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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1905 ∼1919년

과거 50 년간에 서울에 조선 사람의 생각으로 조선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작품과 사업이 그 무엇이냐? 혹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마는 나는 알지 못함을

2.2 차( 재판매)시장의 활성화

자본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근대미술시장의 진전 여부는 재판매 를 목적으로 하는 2차 시장의 진전 정도를 그 척도로 삼을 수 있다.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2차 시장은 1차 시장에 이어 시차를 두고 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한국에서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사실상 시작된 을사조약 을 기점으로 해서 눌려 있던 고려청자 거래 욕구가 일거에 해소되듯,1 차 시장인 골동상점과 2차 시장인 경매가 일본인 주도로 동시에 출현하 는 독특한 현상을 보였다.초기 도굴품의 도매 거래를 위한 성격이 강했 던 경매는 시간이 흐르며 재판매 물품도 취급하기 시작했다.특히 1920 년대 초반 경성미술구락부가 창립되어 재판매 시장을 개척해 갔으나 이 곳에서 재판매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들어서부터이다.

기존 연구와는 달리,한국인 전문중개인 오봉빈의 조선미술관도 고서화 전시·판매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재판매 시장에 뛰어들기 위 해 설립한 것으로 본 연구에서는 해석하고자 한다.경성미술구락부와 조 선미술관의 활발했던 활동은 1930년대 이후 재판매시장의 열기를 보여주 는 것으로,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미술품을 투자 상품으로 바라보 는 미술시장 참여자의 전반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383)허영란,앞의 논문,pp. 294-299

1)경성미술구락부

1930년대 미술시장에서의 재판매 열기는 수요층의 확산에서 비 롯된 측면이 강하다.일본인 상공업 부유층과 전문가층을 중심으로 미술 시장 수요자 저변이 확대되었고,한국인들 가운데서도 상류층을 중심으 로 고가 미술품 구매시장에 뛰어든 이들이 가시화되었다.

경성미술구락부의 재판매 활성화는 일본인의 유품 및 본국 귀국 자의 소장품 처분,이에 자극 받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소장품 처분 욕구 등에 따른 공급 물량의 확충에 따른 것이다.

재판매가 활발해지면서 경성미술구락부 매출은 1930년대 중반 이후 크게 증가했다.설립 이후 연간 매출 추이를 보면 총 매상액(총 매 출액)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는 1만 엔(원)∼6만 엔대를 기록하였으나 1935년부터는 거의 매해 10만 엔대의 높은 수준을 보였다.1940년에는 20만 엔을 넘었고,1941년에는 37만 5000엔으로 절정을 이루었다.1회 평 균 매상액(매출액)도 이전까지 1000엔∼4000엔에 머물렀다.이후 1934년 의 4470원에서 1940년에는 1만 8077원으로 4배나 뛴다.384)

1930년대 중반 이후 매출의 증가는 시장 참가자의 관심을 집중 시킬 수 있는 고려청자가 재판매 품목으로 나온 게 결정적인 이유로 분 석된다.1926년 이후 쇼와시대에 접어들어 일본인 소장자가 갖고 있던 고려청자 재판매품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거래 활성화를 이끌었다.

1932년 요코다(橫田)가문의 매립회에는 다수의 고려 고도기가 출품되었 으며,1934년의 스에마츠(末松)가문의 매립회도 그와 비슷한 양상을 보 였다.385)이런 일본인 수장가의 소장품이 대규모로 경매되면서 고려자기 등 유물의 공급이 크게 늘었고 이것이 경성미술구락부의 매출 상승을 견 인했다.고려청자의 가격 상승은 1934년부터 시작되어 1937년이 되면 3 년 만에 가격이 2배로 상승하는 등 수요가 매우 활발했다.386)

고려청자의 가격이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물품인 조선 백자가 1925년 이후 재판매 물품으로 출품되기 시작했다.경성미술구락

384)사사키 쵸지, 앞의 글,p.23

385)매립(賣立)은 경매 등에 출품해서 판다는 뜻으로 매각과 같은 의미이다.

386)사사키 쵸지,앞의 글,p.23

부에서 조선시대 골동품은 1925년 조선백자 항아리 등 후쿠다(福田)씨 의 유품 거래가 기점이 됐으며,소화(1926년 이후)에 들어 미야무라(宮 村),파성관의 모리(森)등의 유품이 판매되었을 때가 본격적인 출발점이 다.387) 조선시대 서화도 1931년 이후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388) 조선시대 백자와 서화 등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미술을 의도적으로 폄 하하면서 대정 초기인 1910년대에는 시장에서 인기가 없어 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조선백자도 1920년대 들어 고려청자의 대체품으로 일본인 중상류층에서 수집되었으나 1차 시장에서 수집에 집중되는 시기 였으므로 재판매시장인 경매에는 출품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하지만 1920년대 후반 이후,특히 1930년대 들어 일본인 수장가의 사망 및 본국 귀국에 따라 조선백자,조선시대 서화 등이 대거 출품되면서 조선시대 미술품이 활발히 거래되는 양상을 띠었다.조선 고미술품의 경제적 가치 에 대한 미술시장 인식도 제고되며 가격도 올라갔다.389)그리하여 1940 년대 들어서는 조선시대 고미술품이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중국 일본의 미 술품을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되었다.미술시장의 전반적인 분 위기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조선백자가 고가에 팔린 사례는 1940년 간송 전형필이 <진사철 사 양각 국화문병>을 1만 4000원에 낙찰 받은 것을 들 수 있다.이전까 지 백자가 경매에서 1만 원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390)

경매시장의 참여 열기가 높아지면서 조선백자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고서화도 활발하게 거래되기 시작했다.의사 박창훈 같은 한국의 수장가 외에 일본인 소장가들도 애장하고 있던 조선의 고서화들을 내놓 았다.1931년 3월 14일 추정의 ‘전북 이리 모가(某家)급(及)시내 양가

387)사사키 쵸지,앞의 글,p.42 388)사사키 쵸지,앞의 글,p.23

389)“대정 (1912∼1925)시기는 이조유물은 가격이 너무 저렴한 탓에 찾는 이가 없을 정 도였다.(중략)대체로 대정 초년(1912년 이후)부터 말년(26년경)까지는 일본에서 조선으 로 이주해 온 분들이 조선고미술품 및 고기물을 수집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경매에 대규 모로 출품되는 경우는 없었다.이에 비하여 소화시기(1927-)에 들어서면 일본인 수집가 의 수장품이 경매회에 대규모로 출품되는 경우가 많아졌다.조선에 수십 년 간 살면서 성공해 본국으로 귀환하거나 사망 등으로 처분 수요가 생기는 시기가 이즈음부터였기 때문이다.또 소화시기에 들어 조선 고미술품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가격도 현격하게 높아졌다 ” 사사키 쵸지,앞의 글, p.42

390)박병래,앞의 책, p.88

(兩家)비장 조선 서화 幷 고려 及 이조시대 도기 목공류 대매립 목록’, 1932년 3월 18일 추정의 ‘주정가(住井家)애완 서화 매립 목록’등의 경 매도록은 한국인과 일본인 등 민족 구분 없이 조선시대 고서화를 경매에 팔아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태도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391)

조선미전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하는 등 당시의 스타급 작가였던 이도영(李道榮,1884-1933)과 김은호(金殷鎬,1892-1979)의 작품도 경매 등에서 인기를 끌었다.1933년 작고한 이도영의 작품은 1940년 4월 5일 경성미술구락부의 한국인 수장가 박창훈의 소장품 경매에서 <하경산수 (夏景山水)>가 300원에,1941년 11월 1일의 박창훈 소장품 경매에는 <노 안도(蘆雁圖)>가 55원에 팔렸다.392)일본인에게 인기가 있던 김은호의 작품 <계도(鷄圖)>는 1941년 ‘부내(府內)모씨의 애장품 입찰’에 출품되 어 이름값을 드러냈다.393)김은호의 작품은 1938년 조선명보전람회에 조 선 중기 화가 김명국의 <달마도> 등 조선시대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진열되기도 하였다.394)이도영,김은호의 그림은 시중에 가격이 높게 형 성되어 있었다.395)

이 같은 동시대 인기 작가들의 작품이 경매에 출품되고 낙찰되 었다는 사실은 경성미술구락부의 설립 목적대로 ‘각국의 신고서화(新古 書畵)골동’이 경매되었음을 보여준다.그러나 동시대 서화가 거래된 사 례는 극히 드물고 대체로 고서화와 골동품이 거래되었다.특이한 점은 서양화의 거래는 한 점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인데,이는 서양화가 가지는 전위적인 성격으로서의 위험 부담 때문에 투자자산으로서의 가치 를 인정받지 못한 결과로 분석된다.

수요 측면에서 1930년대 경성미술구락부의 재판매 활기에는 그

391)김상엽 편저,앞의 책에 수록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도록을 참고할 것.

392)김상엽 편저,앞의 책 2권,p.603,앞의 책 3권,p.217 393)김상엽 편저,앞의 책 3권,p.166

394)김상엽 편저,앞의 책 3권,p.351,381

395)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이용문이라는 사람은 이도영,오일영(吳一永,1890-1960), 변관식(卞寬植,1899-1976),이상범(李象範 ,1897-1972),노수현(盧壽鉉,1899-1978),김 은호에게 각각 2폭씩 병풍 그림을 그려줄 것을 주문하고,이도영과 김은호 작품은 한 폭 에 50원씩,오일영,변관식,이상범,노수현의 작품은 30원씩을 지급하였다.병풍 그림 한 폭에 30-50원은 시중가보다 3배에서 10배 비싼 것으로,상당히 높은 가격을 받은 것이다 김은호는 당시 병풍 그림은 한 폭에 5-10원이면 괜찮은 가격이었다고 술회한다.김은호, 앞의 책,pp.121-138

시대의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배경에 있다.주식시장과 미두시장의 호황, 금광 열풍,만주 특수에 의한 경제 호조 등으로 투기성 자금이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금광 개발로 벼락 부자가 된 최창학이 골동품 수집에 나선 예에서 보듯 부동산,금광 등에 서 얻어진 부가 흘러들어 미술시장의 크기를 키웠을 가능성이 높다.

재판매의 활성화를 미술품의 공급 측면에서 본다면,1940년대 이 후에는 제2차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소장하고 있던 골동품을 처분하려는 욕구가 늘어난 것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한국인 미술품 수장가로 이름 을 드날렸던 ‘외과의의 태두’박창훈이 1940년,1941년에 걸쳐 소장품을 전부 방출한 것 등이 그런 예이다.1930년대 간송에게 평생 모은 골동품 을 넘겼던,영국인 변호사 게츠비의 경우도 그의 활동무대가 일본이기는 했지만,처분 계기가 전쟁 상황과 관련이 있다.전쟁에 따른 소장품의 가 치 저하를 우려한 경제적 감각이 소장품 처분의 숨은 의도라고 볼 수 있 다.[표 4]에서 보듯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1만 원 이상 매상을 올 린 경매 횟수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두드러지게 증가하는데,여러 요인 이 있겠지만,전쟁 상황에 따라 소장자들이 소장품의 대규모 처분에 나 선 것도 배경에 있을 것이다.

2)조선미술관

오봉빈이 1929년 설립한 조선미술관(朝鮮美術館)이 전문 중개상 에 의한 본격적인 화랑이라는 해석이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다.396)그러나 조선미술관의 전시 내용을 보면 고서화에 집중한 것으로 나타난다.397)

396)오봉빈은 조선미술관을 광화문통 네거리(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에 개설했다.한달 에 월세 50원을 내는 공간으로,공간이 좁아서인지 주로 전시는 동아일보 강당,경성부 민관 같은 넓은 장소를 이용하였다.기존의 골동상이나 고미술상들이 도자기나 목가구와 같은 공예품에 치중하거나 박물상 성격을 지닌 것과 달리 서화만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단순히 매매만 한 것이 아니라 서화기획전을 여는 등 전문성을 보였다는 측면이 조명되 어 왔다.신구서화의 진열과 구입판매,표구업까지 겸했다는 점에서 고금서화관과 비슷 하나 고서화 판매를 위한 대규모 기획전을 성공적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조 선미술관을 민족적인 견지에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연구로는 권행가의 논문이 대 표적이다.권행가,「1930년대 고서화전람회와 경성의 미술 시장 :吳鳳彬의 朝鮮美術館 을 중심으로」『한국근대미술사학』제19집,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2008,pp.163-189 397)오봉빈이 경영한 조선미술관의 전시 내용에 대해서는 권행가의 위의 논문과 함께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김상엽,「朝鮮名寶展覽會와『朝鮮名寶展覽會圖錄』」,『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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