘날 비엣남의 기원임)의 한부분이 된다. 찌에우 다는 중국인 관리 에서 시작하였지만 토착문화에 익숙하고 자신을 현지인들과 동일시하면서 중국의 한나라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인 들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위대한 황제로 본다. 그런데, 이 남비엣은 BC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됨 으로써 베트남은 그 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대(唐代)에는 이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 어 이후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주도는 박장이다.
2. 최초의 독립왕조
중국대륙의 당송교체기의 혼란기에 남비엣 지역을 장악한 류엔이 국호를 대월이라 하였다가 이후에 남한으로 바꾸었 다. 이 세력은 중국대륙과는 별도의 세력을 이루면서 베트남지역을 장악하였지만, 베트남에서의 중국세력을 몰아내려는 응오꾸엔(吳權)과의 일전을 벌인다.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게 대승리를 거둔 응오꾸엔이 이듬해인 939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
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왕조를 세운다. 이후 딩, 레 왕조로 이어졌으며, 레(黎)왕조는 송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지켰다. 이들 왕조에 이어서 1009년에 성립된 리(李)왕조는 리꽁우언에 의해 만들어져 송나라의 재침 입을 물리치면서 20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입과 내부혼란으로 리왕조는 무너지고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쩐흥다오에 의해 쩐(陳)왕조 (1226~1400)가 세워져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국가의 하나임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쩐왕조의 멸망 이후 들어선 호왕조 는 허약하여 명나라의 침입을 받으면서 1406년에는 다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약 20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3. 레왕조
1428년 레러이가 명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레왕조(허우레(後黎)왕조라고도 함: 1428~1788)는 베트남 봉건왕조 중 에 가장 오래 지배한 왕조의 하나이며 봉건왕조가 가장 발전한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네번째 왕인 타인똥(聖宗)은 베트 남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만들었다. 그는 국내에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당율을 근간으로 베트남 고유의 관 습법과 사회제도 등을 반영한 베트남 최고의 성문법인 <國朝刑律>을 만들어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군주제 를 실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남방정벌에 나서 참파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까지 정복하였다.
그러나 타인똥의 사후에 혼란을 겪다가 막당중에 의해 왕조가 멸망하자 레왕조의 중흥노력이 일어난다. 1592년 막씨
가 축출되고 레왕조가 부활되었으나 이후에는 왕조의 정통성과 권력을 둘러싸고 북쪽에는 응웬 가(家)가, 남쪽에는 찡 가(家)가 지배하면서 남북으로 갈라져 대립과 분열이 지속되었으며, 양쪽간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등 이러한 대립구 도는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서로간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휴전을 하여 1세기 정도를 지냈으나 오랜 전란으로 전국의 농촌이 황폐화되면 서 농민들의 봉기가 빈발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1771년 응웬냑, 응웬후에, 응웬르 삼형제가 농민들을 모아 일으킨 떠이 썬(西山) 봉기로 남부의 응웬가의 세력이 1774년 무너졌고, 북부의 찡가의 세력까지 무너졌다. 북부 레왕조의 구원요 청으로 당도한 청나라의 20만 군대가 수도인 탕롱(오늘날의 하노이)을 잠시 점령하였으나, 1788년 후에(Hue)에서 왕 위에 올라 떠이산 왕조를 연 응웬후에에게 패배한다.
레왕조 시대의 남부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응웬가의 응웬아잉은 마침내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1802년 떠이산 군을 물리치고 후에를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웬왕조를 창건한다.
4. 응웬왕조와 식민지 시대
레왕조 시대의 남부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응웬가의 응웬아잉은 마침내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1802년 떠이산 군을 물리치고 후에를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웬왕조를 창건하게 되며, 이 왕조는 국 호를 과거의 중국에서 불렀던 남비에트와 구분하여 비에트남(越南)이라고 하였으며 1945년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응웬왕조의 2대 황제 성조명명제(聖祖明命帝)가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영국과 경쟁하며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구실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 민지가 되었다.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일본 등지에 그
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 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 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베트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
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8년(남부에서는 9년)이나 지속되었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되었고 같은 해 7 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된 결과, 북위 17°선을 경계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다. 제네바협정은 체 결 2년 후에 전국 총선거를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 조항은 이행되지 못하였다.
5. 베트남전쟁
고 딘 디엠의 친미정권(親美政權)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월맹에게 조종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1963년 11월 장군 두옹 반 민의 군부 쿠 데타로 고 딘 디엠은 실각하였는데 이때부터 베트남의 정국(政局)은 쿠데타의 악순환에 휩쓸려 무려 10여 차례의 쿠데 타를 겪은 후 1965년 6월에는 장군 구엔 반 티우의 정권이 들어섰다. 티우 정권은 1966년 새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967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과 상·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1969년 2월에 공산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되 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65년 8월 ‘통킹만(灣)사건’을 치른 미국은 베트콩의 활동은 곧 월맹의 침략행위라는 견해를 표 명하고 북폭(北爆)을 개시하였다. 베트콩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미군은 소탕전에 직접 뛰어들어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었 고 민생안정·농촌건설에 주력하는 ‘평정계획’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이 전쟁에는 동남아시아의 집단방위를 목 적으로 하여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타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도 파병하였다. 1969년 2월 공산군이 베트남에 대 하여 전면 공격을 개시하자 미국대통령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 1월 미국과 월맹 간의 비밀회담이 계기가 되어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베트남·베트콩(남베트남의 공산 당)·월맹 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공산군은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1월 푸옥빈 성도(省都)를 함락, 점차 베트남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4월에 대통령 티우가 사임하고, 트란 반 후옹을 거 쳐 장군 두옹 반 민이 난국 수습의 중책을 맡았으나 대통령 민의 평화협상 제의를 베트콩은 거절했다. 1975년 4월 30 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30년에 걸쳤던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렸다.
6. 중월국경전쟁
1976년 6월에 개최된 남·북 베트남 통일국회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였으나 30여 년에 걸친 전쟁을 겪은 국토의 황폐(荒廢)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국가 건설의 장애가 되었다. 1978년 남베트남의 개조(改造)사업이 본격 적으로 착수되고, 일반 상점의 사회주의화, 통화개혁 등이 단행되었으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호치민시(市)의 경제적 실권을 잡고 있는 화교(華僑)의 대량 귀국사태를 야기하였다. 그 결과 대중공관계의 악화, 군사·경제 양면에 걸친 중공 원조의 전면 정지라는 사태에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베트남은 같은 해 6월 소련·동구권의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맹하는 한편, 미국이나 동남아시아 제국 등 서방측 진영 에의 접근도 시도하였다.
1977년 가을부터 격화한 캄보디아와의 국경분쟁이 1978년에 들어서서 더욱 악화할 조짐을 보인 끝에 1979년 1 월, 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구국 민족통일전선이 캄보디아 전국토를 제압하기에 이르자 캄보디아와 우호관계 를 맺은 중공은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2월 17일 중공군은 중·월 국경지대에서 베트남에 대하여 선전포고 없이 대규모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베트남도 철저히 항전, 쌍방간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1979년 3월 6일 중공이 제안한 외무차관급회의를 베트남이 수락하였으므로 전투는 일단 종식되고, 5월 21일에는 제1차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1989년 9월에는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7. 도이머이정책
장기간의 전쟁 이후인 1975년과 1986년 동안에 베트남은 전후의 황폐함, 사회문제, 대규모 난민의 발생, 캄보디아 와의 분쟁 그리고 자연재해 등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의 고립정책과 무역금지 정책 이 베트남의 전후 발전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어려움들은 발전을 위한 특별한 제반 조건이 갖추어지 지 못한 베트남의 상황을 한층 악화시켜, 1986년에는 774.7%에 달하는 최악의 인플래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베트남 정부는 1986년에 모든 부문에 걸친 개혁 정책안인 ‘도이 머이(Doi Moi)’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도이 머이’ 정책의 가장 우선순위는 경제발전으로 정부에 의해 조절되는 다양한 시장 경제 영역을 창조해내는 경제부문에 대한 개혁이었으며, 동시에 합법적 경제환경을 구축하고 정당과 국가의 구조를 개편 하는 것이었다.
도이머이 정책을 통해 베트남의 경제는 개방되었으며 중앙계획적인 방식에서 시장 지향적인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모 든 재정의 중심이 예산 균형과 수출증대에 맞추어졌다. 1989년 이후에 베트남은 연간 1-1.5톤의 쌀을 수출하기 시작 했으며 인플래이션도 1990년에는 67.4%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와 치안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외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무역금지와 고립화를 벗어나 무역활동을 재 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에서 1998년 사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에 달했으며, 1999년 에 자연재해로 인해 GDP 4.5%로 주춤한 이후 2000년에는 다시 GDP 6.7%로 급속한 발전을 이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