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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모금운동을 통한 미국의 냉전 선전

미국에서 한미재단의 기금 모금 캠페인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수행한 냉전정책의 홍보와 선전활동을 잘 보 여준다. 한미재단의 원조 계획은 현금을 기반으로 한 장기 프로젝트 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재단은 미국의 기업과 시민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실시했다. 한미재단의 기 금 모금 캠페인은 1차 사절단의 방한 이후인 1953년 6월과(1차) 제 네바 회담의 개시에 맞춘 1954년 4월(2차),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 었다. 이 가운데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2차 전 국적 모금 캠페인인데, 이것은 1차 기금모금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한미재단의 기금모금운동에 적극적으로 개 입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재정 문제 때문이었다. 1953년 공 화당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새롭게 들어서면서 최대 과제로 삼은 것은 앞선 민주당의 트루먼(Harry S. Truman)정권 하에서 엄청나 게 팽창한 군사비를 삭감하고, 위기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재정적자 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아시아의 지역적 안전보장 체제 속에서 일본의 중심적 역할을 기대했고, 6·25전쟁 종결 뒤 주 한미군을 철수시키면서 한국을 대상으로 한 군사 원조를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위협론’과 미국 군부 내 ‘롤백론’의 부상을 배경으 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결국 아이젠 하워는 자신이 초기에 내세웠던 군사비 삭감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 워졌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당시 미 의회를 지배하던 재정 보수주의자들과 국내 여론을 달래기 위해 한국의 중요성을 계속 강 조하면서 미국 내의 여론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119) 이 때 이들의 눈에 띤 것이 한미재단의 기금 모금 캠페인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 부는 이 캠페인의 규모를 확장시켜서 전국적인 선전활동을 펼친다 면 미국 대중들에게 위화감 없이 한국의 중요성을 각인시킬 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한미재단의 활동을 부분적 으로 지원하는 수준에서 그치다가 이후에는 한국의 중요한 위상을 국내에 선전하려는 강한 목적의식에서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둘째는 공산측과 한국을 대상으로 미국의 정치적 의도를 선전하 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2차 전국적 모금 캠페인의 시작일과 관련 있 었다. 아이젠하워는 이 캠페인의 시작일을 제네바 회담 개시일과 맞 춘다면 선전의 효과가 한국과 공산측 모두에게 미칠 수 있을 것이

119) 아이젠하워 정부의 아시아 정책과 미국 내 상황에 관해서는 李鍾元, 1996

《東アジア冷戰と韓美日關係》, 東京大學出版会 참고.

라고 예상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동맹’인 한국에게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항상 그들을 지지하며 폐허가 된 한 국의 복구와 재건에 진심으로 협조한다는 의도를 알릴 수 있을 것 이라고 기대했다.120) 한편, 공산측에게는 일찍이 한국을 ‘동양의 쇼 윈도이자 민주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선전하려는 의도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121) 특히 정부가 간접적으로 비공식기관을 이용해 미국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한미 간의 친선과 한국을 도우려는 미국의 평화적인 노력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미재단의 첫 번째 기금모금운동은 한미재단이 이끌고 아이젠하 워 행정부가 지원하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1954년 6월 1 차 사절단의 보고가 있은 뒤 즉각적으로 시작되었다. 기금 모금의 목표는 물품과 현금 기부액을 합쳐 500만 달러였고 병원 및 학교 재건과 고아원을 위한 경비 지원 등으로 쓰일 예정이었다.122) 한미 재단은 대중에 기반을 둔 비공식원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국 시 민들에게 기부를 요청했다. 밀튼 아이젠하워의 호소에 따라 31개주 의 주지사들이 6월 7일부터 일주일간을 “한국 원조를 위한 주간”으 로 정하면서 모금활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장되었다.123)

밀튼 아이젠하워에게 한미재단의 1차 사절단 방한 결과와 기금모 금운동에 관한 보고를 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미재단의 활동에 큰 기대감 을 가졌다는 사실은 테일러 장군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한국의 원조 상황을 설명하면서 한국을 위한 상호안전보장국

120) RG 469, Entry 422, Box 18, “Dwight D Eisenhower to Dr. Rusk” 1954.3.17.

121) Eisenhower, Dwight D.: Records as President, WHCF(Confidential File), 1953-1961, Official File Series, Box 879, OF 196-C American-Korean Foundation, Inc (1), “Howard A. Rusk to President” 1954.4.12.

122) 《동아일보》 1953.5.7.

123) 《The New York Times》 1953.5.24.; 1953.8.2.

기금과 의회에 요청된 2억 달러가 마련되어 있고, 이외에 한미재단 이라고 알려진 비공식원조기관이 한국에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다양 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124) 그는 정부가 모든 원조를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미국 대중이 공식원조를 도 와 기금 모금에 동참하는 것이 미국의 대외원조 목표에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125)

한미재단의 활동에 기대감을 드러낸 아이젠하워는 기금모금운동 의 하이라이트였던 영화모금운동인 ‘Give Them This Day’에 직접 참여해서 한미재단에 힘을 실어주었다. 1953년 7월 27일부터 2주간 미국의 1만 4천여 개 극장에서는 영화조직협회(Council of Motion Picture Organizations)의 지원을 받아 영화 시작 전 2분 동안 아이 젠하워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 예고편이 상영되었다.126) 아이젠하 워는 한국의 끔찍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비심과 애국심을 가진 미 국인들이 한미재단에 기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예고편이 상영된 며칠 뒤부터는 한미재단 이사인 스커러스의 지원으로 20세기폭스 (20th Century Fox)사에서 촬영된 30분 분량의 영화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다.127) 이 방송에는 아이젠하 워 대통령을 비롯해 러스크 박사와 한국을 방문했던 여러 영화배우

124) “Draft Memorandum by the President to the Secretary of State, the Secretary of Defense(Wilson), and the Mutual Security Administrator(stassen), July 31, 1953” FRUS 1952~1954, vol.XV, Part 2, pp.1457-1460.

125) Eisenhower, Dwight D.: Records as President, WHCF(Confidential File), 1953-1961, Official File Series, Box 879, OF 196-C American-Korean Foundation, Inc (1) “Dwight D. Eisenhower to Mrs. Laing” 1953.7.30.

126) 영화조직협회(COMPO)는 1950년대 초에 조직되었다. 극장주와 배급업자들에 게서 자발적인 기부를 받아 재정을 운영했으며, 공산주의와 싸우고 할리우드를 위한 민간 기부를 요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화조직협회는 정부가 영화 산업 을 라디오나 신문 산업보다 격하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할리우드는 정 부와 파트너가 되어 전체주의를 물리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Stephen Vaughn, 1994 《Ronald Reagan in Hollywood: Movies and Polit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201.

127) James Sang Chi, 2008, 앞의 논문, pp.146-147.

들이 참여했다. 이 영화모금운동은 대중의 좋은 반응을 얻어 100만 달러의 모금액을 달성했다.128) 최종적으로 한미재단은 500만 달러 기금 모금운동을 통해 1954년 3월까지 총 3백만 달러의 물품 기부 와 2백만 달러의 현금 기부를 확보함으로써 첫 기금 모금운동을 성 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1차 기금모금운동에서 경험을 얻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미재 단의 2차 전국적 모금 캠페인을 위한 아이디어를 직접 제출했다. 정 부에서 직접 개입한 만큼 이 캠페인은 기금 모금이라는 목표에 더 해 여론을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기금모금운동의 책임자를 직접 임명할 정도 로 적극적이었다. 수장을 맡은 사람은 헨리 알렉산더(Henry C.

Alexander)로 당시 투자은행인 JP모건 앤 컴퍼니(J.P.Morgan and Company)의 회장이었다.129) 여성부의 수장으로는 웬델 윌키 (Wendell Willkie) 부인이 임명되었다. 알렉산더는 캠페인을 홍보하 는 과정에서 한미재단은 한국의 복구, 주거, 교육 및 불구자들을 위 한 구제, 산업 지원 등 방대한 문제들과 관련 있는 장기적 관점을 우선한다고 강조했다.130)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된 ‘한국구호열차’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으 로부터 열차의 협조 요청을 받은 미국열차협회가 약 백만 달러 규 모의 운송비를 지원하면서 이루어졌다.131) 관련자 회의는 한미재단

128) 《동아일보》 1954.7.23.; 《The New York Times》 1953.7.26.

129) 알렉산더는 전쟁기에 육군성에서 근무했는데 전략폭격조사(Strategic Bombing Survey)의 최고위자로 유럽과 태평양 양 지역에서 공중전의 결과를 계획하고 평가했다. 이후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존스 맨빌(Johns-Manville), 아 메리칸 비스코스(American Viscose)사 등의 이사직을 겸임했다. Eisenhower, Dwight D.: Official File Series, Box 879, OF 196-C American-Korean Foundation, Inc (1), “Glenn Glauser to James Hagerty, Press Secretary”

1954.3.2.

130) 《The New York Times》 1954.3.7.

131) RG 469, Entry 422, Box 18 “Walter B. Smith to Faricy” 1954.4.14.; “W. T.

Faricy to Walter B. Smith” 1954.4.16.

과 미국열차협회 관리들의 참석 하에 백악관 주도로 진행되었다. 국 무부, 국방부, 상공부, 육군부 G-4, FOA 등 캠페인과 관련된 모든 부서의 담당자들이 참석하여 일정과 홍보활동, 물품 수송비용 문제 등에 관해 논의했다.132)

이 논의에 따라 FOA에서 한미재단이 기부 받은 물품 수송을 위 해 45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하게 되었다.133) 이 과정에서 미국의 비 공식원조기관을 망라하는 조직인 대외자원원조자문위원회 위원장 맥케언(William H. McCahon)은 한미재단의 활동이 미국의 이해관 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수송비용을 공식원조기관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미재단의 캠페인을 통해 모이는 물자들은 공식원조 프로그램이 제공하지 않는 공백을 채우는 것이며, 현 시점 에서 한국의 불만을 막고 한국인들의 재건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고 예상했다. 그는 지난 7년간 계속되었던 물자 수송이 중단된다면 여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선전에 가장 민감하게 반 응할 것이고, 따라서 미국의 국가적 혹은 안보적 이해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134) 그의 발언을 통해 당시 미 국 정부에게 한미재단의 원조 규모와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음 을 알 수 있다.

이미 본격적인 캠페인의 시작 전부터 화물차 150대 양의 물품이 산업체에 의해 기부되었다. 목표로 하는 물품 기부 양은 총 600대 분량으로, 약 천만 달러의 가치로 예상되었다. 캠페인이 이루어지는 19개의 주와 50개의 도시에서는 기부 받은 물품의 책임을 맡을 한 국구호열차위원회가 조직 되었다.135) 추가적으로 세부 분야와 조직

132) RG 59, Entry 78, American-Korean Foundation/UNKRA, “Andrew C.

Tychsen to John L. Thurston” 1954.3.11.

133) RG 469, Entry 422, Box 65, “ William H. McCohon to Howar A. Rusk”

1954.3.17.

134) RG 469, Entry 422, Box 65, “Authorization for Additional Funds to Cover Transportation Subsidy of Voluntary Agency Shipments –FY 1954”

135) 《조선일보》 195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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