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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언어의 반복을 통한 귀향 서사구조의 해체

문서에서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페이지 107-113)

현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부는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킨과 테레제의 갈등 양상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테레지아눔에서 펼쳐 지는 킨과 피셜레의 일화를 다룬다. 3부는 킨이 파프의 초소를 거쳐 다 시 자신의 도서관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즉, 공간적으로 이 소설은 자신의 “고향 Heimat”(BL 57)에서 추방된 주인공이 외부세계에 서의 방랑을 마치고 ‘귀향’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꾀가 많은 오디세우스 Listenreicher Odysseus’ 장에서 킨은 게오르크 의 도움으로 마침내 자신의 도서관으로 돌아가 이전의 논리적이고 이성 적인 모습을 되찾는다. 이는 훼손된 정체성의 회복으로 귀결되는 전통적

인 귀향 서사적 결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킨은 귀향 서사 의 주인공과 달리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히 시련을 겪는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 장인 ‘빨간색 수도꼭지’ 장에서 여전히 극심한 정신착란에 시달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이성중심주의적인 남성성을 비판하려는 카네티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는 귀향 서사에서처럼 고향에 도착한 주인공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열증적 착란 상태 에 빠뜨린다.

이상의 논의는 소설 형식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카네티는 언어적인 차원에서 귀향의 서사구조를 적극적으로 패러디하고 해체하려 한다. 이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신분열증 환자 의 무의미한 언어216)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회복과 구원으로 나아가는 귀향 서사의 ‘순환구조’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하는 무 의미한 말의 ‘반복구조’로 전환된다. 아래에서는 먼저 킨의 무의미한 언 어가 반복된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작가의 미학적인 차원에서 다시 한번 논의하고자 한다.

테레제가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들은 킨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그로 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유언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광기에 휩싸인 테레제는 자기 자신을 조 금씩 먹어 치웠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앞에 있는 유언장을 바라보았 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살점을 뜯어내고 그것으로 근근이 먹고살았다. 그녀는 마치 하이에나 같았다. 그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 기가 다 익기도 전에 그것을 먹었다.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요리할 수 있었 겠는가. 그러고 나서 그녀는 죽어서 해골이 되었다. 뻣뻣한 치마는 앙상한 뼈 위에 놓였다. 치마는 꼭 폭풍을 맞은 것 같았다.217)

216) 물론 정신분열증 환자의 언어가 독자에게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주인공의 무의미한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내면을 재구성하고 이해할 수 있 다. 여기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주인공의 언어가 현실을 지시하지 못하고 오로지 폐쇄적이고 비현실적인 내면의 허구적 세계를 지시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217) (BL 286): “Sie[Therese], von ihrer Gier nach einem Testament in den Wahnsinn getrieben, fraß sich selbst Stück für Stück auf. Bis zu ihrem letzten

테레제의 죽음에 대한 킨의 묘사는 온전히 그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실적인 언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테레제가 유언장에 집착했 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외에 킨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모두 그가 임 의로 떠올린 초현실적인 환상에 가깝다.218) 이때 눈에 띄는 것은 킨이 테레제가 자신의 살을 뜯어먹었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는 점이다.

이는 킨의 설명을 더욱 공고하게 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언어가 정 신분열증 환자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무의미한 언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뿐만 아니라 킨은 자신의 망상에서 테레제의 죽음 장면을 총 세 번 반복하는데, 이때 킨의 언어에서는 비슷한 내용이나 구도가 발견될 뿐만 아니라 비슷한 단어나 어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녀는 지나치게 삶에 집착했다. 그녀의 탐욕은 한이 없었다. [...] 나약해 질 대로 나약해진 그녀는 고독하게 남겨진 자신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녀가 자초한 것이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한 점 한 점, 조금씩 떼어먹었 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했다.219)

Augenblick sah sie das Testament vor sich. In Fetzen riß sie das Fleisch von ihrem Leib herunter, diese Hyäne, sie lebte von ihrem Leib in den Mund, sie aß das blutige Fleisch, bevor es gar war, wie hätte sie es zubereiten sollen, dann starb sie als Skelett, der Rock lag steif um die leeren Knochen, er sah aus, als hätte ihn ein Sturm gebläht.”

218) 슈미트 Hugo Schmidt는 테레제에 대한 킨의 상상이 현실의 영역에서 기괴한 초현실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Cf. Hugo Schmidt: Narrative Attitudes in Canetti’s Die Blendung. In: Modern Austrian Literature 16(1983), p. 101.

219) (BL 291-292): “Sie hing zu sehr am Leben. Ihre Gier kannte keine Grenzen.

[...] In ihrer schwachen Stunde fand sie sich, wie sie es verdiente, einsam und verlassen. Da griff sie zum letzten Mittel, das ihr blieb: sie fraß ihren eigenen Leib, Fetzen für Fetzen, Streifen für Streifen, Stück für Stück, und erhielt sich unter unbeschreiblichen Schmerzen am Leben.”

앞선 인용문과 비교하자면 위 인용문에서는 “탐욕 Gier”이나 그녀가 자 신의 몸을 “갈기갈기 Fetzen für Fetzen” 찢고 “조금씩 Stück für Stück” “먹어치웠다 (auf)fraß”와 같은 표현이 거의 문자 그대로 반복된 다. 킨은 테레지아눔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번 테레제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이때에도 앞서 등장한 표현과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녀는 자신을 먹어치웠습니다. 그녀의 몸은 조금씩 그녀의 탐욕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220) 이러한 반복은 현 실에 대한 지시기능을 상실한 채 자기 내면에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무의미한 말의 반복을 의미할 것 이다.

실제로 킨의 이야기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허 구적 세계에 머문다. 그는 테레제가 죽은 뒤에 벌어진 일들을 상당히 구 체적으로 상상하여 재구성한다. 예컨대 그는 테레제의 시체가 발견된 경 위나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현한다. 또한 그는 장례행렬 과 테레제가 묻히게 될 곳이 정해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 러나 이는 그가 만들어낸 비현실적 세계에서 공허하게 반복되는 정신분 열증 환자의 언어를 암시할 뿐이다.

킨은 계속해서 비논리적인 주장을 늘어놓기도 한다. 변론 장면에서 킨 은 자신이 테레제를 도서관에 감금한 것이므로 그녀의 아사(餓死)에 어 느 정도 책임이 있지만, 정신병자 같은 여성의 죽음은 지당한 것이므로 자신은 무죄방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연 구를 방해한 테레제를 고발하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것이라 다짐한다.

더 나아가 킨은 살아 있는 테레제를 눈앞에 두고도 그녀의 죽음을 당연 시하면서, 자신은 테레제의 끔찍한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으므로 무죄판 결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모두 잘못 된 전제나 비현실적인 망상에 근거한 주장일 뿐이다. 이렇듯 킨이 근거 220) (BL 346): “Sie fraß sich auf. Stück für Stück von ihrem Körper fiel der

Gier anheim.”

없는 주장 혹은 자신의 망상에 근거한 비현실적인 주장을 반복할 때, 이 는 킨이 이성중심주의라는 확고한 고향의 대지를 밟고 서 있는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로서 그러한 대지를 상실한 채 현기 증을 불러일으키는 무의미한 말만을 반복한다는 인상을 유발한다.

다른 한편으로 킨은 파프의 초소에서도 반복해서 정신병 환자의 헛소 리를 연상시키는 말을 내뱉는다. 그는 바지와 성격의 상관관계, 치마와 혐오스러운 여성의 관계, 파란색의 부재, 치마 없는 세계의 단조로움, 여 성철폐에 관한 법령, 여성의 간계, 연구 대상으로서의 파프, 물리학과 색 채론 등 매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자 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킨의 주장은 자의적인 근거에 기반한 주장이거나 아예 근거가 없는 속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환각에 시달리는 킨은 계속해서 파란색 그림자나 광선이 출현하여 자신을 위협 한다고 생각한다.221) 물론 여기서는 아직까지 통사론적인 구조를 갖춘 문장들이 나타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통사론적 구조마저 무너 지며, 의미 연관성이 상실된 단어들만이 반복된다.

이처럼 킨이 정신분열증 환자로서 무의미한 말을 반복할 때 귀향 서사 의 순환구조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하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구조로 전도 된다. 이로써 이 소설의 결말은 귀향 서사에서 흔히 기대되는 주인공에 대한 회복 및 구원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진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정신과 의사인 게오르크가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처럼 등장함으로써 독자가 자연스럽게 정신분열증적 광기의 치유를 기대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로써 킨이 내뱉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 구조가 다시 귀향 서사의 구조로 전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게오르크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부분 게오르크의 시점에서 서술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게오르크는 빈으로 향 221) 하젤베르크 Peter von Haselberg는현혹에서 끊임없이 사건과 환상의 경계 모호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Vgl. Peter von Haselberg: Ein Roman-Experiment. In: Werner Hofmann(Hrsg.): Hüter der Verwandlung.

Beiträge zum Werk von Elias Canetti. München 1985, S. 285(urspr. In:

Frankfurter Zeitung, 12.4.1936. Literaturblatt, S.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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