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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조선일보』 개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의 양상 및 의미, 그리고 개최 배경을 살펴보았다.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한국 추상미 술의 전성기가 막 시작되던 1957년, 당시 재야에서 활동하던 추상 미술 가들을 모아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국전의 대항마(對抗馬)로서 기획되 었다. 이 전시는 현재 1950년대 후반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재야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창설 당시 전시의 기획에는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이 적극적으로 개 입하였다. ‘홍박(洪博)’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 던 홍종인과 『조선일보』 삽화가 한봉덕이 주축이 되어 추상 작가 김병 기, 김영주, 유영국의 조언을 받아 전시를 꾸렸다는 것이 발기 멤버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병기의 증언이며, 참여작가 박서보, 윤명로, 그리고 미술평론가 오광수, 이구열 등의 추측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시는 1969년 제13회전까지 지속되었다. 1회전에서 4 회전까지 이르는 1957〜1960년에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이 지향했던 것은 전위의 결집이었다. ‘문화창조를 위한 민족정서의 현대화’, ‘국전을 비롯한 기존 미술에 맞선 재야의 전위미술을 보여주는 것’, ‘국제미술계 에 진출하는 것’ 등이 지향점으로 제시되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 등 전 시회에 깊이 간여한 당대의 미술계 인사들이 전시가 처음 열린 1957년부 터 막을 내린 1969년까지의 시기를 ‘현대한국미술의 과도기’라고 인식하 고 있었던 것도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을 이해하기 위해 눈여겨봐야만 할 대목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미술계는 《현대작가초대미 술전》을 ‘새로움의 미술’, ‘전위의 미술’을 위한 장(場)으로 이용하기 위 해 애를 썼다. 《60년미술가협회전》 등을 비롯한 다른 반국전 전시가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작가들이 젊은 혈기로 거리에서 연 전시였던데 반해,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언론사의 힘을 등에 업고, 덕수궁미술관 이나 경복궁 미술관 같은 번듯한 전시장에서 추상미술이라는 새로운 조 류가 활개를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시는 극복의 대상으로 여 겨졌던 근대, 일제 강점기의 잔재, 홍대파를 중심으로 한 대한미협과 서 울대파를 중심으로 한 한국미협간의 갈등으로 붕괴 직전이었던 국전 등 미술계에 산재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1회전

과 2회전은 덕수궁미술관에서, 3회전부터는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렸다.

평론은 이경성, 김영주 등이 맡았으며, 리히하르트 헤르츠 당시 주한서독 공사, 마리아 헨더슨 미대사관 부인 등 외국인 필자들도 참여하였다. 외 국인 필자를 동원한 것은 객관성 확보와 함께 다른 전시회와의 수준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제4회전은 ‘모던 아트’계 작가 들을 총망라해 전국적으로 꾸며졌지만, 4·19 혁명의 영향으로 일시 폐막 되었다가, 7월 10일이 되어서야 속개되어 7월 24일까지 진행되었다.

1961〜1963년의 5〜7회전은 신진작가 공모와 국제화를 목표로 하였다.

1961년 열린 제5회전은 초대전과 함께 신진작가 공모전을 함께 실시하였 다. 신인상은 1명, 장려상은 2명이 받았다. 신인상 수상자는 농아(聾啞) 화가 민병영이었다. 5회전에서의 공모로 체질개선을 시도한 《현대작가 초대미술전》은 1962년 6회전에서는 국제화라는 과제를 해결하려 하였 다. 남아프리카, 오스트리아, 영국, 브라질, 이탈리아 등에서 해외작가 11 명이 초대되었는데, 그들을 전시에 초대하는데는 파리 대회 참가 후 해 외 인맥을 쌓았던 박서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6회전에 신인상 수 상자는 없었고, 장려상은 오창성, 김인중, 곽훈, 정관모, 양주현 등 5명이 받았다. 미흡하나마 국제전의 규모를 갖추려 시도하였던 제6회전은 《현 대작가초대미술전》의 분수령이 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뉴욕타임 스』 동경 특파원이 취재하러 오는 등 해외 언론의 관심도 끌었고, 박정 희 당시 최고회의장이 김종학의 작품을 한 점 사는 등 정부에서도 관심 을 가지고 작품을 구입하였다. 이듬해의 제7회전에서는 추상 위주로 펼 쳐졌던 이전까지의 전시와는 달리 추상과 구상을 한데 모아 공동의 광장 을 마련하는데 의의를 두었다.

제 8회전이 열리기로 예정되었던 1964년부터 13회로 막을 내린 1969년 까지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1964년 4월 18일 개 최 예정이었던 제8회전은 전시 개최 일주일 전에 무기 연기되었다. 학생 데모로 군대가 경복궁 구내에 주둔하게 된 것이 이유였다. 이듬해의 9회 전 역시 당국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불발되었다. 《현대작가초대미술 전》의 공모전을 폐지하고, 2년 임기의 운영위원을 선임해 신인을 발굴 하기로 하며, 초대작가를 대폭 축소하는 등의 조치로 환골탈태를 꿈꿨던

『조선일보』에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1966년의 10회전은 개최되지 못한 9회전을 바탕으로 무사히 열렸으나 그 다음해의 11회전 역시 무산되었

다. 1968년 12회전에서는 초대 작가 수가 81명으로 대폭 늘어나 전시회 의 질이 떨어졌고, 13회전을 끝으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추상은 전위가 아니었고, 『조선일보』로서는 화 제가 되지 않는 전시를 굳이 끌고나갈 필요를 못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 다.

현재 국내 대표 보수 신문으로 불리는 『조선일보』가 당시 전위 작가 들을 규합해 대형 전시회를 규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민족의 발전과 계몽에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언론의 책무에 대한 자각, 이와 함 께 ‘근대’라는 망령을 뛰어넘어 현대화를 이룩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대 중 계몽과 사회 변혁의 연장선상에서 미술계의 구태의연한 권위와 아카 데미즘을 타파하고자 하였던 개혁 의지, 시대의 화두였던 국제화에의 갈 망 등이 당시 신문이 내세운 명분상의 이유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함 께 비용을 지불하고, 지면을 할애해야하는 전시회를 안전한 구상미술이 아닌 추상미술 위주로 구성한 것에는 명분 이외의 정치적인 이유도 있으 리라고 생각하였다.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그를 4·19와 5·16 등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의 한국 정치 상황, 그리고 언론과 정부와의 관계와 연결지어 살펴 보고자 하였다. 이승만 정권 당시 『조선일보』는 대표적인 야당지로서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전국 곳곳에 대통령 동상을 세우는 등 구상 작가 들을 이용해 ‘이미지 정치’를 벌이는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신문은 지면 (紙面)을 통해 구현 가능한 새로운 이미지를 필요로 하였다. ‘새로운 미 술’인 추상에 대한 지지는 제도권 밖의 미술가들을 신문의 편으로 만드 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신문은 대중을 계몽하고, 민족 문화의 발전 에 기여할 지사(志士)적 언론으로서의 책무도 지고 있었다. 추상미술에 무지한 대중을 교육시킨다는 목표는 구태(舊態)의 타파와 함께 여러모로 그럴듯한 명분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이 지녔던 자유 당 시절의 반정부적 성격은 점차 퇴색되어 간다. 이승만 정부의 잔재를 척결하려는 군사정권은 새 시대의 새 미술로서 《현대작가초대미술전》

의 주축을 이루었던 앵포르멜을 택하였다. 1962년 제6회전에서 김종학의 작품을 산 박정희 최고회의장은 정부기관에 작품 구입을 지시하는 등 전 시회에 대한 지지 의지를 보였다. 작가들은 친(親)정부로 돌아섰고, 무자

비할 정도로 강화된 언론 통제에 신문은 대항할 힘을 잃었다. 전시회 자 체도 신선함을 잃어갔다. 1963년 제7회전에서 신인상을 받은 권승연이 서양화부 심사위원 권옥연의 사촌동생이라는 사실은 《현대작가초대미술 전》이 공정성과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결국 추상미술 의 지지기반이 미약하였던 1950년대 말 창립되어 화단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추상미술이 정부의 지 지와 후원을 받게 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컬러 신문 의 시대와 함께 루브르 미술관 소장 《프랑스 현대명화전》 등 화려한 블록버스터 전시가 기획되면서,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사 주 최 미술 전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이 시작되어 막을 내렸던 1957〜1969년이 고작 반 세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통해 전시회의 전모와 의미를 그려 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앞서 밝혔듯 당시의 『조선일보』 기사 외에 는 전시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김달진미술연구소에 소장된 전시 리플렛을 발견해 전시 참여 작가와 작품 목록을 만들 수 있었지만, 신문에 보도된 내용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전시 발기인은 대부분 고 인(故人)이 되어 증언을 듣기도 쉽지 않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에 응해주신 김병기·박서보 화백께 감사드린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당 시에 전시 도록을 만들지 않았고, 카메라가 고가여서 젊은 작가들이 작 품 사진을 남겨놓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출품작의 일부만을 신문의 흑백 도판으로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전시 출품작의 경향 및 양 식 분석을 할 수 없었다. 출품작 경향과 양식 분석은 향후 시간을 가지 고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겨둔다. 이와 함께 참여 작가들의 성향과 행보 에 대한 연구 또한 후속 과제로 생각된다. 광복 이후 국내 대형 기획전 의 대부분이 언론사 후원으로 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주최 전시회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내 언론사 주최 전시 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대한 이 소략한 논문이 『조선일보』뿐 아니라 다른 언론사 주최 전시에 대한 연구, 신문 독자와 전시 관람객의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 등으로 이 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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