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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와 풍속적 요소의 결합: 이상적 공간으로서의 ‘성시(城市)’

‘성시( 城市 )’

<강산무진도>에 표현된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집 안에서 친구와 담소를 나누거나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림 전반에 걸쳐서 묘사된 인물은 짐을 부 지런히 나르는 짐꾼이다(표 3). 이들은 긴 나무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매달 아 어깨로 메어 짐을 나르거나, 당나귀나 수레를 이용하여 짐을 나르고 있 다. 어떤 이는 짐을 잠시 두고 마을의 주막에 걸터앉아 식사를 해결하고 있 다. 이들이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과 당나귀, 말로 북적거려 활기가 느껴진 다. 강에는 조운선(漕運船)과 같은 커다란 배가 떠다니고 있고 강을 따라 들어선 배들이 마을 포구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배가 운반해온 짐을 부지런 히 나르고 있다. 이들에게서 운반업 종사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역동성을 느 낄 수 있다.

<강산무진도>에 표현된 도르래 모티프에도 물자 운송의 이미지가 드러

난다. 도르래는 <강산무진도>와 <촉잔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모티프이다.

그러나 <강산무진도>에서 도르래는 물건을 운송하는 용도로 더욱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일례로, <촉잔도>의 도르래는 사람과 짐을 모두 태우고 있으며 줄을 한쪽에서만 잡아당기고 있어 불안해 보인다(표 4).91) 이와 달리 <강산 무진도>의 도르래는 짐만을 나르는 운송도구로 보이며 도르래 위아래에서 줄을 잡아당기고 있어 안정감이 느껴진다. 또한 도르래를 중심으로 절벽 위 아래에는 마을이 발달해 있다. 도르래를 이용하기 위해 짐을 내려놓고 자신 의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도르래가 있는 마을까지 오기 위해 사용된 당 나귀들로 마을은 북적거린다. 이러한 정경은 역참(驛站)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처럼 <강산무진도> 전반에 걸쳐서 표현된 물자 운송의 이미지는 이인 문이 살았던 18세기 한양의 경제적 상황과 공명한다. 당시 한양은 상품유통 경제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발달했다. 상업이 한양의 주요한 성장 동력이 되면서 한양은 강이천(姜彝天, 1769-1801)의 「한경사(漢京詞)」, 박제가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 표현된 것처럼 유흥과 소비 중심적인 도시의 면모를 드러냈다.92) 시장에는 다양한 물화(物貨)가 넘쳐났으며 시정에는 유 흥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양의 곳곳은 명소화(名所化)되었 고 사람들은 꽃놀이를 하러 한양의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다. 이러한 한양의 상업도시화에는 관(官) 주도에서 사상(私商) 주도로 상업 체계가 변화된 것 과 깊은 관련이 있다.

91) '녹로(轆轤)'라는 도르래의 기준에서 볼 때 <강산무진도>의 도르래가 <촉잔도>의 도르래 에 비해 고식이라고 한다. 김소영, 앞의 논문, pp. 105-106; 고연희, 앞의 논문, p. 20 참조. 그러나 물건의 빠른 운송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강산무진도>의 도르래는 고식과 는 거리가 멀다.

92) 강이천의 「한경사」에 대해서는 방현아, 「重菴 姜彛天의 『漢京詞』 硏究: 18世紀 서울의 都市的 樣相의 形象化」(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석사학위논문, 1994) 참조.

1792년에 정조는 규장각 각신, 검서관(檢書官), 초계문신들에게 '城市全圖'를 주제로 하 여 칠언백운고시(七言百韻古詩)를 짓게 했다. 시의 주제가 된 그림인 <성시전도>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시의 제목 또한 ‘성시전도’이기 때문에 그림과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시는 편의상 ‘성시전도시’라고 지칭한다. 현재까지 13종의 「성시전도시」가 알려졌다.

이에 대해서는 박현욱 옮김,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 13종 성시전도시 역주』

(보고사, 2015) 참조.

대외적으로 대청무역에서 1720년대 이후 청과 일본의 직교역이 이루어 지면서 역관무역의 쇠퇴와 더불어 사상이 성장했다.93) 조선 정부는 역관무 역이라는 관 주도의 무역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러 부양책을 시도했으나 국 내 시장의 기반을 가진 사상들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결국 사상들은 18세 기 후반 대청무역의 전반을 주도하게 되었다.94) 일례로 1797년에 관은 보 유량의 부족현상을 타개하고 역관무역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해 포삼제(包蔘 制)를 실시하였으나 실제로 포삼제를 통해 이익을 얻은 집단은 경상(京商) 들이었다.95) 대청무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상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19세기 초에 이르면 조선 정부는 사상을 규제하기보다 이들에게 서 세금을 거두어서 재정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96) 사상은 대청무역에 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새로운 유통망을 확보하면서 한양의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한양은 쌀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타 지역의 생산품에 의존해야 했

93) 사행무역(使行貿易)을 중심으로 한 대청무역에서 역관들은 청, 조선, 일본간의 중개무역 을 통해 성장했다. 중개무역에 동래상인, 서울상인, 개성상인들도 참여해 이익을 차지하 고 있었다. 고동환, 「17세기 서울상업체제의 동요와 재편」, 『서울상업사』(태학사, 2000) pp. 170-171 참조. 역관들은 기본적으로 청과의 조공관계에서 오는 조공(朝貢)과 회장(回腸) 형식의 공무역을 담당했다. 이와 동시에 사무역으로 팔포무역(八包貿易)의 특 권과 함께 상의원(尙衣院), 내의원(內醫院), 호조(戶曹), 오군영(五軍營) 등 각 아문(衙 門)과 군문(軍門)의 무역을 대행했으며 또한 각급 관아로부터 관은(官銀)을 차대 받아 무 역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1720년대 이후 왜은(倭銀)의 유입이 줄고 국내 광은(鑛銀) 개발도 활기를 띠지 못하면서 조선은 관은 보유량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18세기 후반 대청무역에 있어서 사상의 성장은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2000, 국 학자료원) pp. 61-111 참조.

94) 역관무역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1774년에 시행된 세모법(稅帽法)이다. 세모법의 시행 은 모자 무역의 주체가 역관에서 사상으로, 모자 무역에 필요한 자금 또한 관은에서 상 인들의 자금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자의 국내 판매 및 수익 관리도 관에서 상인에게로 넘어갔다. 이철성, 위의 책, p 91 참조.

95) 홍삼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력을 갖추지 못했던 역관들은 경상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 정부 또한 역관과 경상의 이익을 정책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19세 기 전반 홍삼무역에 대해서는 위의 책, pp. 113-212 참조.

96) 일례로 1802년에 조선 정부는 홍삼무역권을 사상층인 경상과 의주상인에게 넘겨주는 대 신 이들에게 포세를 부담시켰다. 역관과 사역원(司譯院)은 단순히 포세를 받아 사행경비 및 사역원 재정을 충당했다. 위의 책, p. 140 참조.

기 때문에 한양에서 유통경제의 성장을 통한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지게 나 타났다. 특히 경강(京江)지역은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 초 전국적 으로 시행된 대동법으로 인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세곡(稅穀)의 물류량이 폭 발적으로 증가했다.97) 이 시기 물류 운송에서 선운(船運)은 주요한 운송 수 단이었고, 관선조운제(官船漕運制)의 폐단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선 (私船)을 활용한 임운(賃運)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본력, 항해술, 조선술에 있어서 관선을 뛰어 넘고 있었던 경강선인들은 1704년부터 세곡 운송에 합법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1785년 작대법(作隊法)의 시행으 로 세곡운송권을 보장받게 되었다.98) 정조 또한 경강선인들을 우대하는 모 습을 보였다.99) 화성 능행을 위해 노량진에 가설된 주교(舟橋)에도 경강선 80척이 동원되었다.100)

경강 지역이 세속 유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 지역은 18세기 중반 한성 부에 편입될 정도로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101)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 音)』(1751)의 「도성삼군문분계총목(都城三軍門分界地圖)」을 살펴보면 용 산, 서강, 한강, 두모포 등지가 방(坊)으로 승격되어 한성부에 편입되었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를 보면 한양의 오부(五部)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은 서부(西部)였다.102) 경강 지역의 인구증가는 경강이 전국

97) 대동법의 시행은 한양의 상품화폐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고동환, 앞의 책, pp.

159-160 참조.

98) 조선후기 경강선의 세곡임운활동에 대해서는 최완기, 『朝鮮後期船運業史硏究: 稅穀運 送을 中心으로』(一潮閣, 1997) 참조.

99) 경강선인 병폐를 없애고자 조선(漕船)의 건조를 주장하자 정조는 경강선인의 생업을 강 조하며 이러한 주장에 반대했다.『日省錄』 正祖5年 9月24日 참조.

100) 최완기, 위의 책, p. 138 참조.

101) 17세기 후반 이후 한양으로의 인구 집중 현상에 대해서는 고동환, 「18․19세기 서울 경강지역의 상업발달」(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pp. 9-19, p. 29 <표 1-3> 참조.

102) 서부의 경우 도성 밖 인구가 70%를 상회했다. 경강변 뿐만 아니라 도성 밖 경저십리 지역의 인구가 조선후기에 크게 늘어났다. 15세기 전반 호구 분포는 도성 안이 90%, 도 성 밖이 10%였으나 18세기 후반에는 도성 밖 호구수가 50%를 육박하면서 도성 안의 호구수와 거의 대등해졌다. 서울의 도시공간이 도성 밖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의 공간구성과 공간인식」, 『서울학연구』 26(2006), pp.

11-16 참조.

적인 유통망을 구축하여 해운과 수운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103)

경강변이 상품유통의 거점이 되면서 경강과 도성 중심부를 연결한 지역 에는 새로운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종로의 시전(市廛)이 유 일한 시장이었지만 17세기 후반 남대문과 서소문 지역에 칠패시장(七牌市 場)이 형성되었고 1760년경에는 서울 동부 어의동 근처에 이현상가(梨峴商 街)가 형성되었다. 18세기 말에 두 시장은 한양의 대장시(大場市)로 성장했 다.104) 육로교통에서도 송파, 누원 등의 새로운 유통거점이 형성되었다. 이 처럼 새로운 유통체계가 구축되면서 종로 시전 중심의 시전체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105)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흐름에 맞추어 조선 정부 또한 관 주도의 상 업 체계보다는 다양한 유통망을 점유한 사상의 경제 행위가 도시 성장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정조가 경제 분야에서 시행한 포삼제, 작대법, 신해통공(辛亥通共) 등 일련의 정책들은 정부가 경제 정책 운용에서 사상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었다.106) 화성 건설 사업은 도시 성장 에서 사상과 상업의 중요성을 조선 정부가 인지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정조는 화성의 빠른 발전을 위해 화성에 상업자금을 지원했으며 화성 상인 들에게 모자와 인삼의 무역 및 판매 독점권을 부여하려는 정책을 시도했었 다.107) 또한 화성 건설에서 도성의 수축이 중요했던 것처럼, 18세기에 상업

103) 18세기 이후 한양에는 상품유통과 관련된 각종 일거리들이 많이 생겨, 수십 만 명의

‘遊手之輩'가 각종 잡무에 종사하면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고동환, 앞의 논문(1993), p.

15 참조.

104) 고동환, 앞의 논문(2006), pp. 20-21 참조.

105) 18세기 후반 상품유통과 판매에 있어서 기존의 시전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중도아와 여객주인들은 시전을 배제한 유통구조를 만들기 위해 활발히 움직였다. 또한 서울 주변 의 장시에서 서울의 부호(富豪)가 도고(都賈) 활동에 참여하면서 시전체제의 붕괴는 가 속화되었다. 한양의 성장에 따른 한양 주변 지역의 도시화와 18세기 후반 새로운 상품유 통체계의 성립에 대해서는 고동환, 앞의 논문(1993), pp. 46-59 참조.

106) 1791년 시행된 신해통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폐지한 정책 이다. 신해통공의 시행에는 새로운 상업세력의 성장이라는 경제적 측면과 경제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어 있다고 한다. 박현모,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정치경제학」, 『한국정치학회보』35(2001), pp. 65-8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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