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수마노탑 탑지석은 1석부터 5석까지 차례로 1719년, 1773년, 1874년, 1653년, 1874년에 제작된 것으로 여 겨져 왔다. 그러나 연호(年號)와 간지(干支)를 분석해본 결과, 제2석과 제4석 모두 1713년의 기록임을 알게 되었다. 동시기의 기록이 둘로 나눠진 것은, 중수대상을 탑신과 찰간으로 나누어 각기 소임을 맡은 이와 시주자를 기록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수마노탑 탑지석 5매에는 모두 중수불사의 역할을 맡은 승려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일반인 시주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법호법명(法號法名)으로 기록된 제3석의 승려들 이름을 19세기 후반 불사 기록과 비교하여 12명의 同名을 파악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수마노탑 중수불사 전후로 강원도·서울·경상북도 사불산 일대와 경남 해인사 등지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은, 당대 불사의 경향과 수마노탑의 위상을 시사하고 있다.
1874년 탑 내에 봉안된 금은합 시주자인 김좌근은 청신녀양씨와 함께 기록되어, 수마노탑 시주자 중 유일 하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실재는 그의 애첩, 나합이라 불리던 나주 출신 기생 양씨가 그의 사망 이후 시주한 것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좌근의 애첩이던 양씨가 왕과 왕비·왕대비·대비·부대부인 등이 대거 참여한 불사에 개인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더구나 1874년 수마노탑중수는 원자 즉 순종의 탄생 ‘백일’을 기념 하기 위해 왕실에서 사적(私的)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탑지석에 기록된 10여 곳의 사찰 중 빈번히 등장하는 곳은 경북 봉화의 각화사와 강원도 영월 보덕사이다.
각화사는 사고사찰(史庫寺刹)로서 조정의 관리대상이었고, 보덕사는 단종 능의 원찰로서 왕실에서 돌보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두 사찰이 수마노탑 중수 불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이 두 사찰의 조력으로 수마노탑이 중수되었다는 점과 당시 수마노탑의 위상이 사고사찰이나 능침수호사찰 못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주제어 정암사(淨岩寺), 수마노탑(水瑪瑙塔), 수마노탑 탑지석(水瑪瑙塔 塔誌石), 순종 백일(純宗 百日), 보덕사(普德寺), 각화사(覺華寺), 나합(羅閤)
투고일자 : 2013. 12. 30 I 심사일자 : 2014. 01. 22 I 게재확정일자 : 2014. 02. 14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塔誌石) 연구
손신영 고려대학교 강사
※ 이 글은 『정암사 종합정비계획』(정선군·이음건축, 근간예정)에 수록한 「수마노탑 탑지석의 내용 분석」을 대폭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머리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강원도 정선의 정암사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에는 5매의 탑지석(塔誌石) 이 봉안되어 있다.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탑지석 은 탑의 연혁(沿革)과 시주자(施主者)·불사(佛事)에 참여한 승려들을 맡은 역할과 함께 기록하고 있어 불교사와 불교미 술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01 그러나 탑지석이 단독 의 연구대상이 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탑 연구의 보 조 자료로 탑지석의 내용이 언급될 뿐이다. 탑지석에 기록된 연호와 간지를 통해 탑의 연혁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고, 기록된 人名과 寺名을 통해 당시 불사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한 것은, 이름만으로 알 수
있는 바가 거의 없다고 판단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특히 수 마노탑 탑지석의 경우는 5매나 되지만 그 내용이 『정암사사 적』02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마노탑의 탑지석은 1972년 발견되었으나 탑을 보수한 후 다시 봉납되어 2013년 현재, 실견할 수는 없다. 필자는 최 근, 수마노탑 탑지석 사진을 제공받아 기왕에 채록된 탑지석 명문과 대조하여 <표 1>과 같이 수마노탑의 보수연혁을 정 리할 수 있었다.03 이에 본고에서는 19세기 불사경향을 파악 하기 위하여 수마노탑 탑지석에 기록된 바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탑지석의 기록년대를 새롭게 추론하고, 19세기 탑지석의 승려들 활동양상을 同시기 불사 기록과 대조하여 파악해 보고자 한다. 시주자에 대해서는 정암사에 전하는 기 록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01 현재까지 알려진 탑지석으로는 법광사의 ‘正德’3년명 탑지석과 통화23년명 탑지석 2매, 해인사 길상탑의 최치원이 지은 탑지석 4매, 장흥 보림사 쌍석탑의 탑지석 2매, 안성 미륵당석탑의 탑지석 1매, 석풍사 석탑의 탑지석 1매, 정암사 수마노탑의 탑지석 5매 등이 있다.
02 정암사에는 『淨岩寺事蹟篇』이라는 책자와 목판이 전하고 있으며, 서울대규장각에도 ‘葛來事蹟’이라는 판기가 있는 목판 인쇄본 책자로, 표지에 ‘太白寶塔事蹟’(규7089) 이라 쓰여 있는 『정암사사적』이 소장되어 있다. 두 본에는 모두 1778년(정조 2) 翠岩性愚謹誌라는 刊記가 붙은 「江原道旌善郡太白山淨岩寺事蹟」 및 「水瑪瑙塔重修事 蹟」, 1874년(고종 11) 四佛歸客 景雲以祉謹誌의 刊記가 있는 「水瑪瑙寶塔重修誌」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 이종익 교수가 편찬한 『水瑪瑙塔과 慈裝律師』(1977, 太白山淨岩寺)에는 위의 사적에 수록 된 기록 외에 「寶塔重修有功記」, 「寂滅宮法堂重修記」, 「太白山淨岩寺重修記」, 「佛糧願碑」 등이 수록되어 있다.
03 『정암사 종합정비계획』(정선군·이음건축, 근간예정)에 수록 될 「수마노탑 탑지석의 내용 분석」의 표1 재인용.
04 현재 정암사 경내에 있는 비석으로 앞뒷면 모두 기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종익 편, 앞의 책, pp.42~43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이 있는 앞면을 기준으로 보면 왼쪽이 깨져 그 부분의 글자는 일부만 남아 있다.
연대 내용 화주/시행자 전거
1713 ●기단 하부까지 해체 후 5층으로 세웠으나 6개월 만에 벼락을 맞아 무너짐 天密 「水瑪瑙塔重修事蹟」 「水瑪瑙寶塔重修誌」
탑지석 제2석, 제4석
1719 ●보수하여 5층으로 다시 세움 天密 「水瑪瑙塔重修事蹟」
탑지석 제1석
1770 ●지진으로 찰간이 뽑힘 「水瑪瑙塔重修事蹟」
「水瑪瑙寶塔重修誌」
1772 ●7층탑신으로 세워 상륜5층, 풍경32구 조성 翠巖 「水瑪瑙塔重修事蹟」
1777~
1778
●들기름과 석회로 돌틈 막음
●신도들이 佛糧畓 마련 翠巖 「水瑪瑙塔重修事蹟」
「佛糧願碑」04
1874 ●김좌근의 시주로 금합과 은합추가 蘗庵,
南湖
「水瑪瑙塔重修事蹟」
탑지석 제3석, 제5석 1964 ●보물 제410호로 지정
1972 ●기단 하부까지 해체하여 탑지석5매 및 사리장치 확인 후 현재 모습으로 보수 法宗 정영호교수 논문, 국가기록원 자료
1995 ●1층 탑신까지 해체 후 기단석 보강하여 재축 문화재관리국 국가기록원 자료
2012 ●탑신 및 풍경 보수 및 보완 문화재청 『2012년보존처리시방서』
【 표 1 】 정암사 수마노탑 보수연혁
기록시기 추정
1972년 정암사 수마노탑 해체 보수시, 탑 내에서 발견된 5매의 탑지석<사진 1~7>05에는 각기 다른 시기에 쓰여진 銘 文이 있다.06 발견 당시 탑지석의 명문을 채록하고 정리한 정 영호교수에 의해 이들 탑지석은 번호가 붙여지고 기록 년대 가 추정되었다. 이후 정영호교수의 정리내용은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07 이에 따르면 수마노 탑 내에서 발견된 5매의 탑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53 년(효종4)으로 추정된 제4석이다.08 조성년대로 보면, 제4석 다음엔 1719년(숙종45) 기록인 제1석, 1773년 기록인 제2석, 1873년의 기록인 제5석, 1874년의 기록인 제3석 순이 된다.
그러나 실재 탑지석의 명문을 살펴보면, 제2석과 제4석의 간 지는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사진 4, 사진 6>.09
먼저 제2석에 쓰여진 “崇禎後癸巳閏五月二十五日”에서
‘崇禎後癸巳’에는 1653년, 1713년, 1773년, 1833년, 1893년 등 이 해당되지만, 閏五月이 있는 해는 1713년 한 해 뿐이다.10 더구나 1719년 기록된 제1석에 화주로 ‘天密’이 등장하는데, 54년 뒤인 1773년 기록이라 추정되는 제2석에도 화주가 ‘天 密’이라는 점은, 제1석이나 제2석의 연대추정에 오류가 있음
을 시사한다<표 2 참조>. 일반적으로 화주는 불사나 사찰 운 영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소임을 맡는데, 중요한 역할로 인식되어 덕망 높은 고승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11 1713년 불사에서 화주였다면 천밀은 적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 렇다면 제1석이 기록된 1719년에 고승이었던 천밀이, 54년 뒤인 1773년까지 생존하여 화주 소임을 맡는 것은 거의 불가 능해 보인다. 따라서 ‘崇禎後癸巳’라는 연호와 간지는 1719년 에 가까운 계사년이자, 윤오월이 있는 1713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제4석의 “崇禎後逮癸巳五月”이라는 간지는 1653년으 로 해석되었지만, 이 역시 숭정이후 癸巳年인 1653년, 1713 년, 1773년, 1833년, 1899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재고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명문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逮萬曆後百餘年之至癸巳三月二十五日虔禱始役而同年閏 五月日完役而後考以記之盖地臺深莊之處事係重難不爲開函 上層□□一貫珠塔傾頹時散在落埋僅僅所得者八十一枚及黃 金珠五枚金銀器各具數種之物還置上層九耳 崇禎後逮癸巳 五月 落成之”
05 수마노탑 탑지석 사진은 1972년 발견 당시 촬영한 것으로, 이를 통해 그동안 알려진 탑지석 명문의 결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을 제공해준 정선군청 김대순학예사와 이음건축의 이혜원박사에게 감사드린다.
06 여기에는 수마노탑 조성 연기, 중수 이유와 과정, 중수 일자, 중수 당시 직책을 맡은 승려들의 이름과 민간인 시주자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어 탑의 보수를 실증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에 되고 있다.
07 정영호, 1975, 「정암사 수마노탑 내 발견 사리구에 대하여」 『東洋學』 Vol.5,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pp.416~424; 강원대박물관, 1996, 『정선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국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의 ‘정암사수마노탑 탑지석’ 항목; 박경식, 2012, 「정암사수마노탑 연구」 『사학지』 44집, 단국대학교사학과.
08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4석이 탑신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발견되어 오래된 탑지석일수록 탑신 아래 혹은 기단부에 봉안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874년 기록인 제3석과 제5석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탑지석의 발견위치와 기록 시기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景雲以祉가 쓴 「水瑪瑙寶塔重修誌」에 의하면, 수마 노탑은 1874년에 전면 해체되었다가 다시 쌓은 것이므로, 탑지석은 이때 기록순서와 무관하게 봉납된 것 같다.
09 수마노탑 탑지석 명문은 정영호교수의 앞의 논문 및 혜안, 1999, 『황수영전집-금석유문』, pp.245~255 참조.
10 1653년에는 윤7월, 1773년에는 윤3월이 있다. 『孝宗實錄』 11권 및 『英祖實錄』 120권 참조.
11 ‘化士’라고도 하는데, 불사나 사찰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소임을 맡는다. 이종수·허상호, 2010, 「17~18세기 불화의 『畵記』 분석과 용어 고찰」 『불교미술』 21, 동국대학교박물관, p.147.
정영호교수가 정리한 수마노탑 탑지석의 내용 (단위 cm)
연호와 간지 추정년대 크기 두께 字徑 발견위치
제1석 康熙五十八年己亥六月日 1719년(숙종 45) 15.8×35 4 3.5~4.5 3층 탑신 12단
제2석 崇禎後癸巳閏五月二十五日 1773년(영조 49) 35×25 4.5 1~1.5 3층 탑신 9단 중심부
제3석 大淸同治十三年甲戌五月日 1874년(고종 11) 45×36.5 2.4 1.3~1.5 3층 탑신 제 6단
제4석 崇禎後逮癸巳五月 1653년(효종 4) 55×46.5 3~4 1~1.5 2층 탑신 20단 적심아래
제5석 同治十二年甲戌四月初八日 1874년(고종 11) 25.7×15.3 3.6 1.3~2 기단부 상층~2층
【 사진 1 】 제1석 전면
【 사진 3 】 제1석
【 사진 2 】 제1석 측면
【 사진 4 】 제2석
【 사진 5 】 제3석
이를 대략적으로 해석하면, ‘만력년간 이후 백여년이 흐 른 계사년 3월25일에 이르러 정성스레 기도하며 공사를 시 작해, 그해 윤오월 어느 날 공사를 마쳐 기록한다’는 내용에
이어 ‘땅속의 장엄지처(사리장치)를 덮는 일은 함을 여는 것 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데… 하나로 꿴 구슬 (염주)은 탑이 기울어 무너질 때 떨어져 흩어져버렸지만 겨 우 찾아낸 81매와 황금 구슬 5매, 금은기 등의 여러 지물을 갖추어 다시 상층에 넣어, 숭정이후 계사년 5월에 완성했다’
는 내용이다.
앞부분은 수마노탑이 계사년 윤오월에 완성된 사실을 적 고 있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오월이 있는 1713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뒷부분은 탑 내 상층에 염주 와 구슬, 금은기를 비롯한 각종 지물을 넣어 “崇禎後逮癸巳 五月”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뒤로 대시주와 각종 물품 시주자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러한 표기는 연호와 간 지, 날짜 다음에 ‘破塔重創時緣化秩’이라 적고 畵員秩, 都片 手 등을 차례로 기록한 제2석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이 명문 은 1713년 수마노탑 중수 불사를 기록하면서 탑의 중수 소임 을 맡은 이들은 제2석에, 각종 물품 시주자들은 제4석에 각 기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12
이밖에 제4석의 기록해석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탑을 완공하고 탑 내에 봉안물을 넣는 것이 동시기에 이루어 진 것인지, 60년 지난 후에 넣은 것인지 하는 점이다. 탑의 보 수는 1713년 5월에 완료되었는데, 탑 안에 봉안물을 넣은 시 기가 1713년인지, 혹은 그로부터 60년 뒤인 1773년인지 하는 문제이다. 둘 중 어느 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탑이 보수될 당시 봉안물도 넣는 것이 상례이므로, 제4석이 1713년의 기 록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제5석의 ‘同治十二年甲戌’에서 ‘同治十二年’은 고종 10년 즉 서기 1873년이지만 갑술년은 1874년에 해당한다.
정영호교수는 이를 제3석과 연결지어 고종11년 즉, 1874년 으로 비정하였다. 제5석의 연대는 「寶塔重修有功記」를 통해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13 수마노탑의 1874년 중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보탑중수유공기」의 연호와 간지, 기문의 내
【 사진 6 】 제4석
【 사진 7 】 제5석
12 이처럼 제2석과 제4석이 같은 시기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탑지석의 크기나 글씨체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사진 4, 사진 6 참조> 다만 글자 크기가 1~1.5cm라는 점 이 유사하다. 각주 08의 표 참조.
13 그해 즉 1874년 2월 13일에 장인을 부르고, 3월12일 공사를 시작한 후 좋은 날을 택일하여 탑을 해체한 다음 4월 초파일 탑을 쌓기 시작하여 5월15일 완공하였다는 내 용이다. 이종익 편, 앞의 책, pp.38~39 참조.
용 등을 종합해보면 ‘同治十二年甲戌’은 갑술년인 ‘同治十三 年’의 誤記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석 승려들의 활동양상
수마노탑의 탑지석 5매에는 각기 다른 분류와 명칭으로 역할을 나누어 人名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표 2>와 같다. 제1석에는 15명, 제2석에는 59명,14 제3석에는 49 명, 제5석에는 3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름만 보면 僧 侶와 俗人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記名방식은 탑지석마다 조 금씩 차이가 있다. 제1석, 제2석, 제4석에는 승려이름을 법명 으로만 썼지만, 제3석에는 法號法名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이 다. 본고에서는 1874년의 불사가 기록된 제3석에 등장하는 승려라면, 동시기 다른 사찰의 불사에도 참여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19세기 불사관계 기록을 살펴 <표 2>와 같이 정 리할 수 있었다. 이 표에 정리한 12명의 승려들 중 주목되는 인물은 남호영기를 비롯하여 경운이지, 벽암서빈, 범운취견, 용호해주, 주은지순, 상허혜조 등이다.
南湖永奇는 19세기 중엽 근기지역에서 사경(寫經)·독 경(讀經)·판각(板刻) 등 경전간행과 보급을 비롯한 여러 불 사를 맡아 활발히 활동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철원 지장 암·삼각산 내원암 ·수락산 흥국사·철원 석대암·서울 봉은사·합천 해인사·설악산 오대암 등지에서 판각과 관
련된 불사를 도맡았으며, 1872년에는 강원도 정선 정암사 수 마노탑 중수의 도화주와 철원 심원사의 여러 전각 불사 화주 를 동시에 맡았다.15
景雲以祉는 제3석에 기록된 7명의 증명법사16 중 가장 먼 저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쓴 「水瑪瑙寶塔重修誌」에는 “四佛 歸客”, 「寶塔重修有功記」에는 “龍山歸客”으로 자신을 소개하 였다.17 四佛歸客에서 ‘四佛’은 경상북도의 사불산으로 보인 다. 19세기 들어 사불산 일대의 사찰인 김룡사와 대승사를 중 심으로 활동한 불화승들이 독특한 양식적 특징을 형성하여
‘사불산화파’로 분류되는 점을 고려해보면18 사불산의 사찰로 인식되었던 이들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 1858년의 <김룡사지장도>에는 ‘證師’, 1867 년의 「김룡사화장암중창기」에는 ‘山中宗師’, 1868년의 「김룡 사 화장암 중단불사기」에도 ‘山中宗師秩’이라 하였다가 1874 년의 「尙州雲達山雲峯寺天王門重修上樑文」에는 ‘前 宗正’이 라 하였다. 따라서 경운이지가 김룡사의 고승이었던 것은 분 명하지만 行狀은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법맥이 喚性志安을 이은 括虛取如로 부터 이어진 것으로 파악되므로 김룡사의 법맥과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학승(學僧)으로 볼 수 있다.19
한편, 김룡사에 전하는 「大成庵忌日錄」을 통해 암자별로 봉 안된 진영을 살필 수 있는데, 경운이지의 진영인 <先師景雲 堂大禪師以祉>가 양진암에 봉안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20
蘗庵西濱은 제3석과 「水瑪瑙寶塔重修誌」에는 “蘗庵西濱”
이라 되어 있고, 『海東佛祖源流』와 『東宣老師遺稿』에는 “蘗
14 제2석에 首頭로서 “慶尙道順興浮石寺 通政 兼 前維那”라 기록 되어 있는 ‘瑞悅’은 「浮石寺安養門重修記」의 寺內記에 기록된 인물과 이름이 같아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15 속성은 鄭씨로 1821년 전남 고부에서 출생하여, 14세에 삼각산 승가사로 출가해 大演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1872년 9월20일 세수 52세 승랍39세로 입적하였다. 梵 海 撰, 김윤세 譯, 1991, 『東師列傳』, 廣濟院, pp.385~388; 사찰문화연구원, 1997, 「海東朝鮮國寶盖山石臺庵南湖律師開刊華嚴碑銘竝序」 『봉은사』, p.247; 지관 편저, 2000, 『한국고승비문총집-조선조~근현대조』, 가산불교문화원; 사찰문화연구원, 1997, 「봉은사 연혁과 주요인물 - 남호영기」 『봉은사』, pp.91~93; 김종진, 2004, 「1850 년대 불서간행과 불교가사」 『한민족문화연구』 14집, pp.111~112; 손신영, 2006, 『19세기 불교건축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17, 25 <표 5> 참조.
16 불사나 법회·선방·강원 등에서 행사를 증명해주는 소임을 말한다. 대체로 큰 스님들이 맡으며, 상징적 의미에서 큰 스님을 모신다.
17 이종익 편, 앞의 책, pp.38~39. 경운이지는 생년은 알 수 없으나 1874년 이후부터 1880년 사이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 3>을 통해 알 수 있듯, 그의 활동 시기는 1858년~1874년에 집중되어 있고 1880년과 1888년 김룡사에 대대적으로 조성된 불화들의 화기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8 이용윤, 2011, 「退雲堂 信謙 佛畵와 僧侶門中의 後援」 『미술사학연구』 269호, p.76.
19 김형수, 2012, 「김룡사의 고승들」 『운달산 김룡사』, 문경시, p.82.
20 진영은 현전하지 않는다.
이밖에 晩應處禧 역시 김룡사 스님으로 보인다. 1886년의 「江右尙州牧雲達山金龍寺大成庵重修上樑記」와 1888년의 「尙州雲達山雲峯寺大成庵重口記」에 ‘화장암질’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영인 <先師晩應堂大禪師處禧>는 화장암에 봉안되었다는 기록만 있고 역시 현전하지 않는다. 이용윤, 2012, 「신앙의 구심점, 김룡사의 불상과 불화」 『운달산 김룡사』, 문경시, pp.368~372 <표 2> 참조. 만응처희는 수마노탑 중수보다 10년 앞선, 1868년에 조성된 영월 보덕사의 <석가모니불도> 조성시 ‘指 殿’을 맡았다가 1874년 수마노탑 중수시 ‘證明’을 맡아, 그의 활동범위는 보덕사→정암사→김룡사로 이어진 것 같다.
庵西灝”라 되어 있으나 ‘벽암서빈’과 ‘벽암서호’는 동일인으로 보인다.21 『동선노사유고』에 실린 「蘗庵大禪師行狀」에 의 하면 벽암은 38세 때, 강원도 태백산 정암사에 들어가 수마 노석탑을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탑지석 제3석과 5석에 벽암이 화주로 기록된 바와 일치하기 때문이다.22 벽 암서빈[벽암서호]은 흥국사에서 講主가 되었으며 피로 사경 한 『阿彌陀經』을 판각하고 간행하여 명성을 날렸다. 38세때 강원도 태백산 정암사에 들어가 백일기도를 올린 뒤 수마노 석탑을 중수하였는데, 이를 기록한 제3석에는 都化主23로 제 일 앞에 기록되어 있고 제5석에는 단독 ‘化主’로 기록되어 있 다.24 아울러 동시기의 기록인 「보탑중수유공기」에도 단독 으로 ‘都化主’라 기록되어 있다.25 이 당시 탑을 중수하려고 그 기저를 파니 기단 밑돌에 “蘗庵重修”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 었다고 한다. 그는 43세때인 1879년에는 금강산 장안사 불지 암의 <현왕도> 조성당시 증명을 맡았으며, 57세에는 금강산 유점사로 가서 萬日念佛會의 화주가 되어 염불회를 증흥시키 는 한편, 유점사를 크게 중수하는 일을 도맡았다. 『海東佛祖源 流』에 의하면 벽암서빈[벽암서호]은 태고 19세손이자 涵月海 月 門人으로, 湖月道訓→慧峰最性→幻應善訓→蘗庵西濱[蘗 庵西灝]→東宣淨義 순으로 법맥이 계승된 것을 알 수 있다.26
梵雲就堅은 탑지석 제3석에 경기화주로 芸禪定燮과 함께 法號 없이 ‘就堅’이라는 법명으로만 기록되어 있다.27 그는 서 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1866년의 3중창과 1870년의 대웅보전
중건불사, 1878년의 건봉사 중건불사에서도 화주를 맡았다.
또한 수유리 화계사에 조성되어 있는 1878년의 <명부전 지 장도>와 1886년의 <괘불>에 모두 ‘山中秩’28로 기록되어 있 어, 범운취견은 당시 화계사에 주석했던 고승으로 보인다.29 이후 1884년 조성된 김룡사의 <시왕도>와 1884년 조성된 용 문사의 <십육나한도>, <시왕도>에도 역시 ‘화주’로, 1896년 조성된 대구 동화사 <석가모니불도>와 사천왕도의 <광목천 왕도>에는 ‘引勸化主’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김룡사에서 는 석가모니불좌상 개금불사도 함께 진행하였는데, 복장기 에는 범운취견을 ‘서울 화계사 승려’이자 ‘인권화주’로 기록하 고 있다.30 해인사에는 1892년 조성된 <대적광전 팔상도 쌍 림열반상>의 화주로 ‘法雲就堅’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듬해 인 1893년 조성된 <길상암 지장도>의 指殿31으로 ‘梵雲就堅’
이라 기록되어 있어 ‘法雲就堅’은 ‘梵雲就堅’의 誤記가 아닐까 한다. 이렇듯 범운취견은 서울 화계사, 김룡사, 용문사, 해인 사에서 활동한 것이 확인되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다수 전하 는 해인사에서는 ‘미증유의 공덕주’로 칭송받고 있다. 서울 화 계사 스님이지만, 1888년 해인사로 내려와 화주가 되어 내탕 금을 얻어 여러 당우를 수선하였고, 1899년에도 내탕금 6만 량을 받아와 해인사의 여러 불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인 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인사의 127위 선사진영 중에 는 범운취견을 그린 <修禪社創建大化主梵雲就堅之眞>과 〈重 創大化主梵雲堂大禪師就堅之眞影> 두 점이 전해지고 있다.32
21 벽암서빈[벽암서호]은 충청남도 덕산 출신으로, 1837년 출생하였다. 속성은 김해김씨로, 경기도 양주군 수락산 興國寺에서 蓮月禪師를 은사로 득도하여 교학을 이수한 뒤 禪공부를 하였다. 세수 75세, 法臘 55세 때 유점사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19세말~20초반의 學僧이자 전 종단의 敎正을 지낸 東宣淨義가 있다. 金剛山楡岾寺, 昭和18年, 「蘗庵大禪師行狀」 『東宣老師遺稿』, pp.50~52 참조.
22 어떤 이유로 벽암의 법명에 ‘濱’과 ‘灝’가 각기 쓰이게 된 것인지 현재로선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벽암서빈과 벽암서호를 병기하고자 한다.
23 도화주는 화주가 여러 명 일 때, 공적이 클 경우 붙이는 호칭이다. 이종수·허상호, 앞의 논문, p.147.
24 도화주 소임을 맡은 남호영기가 입적하자, 실질적 책임을 벽암이 도맡아 진행한 결과로 보인다.
25 蘗庵西灝, 「寶塔重修有功記」; 이종익 편, 앞의 책, p.39.
26 炯埈 編, 1979, 『海東佛祖源流』 我, 佛書普及社.
27 ‘취견’이라는 이름만으로 파악하는 것이 부정확하긴 하지만, 이 무렵 활동했던 분으로 활약상이 두드러지는 분은 梵雲就堅이므로, 제3석의 취견을 ‘범운취견’일 가능성이 높다. 1855년 경북 청송 대둔사 대광명전 <신중도> 조성시 송주를 맡은 ‘梵雲’ 역시 ‘범운취견’ 으로 추정된다.
28 해당 불사와 관계없이 상시적으로 (해당)사찰 경영에 필요한 소임을 맡은 승려와 전임 승려, 당시 사찰에 머물고 있는 고승들을 말한다. 이종수·허상호, 앞의 논문, p.147 참조.
29 손신영, 앞의 논문, p.34 <표 6> 참조.
30 범운취견이 서울 화계사에서 시주모연에 인상적인 활동을 결과, 여러 사찰에서 인권화주로 활동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왕실이나 상궁, 고위계층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시주에 동참케 한 것 같다. 그가 화주로 활동한 불사에는 대부분 이들 계층의 후원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1 秉法을 보좌하여 의식을 집전하는 소임으로 『百丈淸規』에는 여러 불전 청소와 香燈을 관리한다고 되어 있다. 東陽德輝 重編; 笑隱大訴 校正, 최법혜 역주, 2008, 『勅修 百丈淸規』, 가산불교문화연구원출판부, p.311; 이종수·허상호, 앞의 논문, p.143 재인용.
32 李智冠 編著, 앞의 책, 「梵雲大師碑銘並書」 『梵雲大師紀功銘碑銘並書』, pp.714~717, p.772, p.774, p.939 참조.
龍湖海珠는 枕溟講伯의 傳禪제자로, 청화산 백련암의 대 강사였고,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쪽을 넘나들며 공부하였 으며 호남지방에서는 남북을 오가며 구도활동을 하였다.33 1872년, 「裟婆世界南贍部州海東朝鮮國慶尙左道醴泉郡小白 山龍門寺慈雲樓重建上樑時芳啣錄」에 ‘大庵祖室’이자 ‘會主’
로 기록된 것을 보면,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에 주석하며 활 동했음을 알 수 있다.34 그는 수마노탑 중수를 비롯하여 여러 불화 조성불사에서 ‘증명’을 맡았지만, ‘화주’ 소임을 맡은 경 우가 더 많아 불사 당시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海東 佛祖源流』에 의하면 용호해주는 太古 제19세손이자 抱月門 人으로, 법맥은 仁坡進華→寶月景琳→洛下取仁→龍湖海珠 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35
柱隱智順은 다라니를 잘 외웠던 분으로 추정된다. 수마노 탑 탑지석 외에도 1880년 상주 김룡사에 조성된 <양진암 신 중도>를 비롯한 5점의 불화에 모두 ‘誦呪’36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송주로 활동한 상황은 1884년 예천 용문사에 조성 된 <대향각 아미타회상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주은지순도 한곳에만 주석하지 않고 옮겨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수마노탑 중수에 앞서 1868년, 영월 보덕사에서 조성된 <석 가모니불도>에는 ‘산중질’이었다가, 12년 뒤인 1880년 김룡 사에 조성된 사천왕도의 <증장천왕도>에 ‘山中秩 宗師’로, 8 년 뒤인 1886년의 「江右尙州牧雲達山金龍寺大成庵重修上樑 記」와 1888년의 「尙州雲達山雲峯寺大成庵重□記」에는 모 두 “華藏庵秩”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37 따라서 주은지순 은 영월 보덕사, 예천 용문사, 김룡사 화장암을 차례로 거치 면서 활동하였으며, 만년에는 김룡사 소속 암자인 화장암에 주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相虛慧造는 수마노탑 중수 불사에서 증명을 맡았는데 이 후 해인사에서 주로 활동한 것 같다. <표 2>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1885년·1890년·1892년에 각기 조성된 불 화 및 불상 개금 불사 등에 ‘證明’, ‘上指殿’, ‘山中秩’, ‘山中大 德秩’, ‘化主’ 의 소임을 맡았기 때문이다. 현재 해인사에 전 하는 127위 선사진영 중에 <禪敎兩宗相虛堂慧造之眞>이 있 지만, 해인사에는 역대 고승이 아닌 ‘서울 화계사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38
이밖에 關西化主로 기록된 華月智修는 수마노탑 중수 불 사 이전인, 1856년 봉은사 화엄판전 신건 불사에서도 ‘송주’
를 맡은 바 있어 주목된다.39
이상과 같이 수마노탑 탑지석 제3석에 등장한 승려들 의 이름을 19세기 후반 불사기록과 비교하여 살펴본 결과, 1874년 수마노탑 중수는 당대에 서울과 강원도·경상남북 도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던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불사 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판각활동으로 유명했던 남호영기 가 수마노탑 중수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수마노탑중수가 탑 의 초창 당시 내세웠던,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명분에서 시작되었음을 추론케 한다.40 이러한 대의 명분이 있었기에 전국 각지의 이름난 승려들이 화주를 비롯 한 각종 소임을 맡으며 수마노탑 중수불사에 참여했던 것으 로 보인다.
활동양상이 파악된 12명의 승려들은 정암사 외에, 한 사 찰의 불사에 동시에 참여한 바가 두드러지는데, 3명이 동시 에 참여한 곳도 적지 않다. 예컨대 만응처희·용호해주·주 은지순은 1868년 영월 보덕사 <석가모니불도> 조성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18년 뒤인 1886년 김룡사대성암 중수에도 또
33 출생년대는 불분명하지만, 1887년 8월30일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梵海 撰, 김윤세 譯, 앞의 책, pp.344~346, p.593 참조.
34 범해의 글에는 없지만, 김윤세선생이 문경 사불산 대승사에서 강설하였다고 정리한 것을 보면, 용호해주는 사불산 일대 사찰인 용문사와 대승사를 아우르며 활동했던 분 이라 할 수 있다. 梵海 撰, 김윤세 譯, 앞의 책, p.344 참조.
35 炯埈 編, 앞의 책 참조.
36 불사가 진행될 때 眞言(多羅尼) 염송하는 일을 맡은 승려로, ‘持誦’ 혹은 ‘持呪’라고도 한다. 이종수·허상호, 앞의 논문, p.143 참조.
37 그러나 김룡사에 전하는 진영기록에 는 그의 이름이 없다.
38 李智冠 編著, 위의 책, p.776.
39 華隱護敬, 「京畿左道廣州修道山奉恩寺華嚴版殿新建記」; 손신영, 앞의 논문, p.25 <표 5> 참조.
40 「江原道旌善郡太白山淨岩寺事蹟」 “此所謂福國祐世者也.”
년도명문의 주 내용 (人名以外)
조탑 연화질(緣化秩) 大施主 證明指殿上片手旌善 冶匠上供養主副供養主來往助役雜役負木別座副化主 都大化主 제1석1719主上三殿下 萬歲 기원洪濟寺 印悟比丘
中峯寺 就撛 比丘
覺華寺 一淳 比丘
覺華寺의 宣藏比丘 祖師比丘 尙稀比丘 智海比丘 禪洽?比丘
金 聖 海 保軆
覺華寺 宗念比丘性什比丘
戒冶比丘 卓元比丘 禪鑑比丘 玉玄比丘
月岳山 德 主寺 草元 比丘
京畿道 居士 玉熙 保軆
崔仅眞覺華寺 靈信 比丘
密陽 載藥山 雲學比丘 洪濟寺 居士 幸梅保軆 洪濟寺 居士 戒淡保軆
寧月報寺 天密朴自云 兩主 제2석1713
破塔重創
畵員秩 化主秩 證師持誦指殿鐘頭淨桶都片手冶匠針匠助緣供養主來往負木助役 大德慈忍老德 印岑山人 想如惠明仅卞
宗印 幸均 能印 祖師 宗演 廣沾 雪淸 醒旭 道修
通政 李先伊 李今奉 鄭太龍
山人 敬手鑑
居士落衍 居士落世 居士惠云 居士善眼 居士石泉 居士幸梅 比丘社明
修海 再安 自心 斗玉 宋念 性 種(宗) 貫沈 修行 仁業
大元 明捀 致白 最根 宝云 奉乞 禹(?) 世赤
李祐上 居士 就卓
双? ?察 信敬 草洽 義?弘
守安 寧越 報德寺 天密 前揔攝登階大師 致捀 慶尙道 大邱 龍淵寺 嘉善 兼 측면 명문都監首頭公員畵記助使別座 ?擧役之際 各道各邑寺 所用財物 隨其多小 以爲尙補耳
江原道 寧越 報德寺 嘉善僧大將 兼 登階大師 學淸 慶尙道 奉化 覺華寺 揔攝性倫 慶尙道順興浮石寺 通政兼前 維那瑞悅江原道三陟靈隱寺 前執綱 道照 黙 慶尙道 安東 洪濟寺 前執綱 仅湖江原道 蔚珍 彿影寺 玄洽 三陟 靈興寺 秀澄蔚珍 天?興寺 敬倫
內別座 金海中峯汀(?)貫洙 外別座 報德寺 虔岑 覺華寺 文憲(?)
【 표 2 】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 명문의 인명 분류
년도명문내용
緣化秩 證明誦呪指殿供司淨槦(誦)鐘頭石手冶匠茶角都化主會主刻字 제3석1874탑이 기울어 중수
景雲以社 海月浩然 大溟取一 龍湖海珠 晩應處禧 相虛慧造 瀨應仁和
報恩 竺蓮/ 影月 侑定/ 西皐 信元/ 柱隱 智順/ 慶雲 道希/ 蘗山 應弼
寶蓮性 佼圓潭法塵 典 守益沙彌 永洽
沙彌 亘修 根俱 社訓
淸信士 高善慧 信士 宋信覺 李春滿 金萬龍 朴福同 韓窉吉 朴淸泰 李允國
信士 金願覺
內別座 西應保戒 外別座 比丘義演
內都監 幻應 善昕 外都監 九蓮 泰彦
應松定律 / 亘曄/ 定優
蘗庵西濱 南湖永奇 京畿化主 芸禪定燮 就堅 湖南化主 海雲信興 優曇華先 湖中化主 牧菴德讚 嶺南化主 南化仁性 關東化主 錦檻瀅萬 德松斗沾 關北化主 一虛幻黙 蓮藕智允 關西化主 華月智修 沙彌念勤 海西觀虛道翰
嗅(?)恩在昕
慶霞到雨 秉法 西嶺敬熹 雨龍明善 助役 沙彌善德 제4석1713
명문내용大施主供養施主布施遮日施主法油 石灰施主鐵物施主중앙하측 명문 (대각선)중앙명문좌측명문 施主施主 탑이 기울어 중수
長?(幡)施主 金貴建 兩主 李祐上 步蓮施主 察?(諺)?(棒)云已 兩主 信海比丘 食塩施主 比丘 釋弘, 大林 朱同伊 兩主 /沈海業 兩主
通政 性律比丘 守然比丘 比丘覺倫 姜斗永兩主
嘉善 金以叔 兩 主 就定
金莫礼 金賢武 金哲問 金哲鐄
体洪 山人解佾 山人定俊
舍音基吉谷?(斗)毛洞 幷力納拱
通政 朴戒龍 鄭命山 金莫立
覺華寺僧有 添怏?慶尙左道 覺華寺 匠人 5석1873
명문내용獨施主 化主 甲戌 四月初八日佛念珠奉安金銀盒相國 丁巳生 金左根 淸信女 丙子生 梁氏 普光明蘗庵西賓
41 李智冠編著, 1992, 『伽倻山海印寺誌』, 伽山文庫; 고경스님 校勘, 송천스님 外 編著, 2011, 『한국의 불화 화기집』, 성보문화재연구원;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사찰문화재』 경상북도 1편(2007)·2편(2008) 및 서울 편(2013) 자료집; 도윤수·한동수, 2013, 「문경 김룡사의 불사 관련 기록물」 『건축역사연구』 vol.22, No.5
<표 1> 참조.
【 표 3 】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 제3석의 인사들이 참여한 불사와 활동양상41
지역 寺名 佛事內容 景雲以祉 瀨應仁和 海月浩然 大溟取一 相虛慧造 晩應處禧 龍湖海珠 柱隱智順 蘗庵西濱
/蘗庵 西灝
南湖永奇 梵雲就堅 華月智修
강 원 도
정암사 수마노탑 중수, 1874 證明
기록자 證明 證明 證明 證明 證明 證明 誦呪 都化主 都化主 京畿化主 關西化主
보덕사 석가모니불도, 1868 指殿 證明 山中秩
장안사 불지암 현왕도, 1879 證明
서 울
봉은사 화엄판전 신건기, 1856 都化主 誦呪
화계사 명부전 지장도, 1878 山中秩
괘불, 1886 기록자 山中秩
경 상 북 도
혜국사 극락전 상량문, 1867
김룡사
지장도, 1858 證師
응향각 중수기, 1867 기록자
화장암 중수기, 1867 山中宗師
기록자 宗師
화장암 中壇佛事記, 1868 기록자 證師
설선당 중창상량문, 1870 기록자 만세루방중창상량문, 1870 기록자 상주운달산운봉사천왕문중 수상량문, 1874
前宗正 기록자
양진암 신중도, 1880 證明 誦呪 誦呪
금선암 신중도, 1880 誦呪
금선암 석가모니불도, 1880 誦呪
사천왕도(지국천왕),1880 證明 誦呪 誦呪
사천왕도(증장천왕),1880 山中宗師
秩
독성도, 1880 誦呪
시왕도(10폭모두), 1884 化主
강우상주목 운달산 김룡사 대성암 重修上樑記, 1886
華藏菴
晩應處禧 別堂 華藏菴 柱隱智順
칠성도, 1888 誦呪
상주 운달산 운봉사
대성암 중〇기, 1888 華藏菴秩 別堂 華藏菴秩
16나한도1, 1888 山中宗師
16나한도2, 1888 誦呪
대성암 독성도,1888 誦呪
예천 용문사
두운암 아미타회상도, 1868
荷月智修 本庵秩,
/ 誦呪
신중도,1868 誦呪
사바세계남섬부주해동조 선국경상좌도예천군소백 산용문사자운루중건상량 시방함록, 1872
大庵祖室 /會主
지역 寺名 佛事內容 景雲以祉 瀨應仁和 海月浩然 大溟取一 相虛慧造 晩應處禧 龍湖海珠 柱隱智順 蘗庵西濱
/蘗庵 西灝
南湖永奇 梵雲就堅 華月智修
경 상 북 도
예천 용문사
대향각 아미타회상도, 1884 化主
상향전 아미타불도,1884 化主 誦呪
영산전 영산회상도, 1884 證明 山中秩
/化主 誦呪 化主
서전 신중도, 1884 證明 化主 化主
대장전 신중도, 1884 化主 化主
영산전 16나한도, 1884 證明 化主 化主
시왕도(10폭), 1884 證明 化主 化主
칠성도, 1884 證明 化主 誦呪 化主
봉화 금봉암
아미타불도, 1880 證明
신중도, 1880 證明
봉화 각화사
동암 아미타회상도, 1880 證明
신중도, 1880 證明
청송
대둔사 대광명전 신중도,1855 “梵雲”
誦呪
구미 도리사
극락암 석가모니불도, 1876 證明 化主
法堂重修記, 1876 化主
칠성도, 1881 證明 都監 誦呪
안동
광흥사 영산암아미타불도, 1886 證明
대구 동화사
석가모니불도, 1896 引勸化主
석가모니불상 복장 개금원문
1896 引勸化主
사천왕도(광목천왕),1896 引勸化主
경 상 남 도
해인사
대적광전 삼신불도 (비로자나불),1885
證明/
上指殿/
山中秩
장경각 불상개금, 1885 證明
대적광전 삼신불도 證明
(석가모니불),1885 指殿
홍제암 석가모니후불도,
1890 證明
괘불, 1892 指殿/
山中大德秩 化主 誦呪
조사도, 1892 化主
대적광전 팔상도(유성출가), 1892
化主/
證明 化主 華月志修
誦呪 대적광전 팔상도(쌍림열반),
1892
山中宗師 秩
法雲就堅 化主
華月志修 誦呪
길상암 지장도, 1893 指殿
통도사 백련암 신중도, 1864 誦呪
다시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수마노탑 중수에 참여 했던 승려 중 3~4명이 함께 참여한 곳은 1880년 김룡사의 여 러 불화 조성불사, 1886년 김룡사대성암 중수, 1884년 용문 사의 여러 불화 조성불사, 1892년 해인사의 여러 불화 조성 불사 등이다. 대체로 한 사찰에서 여러 불화가 동시에 조성 되는 큰 불사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는 18세기 말~19세기 에 걸쳐 나타난 화승들의 활동양상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 목된다. 아울러 예천 용문사와 문경 김룡사는 12명의 승려들 중 5명이 활동했던 곳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 두 곳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불산지역의 사찰로서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던 곳이었으므로, 화승(畵僧)뿐만 아니라 사판승(事 判僧)의 활동도 두드러졌던 지역으로 보인다.
제1·제2·제4석의 사찰들
19세기에 기록된 제3석과 제5석을 제외한 나머지 3매 의 탑지석(제1·제2·제4석)은 모두 18세기에 기록된 것으 로 각기 승려들의 소속사가 기록되어 있다. 제1석에는 洪 濟寺·中峯寺·覺華寺·月岳山 德主寺·寧越 報寺, 제2석 에는 寧越 報德寺·慶尙道 大邱 龍淵寺·寧越 報德寺·慶
尙道 奉化 覺華寺·慶尙道 順興 浮石寺·江原道 三陟 靈隱 寺 ·慶尙道 安東 洪濟寺·江原道 蔚珍 彿影寺·三陟 靈興 寺·蔚珍 天興寺, 제4석에는 慶尙左道 覺華寺가 등장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 4>와 같다.
위의 <표 4>에 정리된 10개 사찰 중 주목되는 곳은 각화 사와 보덕사이다. 경상북도 봉화에 위치한 각화사는 탑지석 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곳으로 1777년(정조1), 경내에 太 白山史庫가 건립되어 8백여 명의 승려가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42 따라서 18세기에 기록된 수마노탑 탑지석에 각화사 승려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정암사 수마노탑 보수 불사가 국가나 왕실과 관계되었음을 시사한다. 탑지석 제1 석과 제2석에 음식을 관리하는 ‘別座’와 ‘供養主’를 모두 각화 사 승려가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고사찰인 각화사가 수마노탑 중수 불사 당시 식량을 공급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제2석에 ‘外別座’로 기록된 보덕사는 단종의 능인 莊 陵의 능침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보덕사는 1666년(현종 7) 노산군이 伸寃되어 단종으로 追封되자 창건되었다.43 1726 년(영조2)에 ‘報寺’에서 ‘報德寺’로 이름이 바뀔 당시 예조에 서 ‘莊陵守護造脯寺刹‘이라는 官文을 하사하여 대대적으로 지원하였기에, 강원도 내에서 유력한 사찰로 자리매김 되었
지역 사찰명 기록 된 탑지석 기록 횟수 현존유무 비고
경상도
安東 洪濟寺 1(3), 2(1) 4 ×
(창원) 中峯寺 1(1) 1 ×
奉化 覺華寺 1(4), 2(2), 4(2) 8 ○ 史庫사찰
大邱 龍淵寺 2(1) 1 ○
강원도
蔚珍 天興寺 2(1) 1 ×
蔚珍 彿影寺 2(1) 1 ○
順興 浮石寺 2(1) 1 ○
寧越 報德寺 1(2), 2(3) 5 ○ 莊陵수호사찰
三陟 靈隱寺 2(2) 2 ○
충청도 月岳山 德主寺 1(1) 1 ○
【 표 4 】 탑지석에 등장하는 사찰명 ( )안의 숫자는 등장횟수
42 史庫는 현재 터만 남아 있다.
43 김덕수 역주, 2011, 『역주 장릉지속편』 3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p.173 참조.
【 사진 8 】 <대동여지도>(규 10333)의 정암사, 보덕사, 각화사, 부석사 부분
44 天密은 1705년(숙종31) 보덕사의 큰 종을 주조한 바 있어, 정암사 수마노탑 중수 이전에 이미 불사 진행 능력을 인정받았던 분으로 보인다. 강원도·선영건축사사무소, 2008, 『강원도지정문화재실측조사보고서』, p.236 참조.
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제1석과 제2석에 모두 화주로 기 록된 ‘天密’44 앞에 “寧越 報寺” 또는 “寧越 報德寺”라 쓰며 보 덕사 소속임을 밝힌 것이 아닐까 한다.
각화사와 보덕사 이외의 사찰들이 정암사와 어떤 인연으 로, 혹은 각기 다른 사찰 승려들이 어떤 이유로 정암사 수마 노탑 중수 불사에 참여했는지는 현재로선 명확히 밝히기 어 렵다. 다만, 강원도와 경상북도, 충청북도 내륙에 위치한 사 찰들이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정암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 이라는 점이 주목된다<사진 8 참조>. 즉, 강원도 영월과 정 선, 경상북도 봉화와 문경, 충청북도 제천 등지에서 활약하 던 승려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조선후기 승려들이 행정구역
을 초월하여 활동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 사고사찰인 각화사와 능침사찰인 보덕 사의 승려가 대거 참여하고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 은 18~19세기 당시, 정암사수마노탑의 위상을 시사하는 것 으로 보인다.
제5석을 통해 파악된 시주자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의 제1·제2·제4석에는 민간인 이름 앞에 居士라고 하거나, 通政 또는 嘉善이라는 품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