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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노인요양시설의 확충 X ■

외국의 경우 노인요양시설의 종류는 노인환 자의 중증도, 일상생활의 자립정도, 가족 등 간 병인력의 유 • 무 등에 따라 다양하게 설치 • 운 영하고 있으며, 시설은 입소요양시설, 낮 또는 밤에만 이용하는 부분입소시설. 환자집을 방문 하여 간병하는 거택간병 서비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O 입소요양시설 : 노인요양시설

- 노인보건 시설 (일본), Nursing Home(미국 등), 노인 홈(일본, 영국, 네델란드 등), 호스피스(미국, 영국 등), Short Stay

O 부분입소시설 : Day Care Center O 거택간병서비스 : 방문간호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도 시설이 부족하고 수 준도 미흡한 실정이나, 앞으로 그 수요는 급증 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정부나 국고지원에 의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생활보호대상 노인과 같은 저소득계 층을 위한 무료시설은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공 급하더라도, 일정소득이상 고령자 등의 전문요 양을 위하여 일정액의 이용자부담을 전제로 한 유료시설은 사회복지단체, 보험자 등의 공공기 관, 또는 민간단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 도록 하기 위한 정책적인 유인책과 지원이 요 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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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마다 오월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린이날(5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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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8일)이다. 그래서 오월 한 달을 ‘가정의 달’로 정하고 서울을 비롯한

엄 기 원 한국아동문학연구소 대표

여러 고장에서 크고 작은 가족 행사를 벌이고 있다.

또 오월이 돌아오면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 선생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올해는 소파 탄생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1923년 봄, 소파 방정환은 젊은 대학생 신분으로 적지인 일본 수도 도쿄에서 뜻을 같이하는 유학생들을 불러 모아 어린이 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다. 그것이 1923년 3월 16일의 일이었다. 소파는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대대적인 행사를 펼쳤다.

이 색동회 초창기의 동인은 방정환을 위시하여 정병기, 진장섭, 윤극영, 정순철, 조준기, 고한승, 조재호, 손진태, 이헌구, 마해송, 정인섭 등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이 색동회가 시작한 5월 1일 어린이날은 광복 후에 정부에서 5월 5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오월은 어린이와 깊은 인연을 '갲어 왔고, 어린이는 가정에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므로 오월이 가정의 달로 자리메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월을 맞이하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가정(家庭)의 사전적 풀이는 ①한 가족이 살림하고 있는 집안. ②주인을 중심으로 하여 어버이와 자식, 부부들이 공동 생활을 하고 있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이라 했다.

이러한 우리의 가정은 가장 기초적 단위의 피붙이들이 한데 모여 사랑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장(場)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에게는 눈비를 피하여 잠 잘 수 있는 집(家屋)으로 변해버리고,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을 나누는 가정의 구실은 사라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것은 사회적 발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추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나친 물질적 욕구 충족에 메달려 귀중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1960년대 이전의 집을 비교해 보면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지금은 그리 넉넉치 못한 서민 가정이라 해도 누구나 TV, 냉장고, 세탁기, 전화, 오디오, 컴퓨터 따위는 물론이고 승용차 없는 집이 드물 정도다. 이렇게 살기 편리해졌지만 우리 사회는 가난했던 옛날보다 훨씬 짜증스럽고 살벌해졌다.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옷깃만 스쳐도 싸우러 덤빌 듯한 신경질적인

사람이 많아졌다.

좋은 집에서 고급스런 문화 혜택을 누리며 사는데도 사람들은 웃음을 잃어버렸다. 왜 그럴까? 그것은 가정이 가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한 30년 전만 해도 허름한 우리네 집들은 문마다 창호지를 바르고 살았다. 날이 추워지면 문풍지로 문틈의 바람을 막았다. 이런 집에서 방 안에 어린 형제들이 장난을 치고 놀다가고 바깥에서 어른이 ‘어흠!’하고 인기척을 하면 얼른 장난을 멈추고 책을 읽었다. 누가 몸살이라도 앓아 누우면 가족들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살펴 주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가족의 사랑 속에 마음 든든하고 편안했다. 가난해도 참 행복했다.

그 시절 아이들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가 결코 짐이 되지 않았다.

오늘날은 너 나 없이 현대식 주택, 편리한 아파트에서 불편 없이 살아가지만 인정이 메말라 버렸다. 그것을 사람들은 ‘인간성 상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집집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제각기 자기 방을 따로 쓴다. 그 방에서 문을 닫고 꼭지만 누르면 완전 단절이다. 그 방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밖에서는 알 수 없다. 유일하게 가족이 모일 수

있는 거실이 있다. 그러나 거실이 가족의 대화 장소 구실을 잃은 지는 오래 되었다. 기껏 TV 보는 장소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가족이 한데 모여 앉아 식사하기도 쉽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대화가 단절된 가정, 각기 제 방에서 잠이나 자는 집(家屋). 개인 이기주의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 오늘의 집이다.

계절의 여왕인 오월, 가정의 달 오월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정’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가족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가옥이 아닌 가정이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하루 생활의 이야기를 나누며 보글보글 끓는 구수한 찌개를 함께 떠먹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이고 행복이다.

가장이 돈 좀 덜 벌면 대순가. 아들 딸이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물질과 돈이, 행복의 척도가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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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아들 딸의 100점짜리 시험지가 성공의 잣대가 되지 않게 하자.

저 향기 짙은 수수꽃다리(라일락)의 연보라빛 수수한 자태를 보고 배우자. 행복이란 결코 고급스럽고 화려함에 있지 아니하고 검소하며 수수함에 있음을 자녀에게 가르치자.

가정의 소중함, 그것은 곧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이다.

그러므로 가족끼리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잘못과 부족함을 덮어주자. 부모가 좀 모자라는 자식에게

■그래, 애썼다.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런 격려와 용기를 줄때 그 아들 딸은 행복해진다. 그런 집 아들 딸은 자신의 집이 가난해도 결코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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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명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T1 I 금쯤, 하회를 감돌아 흐르는 꽃내(花川)는 그 푸른 속살을 햇볕에 뒤척이고 싀 있을 것이다. 하회를 굽어보는 꽃산(花山)은 오만 가지 꽃들을 보듬어 안고

도도한 춘흥(春興)에 겨워하고 있을 것이다. 풍산 류씨 7세손인 류종혜 공이, 고려말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찾기로 하고, 이곳저곳을 물색하다가 하회마을로 처음 들어왔을 때도 이 무렵이었던가?

풍산 류씨들의 동성마을

풍산 류씨가 들어오기 이전에, 하회에는 벌써 허씨와 안씨들이 살고 있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E盤)”이라는 향언은 하회마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허씨와 안씨가 먼저 들어와서 기틀을 마련한 뒤에 류씨들이 들어와서 마을의 번성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어온 류씨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른 성씨들과 함께 하회마을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종법(宗法)이 제도화하고, 같은 집안의 사람들끼리 모둠살이를 하는 경향이 일반화하면서 마침내 하회는 류씨들이 지배하는 동성마을이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걸출한 인물들의 역할이 크다. 이분들을 배출함으로써 다른 성씨에 비해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회를 그들만의 터전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회를 그들의 왕국으로 만든 류씨들은, 아주 유연한 문화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들은, 선주민으로부터 시작된 민속문화를 부정하지 않고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성리학적 가치관에 뿌리를 둔 그들의 문화와 조화를 꾀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민속문화가 옮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뿌리를 잘라버린, 다른 양반집단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관용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회탈춤과 하회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산과 강이 만난 천하의 명당

전국에 몇 개의 민속마을이 있지만 하회마을처럼 민속문화와 양반문화가 여유롭게 조화를 이룬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중들의 탈춤과 양반들의 선유(船遊), 민중들이 주도하는 동제와 양반들의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 민중들의 도투마리 초가집과 양반들의 고래등같은 기와집 등은, 엄한 신분사회 속에서도 조화로운 모둠살이를 꿈꾸었던 하회 양반들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하회마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조화옹이 만든 자연과 인간이 만든 문화가 이루어내는 절묘한 조화이다. 태백산맥이 달음질쳐 남으로 내려오다 꽃내를 만나 걸음을 멈추니, 하회의 주산(主山)인 꽃산이다. 또한 일월산의 한 줄기가 남서로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