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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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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1). 류 창 호*. 目 次 Ⅰ. 동아시아의 법적 전통과 특색 Ⅱ. 동아시아법계의 개념과 형성가능성 Ⅲ. 동남아시아의 법적 전통과 법제 Ⅳ. 한국 민법의 근대화과정 Ⅴ. 한국 민법에 있어서 전통과 관습 Ⅵ. 결어. I. 동아시아의 법적 전통과 특색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라고 하는 경우에는 한국․일본․중국․대만을 지 칭하는 것으로, 중세까지는 중국문화권에 속하였고 근대화 이후에는 대만 과 한국은 다 같이 반세기를 넘나드는 기간에 일본 식민지배를 경험하였 고, 중국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지만 한국․대만과 같은 식민지 경 험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강압으로 일본화된 서 구적 근대법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서의 법은 각자가 처해있던 * 한국법제연구원 부연구위원, 법학박사. 117. (2)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특수한 처지의 제약을 받으며 존재하였고, 한국과 대만은 다 같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그 식민지법의 권력적인 공통성이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법 전개는 다르고 식민지 피지배민중의 의식과 대응방법도 달랐을 것으로 보 인다.1) 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법제는 공통점과 함께 차별성을 동 시에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한국의 민사법학 분야는 1958년 현행 민법의 제정과 함께 독일법, 미국법, 일본법 등 외국의 입법론․해석론 및 학설을 계수 및 수용함으로 써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고, 민사법의 현대화를 위 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과 법의 괴리현상이 비롯되었으며, 현대법의 법제화과정에서도 과거의 전통과 관습을 성문법에 반영하는 노력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에서의 전통과 법’에 관한 연구는 근대법의 수용과정에서 단절 되었던 한국에서의 법적 전통을 ‘온고지신(溫故知新)’2)의 의미에서 재인식 하고, 이를 현대법에 용해시킴으로써 현대법에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한 방 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분야로 생각 된다. 전통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상․관 습․행동양식 등을 말한다. 즉, 전통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모든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가치있다고 판단되는 것만을 말한다. 따라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것이라도 선대(先代)가 하던 대로 수동적으로 따 르는 관행이나 관습은 그 가치에 대한 적극적․긍정적 판단이 따르지 않는 한 전통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제도들도 그것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역시 전통이라 할 수 없다.3) 1) 박병호, “동아시아에서의 법과 근대성”, 「법사학연구」제26호, 민속원, 2002. 10, 5면. 2) 온고지신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면 남의 스 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옛 것을 앎으로 서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즉, 역사를 배우고 옛 것을 배움에 있어 단지 그것을 알기만 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이치와 이론을 알 아내어 올바른 판단이 설 수 있어야만 된다는 뜻이다. 3) 최대권, “전통과 법질서”, 「문화전통과 사회발전」, 미원문화재단, 1991, 179∼180면.. 118. (3)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이러한 전통은 정치․경제․문화․사회의 각 분야에서 생성․발전․계 승․소멸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으며, 거래관계․단체․가족관계 등의 분 야에서도 법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거래관계와 가족관계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전통과 관습은 성문법을 제정․보완․폐지하게 하는 등 법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매개체로 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한국에서의 법적 전통은 민중들로부터 발전․계승되어온 순수한 내부적 인 전통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의 법제도들이 직․간접적으로 이식(移植) 또는 계수(繼受)되어온 부분이 있다 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과정은 다른 나라에서 4∼5 백년에 걸쳐 경험한 것을 거의 1백년 안팎이라는 단기간에 달성하는 과정 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요소가 뿌리깊게 잔존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는 전통적인 요소가 파괴된 점도 있다.4) 이러한 근대화과정은 한국 국민 들의 법감정에도 영향을 미쳐 거래관계와 가족관계 등의 사법적(私法的) 영 역에 있어서도 전통과 법의 충돌 및 조화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반복하면서 발전하여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전통과 법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 여 법은 생명령을 유지할 수 있으며, 전통의 계승을 통한 법의 현대화라는 명제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에서는 동아시아의 문화 및 역사적 전통과 법제에 대한 고찰을 통 하여 사법(私法)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법계(法系)의 성립가능성과 이에 대한 우리 법제의 발전을 위한 과제를 주요 대상으로 한다.. 4) 이에 관해서 한국 사회는 이미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에 21세기의 후기산업산회를 준비해야 할 입장에서 전통법에서 직접적으로 승계할 것은 윤리적 성격이 짙은 형법이나 가족법의 일부영역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견해도 있다(심희 기, “현행법제에서 전통법제의 수용과 그 과제”, 「법제연구 제3호」, 한국법제연구원, 1992. 12, 121∼122면).. 119. (4)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II. 동아시아법계의 개념과 형성가능성 1. 법계론의 의의 법계론(法系論)은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법질서를 몇 개의 법계(法系) 로 나누어 보는 것을 시도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5) 법계론의 측면에 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특히 첫째, 대체로 무수한 법질서를 소수 의 그룹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유익한가, 둘째 이러한 작업이 가 능하다고 해도 어떠한 기준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셋째 이러한 분류기준의 도출이 가능한 경우에도 어떤 법질서가 어떠한 법계에 속하는가를 어떠한 기준에 의해 결정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많은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법계론은 오늘날 서구의 비교법학자들에 의해 매우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고, 많은 비교법 교과서의 중심부분을 점하고 있다.6) 법계론은 이미 제2차대전 이전에 약간의 비교법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었 지만, 현재의 학설에 압도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프랑스의 René David와 독일의 콘라드 츠바이게르트(Konrad Zweigert)의 법계론이다. David 는 1950년에 「비교민법입문(Traité élémenaire de droit civil comparé」를 발간 하여, 법계분류의 기준으로서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기술적 관점을 주장하 였고, 특히 전자를 우선하였다. David는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세계의 법을 ①서구법계(프랑스법계와 영미법계), ②소비에트법계, ③이슬람법계, ④힌두 법계, ⑤중국법계의 5법계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David의 법계론은 세계의 비교법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1964년에 출간한「현대의 대 법계(Les grands systèmes de droit contemporians)」에서도 종래와 같이 법계 5)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信山社, 2002, 245頁. 6) 그러나, 최근에는 서구의 비교법학자 중에서도 법계론의 의의에 관해서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Hannes Roesler, Rechtsvergleichung als Erkenntnisinstument in Wissenschaft, Praxis und Ausbildung, Juristische Schulung, 1999, 1084 u. 1186, 1187 f. 참조.. 120. (5)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분류의 기준으로서 법기술적 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들고 있다. 그러 나, 여기서 그는 양자에 대해 동일한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전자의 분 류를 약간 변경하였다. 이에 의하면 현대 세계의 법계는 ①로마․게르만법 계, ②코먼로법계, ③사회주의법계, ④철학적․종교적 제도(이스람법, 힌두 법, 극동법, 아프리카법계의 4법계로 분류하였다. 이에 대하여, 츠바이게르트는 1961년 ‘법계론에 관하여(Zur Lehre von den Rechtskreisen)’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여, 법계론을 둘러싼 논쟁에 가 담하였다. 츠바이게르트의 법계분류의 키워드는 ‘법의 양식’이다. 각 법계는 독자적인 법의 양식을 갖고 있지만, 그 양식을 결정하는 요소는 이하의 5 개이다. 즉, 츠바이게르트는 5가지의 요소로 ①역사적 전통, ②특수한 법학적 사 고방법, ③특징적인 법제도, ④법원의 종류과 그 해석, ⑤이데올로기를 들 고 있다. 단, 이 논문에서 츠바이게르트는 법계론의 방법을 제시하엿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1971년에 괴츠(Hein Koetz)와의 공저 「비교법입문원론 1(Einfuehrung in die Rechtsvergleichung auf dem Gebiete des Privatrechts, Bd.1)」에서 서술되었다. 여기에서 츠바이게르트는 위에서 제시한 다원적 기 준에 따라 현대의 사법을 ①로마법계, ②독일법계, ③영미법계, ④북구법계, ⑤사회주의법계, ⑥기타 법계(극동법계, 이스람법, 힌두법)로 나누고, 각각의 법계에 관하여 상술하고 있다.. 2. 동아시아법계의 형성가능성 (1) 역사적 전통.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법의 역사에 있어서 서로 관련 하여 발전하여 왔다. 한국과 일본은 7세기 이래 중국(당나라)로부터 율령제 도를 도입하여, 이후 이것이 양국의 법제도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일본은 19세기말에 대륙법의 영향을 받아 법전을 편찬하였고, 이후 이것 이 일본의 법제도의 근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 121. (6)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에 이르러 대만과 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하였 고, 일제는 대만과 한국에 대해서 당초는 관습을 우선하였으나, 식민지정책 에 따라 일본법을 강제로 적용하였다. 반면, 중국에서는 1차대전 후 국민당 정권 아래에서 법의 근대화가 진전 되었지만, 특히 1929년부터 30년에 이르러 제정된 민법전은 독일법과 일본 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여기서 재차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공통점 이 형성되었다. 만약 중국과 일본간에 전쟁이 없었다면, 이 때 이래 중국과 일본간에 동일한 법계의 형성이 기대되었을 것이다. 중화민국 민법전은 중 국에서는 적용의 기회가 사실상 없었지만, 전후 장개석 정권과 함께 대만 으로 건너면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독립 후 새로운 법전편찬이 이루어졌다. 특히 1958년 에 제정된 민법전은 일본민법과 독일민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단, 독 일민법에 가까운 규정의 상당수는 이미 일본의 학설․판례로 인정되었던 것이므로 전체로서 일본민법과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중국은 제2차대전 후 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을 시작하여, 이 점에서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하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다른 노선을 취하 였다. 중국은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법제도의 정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는 점에서는 중국법의 전통에 따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끝 난 후 개혁개방노선으로 전환하여, 입법화가 진전되고 있다. 특히 민법관계 에서는 민법통칙(1986년)으로 계속되어 1999년에 계약법전이 성립하고, 잇 달아 물권법의 제정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장래적으로는 민상법통일법전의 등장도 예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법은 사회주의법계로부터 이 탈하여 동아시아법계로 점차 편입되어 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대전 후 일본은 미국에 점령되어 미국의 감독 하에 법개혁이 이루 어져서 헌법, 형사소송법, 상법, 경제법, 노동법의 분야에서 미국법의 영향 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미법의 영향에 관해서는 제2차대전 후의 한국과 대만도 미국의 군사적 지배 하에 있어 일본과 동일한 분야에서 미 국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반대로 오랫동안 미국과. 122. (7)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대립하여 왔지만 차후에는 시장경제의 도입에 따라 영미법으로의 접근도 예상된다. (2) 법문화적 측면. 동아시아 각국을 하나의 법계로 통합하는 경우의 공통적인 문화적 요소 로서는 다음 세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7) 1) 지리적 접근성. 동아시아는 원래 지리적 개념이다. 세계에는 스칸디나비아와 같이 주로 지리적 접근성에 의한 법계도 있다. 과거에는 교통기관의 미발달로 인해 인근 국가와의 사이에서만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에 문화적 일체성도 생겨 났다. 또 기후조건도 유사하여 공통의 문화적 요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글로벌화된 세계에서는 지리적 접근성만으로는 동일법계를 형성하 는데 충분하지 않다. 2) 유교문화권. 동아시아 각국에 공통된 문화적 특색으로서는 유교를 들 수 있다. 이러 한 점에서 동아시아법계와 유교문화권을 동일시하는 것은 보편적인 견해라 고 할 수 있고, 서구의 비교법학자들도 유교를 극동법계의 중요한 요소로 들고 있다.8) 유교문화권의 성립은 고대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발전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근 거로서 유교가 주목받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한층 더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유교는 법문화에 미친 영향을 실증적으로 고찰할 필요도 있다. 유교에 의하면 법은 사회통제의 제1차적인 수단이 아니라, 사 회는 도덕규범, 특히 예(禮)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서 유교문화권에서는 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흑백논리식의 재판이 아니라, 상호 양보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화해나 조정(調停)제도가 선호되었다. 이는 7)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258頁 8)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258頁.. 123. (8)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동아시아제국에 있어서 민사소송의 건수가 감소됨을 초래하고, 이에 대응 하여 재판관과 변호사 등 법률가의 수도 적은 편이다.9) 유교의 영향력에 관해서도 각 국별로 차이가 인정된다. 중국에서는 사회 주의정권 하에서 유교의 영향이 축소되어 왔다. 일본에서도 2차 대전 전의 학교교육에서는 유교가 중심적인 지위를 점하였지만, 2차 대전 후에는 그 지위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유교의 전통이 상당히 남아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교문화권설의 근거는 점차 약 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3) 한자문화권. 전술한 유교문화권설에 대한 보완으로 등장하는 것이 한자문화권설이다. 중국․대만․한국․일본은 한자를 사용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동아시아법계나 유교법문화권을 대신하여 한자법문화권의 명칭의 사용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10) 서구의 비교법학자 중에서도 비교법에 있 어서 언어나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11) 언어나 문자는 각 국민의 문화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어와 한국어․일본어 는 문법적으로는 완전히 별개의 언어이고,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는 문법 적으로는 공통점이 많은 편이지만, 전문가에 의하면 각각 독자적인 언어라 고 한다. 그러나, 이 3개국이 한자를 공유한다는 점에 의해 3개국간의 문화 적 교류는 용이한 편이고 실제로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12) 명치시대 초기에 일본에서 이루어진 서구법률용어의 번역작업도 실제로 는 중국에서 이루어진 번역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시 재번역된 사례도 많 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의 중국의 법전편찬의 경우에는 오히려 일본의 법률용어를 수입한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하고 있다.. 9)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258∼259頁. 10) 千葉正士, 「アジア法の多元的構造」, 成文堂, 1998, 126頁. 11) Bernhard Grossfeld, Kernfragen der Rechtsvergleichung, Tuebingen, Mohr, 1996, 53 ff. 12) 근래에 중국과 일본의 한류열풍을 예로 들 수 있다.. 124. (9)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3. 동아시아 보통법론. 한편, 최종고 교수는 한․중․일의 법사(法史)와 법사상의 기저에 흐르 는 보통법이라는 개념을 착안하여 동아시아 보통법론을 주장하고 있다.13) 여기서 동아시아 보통법14)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첫째, 법전화(Codification), 둘째 유교법문화, 셋째 향약과 촌락법, 넷째 법학을 들고 있다. 아래에서는 법전화․유교법문화․향약과 촌락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 법전화(法典化). 동양에서도 서양와 같이 법전화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권력자들은 정권을 세운 다음에는 반드시 법전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법전은 권력의 정당화의 수단으로서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법원(法源)으로 인식되었다. 법 전화에서 보통법적 특징을 이루는 요소는 법전화의 연속성이었다. 법제사 가들은 중국의 당률에서 송률, 명률, 청률에 이르는 법전화의 과정에 내용 적으로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법은 율령격식(律令格式)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체제를 가진 국가를 율령국가라고 불렀다. 고구려도 소수림왕 3년(93년)에 율령을 채택하였고, 신라도 진흥왕 7년(520년)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일본에 서는 7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율령이 채택되었다. 금과옥조(金科玉條)라는 말처럼 동양에서는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존중 하는 법적 안정성의 이념이 추구되었다. 서양의 판덱텐체계나 인스티튜치 오넨체계와 다른 동양식 행정제도에 입각한 육분체계, 즉 이전․호전․예 전․병전․형전․공전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도 동아시아의 공통점이었다. 13)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최종고, “동아시아 보통법론”, 「법학」, 제40권 2호, 서울대 법학연구소, 1999, 67∼85면. 이하에서는 이 논문의 내용을 일본의 동아시아 법계론 에 대비하여 요약․소개한다. 14) 여기에서 보통법은 영미법에서 사용하는 Common Law보다는 유럽대륙법에서 사용 하는 ius commune의 개념에 가깝다고 한다. 즉, Common Law라는 개념은 대륙법 (Civil Law)에 대립되는 영미법, 제정법에 대립되는 판례법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 문이라고 한다(최종고, “동아시아 보통법론”, 70면).. 125. (10)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2) 유교법문화. 동아시아법을 이념적․내용적으로 보통법으로 작용하게 한 이유 중 하 나로 유교를 들 수 있다. 물론, 불교․샤머니즘과 같은 종교적 영향이 국가 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공적으로 법과 정치에 관련이 깊은 것은 역 시 유교였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유교적 세계관․가치관․인생관이 공통적 호흡기를 이루어 그것으로 숨쉬며 살 수 있었고, 그것이 법으로 강제되었 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서양과 달리 법과 도덕의 독특 한 동양적 함수관계가 형성되었다.15) 또한, 법전의 해석과 운영에 있어서도 유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 다. 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에서 유교는 국경을 초월하여 보통법으로 적용 될 수 있는 정신적, 가치적 기초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가 동아시아법의 실효성의 근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향약과 촌락법. 동아시아의 보통법은 중앙적 법전화와 유교이념으로만 설명되어 질 수 없고, 민중 속에서 보통법이 어떻게 살아 있는 법으로 역할을 했느냐를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향약(鄕約)16)과 촌락법이다. 이러한 지치법은 그 이념적 공통성보다도 당해 지역에서의 특수한 사정 이 반영된다. 중국에서는 일종의 경찰조직과 같은 파우차오(保甲)제도가 중 요한 역할을 했지만, 조선과 일본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안 전을 위하여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이 제정되어 역할을 하였고, 일본에서 는 고닌구미(五人組)제도가 실시되었다. 특히, 지방사회를 실제로 규율하는 촌락법은 더욱 특수성이 강하게 나타났다.17) 특히, 일본에서는 도꾸가와시 15) 최대권, “한중일의 사회규범과 그 변화”, 「한국의 규범문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89∼137면 참조. 16) 향약은 중국의 송대(宋代)에 여씨형제에 의하여 1077년 창안되어 덕업상권(德業相 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원이레 의하여 자치적으로 주민을 규율해 나가는 일종의 자치법에 해당된다.. 126. (11)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대의 촌락법을 연구한 결과 서양과 달리 동양식의 화해와 조정제도가 독특 한 분쟁해결방식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사정은 달랐지만 근본적으로 농경사회와 어촌사회를 배경으로 한 사법질서 의 보통법적 성격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III. 동남아시아의 법적 전통과 법제 1. 베트남 베트남은 고대부터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중국의 문화적 전통, 특히 유교는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어, 프랑스법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독자의 사회주의법을 건설하 였지만, 도이모이정책의 진전에 따라 시장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1995년에 민법전이 편찬되었는데,18) 이 법전은 그 편찬에서 일본학자(森島昭夫)의 협 력을 받아 일본법 유사한 부분도 상당수 있다. 따라서, 베트남법은 장래적 으로는 동아시아법계의 일원으로서 위치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19)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역대왕조와 책봉관계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 에,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화 이전의 베트남법은 중국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또한, 유교의 영향도 받아 덕과 재능을 갖춘 인물에 의한 통치를 최우선으로 하였고, 법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인물에 의한 통지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필요악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20) 프랑스의 식민지시대에 있어서는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 랑스령 인도지나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베트남은 북부, 중부, 남부의 세 지. 17) 일본에서는 이를 무라오끼데(村掟, Village rules)라고 하였다. 18)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信山社, 2002, 251頁. 19) 이에 관해서는 稻子恒夫․鮎京正訓, 「ベトナム法の硏究」, 日本評論社, 1989 ; 鮎京正 訓, 「ベトナム憲法史」, 日本評論社, 1993 ; 森島昭夫, “ベトナムにおける法整備とわ が國法律家の役割”, 「自由と正義」, 1996年 7月号 참조. 20) 北村一郞, 「アクセスガイド外國法」, 東京大學出版會, 2004, 411頁(鮎京正訓집필부분).. 127. (12)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역으로 구분되는데, 각 지역에는 상이한 법체제가 시행되었다. 특히, 남부 는 프랑스의 직할식민지로 되어 프랑스법이 직접 적용되었다. 또, 다른 지 역에서도 프랑스의 식민지총독부가 법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 과, 베트남법은 프랑스법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대륙법계의 법제도의 전통 을 가지게 되었다.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선언은 1940년 9월 이른바 ‘북부 프랑스령인도차이나로의 진주(進駐)’ 이래 베트남을 지배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또, 독립선언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및 1789 년 프랑스 시민권리선언을 인용하여 민족의 권리라는 독특한 권리를 선언 하였다. 그후 프랑스와의 전쟁을 겪고 남북분단이 고정화되어 북부의 사회 주의화를 진척시킨 시기, 즉 1950년대말까지는 북부에 있어서는 중국공산 당에 의해 형성된 중국법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소 비에트법의 영향이 지배적으로 되어, 법학교육의 분야에서도 소비에트․동 독 등의 국가들이 베트남의 법학연구자의 육성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1991 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될 때까지는 베트남은 소비에트법의 압도적인 영향 을 받았고, 헌법을 비롯하여 주요한 법령의 제정에 있어서는 소비에트연방 의 법률고문단이 하노이의 사법성 등에 파견되어 입법작업을 원조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베트남법의 전환을 결정적으로 촉진하였 다. 이미 베트남에서는 1986년 이래 도이모이정책이 채용되어 시장경제화 와 대외개방정책을 시행하였지만, 1991년부터 도이모이정책의 진전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베트남에 있어서 큰 전환의 시기를 맞이한 1992년 에 제정된 헌법(2001년 12월에 부분개정)은 인권․사적소유라는 종래의 베 트남헌법에는 없었던 새로운 법영역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1995년에는 민 법전을 제정하고 그후 민사소송법을 제정을 시작하는 등 일련의 주요법률 의 제정 및 개정을 행하였고, 시장경제화에 적합할 수 있도록 법정비를 진 행하였다.21). 21) 스웨덴에서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베트남에 대한 법정비지원을 시작하여, 그후 프랑스․독일․UNDP(유엔개발계획)이 동일하게 법정비지원에 착수하였다(北村一郞,. 128. (13)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2.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원래 다원적인 국가로서, 각지의 독자적인 관습으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가 전래된 결과 성립한 adat22)라고 하는 관습법이 발달되 었다. 근세 이후 네덜란드의 지배 하에서 네덜란드인에 대해서는 네덜란드 민법전이 적용되었다. 독립 후 현재에도 adat법(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슬람교도의 가족생활에 대해서는 이슬람법)이 적용되고 있다.23) 현재의 인도네시아공화국 영역에 해당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언어․ 종교․관습이 다른 다수의 종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종족은 공동체별 로 법적 성격을 지닌 관습을 갖고 있다. 또, 13세기경부터 군도(群島)의 서 부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의 보급에 의해 이슬람법도 각지에 수용되었다. 19세기경부터 네덜란드는 이 지역에 있어서 영역적인 식민지지배를 강하게 하였다. 네덜란드는 식민지 주민을 인종집단으로 분류하여, 각각에 대해 다 른 법체계를 적용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이를 식민지의 기본법으로 정하였 다. 따라서, 식민지 주민은 계약․토지소유․상속 등에 있어서 다른 규범에 구속받았고 또한 상이한 재판제도의 영향 아래 놓였다. 특히 중요했던 것 은 유럽인과 원주민의 분류였다. 유럽인은 네덜란드 본국법에 원칙으로서 준거하는 식민지법의 적용을 받았다. 반면, 원주민은 각 종족의 관습법 (adat)의 적용을 받았다. 관습법의 적용에 있어서 네덜란드는 식민지사회조 사의 성과를 근거로, 식민지를 19개의 관습법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즉, 네 덜란드는 무수하게 존재하는 각 지역의 관습법 중 19개만을 승인하여 법으 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유럽법과 관습법․이슬 람법의 병존 및 이러한 규범의 속인적 적용은 현재에도 존속되고 있다.24) 민사법과 달리 식민지 정부는 형법에 관해서는 통일화를 채택하여 1918 년에 통일형법전을 제정하였다. 소송법은 재판제도가 인종마다 다르므로 「アクセスガイド外國法」, 413頁(鮎京正訓집필부분)). 22) adat는 관습이라는 의미를 갖는 마인어이다. 23)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252頁 24) 北村一郞, 「アクセスガイド外國法」, 383頁(島田 弦집필부분).. 129. (14)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복수의 제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유럽인을 대상으로 하는 재판제도가 일 제강점기에 폐지된 결과 소송법은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재판제도에 적 용되었던 간략한 소송법으로 통일되었다. 1945년 일제점령 하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조사회가 기초한 인도네시 아공화국 헌법(1945년 8월 18일 공포)의 경과규정은 신법령에 의해 폐지되 기 전까지 헌법 공포시에 유효한 법령을 계속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하였 다. 그 후의 모든 헌법도 같은 취지의 규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인도네 시아는 독립 후에도 식민지의 모든 법령을 승계하였다. 식민지법의 폐지와 법체계의 통일에 의한 국민법 제정은 독립 후의 중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 러나, 1981년에 형사소송법이 전면적으로 개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식민지 법은 여전히 실정법의 중요부분을 점하였고, 형법․민상법도 네덜란드어를 원문으로 한 식민지의 법전을 사용하고 있다.25). 3.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에서도 이슬람교 등 각종 종교의 영향을 받아 관습법이 발달 하였지만,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식민지로 되어 특히 형사법이나 상거래법 의 영역에 대해서, 영국법이 도입되었다. 제도적으로도 최근(1985년)까지 영 국의 추밀원 사법위원회에로 소송위탁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 슬람법으로의 회귀와 법의 측면에서 아시아화가 진행되고 있다.26) 말레이시아는 1957년 말레이반도의 각 주로 구성된 말라야연방이 영국 으로부터 독립하여, 1963년에 싱카폴 및 보르네오섬의 2개 주(州)가 가맹하 여 말레이시아연방이 탄생하였고, 1965년 싱가폴의 탈퇴로 인해 현재 13개 주와 연방직할령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로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영국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으로 되기 이전에 적용되고 있었던 이슬람법 및 관습법 은 현재에도 가족법을 중심으로 한 한정된 법분야에서 여전히 효력을 갖고 있고, 현재의 법제도의 기반은 식민지 또는 보호령 시대의 영국법계수에 25) 北村一郞, 「アクセスガイド外國法」, 384頁. 26)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252頁.. 130. (15)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의해 서서히 형성되어 왔다. 말레이반도는 영국의 식민지인 해협식민지와 보호령인 말레인연합주 및 비말레인연합주로 구분되었다. 해협식민지는 1807년․1826년 및 1855년에 발표된 사법칙허장에 기초하여 영국법의 적용 및 법원의 설치가 점진적으 로 이루어졌다. 영국은 1895년에 결성된 말레이연합을 구성한 각 주의 왕 의 주권을 인정하는 한편 ‘말레이인의 종교 및 관습을 배제하는 사항’에 관 하여 주(州)의 왕(王)을 보좌하는 영국인 이사관을 배치하여 이사관제도에 의한 간접통치를 행하였다. 말레이연합을 구성하지 않았던 비연합주는 1909년 영국․샴간의 협정체결에 의해 영국의 보호령으로 되어 영국인 고 문관이 파견되었다. 영국은 말레이연합주와 각 주의 왕의 주권을 승인하는 한편, ‘말레이인의 종교 및 관습을 배제하는 사항’에 관해서는 영국인 고문 관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였다.27) 말레이연합주 및 비말레이연합주에서의 영국법의 계수는 1937 및 1951 년 민사에 관한 법령의 제정 이전에는 판례법 및 영국 또는 영연방인 인도 법을 모델로 하여 입법하였다. 양 법령은 말라야연방에 적용되었던 1956년 민사법에 관한 법령에 의해 폐지되었고, 이 법령은 1956년 민사법에 관한 법률(1972년 개정)으로 개정되어 현재 영국법 적용의 근거로 되었다.. 4. 태국 태국에서는 그 고유법은 인도의 마누법전의 영향에 의해 발달하였지만, 19세기 후반이 되어, 일본과 동일하게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위해 법의 근 대화 필요성을 인식하여 당초에는 영국법, 추후에는 프랑스법과 독일법의 영향을 받아 법전편찬이 행해졌다. 1935년에 최종적으로 성립된 민상통일 법전은 비교법의 소산이라고 하지만 실제상은 일본의 민법․상법전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되었고, 본고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법과 태국법에는 공통점 이 있고, 태국은 유교나 한자의 영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법계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28) 27) 北村一郞, 「アクセスガイド外國法」, 393頁(桑原尙子집필부분).. 131. (16)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태국의 전통법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1805년 에 라마1세의명에 의해 통합된 ‘三印法典’이다.29) 이 법전은 아유타야왕조 의 멸망 이래 혼란스러워졌던 법제를 정비하기 위해, 당시 전쟁의 피해를 면하기 위해 왕궁에 보관하였던 모든 법률문서를 수집하여 이를 기초로 편 찬하였다. 여기에는 1350년부터 1805년까지의 455년 동안에 제정․공포된 여러 가지 법령․포고가 포함되어 있어 아유타야시대의 상황을 알아 볼 수 있다. 아유타야시대에는 국왕만이 유일한 토지소유자로 인정되었고 국왕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민의 사회적 지위를 토지를 기준으로 나타내는 위계제 (位階制)를 채택하여 아시아형 전제국가를 형성하였다.30) 태국은 식민지화를 면할 수는 있었지만 서구 열강과의 사이에서 영사재 판권의 승인과 관세자주권의 포기라는 내용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서구법에 기초한 사법제도의 확립 및 법전편찬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불평등조약의 개정만이 서구법에 기초한 법률정비의 목적은 아니었다. 동남아시아의 강국이었던 미얀마가 영국에 패한 현실에서, 유럽세력으로부터 생존을 위해서는 세계에 통용되는 법제 도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법전편찬을 촉진한 것을 볼 수 있다. 태국에서는 프랑스 법률가를 중심으로 법전편찬이 이루어졌으므로, 프랑 스법을 중심으로 한 대륙법의 영향이 큰 편이다. 그러나, 제2차대전 후에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오고 있는 편이다.. 28) 五十嵐淸, 「現代比較法學の諸相」, 252頁. 29) 1805년 이후 ‘三印法典’은 서구법에 기초한 법률정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실제로 사용되어 왔다. 새롭게 제정된 법령에 흠결이 있는 경우에는 ‘三印法典’이 적용된 경우도 있었다. 30) 北村一郞, 「アクセスガイド外國法」, 402頁(西澤布久男집필부분).. 132. (17)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IV. 한국 민법의 근대화과정 1. 근대 민법의 태동 한국의 역사 속에서 법제의 변천은 일제강점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큰 변화를 겪은 것으로 구분된다. 일제강점기 이전의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 선시대에서는 원시법에서부터 출발하여 중국의 법제의 영향을 받아 왔으 나,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일본의 민법제정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서구의 영 향을 받은 일본법이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하 여 한국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법의 영향에서 일본의 서구법의 영 향이 교차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조선 후기(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자주적으로 민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재산을 보호할 필요성이 개혁안에 포함되었고, 민법제정을 위한 법률기 초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31) 그러나, 이러한 자주적인 입법시도는 일본의 침략으로 열매를 맺기 전에 좌절되었다.32) 한국에 있어서 일본 민법은 미군정에 의하여 1960년 현행 민법이 시행 되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일 본 민법의 적용은 현행 민법의 제정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일제는 우선 조선민사령(1912년)의 시행을 통하여 일본 민법을 직접적으 로 조선에 적용하였다. 다만, 조선민사령에 의하면 조선인 상호간의 법률행 위에 대하여는 법률 중 공공의 질서에 관한 것이 아닌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그 관습에 의하며(제10조), 조선인의 친족 및 상속에 관하여 는 조선의 관습에 의하도록 하였다(제11조).33) 이를 기초로 일제는 전국을 31) 조선후기 민법전 제정작업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정종휴, “민법전의 편찬”, 「한국 법학 50년 I」, 한국법학교수회, 1998, 541면 이하 참조. 32) 이은영, 「민법총칙(개정판)」, 박영사, 2000, 18면. 33) 일제의 조선민사령 중 한국 민사관습의 적용에 관해서는 제10조부터 제12조까지에 서 규정하고 있다. 각 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0조 조선인 상호간의 법률행위에 관하여는 법령 중 公共의 질서에 관계없는 규. 133. (18)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대상으로 관습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본격적인 조선의 관습조사에 착수하였 다.34). 2. 민법전의 편찬과 민법의 특징 광복 이후 미군정 시대에는 민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법전기초위원회를 설립하여 민법기초요강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후 1948년 법전편 찬위원회는 미군정의 민법제정작업을 이어받아 1950년 민법안 편찬요강을 완성하였고, 1958년 2월 22일 법률 제471호로 제정되어 약 11회의 부분개 정을 통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118개의 방대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 다. “우리 나라의 법학은 해방 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35)라는 말과 같이 한국 민법(이하 ‘민법’이라 한다)은 1945년 해방 을 기점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약 60년 동안 많은 발전이 있어왔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친 민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민법은 1950년대의 법사상을 수용하여 근대법 초기의 법원칙을 수 정하려는 후기 근대법 또는 현대법의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민 법 제1조에서 조리(條理)의 법규범성을 인정한 점, 제2조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을 민법 전반에 적용되는 원칙으로 규정한 점, 채권법에 다수의 강행 규정을 두고 있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둘째, 민법은 대륙법계의 법전(法典)을 계수하여 제정되었다. 입법자들은 1950년대에 성문화되어 있던 독일 민법, 스위스 민법, 중국 민법, 만주 민 법 등을 참조하고 당시 한국에 적용되고 있던 일본 민법을 수정․보완하는 방법으로 입법하였다. 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그 관습에 의한다. 제11조 제1조의 법률 중 능력, 친족 및 상속에 과한 규정은 조선인에 이를 적용하 지 않는다. 제12조 부동산에 관한 물권의 종류 및 효력에 관하여는 제1조의 법률에 정한 물권 을 제외하고는 관습에 의한다. 34) 일제의 관습조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27 면 이하 ; 정종휴, “민법전의 편찬”, 565면 이하 참조. 35) 김증한, “한국법학 30년의 개관”, 「법정 제5권 9호」, 1975. 9, 71면.. 134. (19)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셋째, 민법은 각 부분마다 최상의 입법례를 선택하여 조합을 이룬 것으 로 전체적인 체계는 독일 민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세부적인 제도들 은 스위스 민법․프랑스민법․만주민법 등에서 도입된 것들도 있다. 민법의 각 제도는 다른 제도와 상호 관련을 갖고 해석․적용되기 때문 에 외국과 같은 조문이라도 다른 제도와의 합성으로 인해 그 해석과 적용 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민법의 특색은 제도를 최초로 창안했다 는 점이 아니라, 관습 등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자주적인 판단에 따라 외국제도를 취사․선택하여 합성해 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36). 3. 민법에서의 관습의 지위와 역할 어떤 거래나 가족관계와 관련하여 상당한 기간동안 사람들이 같은 행동 을 반복할 때 이를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관습은 일정한 직역(職域)․업 종․지역의 내부에 보편화되어 있는 경우에 그 집단의 법률관계에 관한 관 습을 형성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습이 사실상 위반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에 정착되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법적 확신이 일반화된 것, 즉 관습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부여된 것을 관습법이라고 한 다. 민법에서는 관습법과 관습을 구별하여 관습법에 대해서는 규범력을 인 정하고 있다. 민법 제1조에서는 관습법을 민법의 법원(法源)으로 인정하고 있고,37) 제 106조는 법률행위의 해석기준으로서 관습을 임의법규에 우선하고 있다. 또 한, 제185조에서는 물권을 창설하는 경우는 관습법에 대해서 법률과 동일 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38) 이와 같이, 민법에서 관습과 관습법은 계약에 36) 이은영, 「민법총칙(개정판)」, 20면. 37) 한편 상법 제1조는 ‘商事에 관하여 본법에 규정이 없으면 상관습법에 의하고 상관 습법이 없으면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라고 하여 상관습법을 상법의 法源으로 규정 하고, 민법에 우선하여 적용되도록 하고 있다. 38) 그 외에도 민법에서는 관습과 관련하여 자연유수 관련 공사비용부담에 관한 관습 (제224조), 수류(水流)의 변경에 관한 관습(제229조 2항), 용수권(用水權)에 관한 관 습(제234조), 담의 설치 및 비용부담에 관한 관습(제237조 3항), 경계선 부근의 건축 에 관한 관습(제242조 1항), 특수지역권(제302조), 매매에서 쌍방의무의 동시이행의. 135. (20)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있어서 당사자의 의사표시를 해석하는 기준으로서 임의법규에 준하는 역할 및 법률을 보충하는 보충적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는 점 에서 민법의 규범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국에 일본 민법을 강제하는데 따른 반감을 줄이기 위하여 근대적인 방법에 의한 관습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 에 의한 관습조사는 한국 문화의 말살정책과 맞물려서 기존의 관습을 없애 거나 허위의 관습을 날조한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39) 반면, 한국과 같이 외국의 법체계를 수용하는 입법방식을 취할 경우에는 성문법이 국민의 법문화와 괴리되지 않도록 관습조사 및 법의식조사를 실 시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관습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 했다.40) 관습법과 조리가 민법의 법원(法源)인 이상 사회조사를 통해 우리 법의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V. 한국 민법에 있어서 전통과 관습 1. 권리주체에 관한 관습과 법 (1) 성년에 관한 관습. 현행 민법은 단독으로 완전․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행위능력을 불필요에 관한 관습(제568조 2항), 고용계약에서 보수액과 지급시기에 관한 관습(제 656조) 등이 있다. 39) 일제하에서 조사된 관습은 그대로 관습법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라, 행정기관의 심 의를 거쳐, 법원이나 기타 기관의 질의에 대한 회답이나 통첩의 형태로 인용된 것 에 한해 규범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결과 제사상속, 여자균분상속, 입양관습 중 백골양자(白骨養子) 등은 부정되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정종휴, “민법전의 편찬”, 576면 이하 참조. 40) 근래의 관습조사로는 박상철 외, 「국민법의식조사연구」, 한국법제연구원, 1991 ; 전 재경 외, 「관습법조사연구(I)」, 한국법제연구원, 1991 ; 정긍식, 「국역 관습조사보고 서」, 한국법제연구원, 1992 ; 박상철 외, 「법전문가의 법의식조사 연구」, 한국법제연 구원, 1996 ; 전재경, 「어촌사회의 법의식」, 한국법제연구원, 1998 ; 박영도 외, 「법 률문화 및 법률용어에 관한 국민여론 조사」, 한국법제연구원, 2001 등이 있다.. 136. (21)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만 20세 이상의 성년자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법률에서는 행 위능력에 관한 일반적인 규정은 발견하기 힘들다.41) 따라서, 성년에 대한 관습의 존재와 그 효력, 즉 성년에 관한 관습이 행정상의 성질을 갖는가 또는 민법상의 성질을 갖는가, 만약 행정상의 성질을 갖는다면 병역상의 필요 때문인가 또는 공법상의 의무에 관한 필요 때문인가, 민법상의 성질 을 갖는다면 미성년자는 계약 등 법률행위를 할 수 없는가 또는 법률행위 의 효력은 어떠한가, 미성년자의 후견제도는 존재하는가 등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혼인을 앞두고 남자는 관례(冠禮)를 하고 여자는 계례(笄禮) 를 하는 풍습이 있어 관례나 계례를 한 자를 성인으로 인정하였다.42) 그러 나, 조혼의 폐습으로 인해 관례의 여부는 반드시 행위능력의 유무를 구별 하는 법적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또한, 남자는 일정 연령이 되면 호패를 차야 했는데, 그 연령은 병역의무가 시작되는 약 16세에서 20세(이를 丁年 이라 한다)로서 공법상의 성년의 표준으로 되었다.43) 그러나, 실제로는 15 세 이상인 경우에는 관례가 허용되었다. 이러한 점을 기초로 할 때, 조선시대에는 남자는 15세44)에 비로소 관(冠) 을 쓸 수 있고, 정년(丁年)을 15세로 하는 관습에 의하면 행위능력에 관한 성년은 15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5세 이상인 경우에도 행위능력이 인정 되지 않고 보호자가 그를 대리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행위능력자의 여 부는 연령을 표준으로 하되 동시에 보호자의 유무를 표준으로 하였다. 41) 1895년의 법무령 제3호 ‘민형사소송에 관한 규정’ 제2조는 ‘未成年者는 卽 二十歲 以下니 護後人이 있는 有한 境遇에는 護後人이오 護後人이 無한 境遇에는 親戚 中 의 成年한 者로 代訴하게 함이 可홈(隆熙 3년(1909년) 법률 제13호로 폐지)’이라는 규정이 있었지만 실제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42) 실제 이러한 관습은 현행 민법에도 반영되어 제826조의2에서는 성년의제제도를 두 어 미성년자의 경우에도 혼인을 한 경우에는 성년자로 인정하고 있다. 43) 호패제도의 주목적은 장정의 수를 분명히 하고 백성의 행적을 찾는데 편리함을 제 공하기 위한 것으로, 남자는 호패를 찰 연령이 되어야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 갈 수 있음과 동시에 병역의무를 부담하게 된다는 점에서 공법상의 성인기준으로 볼 수 있다. 44) 초년부터 역(曆)에 따라 년수를 계산한다.. 137. (22)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즉, 15세 미만자와 15세 이상자로서 보호자가 있는 자는 행위무능력자이 고, 15세 이상자로 보호자가 없는 자를 행위능력자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행위무능력자가 계약 등의 법률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보호자가 대신해야 하였고, 무능력자가 단독으로 법률행위를 한 경우에 보호자는 이를 취소할 수 있었다. 보호자는 부(父)가 되고, 부가 없을 때는 조모(祖母) 또는 모, 조 모나 모가 모두 없을 때에는 백숙부(伯叔父) 등의 근친이 되고 조부(祖 父)․장형(長兄) 등이 호주인 경우에는 호주가 보호자가 되었다.45) 한편, 여 자의 경우에는 기혼자를 성년자로 보는 것이 관례이지만, 부권(夫權)에 의 해 그 행위능력이 제한받으므로 실제로는 미망인만이 능력자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2) 행위무능력자에 대한 관습과 법. 현행 민법은 행위무능력자로 미성년자 외에 심신(心神)이 박약(薄弱)하 거나 재산낭비자인 한정치산자와 심신상실(心神喪失)의 상태에 있는 자인 금치산자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미치광이(瘋癲)와 바보(白痴) 을 폐질(廢疾, 고칠 수 없는 병)로 인정하여 정신병자에 포함시켰다. 정신병 자는 부모․처․자․백숙부 기타 근친이 그를 보좌하여 계약 등의 법률행 위는 대신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46) 따라서, 정신병자 스스로가 한 법 률행위는 무효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와 같이 정신병자에 대해 관청에 출원하여 금치산의 선고를 받는 제도나 관습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 다. 귀머거리(聾者), 벙어리(啞者), 장님(盲者)도 폐질로 인정되었지만, 귀머거 리나 장님이 한 법률행위의 효력에 대해 일반인과 차이를 둔 것은 아니고, 다만 벙어리에 대해서 드물게 후견인을 인정하고 벙어리가 단독으로 한 법 률행위는 후견인의 취소권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실제로 이러한 자와 법률행위를 하는 상대방은 보증인을 요구하거나 제3자를 입회시키는. 45)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87면. 46)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89면.. 138. (23)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예도 있었다. 재산낭비자에 대해서는 그의 행위능력을 제한하여 그 행위에 대해 감독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관습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그 행위의 효력도 정상적인 효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아내는 남편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하여여 하므로, 처 에 대한 남편의 부권(夫權)은 강력하였고 반사적으로 처의 행위능력은 극단 적으로 제한되어 거의 모든 일은 남편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남녀가 유별하여 여자가 가정 이외의 일에 관여하거나 사회활동 을 하는 것은 배척받았기 때문에 여자가 법률행위를 하는 것은 아주 드물 었으며, 신체의 구속이 따르는 고용계약의 경우에도 남편이 대신하여 계약 을 체결할 뿐 아니라, 남편이 계약의 당사자로 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 나, 남편의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정신병자 또는 투옥된 경우 등에는 처가 단독으로 법률행위를 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도 남편의 존속이 있는 경우 에는 그 존속의 허가를 받아 법률행위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처가 남편의 허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한 법률행위는 관습상 남편이 취 소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일제시대에 적용된 일본민법이 구민법에서 도 처를 일정한 범위에서 무능력자로 규정하였던 것과 태도를 같이 하였 다. (3) 법인에 관한 관습과 법 1) 단체에 관한 전통적 관습. 법인은 법률에 의해 권리능력이 부여된 법적 주체로서, 현행 민법은 단 체에 대하여 그 구성원인 개인과 별개의 독립된 법인격을 부여하고 단체의 고유한 재산과 활동을 인정함으로써 단체의 법률관계를 명확히 처리하고 있다. 자연인이 육체와 정신을 갖고 살아서 활동하는 자연적 생명체인 것 과 대조적으로 법인은 육체와 정신을 갖지 않지만 자연인의 사회생활과정 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인위적인 조직체이다.47) 이와 같이 법인을 사람 으로 보는 시각은 매우 발달된 추상화된 법기술이라 할 수 있는데, 서구에 47) 이은영, 「민법총칙(개정판)」, 213면.. 139. (24)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서는 이러한 법기술이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된 것이었 다. 한편,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비록 법인이라는 명칭은 없어도 개인 이외의 재산의 주체가 되어 계약 등 법률행위 및 소송의 당사자로 될 수 있는 단 체가 존재하였다. 즉, 종래 조선시대에서는 자연인 이외에 재산의 주체로 될 수 있는 것은 국가, 왕실, 부락 기타 종교, 학술 또는 기예(技藝)를 목적 으로 하는 영조물(營造物)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 전에 국왕과 왕실이 법률행위를 하고 소송당사자로 된 예는 없었으나, 일제시대에 들어 서는 국가와 왕실도 법률행위와 소송의 당사자로 되기도 하였다.48) 또한, 상속인이 없는 재산은 사자(死者)의 유산(遺産)으로 보관하여 그 수익을 사 자의 제사비용에 충당한 예도 있다.49)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형 식의 재산관리는 재단과 유사한 단체의 존립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부 락. 부락은 리(里)․동(洞) 또는 촌(村)이라 불리는 것으로 예로부터 산야(山 野)․전답․제방 등을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혼구(婚具)나 장구(葬 具) 등을 갖추고 보관하는 창고를 건설한 부락도 있었고 금전을 저축하여 주민에게 대부하여 이자를 받는 부락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예로 충청 북도의 한 부락에서는 논 1648마지기, 밭 168정보, 택지 19마지기를 소유하 고, 이 재산은 주민의 사용․수익에 제공되기도 하고 그 수익을 부락의 비 용에 충당하기 위하여 특별히 관리자를 정한 경우 외에는 이장이나 동장이 관리하며, 주민이 그 부락을 떠날 때는 그 수익을 받을 자력을 상실하고 새로 전입해오는 자가 그 자격을 취득한 사례도 있다.50) 이러한 조선시대의 부락은 현대법에서 총유(總有)의 법률관계와 유사한 것으 로 현재의 판례도 부락인 里에 대해서 '비법인 사단'으로 인정하고 그 재산은 주 48)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국가가 재산의 주체인 것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왕실의 재 산은 국가의 재산과 구별되었다는 점에서 왕실도 재산의 주체로 볼 수 있었다. 그 러나, 조선 후기에는 국유재산과 황실소유재산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49)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107면. 50)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108면.. 140. (25)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민의 총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51) 3) 사 찰. 현대법에 있어서 불교종단(대한불교조계종 등)은 그 산하의 사찰과 승려 및 신도로 구성되는 비법인사단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갖는다. 종단에 소속 된 사찰은 자율적인 주지임명권 등을 상실하고 종단이 그 권한 등을 행사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찰이 독립된 단체로서의 실체를 가지는 경우에 는 독자적인 권리능력과 당사자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52) 사찰도 단체로서의 실질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법에서의 사찰의 법적 지위도 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에서부터 제도 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으로서 조선시대에도 억불정책에 의해 사찰에 대한 많은 제한이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사찰에 속한 재산을 인정하였으며, 신도 나 승려가 기부한 부동산과 공작물 등이 모두 사찰의 재산에 속했다. 또한, 사찰의 재산은 승려의 개인 재산과 구별이 되었고, 주지가 사찰재산을 관 리하여 그 수익으로 사원의 비용에 충당하였다. 그리고 사찰의 재산을 전 당(典當)에 제공하거나 매각할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2. 물권에 관한 관습과 법 (1) 소유권. 토지의 소유는 일찍부터 인정되었다. 소유자는 법령 또는 관습에 따른 제한의 범위에서 그 토지를 사용․수익․처분할 수 있고, 그 토지 위에 권 리를 설정하고 양도도 가능하였다. 그리고 토지소유권의 일종인 토지의 共有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조 선시대는 계(契) 또는 동사(同事)53) 등을 통해서 조합 또는 이와 유사한 관. 51) 대판 1995. 9. 29, 95다3205. 52) 대판 1992. 1. 23, 91마581. 53) 동사는 2인 이상이 공동으로 상업 또는 상거래를 하는 출자관계를 말한다(한국법제 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303면).. 141. (26)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계로 물권을 공유하는 사례가 있었다. 공유물에 대한 지분을 균등한 것으 로 추정한 관습은 없었고 출자의 정도에 따라 지분이 정하여 지는 것으로 보인다. 공유물의 처분과 변경은 공유자 전원의 동의에 의해 가능하고 공 유지분을 담보제공하거나 처분하는 경우에는 다른 공유자의 동의를 요건으 로 하였다. 공유물의 관리는 공유자의 협의에 따라야 하고 협의가 성립되 지 않은 때에는 과반수로 결정하였다. 공유물불분할특약을 한 경우에는 분 할청구를 할 수 없지만, 이러한 특약은 매우 드문 편이었다. 따라서, 통상 적으로는 특별한 제한없이 공유물분할청구가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용익물권.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관습상의 용익물권으로는 차지권(借地權), 특수 지역권의 성격을 갖는 입회권(入會權) 등이 있었다. 차지권(借地權)은 사용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설정되었다.54) 그 종류로는 가옥 등 건물을 소유하기 위한 것, 묘지 등 공작물을 소유하기 위한 것, 수 목을 소유하기 위한 것, 경작하기 위한 것, 목축을 하기 위한 것 등이 있었 다. 또한, 일본 민법상의 입회권과 유사한 권리로서 둘 이상의 부락이 공유 하는 산야(山野)에서 공유자인 각 부락 주민이 식물을 채취하고 방목을 하 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현행 한국 민법상의 특수지역권(제302조)에 해당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현행 민법상의 특수지역권은 어느 지역의 주 민이 집합체의 관계로 각자가 타인의 토지에서 초목, 야생동물 및 토사의 채취, 방목 기타의 수익을 하는 권리를 말한다. 이 권리는 지역주민의 자격 과 결합된 것으로 어 떤 주민이 그 지역을 떠나 이주하게 되면 그 특수지 역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특수지역권은 민법에 근거를 두고 있 지만 주로 관습에 의해 성립되는 물권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관습이 현 행법에서 성문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55) 54) 차지권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지상권, 영소작권(永小作權), 임차권, 사용차권 등이 있 다.. 142. (27)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3) 담보물권 1) 전당권(典當權). 전당은 물건 또는 권리를 목적으로 하는 채권담보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저당제도와 유사하다. 전당에는 목적물을 채권자에게 인도하는 점 유담보방식과 비점유담보방식이 양립하였다. 즉, 전당의 목적물이 동산인 경우에는 이를 채권자에게 인도하여야 하고, 부동산인 경우에는 인도를 요 하지 않고 단순히 문권(文券) 또는 문기(文記)56)만을 인도하는 것이 관례였 다. 따라서, 동산에 대한 전당은 현재의 질권에 해당하고, 부동산에 대한 전당은 저당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질권의 성질을 갖는 전당은 동산 뿐 아니라, 어음․채권․전세에 의한 차가권(借家權) 등을 목적으로 하는 등 채권을 전당으로 목적으로 하는 것 도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채권질도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저당의 성질을 갖는 전당은 토지나 가옥의 전당을 목적으로 하여 이를 채권자에게 인도하 지 않고 단순히 문권(文券)만을 인도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부동산 외에도 선박57)․삼포(蔘圃, 인삼재배밭)․어장(漁場)58)․저수지59) 등을 목적으로 하 였다. 전당에는 일정기간동안 원금을 갚고 환퇴(還退 : 도로 물림)할 것을 약 정하고 그 기간이 지나도록 원금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가 담보물의 환퇴를 55) 반면, 조선시대의 지역권에 관해서는 수로(水路)를 개설하기 위한 인수지역권은 존 재하나, 통행지역권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 보고서」, 198면 참조). 56) 조선시대에 부동산의 소유권이나 기타 권리를 표창한 문서를 말한다. 57) 선박의 전당은 선박의 인도 대신 그 문권만을 채권자에게 인도하는 방식으로 이루 어졌으며, 1910년 선박법의 시행 후에는 등록을 요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 선박 등기부에 기재되는 선박저당권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8) 어장의 전당은 어장의 사용권을 전당의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1909년 어업법에서 성문화되었다. 59) 저수지나 보(洑)에 대해 전당을 설정하는 경우에는 문권을 채권자에게 인도하고 저 수지 자체의 점유를 인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채권자가 이자를 대신하여 그 수세(水 稅)를 수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143. (28)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요청할 수 없도록 하는 유질특약(流質特約)을 하는 경우와 유질특약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유질특약이 있는 경우라면 원고의 청구는 부 당한 것이고 유질특약이 없는 경우라면 피고는 원고의 청구에 응해야 한 다. 이에 대해, 판례는 피고가 원고의 청구에 응해야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당사자 사이의 계약내용에 따른다고 하고 있다.60) 이러한 특약이 없는 경우에는 전당권자가 그 목적물을 매각하고 그 대 가로부터 변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채무자가 연기를 신 청하면 채권자가 이를 승낙하거나 채권자가 관청에 제소하여도 관청은 채 무자를 위하여 상당한 유예기간(官限)을 부여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이행 지체 후 즉시 실행되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특약이 있는 경우에도 역시 채무자의 연기신청 또는 관청의 유예기간 부여 등으로 이행 지체 후 즉시 전당권자가 그 목적물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은 드문 편이 었다. 또한, 전당의 실행에 있어서 목적물의 가액이 채권액을 초과하는 경우에 는 유질특약이 있는 경우에는 그 차액을 반환할 필요가 없고, 특약이 없는 경우에는 차액을 반환하여야 한다. 그러나, 전당물의 가액이 채권액을 명백 히 초과한 때에는 채무자가 스스로 변제를 하거나, 다른 매수인을 통하여 변제하게 함으로써 전당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통례였다고 한다.61)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전당권은 현재의 저당권이나 질권과 유사한 점도 있으나, 이러한 유사점은 담보제도가 갖는 공통점에 기인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동산에 대한 전당권은 현재의 비전형담보제인 동산 양도담보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조선시대의 전당권은 관습을 통하여 현재에도 동산양도담보제도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민법상의 저당권62)과 질권은 유럽의 담보제도가 우리의 전통적인 담보제도. 60) 박병호, 「한국법제사고」, 법문사, 1974, 97면. 61)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207면. 62) 근대의 부동산등기제도가 비점유담보제도인 저당권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점 을 염두에 둔다면, 조선시대에는 근대와 같은 부동산등기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는 점에 비추어 보면 더 분명하다.. 144. (29)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와 관계없이 일본의 민법을 통해 법제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유치권. 조선시대의 관습에는 물건의 수선을 의뢰한 자가 수선비를 지급하지 않 으면 수선자는 이를 지급받을 때까지 그 물건을 유치할 수 있는 제도가 있 었다. 또한, 가축의 사육을 의뢰한 자가 사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이를 지 급받을 때까지 그 가축을 유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현대법에서의 유치권과 같은 물권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치권의 성립요건으로는 현행 민법과는 달리 피담보채권이 반 드시 그 물건에 대하여 발생할 필요는 없지만, 그 채권이 변제기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또한 채권자가 유치하는 경우에는 다른 채권자 등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담보물권의 대항력이 인정되었고, 채무자가 변제하지 않는 경우에는 채권자는 채무자로 하여금 유치물을 처분하게 하여 다른 채권자 에 우선하여 변제받을 수 있다. 이는 유치권의 환가방법으로 경매권과 간 이변제충당권으로 제한하여 인정하고 있고, 유치권자에게 우선변제권을 인 정하지 않는 현행 민법상의 유치권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채권에 관한 관습과 법 (1) 관습상의 이자. 조선시대의 관습에서는 이자는 금전대차의 경우에 금전으로 정하는 것 이 일반적이지만, 곡물을 대차(貸借)하는 경우에는 곡물로 이자를 정하는 예도 있었다. 또한, 도전(賭錢)이라고 하여 금전을 대여하고 곡물을 이자로 수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이자는 금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곡물도 이자로 할 수 있었다. 이율은 계약에 따라 약정되며 관습상 이율이 확실하 게 정해진 것은 없었다. 지방에 따라서, 당사자 관계에 따라서 또는 담보의 유무, 금액의 과다 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만, 보통 월 3푼 내외가 보 통이며 높은 경우에는 월 6∼7푼 정도, 낮은 경우에는 월 1푼 5리 이하도 있었다.. 145. (30)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이자의 제한에 관해서는 실제 월리(月利) 2푼을 관변(官邊)이라 하며, 이 자에 관한 분쟁으로 관청에 제소하여 청구하는 경우에는 이 제한을 초과하 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연이율 24%의 제한은 현대에도 계승되어 지금은 폐 지된 이자제한법에서도 이자율을 연 24%로 제한하였는데, 24%의 근거를 이러한 관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채무불이행 1) 채무불이행의 효과. 계약해제는 현대와 과거에 있어서 공통적인 채무불이행의 효과로 인정 되었다. 또한、 계약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금전채 무에 대해서는 지연이자를 부과하고, 기타 채무에 대해서는 채권자가 그 불이행으로 받을 수 없는 물건의 대가를 변상시키는 방법이 통용되었다. 금전채무가 이자부 채무인 경우에는 약정이자와 동일한 이자를 받지만, 무 이자부 채무인 경우에도 기한 경과 후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관습이 있었 다.63) 그 이율은 약정이율에 준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관청에 제소하는 경 우에는 월 2푼의 이자를 부과하였다. 또한, 채무자가 이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보통 이자를 첨부하는 것을 조 건으로 이행을 유예하는 것이 통례였다. 따라서, 그 이자도 약정이자로 되 어 금전채무를 불이행하는 경우에도 채무자에게 지연이자를 부과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강제이행. 조선시대에는 채무자가 임의이행을 하지 않으면 채권자는 관청에 제소 하여 강제이행을 청구하고 관청은 일정한 기간(官限)을 정하여 채무자에게 이행을 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채무자가 그 기간 내에 이행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채무자를 구류(拘留)하거나 태형을 집행한다. 63) 이 경우 지방에 따라서는 기한 후 5일에서 15일간은 이자를 면제하는 관습도 있었 다.. 146. (31)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작위채무의 불이행에 대해서는 이를 강제로 이행하게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 므로 대가를 지급한 때에는 그 반환을 요구할 수 있으나, 현대의 대체집행과 같 이 타인에게 이를 하게 하고 그 비용을 징수하는 관례는 드물었다. 부작위채무 의 불이행은 관청에 제소하여 이를 제거할 수 있었다. (3) 연대채무 및 보증채무 1) 연대채무. 조선시대에는 다수인이 공동으로 금전이나 곡물 등을 차용하는 것을 동 대(同貸)라고 하며, 각 차주(借主)는 현대에 있어서 연대채무와 유사한 관계 가 성립한다. 이 경우 다수인이 공동으로 1개의 채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각 채무자가 각각 1개의 채무를 부담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리고 채권자는 다수의 채무자에 대해 1개의 채권을 가지고, 채무자 1인 으로부터 변제를 받는 것과 그 전원으로부터 변제를 받는 것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결국 다수인의 채무자에 의해 전부의 변제를 받는 것을 목적으 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채권자가 이행청구를 하는 경우에는 채무자 전원에 대해 할 수 있음은 물론 그 중 1인 또는 일부에 대해서도 전부의 이행을 청구할 수도 있다. 또한, 수인의 채무자에 대해 동시에 각각 전부의 이행을 청구하는 것은 관 습상 허용되지 않으므로, 채권자가 수인의 채무자에 대해 동시에 이행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그 총액이 채무 총액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 공동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경우에는 각자가 그 전부를 책임지는 것이 관습이므로 현대법과 같이 부진정 연대채무와 유사한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보증채무. 조선시대에는 보증채무를 부담하는 자를 보인(保人)이라 하고, 관습상 주채무자가 채무이행을 할 수 없는 경우에 그 이행을 책임지는 것으로 하 였다. 보인(保人)은 주채무자에게 변제자력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이행책임. 147. (32) 아시아법제연구 제3호 2005. 3. 이 있으므로 단순히 주채무자가 변제기를 경과하여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실만으로 보인(保人)에게 보증책임이 부과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64) 따라서, 채권자가 변제기에 보인(保人)에게 이행청구를 하는 경우에 보인 (保人)은 먼저 주채무자에게 청구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으나, 주채무자가 도망하거나 먼 지방으로 이사한 경우 채권자는 즉시 보인에게 이행을 청구 할 수 있고, 이에 보인은 채무자에게 자력(資力)이 있음을 이유로 그 청구 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법에서 보증인에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최고․검색의 항변권은 다소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 보인이 2인 이상인 경우에는 그 전원 채무 전액을 보증하는 것으로 보 아 보인 각자의 책임은 그 인원수에 따라 분할되므로, 채권자는 1인의 보 인에 대해 채무 전부를 청구할 수 없고 이 경우 보인은 초과부분에 대해 다른 보인에게 청구할 것을 요구하여 그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현행 민법은 보증인의 구상권에 대해 주채무자의 부탁으로 보증인이 된 수탁보증인(제441조 이하)과 주채무자의 부탁없는 보증인(제444조)으로 구 별하여 수탁보증인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주채무자에 대한 구상권(제441 조) 및 사전구상권(제442조) 등을 인정하고 있고, 부탁없는 보증인에 대해 서는 주채무자가 그 당시에 이익을 받은 한도 또는 주채무자의 현존이익의 한도에서만 구상권을 인정하는 등 차이를 두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관습조사결과 보증인으로 되는 자는 대부분 주채무자의 부탁으로 보증인이 된 수탁보증인이고 주채무자의 부탁없이 또는 주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보증인이 된 사례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65) 이러한 점에서, 부탁없는 보 증인의 구상권에 관한 현행 민법 제444조의 실효성에 대한 실증적인 검토 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66). 64)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247면. 65) 한국법제연구원, 「국역 관습조사보고서」, 250면. 66) 판례검색 프로그램인 LX 7.9를 통해 검색한 결과 하급심 및 대법원 판례 중 부탁없 는 보증인의 구상권에 관한 민법 제444조가 적용된 판례는 단 1건(대판 1990. 11. 13, 90다카26065)이 검색되었을 뿐이다.. 148. (33) 동아시아의 문화전통과 한국 민법의 발전. (4) 계약금. 조선시대에는 매수인이 매도인에 대해 대금지급시기에 앞서 대금의 일 부를 교환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를 선급(先給)이라고 한다. 선급은 계약 의 이행시까지 매수인과 매도인이 해약하지 않을 증거로서 교부 및 수취하 는 것이었다.

참조

관련 문서

현행 의료법 및 일본, 미국 등의 간호인력 배치는 입원환자수 를 기준으로 하는 반면, 간호관리료 차등제 산정은 병상수를 적 용하고 있어 간호사 산정기준이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