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불교의 대중화와 신중단의 당산목
불교는 다양한 지역에 뿌리내리면서 재래의 민속과 결합했지만 헌공(獻供) 행위에 있어서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토착화를 통해 형성되는 불교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은 피라미드형 구조를 갖는데, 부 처와 위계 낮은 불교의 수호신들(신중)의 위계가 확실히 드러난다. 일반적으 로 불교는 ‘삼단불단(三壇佛壇)’에 따라 상단, 중단, 하단 3개의 단으로 나뉜 다. 상단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며, 하단이 가장 아래에 놓이는 구조인 것이다.
삼단불단에서 상단(上壇)은 불·보살단으로 모든 사찰에 있어 중심단이 된 다. 법당에서도 가장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주존불이나 좌우보처(左右補 處)의 보살상을 봉안하는 일괄적인 형식을 갖춘다.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헌공의식은 바로 이 상단을 중심으로 행해진다. 다음으로 중단(中壇)은 일반 적으로 ‘신중단(神衆壇)’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상단인 불·보살단의 좌측이나 우측에 신중탱화를 봉안함으로써 설치된다. 의식에서도 상단의식 다음으로 중단헌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단(下壇)은 ‘영단(靈壇)’이라고 불리며 주로 영가위패를 봉안하고 그 중앙에 감로탱화를 모신다.
이 가운데 중단은 사찰에서 호법신중을 모셔두는 단을 말하는데, 대승불교 가 발달하면서 수용한 각 지역의 토속신들―제석천, 범천, 사천왕 등―을 비 롯해 팔대금 강신중과 야차, 아수라 같은 팔부신중들을 모두 모시는 공간으 로서 활용된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는 상단, 중단, 하단이 질서정연하게 하나 로 통합되는 일련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어떠한 재래 및 토속신들이 수용된 다하더라도 불·보살의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즉, 삼단분단은 불교의 토착화 에 크게 기여한 구성이면서 불교 이외의 모든 토속신앙들을 불교적으로 수용 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홍윤식 2012: 138). 당산신(堂山神) 역시 본 래 불교의 신이 아닌데 신중에 편입되어 모시고 있는 것이다.28)
당산신이 신중에 등장하는 연원에 대해서는 송화섭(2012)이 당산제의 제신 의 기원을 18세기 초 사찰에서 성행한 수륙재에 두며, 당산제의 제신명인 ‘당 산천룡팔부지신(堂山天龍八部之神)’은 당산천왕단의 당산신과 천룡팔부단의 천룡팔부가 결합된 마을수호신으로, 당산제가 수륙재의 신중작법에서 파생되 었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송화섭 2012: 257-258). 특히 당산천왕단은 「수 륙재의문」을 통해 조선후기 사찰에서 수륙재를 거행할 때 설치한 옹호신중 단 가운데 등장한다.
내소사의 승려들은 ‘할머니당산’과 ‘할아버지당산’을 신중단에 모시면서 불 교가 대중적인 신앙과 의례를 포용했을 때 훨씬 더 안정적인 종교적 체계를 제공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들은 현대사회에서 ‘미신’으로 격하된 당산신들 의 위상을 불경을 암송하고 신중단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수행적인 질서 안에서 지속적인 의례를 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따라서 승려는 마을의 례의 유교식 제관과 같이 ‘일시적인 의례지도자’가 아니라 영구적이고 권위 있는 제관으로서 의례를 집전하며 불교의 대중화를 표방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내소사는 한국의 사찰에서 ‘산신’을 수용해 산신각(山神閣)을 설치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당산목을 정월에 모시는 중요한 신중으로 만들었다.
28) 불교의례 중단인 옹호신중단에는 천룡팔부단(天龍八部壇), 풍백우사단(風伯雨師壇), 당 산 천왕단(堂山天王壇), 용왕단(龍王壇), 당산국사단(堂山國師壇), 성황단(城隍壇), 산신 단(山神壇) 등을 설행하는데 중단 위목 가운데 천룡, 당산, 용왕, 국사, 성황, 산신 등이 오늘 날 동제의 제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불교의 옹호신중단의 제신명에서 파생되어 온 것으 로 추적 가능하다(표인주 1989: 48; 송화섭 2012: 258).
2-2. 사하촌 확장에 따른 당산신의 수렴
내소사를 중심으로 한 변산반도의 관광지화에 따라 ‘절 덕’에 먹고사는 사 하촌의 범위는 기존에 입암리·원암리에 한정되었던 것에서 석포리 5개 마을 전체로 확장되었다. 내소사와 능가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석포삼거리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업소, 식당, 젓갈판매장, 슈퍼마켓, 찜질방 등이 다수 입점했고, 이러한 상가는 내소사 일주문 앞까지 이어진다. 사하촌의 확 장에 따라 당산제도 석포리 전체의 공동의 행사가 되었다. 이 장에서는 입암 리를 제외한 4개 마을에서 존재했던 당산제가 어떻게 사라졌고 왜 다시 하나 의 의례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서술해본다. 다음의 [표 Ⅳ-3]는 각 당산제들의 성격을 간략하게 나타낸다.
지역 당산 시기 줄다리기 성격
내소사 할머니,
할아버지 1월 15일 x 신중불공
입암리 웃뜸, 아랫뜸 1월 14일 x 산신제
원암리 당산나무 1월 15일 o 풍농제
석포1리 할머니,
할아버지 2월 1일 o 영등제
[표 Ⅳ-3] 석포리(내소사, 입암리, 원암리, 석포1리)의 당산제 비교
먼저 원암리(黿巖里)는 마을에 자라바위가 있어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이 마을은 밀양 박씨와 홍성 장씨가 약 300여 년 전에 입향하여 살아온 마을 로, 1960년대에는 137호 정도 되는 큰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70여 호밖에 남 지 않았다. 이 마을은 입암마을과 가장 가깝고, 내소사와도 근거리에 위치하 기 때문에 옛날부터 절에서 나무를 하거나 소지를 하는 일로 생계를 이었 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원암마을의 당산목은 마을입구에 있던 팽나무였 다고 한다. 그런데 큰 홍수가 나서 나무가 쓰러져서 마을주민들은 쓰러진 당산목이 있던 자리에서 줄다리기를 한 후 줄로 똬리를 틀어 당산제를 지냈 다고 한다. 쓰러진 당 산목은 마을주민들이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어느 날 외지인이 들어와 쓰러진 나무로 소반을 짜서 팔아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원암리 주민들은 소중한 당산목으로 소반을 짜버린 외지인을 괘씸하 게 생각했다. 그리고 소략하게 진행하던 당산제도 해방을 맞이하면서 중단 되었다.
구술을 통해 수집하고 재현한 원암마을의 당산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 월대보름날 아침, 마을주민들은 볏짚을 들고 마을 당산에 모여 줄을 만들었 다. 줄은 외줄로 약 100m 정도 길게 만드는데, 줄을 3접을 하나로 만들고 다시 3접을 합쳐 모두 9줄로 줄을 만들었다. 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 해가 질 즈음에 마을주민들은 어깨에 줄을 메고 마을돌기를 했다. 동네를 한 바 퀴 돌면서 ‘재화 재화 어허 얼싸 어허 얼싸 명년 화전 놀이가세’ 소리를 반 복했다. 마을돌기는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을 정화해 청정한 공간으로 조성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줄다리기는 저녁식사 후, 마을주민들이 당산나무 아 래 모여서 행했다. 남자 편과 여자 편으로 나눠서 삼판양승제로 여자가 이 겨야 올해 풍년이 든다고 하여 항상 여자가 이겼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자 정에 이르러서야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줄다리기를 마치면 당산나무에 줄 을 감았다.
다음으로 석포 1리는 심씨가 많아 ‘심촌’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을이었다.
원래 포구마을이었던 석포마을은 1975년 간척사업으로 인해 비로소 논농사 가 시작되어 마을사람들의 생업이 한차례 바뀌었다. 현재의 석포교회 자리 가 원래 마을의 입구였고, 당산나무였던 소나무(혹은 팽나무)가 한 그루 있 었는데 한국 전쟁 때 나무가 쓰러지면서 당산제도 중단되었다고 한다. 하지 만 일부 마을사람들은 1982년 교회가 생기면서 목사와 교회 신도들의 반대 에 의해 당산제가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다고도 인식한다.
석포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 사흗날부터 집집마다 볏짚을 걷어서 줄을 비볐다. 줄은 외줄이며 굵기는 전봇대 정도였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석포 1 구와 2구가 편 을 갈라서 했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남녀로 편을 가르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줄
다리기가 끝나면 당산나무와 입석에 줄을 감았는데, 따로 감지 않고 한꺼번 에 감았다. 줄을 감을 때는 서열을 따지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꼬리가 밑으로 가고 머리가 위로 올라가도록 감았다. 그리고 마을 풍물패는 줄다리기가 끝나고 집집마다 돌면서 걸립을 했다.
석포마을의 옆에 자리한 용동마을은 원래 당산으로 모실 특별한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석포마을의 당산제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석포마을은 2 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했는데, 원암마을과 입암마을도 당산제가 없을 시절 에 다 같이 석포리 줄다리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석포리의 5개 마을 모두 기존에 당산제가 있었지만 여러 사정에 의해 당산제가 중단된 상태였 다. 마을주민들은 “당산제를 할 만 한 여건”이 만들어지면 얼마든지 당산제 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는데, 그것은 당산신으로 모실 나무와 걸립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본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포리 전체의 당산’의 생 성이 논의되고 당산제에 대한 보조기금이 확보된 것은 각 마을들이 당산제 에 참여하게 된 자연스러운 계기가 되었다.
3. 당산제 의례의 내용과 의미 경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