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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정신분석학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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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정신분석학 담론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기호학적 그림 읽기 1)

전영백*

들어가는 글

I. 색채로 인한 회화의 자유화: ‘지오토의 환희’

II. 동정녀 제식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모성 담론: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

III. ‘표현할 수 없는 것’/‘분리’의 상징화:

홀바인의 <죽은 예수> ’

마치는 글

정신분석학의 프리즘을 통해 보는 심도 깊고 확장된 언어로서의 미술사는 특히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 )의 연구에서 적절하게 예시된다. 다양한 텍스트에 나타난 이미지 분석을 크리스테바 특유의 정신분석학적 기호학의 시각으로 조명해 보는 것은 미술 작품에의 의미론적 접근에 중요하게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특히 미술사에 깊이 개입한 그녀의 논문들을 소개하고 가능한한 그 원문에 충실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Ⅰ. 들어가는 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연구의 범위는 언어학, 철학, 문화학, 정신분석학, 문학비평 그리고 미술사 등 다양한 담론들을 망라하나, 후기 구조주의의 지식층에 속하는 그녀의 공헌은 무엇보다 기호학적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기호학적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시각적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을 이러한 의미체계의 틀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본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본고에서 다루게 될 크리스테바의 ‘지오토의 환희(Giotto’s Joy)’,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Motherhood According to Giovanni Bellini)’, 그리고 ‘홀바인의 <죽은 예수>(Holbein’s <Dead Christ>’등의 논문들은 이러한 언어체계, 주체성, 그리고 이미지의 삼자관계라는 근거 위에 씌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13 세기부터 시작하여 15 세기 및 16 세기에 걸치는 이 세 연구는 크리스테바가 미술사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출판한 대표적 논문들이다. 지오토, 벨리니 그리고 홀바인이라는 미술사에서 소위 정통적인 작가들의 작품에 구성되어 있는 사회, 문화적 코드에 파고들어, 시각 체계에 있어 표면적 의미망 아래 적재되어 있는 의미의 층들을 조명해 낸다는 점을 본고의 논점으로 삼아 각각 따로 출판된 크리스테바의 논문들을 한데 모아 저술하는 근거로 삼았다.

크리스테바의 그림 읽기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그녀의 기호학 이론을 간략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펄스 (Charles S. Peirce)의

“기호학(semiotics)”,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의 “기호론(semiology)”의 개념들, 그리고 바르트(Roland Barthes)의 “기호론의 요소들(Eléments de sémiologie)” (1964)로 연결되는 기호학의 계보에 크리스테바는 특징적으로 “기호분석(sémanalyse)”이라는 용어를 소개한다. 그녀는 이를 ‘의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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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며 그 요소들과 법칙들(critique of meaning, of its elements and its laws)’이라 규정하였다. 따라서 크리스테바의 기호분석은 ‘기호의 과학(the science of signs)’이라는 기호학(semiotics)과 같은 의미로서 이해된다.1)

크리스테바는 대상징적 질서(the Symbolic order) 안에서의 기호계(the semiotic)와 상징계(the symbolic)의 이중 구조를 설정한다.2) 여기에서 대상징적 질서는 의미화의 질서를 특히 사회적 차원에서 지칭한다. 이 구조에서 상징계와 기호계는 다른 차원을 가리키는 의미 구조이고 이들은 병행된다.3) 크리스테바의 기호학 이론은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주도적인 상징계(the symbolic)에 대하여 기호계(the semiotic)를 새로이 부각시켜서 언어의 구조적 범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기호계는 언어의 의미에 있어 상징계가 지시하지 못하는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호계[세미오틱]는 통시적으로 선행하며, 공시적으로는 기호, 구문, 지시, 의미 작용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울음소리, 소리, 아기의 몸짓에서 그려볼 수 있다. 어른의 담론에서는 기호계[세미오틱]가 리듬, 운율, 단어 놀이, 의미의 무의미, 웃음으로 기능한다.”4)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상징계와 기호계의 변증법적 관계를 1974 년 출판된 박사학위 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La Révolution du langage poétique)」에서 본격적으로 제시하였다.5)

그런데 크리스테바의 개념에서 기호계와 대상징계(the Symbolic)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호계는 대상징계의 부분이지만, 전자가 후자에 구속되지 않는다. 기호계는 대상징계의 내부에서 움직이고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작용한다. 의미화 작용에 있어, 기호계와 상징계는 서로 이질적이면서 공존하는 관계인데, 기호계는 상징계에 대항, 도전하면서 그 변증법적 긴장 상에서 사회의 의미체계를 지속시켜 나간다.6) 통시적으로 말해, 상징계는 언제나 존재하는데, 기호적 성향(semiotic disposition)에서조차 존재한다. 한편, 그 기호적 성향은 상징적 성향에 끊임없이 도전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의미체계의 이 두 구조는 상호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주체성의 형성과의 연관에서 본다면, 위치와 판단의 영역으로서의 상징계는 기호계보다 더 이후에 출현하는 바, 구체적으로 쟈크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 단계(the mirror phase)의 시기에 등장한다.

이는 단언적, 자의적인 단계에 관여하고 주체의 규명 작용과 대상으로부터의 분리에 연관된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발화 주체(speaking subject)’가 사회적 틀에서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 기호 체계(sign system)와 직결됨을 보인다.

주체의 사회적 틀과 규범에의 적응과 변혁의 행동양식도 이러한 기호체계에 순응하는가 아니면 도전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녀의 언어체계를 기반한 주체성의 이론(theories of subjectivity)은 따라서 주체의 특성을 새롭게 규명한다. 크리스테바가 제시하는 발화 주체는 ‘분열된 주체(split subject)’인 바, 무의식과 의식의 동기화 사이에, 즉 생리적 과정과 사회적 제약 사이에 나눠진 주체를 일컫는다.7) 의식에 의지하는 의미의 체계를 고려하면서 크리스테바는 의미화 과정(signifying process)에 대한 재분석을 제안하는데, 이 의미화 과정이 이미 분열된 주체를 가정하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그녀의 연구는 구조주의적 언어 체계나 현상학적 담론으로 제한시켜 규명할 수 없고, 분열된 주체의 담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신분석학과 연결점을 찾는다.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s)는 발화 주체의 구성에 있어서 신체와 육체성의 역할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연구를 검토하면서, 신체가 암호화되고 의미를 부여받고 또 표현될 수 있게 되는 방식은 담론적이고 문화적 표상을 위한 필요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점을 지적한다.8)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주체가 갖는 육체성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학적으로 인정받는데, 이는 신체를 의미화하는 작용과의 연관에서 파악하여 의미하는 신체(signifying body)를 설명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로스는 신체(body)와 의미체계(signifying systems)와의 결속은 주체에게 질서 있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보장해 주고, 담론의 체계적인 생산과 의미를 견고히 만드는 데 전제 조건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체와 담론의 상징적 체계의 분열과 분쇄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덧붙인다.9) 크리스테바의 신체 담론은 신체의 상상적이고 상징적 지위를 이론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의 ‘업젝션(abjection)’10) 개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공포의 힘(Powers of Horror)」에서 드러났듯이, 이는 상징적 질서, 그리고 성적이고 심리적인 정체성의 획득이 가능하기 위한 주체의 전제 조건으로서 상정되는 개념인데, 상징 체계의 유지는 신체를 정결하고(clean) 적절한(proper) 범주로 제한하고 규정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주장에서 새로운 것은 주체의 육체적 기능은 완전히 생략될 수 없고, 분열과 해체의 가능성을 갖고 주체의 정체성의 통합성과 안정성을 협박하면서 그 경계에서 맴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념이 유도하는 결론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 협박적이고 반사회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크리스테바가 신체의 비상징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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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요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상징계(the symbolic)의 전제 조건을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업젝션은 이러한 상징계 내에서 위치와 정체성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체에 의해 억제되고 배척되어야만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와같이 광범위하나 연관이 깊은 크리스테바의 연구 범위 중에서 특히 기호학적 시각으로 본 지오토, 벨리니, 홀바인의 작품 분석을 정리하면서 회화의 조형언어가 의미체계 그리고 주체성과의 연관에서 분석할 때 작품에 대한 다층적 이해가 가능한가를 보고자 한다. 지오토의 프레스코화에서 강조된 기호계(the semiotic) 영역에서 작용하는 색채의 의미 구조, 그리고 벨리니의 성모화에서 은밀하게 드러나듯, 상징적 영역에서 표출될 수 없는 모체의 경험을 담고 있는 기호적 표현 언어, 끝으로 홀바인의 <죽은 예수>에서 절제된 리얼리즘으로 말미암아, 표현될 수 없는 주제인

‘예수의 죽음’ 그 자체가 가리키는 의미체계의 맹점 (구멍, 갭)이 가시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시도는 미술 작품의 표현 구조, 시각 체계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요컨대 기존 미술사 담론이 갖는 의미체계의 범위를 확장시키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주체와 언어의 보다 자유로운 관계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겠다.

Ⅱ. 색채로 인한 회화의 자유화: ‘지오토의 환희(Giotto’s Joy)’11)

크리스테바는 언어체계, 회화 그리고 주체의 관계에 근본적 관심을 강조하면서 이 논문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름이 없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이름보다 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그림인가? [...] 나(주체)의 말에 덧붙여 기능하는 어떤 것이 있는 장소로부터,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장소를 분리하면서 우리의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 어떤 것은 말보다 더한 것(more-than- speech)이고 공간과 색채가 부가된 하나의 의미이다. 우리는 이름들의 초과(excess of names), 또한 이름보다 더 한 것(more-than-name)이 공간과 색채가 되도록 추구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의 그림을 명명하기 위해 (in order to name) 두 번째 단계의 이름 짓기(second-stage naming)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다.12)

크리스테바는 회화와 주체의 의미하는 형식 사이의 관계(painting’s relationship to the subject’s signifying mode)를 고려하면서 그림을 관찰하는 일반적 가정을 세운다. 본고에서 그녀는 지오토(Giotto, 1267-1336)가 서양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자리만큼이나 건축과 색채에서의 그의 실험에, 즉 본능적 욕동(instinctual drives)을 채색된 표면으로 ‘번역해’ 내는 것에 관해 중점적으로 논의한다. 크리스테바의 연구는 성 프란시스, 성모, 예수 등이 주제로 다루어진 아시시(Assisi)와 파두아(Padua)에 있는 작품들을 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성당(The Upper Church of San Francesco) (도 1)과 파두아의 아레나 예배당(The Arena Chapel) (도 2)에 있는 지오토의 프레스코화들은 모두 14 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다. 지오토의 회화적 내러티브는 성경적, 복음적 전통을 따르는데, 전자가 후자보다 먼저 완성된 초기작이라 추정된다. 아시시에 있는 프레스코는 28 개의 장면이 각 교각 사이를 장식하고 있는데, 벽이 3-4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분은 3 단화의 구성을 따른다. 주제는 성 프란시스의 일생을 기록한 것으로 신선한 느낌의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확신있게 표현되어 있다.13)

이에 비해, 파두아의 아레나 채플의 프레스코는 38 개의 장면들이 3 층에 분포되어 보여지는데, 인물들은 실제 인물의 반 정도의 크기이다. 내용은 성모와 예수의 생애를 나타냈는데 선택된 장면들은 13 세기 제노아 교황인 드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에 의해 알려진 황금 전설(Golden Legend)에 따른 것으로 성모의 삶을 강조했다. 따라서 예수 일생의 묘사에서 일반적으로 생략되어지던 성모의 역할을 드러낸 것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14)

크리스테바는 파두아 프레스코의 내러티브 기의(the narrative signified)는 성모와 예수의 생애의 기본적 에피소드에 제한한 단순하고 순전한 논리를 통한 기독교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전기(biography)의 방식에 의해 효과를 본다고 기술한다. 회화적 내러티브 안에서 개별적 역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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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은 아시시보다 파두아 프레스코에서 더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아시시 프레스코 중 <옥좌의 비전(The Vision of the Thrones)>에서 보듯, 푸른색의 정지되어 있는 빈 의자는 파두아 프레스코의 세속적 내러티브에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15)

지오토의 작품에는 색채와 형태가 그 자체로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지오토로부터 시작되면서, 르네상스의 위대한 기독교 회화의 부상은 색채와 형태의 독립이 기의(the signified)에 관련하여, 즉 신학적 규범에 연관되어 나타난다. 내러티브와 표현의 관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색채와 형태는 그 신학적 규범을 흡수하기도 하고, 때로 여기에서 분리하하고 넘어서서 다른 작용을 하지만 언제나 그것과 연관을 갖는다는 크리스테바의 주장이 주목할 만하다.16)

크리스테바는 지오토의 그림이 상징화{symbolisation(색채-형태-표현)}의 바로 그 경제(economy)에 도전할 뿐 아니라, 표현된 내러티브에 스스로를 대항시키므로써 상징적 법칙에서 독립됨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회화의 자유는 규범을 통하고 또한 규범에 대항하는 자유화의 과정, 정확하게는 주체의 자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질서{an order (기의a signified)}를 통해 부상하면서도 그 위반을 허락하고 통합하는 그런 자유이다.

왜냐하면, 주체의 자유는 상징적 질서(the symbolic order)로부터 얼마나 도피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그림에 있어 두 가지 요소인 색채와 공간(회화적 공간의 조직)이 ‘의미하는 실행(a signifying practice)’17)으로부터의 이러한 상대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설명한다.18)

그렇다면 이제 파두아와 아시시의 프레스코에서의 색채와 회화적 공간의 특성을 알아보고 그것이 의미체계에서 갖는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파두아 프레스코는 75%가 경사지게 설정된 입체 조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방, 외부에서 주어진 각도로 묘사된 산의 프로파일, 대각선 배열 등의 묘사는 직사각형, 정사각형의 특징들에 대한 지오토의 기하학적 탐구를 증명해 준다. 정면 구성은 비교적 드물고, 비스듬한 공간적 구성이 전체 내러티브 연결을 주도하는데, 이는 종종 벽면에서 합쳐진다.

크리스테바는 특히 회화 공간의 갈등적 조직에 주목한다. 지오토는 이 연작들에서 소실점뿐 아니라 정면 구성을 피하고 있으며, 갈등관계의 경사진 선들을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프레스코에도 중앙시점을 볼 수 없고 이는 오히려 화가나 관객이 서있는 건물의 공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회화 공간의 갈등적 조직과 그 경사진 구성은 이미지 외부에 있는 보는 이, 즉 시각의 주체에 의해 지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오토의 프레스코는 그 자체가 독자성을 갖지 않기에 내러티브 연계로부터 고립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또한 건물의 부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회화적 공간의 이러한 갈등은 사실 아시시의 프레스코에서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아레쪼에서의 악마의 추방(Expulsion of the Demons from Arezzo)> (도 3)에서 보듯이, 부숴진 공간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설정되어 있다.19)

그렇다면 이러한 공간적 특성과 색채의 연관이 관건이다. 다시 말해, 문제는 ‘색채가 어떻게 이 적대적이면서도 또한 조화로운 공간에 참여하는가’하는 점이다. 지오토의 프레스코에서는 겹치고 분절된 덩어리의 적대적인 공간이 채색된 표면들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고조된다. 매우 세련되고 상당히 가볍게 처리된 차별화된 색조들은 가장 미세한 차이로 동질적인 배경을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체바의 표현으로, “최소로 가능한 차이(the smallest possible difference)”가 과격하지 않게 조화와 전이로서 인지되는 공간에 갈등을 일으킨다.20)

이러한 색채의 차이와 공간적 갈등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색채와 입체감과의 연관으로 발전된다. 크리스테바는 “입체적인 색채들(voluminous colours)”이라고 묘사했지만, 지오토 인물의 둥굴고 조각적 표현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환성은 굴곡적인 드로잉과는 달리 색채에 의해 달성된다.

색채의 덩어리들이 그 스스로의 자기 분화를 통해 구와 같이(spherical) 된다는 뜻이다. 사각 덩어리와 사각형의 각진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그 색채들은 충돌하는 표면들 사이에 전이적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 이러한 색채 덩어리들은 그러한 표면들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채색 표면의 볼륨을 형성시킨다. “색채는 불화의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즉, “탈중심적이고(uncentered), 경계지워지지 않은(unbordered), 그리고 비고정적(unfixed) 변이”의 공간을 만드는 셈이다.21) 이와같이 색채적 처리가 기하학적인 조형 효과를 산출하고, 규정된 표면의 조화와 채색된 표면에 부피감을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입체감이 윤곽선의 도움 없이 색채의 차이 자체의 병치에 의해 부상된다는 것이 지오토가 가진 색채화가(colourist)로서의 면모에 주목하는 점이다.22)

크리스테바의 색채에 대한 관심은 아레나 예배당의 주조를 이루는 푸른색으로 집중된다. 미묘한 감각의 빛나는 푸른색의 첫 인상은 형태나 건축으로 지각되기보다 우선 채색된 물질로서 인식된다고 말하는데, 크리스테바는 이 푸른색에서 발산되는 빛의 경이감을 강조한다. “이러한 푸른색은 시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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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극단의 한계에서 관객을 사로 잡는다”23)고 묘사한다. 아레나 예배당의 특정한 푸른색에 대한 관심은 푸른색의 특성에 대한 일반적 논의로 발전되는데 이는 자아 형성 및 주체성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그리젤다 폴록(Griselda Pollock)은 크리스테바가 푸른색의 이중적인 임무를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먼저 회화의 상상적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주체-대상의 대립을 애매하게 하면서 경계들의 분쇄를 허용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푸른색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욕망과 채색된 연무의 그리움으로 뻗어나간다’고 묘사한다.24)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주장을 위한 가능한 가설로 브로카(André Broca)의 역설을 수용하면서, 대상을 규명하지 않는 푸른색의 속성을 강조한다.

대상을 규명하지 않는, 다시 말해, 대상의 고정된 형태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푸른색이 지정하는 것은 결국 현상적 정체성이 사라지는 영역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색채의 지각 경험에 있어서 대상 규명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녀는 푸른색과 탈중심적 시각 사이의 중요한 관계에 주목한다. 중심화된 시각(centered vision)은 색채의 지각 이후에 작용하는데 여기서 집중된 시각은 주체 자체를 포함한 대상 규명의 과정에 연관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자아는 6 개월에서 18 개월 사이의 거울 단계에서 인지되는 주체를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의 초기 형성 중에 감지되는 최초의 색채가 지극히 짧은 파장의 파란색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이면서, 크리스테바는 푸른색의 영역이 의미할 수 있는 원초적인 표현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주체가 하나의 총체적 ‘나(I)’로서 굳어지기 전의 초기 단계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채의 일반적 속성이기도 하나, 특히 푸른색의 두드러진 특성인 비중심적(noncentered), 탈중심화(decentering)의 효과는 대상 규명과 현상적 고착(phenomenal fixation)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체를 원초적(archaic) 순간으로 회고케 하는 색채는 고정적이고 시각적으로 규명된 ‘나’ 이전의 역설적 주체로 돌려보내는 기능이 있다는 주장이다.25)

요컨대,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있어 색채는 회화의 의미 체계에서 상징적 질서가 규명하지 못하는 부분에 개입하는 구조적인 역할로 부각된다. 다시 말해, 관건은 주체와 의미화 작용의 관계에서 분석되는 색채이다. 색채는 “가치의 지표(an index of value)”이자 “대상적 참조체(an objective referent)”이고, “주체의 에로틱한 암시를 뜻하는 본능적 압력(an instinctual pressure)의 지표”라고 정의하면서 크리스테바는 “그림에서 색채는 무의식으로부터 상징적 질서로 유도된다고 말한다.”26) 여기서 자아의 통합이라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고착하는데 그 질서는 자아가 스스로를 한 덩어리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채의 “3 중 등록(triple register)”27)은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색채의 구별적 가치는 무의식으로 유도되는 점이 주목된다. 그 결과 색채는 상징체계의 검열을 피하고 무의식은 문화적으로 암호화된 회화적 분배로 유입된다. 따라서 크리스테바는 색채적 경험이 총체적 자아의 개념을 위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협이 역설적으로 주체가 자아의 재구성을 시도하는 것에 기여한다는 지적이 흥미롭다.28)

이러한 색채의 의미와 역할을 설명하는 데에 마티스(Henri Matisse)의 설명이 적절하다고 크리스테바는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색채는 언어라는 광의의 의미에서 회화의 근본적인 “고안(device)”인데 이를 통하여 조형미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티스를 참조하여 색채의 속성을 분석하면서 크리스테바는 색채에 대한 기호학적 이해를 피력한다. 즉 색채적 기재는 언어에서의 리듬과 같이, 의미의 분쇄에 연관시켜 그 의미를 일련의 차이들로 유도한다. 이 차이들은 “의미의 잉여(meaning’s surplus)”를 보유하는, 즉 의미를 넘어서는 영역 내에서 조성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색채는

“0 의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크리스테바는 강조한다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본능적 욕동(drive)을 통한, 즉 죽음을 통한 “초과 의미(excess meaning)”이라는 것이다.29)

크리스테바는 드로잉과 구성, 묘사된 형태와 공간과 대비적으로, 색채는 상당한 자유를 즐긴다고 강조한다. 색채를 통해 주체는 표현적, 사상적, 상징적 암호 등에서의 소외를 피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서구 미술사에 있어 색채화가들의 계보를 세우는데, 지오토로부터 색채를 통해 설화적이고 원근적인 규범의 제약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세잔(Paul Cézanne), 마티스(Henri Matisse), 로스코(Mark Rothko), 몬드리안(Piet Mondrian)으로 말미암아 재현 그 자체의 제약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한다.30) 그런데 크리스테바는 이렇듯 서구회화가 이제까지 점진적으로 성취해 온 자유의 배후에는 종교적 맥락이 중요하게 개입된다고 말한다. 그 논점을 간단히 말하면, 서구 회화는 가톨릭 신학에 봉헌하였고 또한 그것을 배신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즉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에서 종교적 내용이 주요 내용이었던 것과 판이하게, 르네상스의 도래와 함께 가톨릭의 주제들은 간과되었고 이후 인상주의의 등장과 그 계속적 움직임으로 재현이라는 규범 또한 뒤로 남겨지게 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31)

이렇듯 서구 회화가 결과적으로 추구해온 자유를 향한 일련의 움직임의 시발점을 지오토의 색채 표현에 둠으로써 크리스테바는 전통적 방법론의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지오토 미술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시각체계의 구조와 주체 형성의 연계를 유념하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의 미술사 방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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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의 회화 분석은 쟈크 라캉이 조명한 주체의 초기 형성과정에 맞물려 있다. 이 방법론에서는 원근법과 황금비율 등의 과학적, 총체적 시각체계로 부각된 르네상스 시기의 이상적인 인류의 자아의식을 라캉의 거울 단계에 진입하는 주체의 양상과 일반적으로 비유된다. 이것에 비해, 크리스테바가 지오토 회화에서 보는 갈등적 공간 구조와 관객의 시점에 따라 다양한 시각적 관계를 이루는 일관성 없는 조형성, 그리고 이를 최소한의 차이로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색채 등은 서구 미술의 표현에 있어서 거울단계 이전의 주체의 형성 과정과 연계됨을 기본적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미술사의 있어 색채화가의 계보를 지오토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크리스테바는 미술사의 ‘보는/읽는 주체’의 거울단계 이전(pre-mirror phase)에 처한, 단일성과 총체성과는 거리가 먼 탈중심화된 자아의 모습을 색채의 기호학을 통해 접근한다고 할 수 있다.

Ⅲ. 동정녀 제식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모성 담론: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 (Motherhood According to Giovanni Bellini)’32)

크리스테바는 모성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 설명, 특히 서구에서의 ‘동정녀 제식(the cult of Virgin)’은 모성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모성 및 어머니-아이 관계에 있어서 불안정한 측면들, 그리고 모성과 상징계 사이의 긴장을 은폐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성경에 따르면, 동정녀는 말(Word)/아버지의 이름(the Name of the Father)/신(God)에 의해 수태를 하는데, 크리스테바는 이 의미 구조에서 부성성을 공고히 하는 근본적 의도를 드러낸다. 결국 아버지의 이름이 부성성과 그 유산을 보장해 주는 것이고, 대상징적 부성 인자(Symbolic paternal agency)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한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규제와 교환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상징계의 질서에서 남성은 대타자(the Other)에 대하여 자신의 주체를 확인하는데 이러한 양상에 어머니의 존재는 위협을 가한다. 먼저 그것은 모성의 열락(jouissance)33)이 그녀를 대타자(the Other)보다는 주체로 만들려고 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덧붙여, 어머니는 대상징계(the Symbolic)에 의해 완전히 연합되어지지 않는 문화와 자연 사이의 애매한 경계 부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동정녀 제식을 통하여 이와같이 설명하기 힘든 어머니 존재의 비결정성과 그녀의 ‘위법적인’ 열락을 상정되는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성과의 완전한 결합으로 유도한다.34)

크리스테바는 동정녀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는 어머니와 상징계의 동시적 동일시라고 설명한다. 이는 완벽한 것, 죽음을 초월하는, 성스러운 어머니와의 동일시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녀를 지칭하고 규명하는 말(Word)과의 동일시이다. 그녀는 결국 상징적 어머니(a symbolic mother)이다.

성처녀와 동일시함으로써 여성들은 대상징계의 질서(the Symbolic order) 안에서 어머니와 동일시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가톨릭의 성모에 대한 향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이 성모와 동일시하는 양상은 “메져키스틱”한 것으로 분석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동일시는 상징적 어머니(the symbolic mother), 부계적 어머니(a paternal mother)와의 동일시를 위해서 기호적 모체(the semiotic maternal body)와의 동일시를 희생하기 때문이다.

캘리 올리버(Kelly Oliver)는 크리스테바의 동정녀 신화에 대한 분석을 설명하면서, 성처녀의 모성은 실재의 모성이 아님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동정녀는 어머니가 으레히 갖는 아이에 대한 애매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성처녀의 경우 아이는 신이고, 아이에 대한 성처녀의 관계는 초월적 신과의 관계이다. 관계의 처음부터 어머니 자신의 원초적(일차적) 나르시시즘(자기자신과의 동일시)을 허용하는 미결정성이 없다. 이것이 동정녀 숭배가 대상징계(the Symbolic)을 유지하기 위해 기호계(the semiotic)를 규제하는 방식이다. 올리버는 이로 인해 어머니가 성처녀로 희생되어진다고 표현한다.35) 크리스테바는 동정녀 신화가 모성에 대한 가톨릭 담론에서 억제되었던 것, 즉 ‘기호학적 신체(the semiotic body)’를 재도입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테바가 모성의 담론(the discourse of maternity)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녀가 정체성이 와해되는 담론에,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오는 담론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서구의 모성 담론은 그러한 담론에 중에서 대표적이다.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Motherhood according to Giovanni Bellini)’과 ‘성모의 애도(Stabat Mater)’의 두 논문에서, 그녀는 모성 담론에 대해, 특히 임신된 모체에 관해 논의의 초점을 둔다. 임신한 모체는 분열된 신체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모성에 대한 대부분의 기존의 담론들36)은 모체의 기호적 측면을 은폐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 담론들이 어머니의 고통과 열락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고통과 열락은 자율성과 법칙으로 무장된 상징계를 도전하는 것이다. 올리버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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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체는 단지 고통에서 기쁨을 허용받는다. 그녀의 몸은 단지 귀, 우유, 그리고 눈물이다. 성적(sexed) 신체는 가톨릭 교회의 동정녀 마리아, 즉

“이해하는 귀(ear of understanding)”로 대치되어 졌다. 이런 식으로 성처녀는 생물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이의 모성적 시접을 덮는다. 성모(the Virgin mother)는 억제되어진 기호계의 복귀를 대표하게 된다. 모성적 기호계(the maternal semiotic)는 성모의 상징에 집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상징적 질서(the Symbolic order)에 대한 그 위협은 규제되었다.37)

이와 같이 동정녀 제식을 통한 모성 담론의 연구에서 크리스테바의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모체(the maternal body), 의미체계(주체-상징의 관계), 그리고 시각적 표현의 삼자 관계이다.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에서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38)의 성모자화는 주체의 정체성과 의미체계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논의에 있어 시각적 장(visual site)이 된다. 의미의 체계에서 모체가 표상되는 관점에서, 회화의 언어는 내러티브 등 말이 나타낼 수 없는 독특한 예술적 양식으로 은폐되거나 억제된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크리스테바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 미적 언어는 ‘모성적 열락의 다른 측면’을 추적한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승화(sublimation)는 모체 안의 원초적 억압39)의 바로 그 순간에, 어머니의 주변적 위치에서 부상한다고 설명한다. 기호(sign)와 리듬, 표현과 빛, 상징계(the symbolic)와 기호계(the semiotic)의 교차에서 “예술가는 어머니가 없는 곳으로부터, 그녀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 내부의 즐거워하는 신체(a body rejoicing [jouissant])를 묘사하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미적 표현은 ‘2 차적인 억압’40)을 통해, 또 이를 가로질러 ‘원초적 억압’에 닿게 된다.41)

원초적 타자인 모체42)와의 연관을 갖는 공간에서 작가들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공과 실패의 개별적인 차이는 있으나, 시도를 한다는 차원에서는 예외가 없다. 크리스테바는 특히 서구미술의 예술가들이 모체에 대한 예술적 빚을 져 왔고, 모성을 대상으로 한 주체로서 상징 체계에의 진입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미술의 언어에 의해 취해진 에로티시즘은 작가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견되어진다. 크리스테바의 본 논문에서는 레오나르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와 지오반니 벨리니의 상이한 미적 언어가 서양 미술에는 모체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함축하여 보여준다고 제시된다. 서구적 표현의 논리에 있어 다빈치와 벨리니는 이 두 태도들 사이의 대립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설명되는데, 전자는 플로렌스 지역의 양식을 기반으로 페티쉬(fetish)로서의 신체에 집중하는 것이고, 후자는 작품에서의 그 육체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를 너머서는 빛의, 색채적 차이들의 우세함을 드러내는 것이다.43)

크리스테바의 견지에 따르면, 다빈치는 모성적 흔적보다는 상징적 세력에 주력하였다. 그는 그래픽 미술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향해 자신을 몰아간 것이지, 벨리니처럼 무의식의 쾌락-고통을 탐구하거나 억압에서 오는 간극(gap)의 상황에 집착하지 않았다. 표현의 메카니즘에 있어 이러한 종류의 구조는 언제나 인본주의적 리얼리즘을 포함한다고 크리스테바는 설명한다. 그녀가 분석한 대로 다빈치 성모 그림에서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체의 페티쉬즘(fetishism)44)과 유사(resemblance)에 근거한 표현의 기술이 극도의 세련됨을 가지며, 신체에 대한 욕망이 중심된 심리적 에피소드이다. 그리고 모든 색채와 빛의 건축적 실험들에서 예술가는 단순하면서 기술적 기재로 감축되는 형상화를 경험하는데 이것이 표현할 수 있고, 욕망할 수 있는 페티쉬적인 형태들을 가져온다.45)

이에 비해, 크리스테바의 벨리니의 성모자 회화 연구에서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를 분리시키는 거리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적 공간이 건재하는데, 불행하게도 보는 주체는 매혹과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이 공간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모든 욕망이 집결된 아기-대상을 향한 다빈치 회화에서의 어머니의 고독과는 달리, 벨리니 회화에서는 모성적 기능이 담론을, 내러티브를, 심리를, 살아 체험하는 경험과 생물학을 넘어서는, 단순히 말해, 형상화를 넘어서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락을 나타내는 느낌이 농후하다.46)

대체로 벨리니의 성모자 그림들에서는 마돈나의 얼굴들이 대부분 돌려져 있고 응시는 옆을, 위 어딘가를, 아니면 특정한 아무데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아기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벨리니 그림에서 어머니는 손과 몸체 부분 등 단지 부분적으로 현존한다. 그런데 아기와 동일시되는 화가(벨리니)는 이 그림에서 포용할 수 없는 모체의 나머지 부분, 즉 머리, 얼굴, 눈이 지향하는 ‘다른 어딘가(elsewhere)’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어디엔가 있을 ‘다른 이 곳’에는 멜랑콜리로 채색된 도달할 수 없는 평화가 지배적인데, 묘사된 육체적 접촉이나 신체적 부피를 규명하는 채색된 덩어리들의 구성에 의해서 묘사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아기/ 예술가)가 부숴지는 것,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는 상태이며 ‘그녀’가 없는 곳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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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희열이다. 그러나 ‘그녀’가 없는 상태에서 색채와 공간의 미세한 분화가 리듬있고 고요한 기쁨을 낳는다. 어머니에 닿는 것은, 즉 그녀를 만지는 것은 이 가정된 열락을 소유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크리스테바는 묘사한다.47)

벨리니는 색과 빛이 회화에 있어 실제적인 목표임을 암시하지만, 그의 미적 탐구는 부피를 구축했던 색채와 빛이 주제로부터 결별되는 지점에서 절정을 이룬다. 벨리니의 성모 이미지에서, 우리는 부계 법칙 너머에 존재하는 부재의, 죽은, ‘함구된’ 어머니를 생각하도록 유도된다. 벨리니는 이 모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그러므로 아버지의 성적 대상(father’s sexual object)에 대한 것보다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열락에 대해 상징적 생동감을 주입시킬 수 있다고 크리스테바는 강조한다.48)

그러나 결국 벨리니 미술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종합하고 이 양자를 넘나든다. 벨리니는 어머니가 닿을 수 있었을 장소에 자기 자신을 위치함으로써 아버지의 존재와 그 언어를 통과한다. 일종의 근친상간을, 즉 어머니를 ‘소유’하는 것을 범하는 것인데, 이는 모성에, 그 벙어리 상태의 경계에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모성에 실재적 존재(a real existence)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것에 상징적 지위(symbolic status)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모성과의 동일시라는 방편에 의해 “억압의 경계(the threshold of repression)”에 다다르는 것이다.49)

사실상 크리스테바가 관심을 두는 성적(sexual) 커플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고 어머니와 아이(아들)이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견지를 따라 여성성과 여성적 성은 자율적 견지가 아니고, 남근(Phallus)과의 연관으로 규정되어 진다는 것을 밝힌다. 크리스테바의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의 주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데, 그녀의 모성 신체와 모성의 개념은 크게는 성적 특정성의 이해에 기여하고, 좁게는 여성의 성적 특정성에 지표를 제공한다.

그는 모성의 개념을 주체 형성 과정의 연계와 공간성을 지정하기 위해 활용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s)가 강조하듯이, 크리스테바에게 있어 모성의 의미는 주체의 위치와 역할과 혼동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 없는 과정(a process without a subject)’이기 때문이다.50) 따라서 모성성은 엄격하게 상징화 작용의 밖에 존재한다.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에서 크리스테바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머니를 출산 과정의 완전한 통제자로 만드는 환상이 그녀를 자연과 문화의 문턱에 위치시킨다는 점이고 이것이 남근적 어머니(phallic mother)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 환상이 동정녀 마리아의 이상을 지지하고 우리를 정체성의 소멸과 허무의 경험으로부터 방어해 준다고 설명한다. 크리스테바는 만약 어떤 존재도 이 경계선 상에 없다면, 각각의 발화 주체는 그 존재를 공허와 허무에 내어 놓게 될텐데, 이것이 주체의 안정성과 통제력에 대한 결정적이고 영원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51) 다시 말해, 남근적 어머니의 환상은 허무 및 부재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이상화(idealisation)에 관련되는데, 반대로 이상화 작용이 붕괴될 때 이러한 공포는 우리를 협박한다. 사랑하는 어머니(loving mother)에 대한 환상은 분화 내지 차별화(differentiation)의 과정에 깔려 있는 애매성을 내보이지 않도록 이를 가리우고 그 과정에서 유발되는 증오와 공포를 부인하도록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이나 ‘성모의 애도’ 등에서 크리스테바가 결국 제시하는 것은 위기에 처해 있는 종교적 신화, 동정녀 신화를 대치하기 위해 모성성의 세속적 담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모의 애도’의 끝 부분에서 그러한 담론을 발전시키는데, 이는 주체에 있어 차이(difference)와 타자성(alterity)에 근거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올리버는 크리스테바가 제시하는 새로운 주체개념은 모성성의 분석과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그 기반을 이룬다고 강조한다.52)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의 존재를 정체성에 있어 근본적 타자성을 함유하고 있는 모성성의 개념으로 상정한다. 이는 연계, 정체성, 윤리, 그리고 사랑을 아우르는 자율적인 개방적 주체성, 즉 ‘과정 중의 주체(subject-in-process)’53)의 모델인 셈이다. 그녀의 주체 개념은 욕망의 주체(subject of desire)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라캉과 맥을 같이 하지만 이

‘과정 중의 주체’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독자적인 주체관을 형성한다. 이 주체 개념은 분석적 담론(analytic discourse)에서 고려되는데 여기서 소위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의문에 부쳐지고, 분석자(analyst)나 분석받는 자(analysand)에게 있어 지식은 욕망에 의해 중재되고는 해석을 향해 개방된다.

이제 크리스테바가 벨리니의 성모 이미지54)를 분석한 것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녀의 ‘지오반니 벨리니에 따른 모성성’에서 벨리니 성모자 그림 읽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 바, 1450-80 년의 시기, 1480-90 년 시기, 그리고 1500 년 이후의 시기 등이다. 먼저 1450 - 1480 시기에서 초기(1450 - 1460)의 성모의 이미지를 볼 때, 냉정하게 멀리 있는 느낌이고 또한 무감각하다. 아기와 엄마 사이의 접촉은 손가락 끝만으로 이루어진다. (<잠자는 예수 앞에 경배하는 성모(Adoring Madonna before Her Sleeping Child)> (Metropolitan Museum, New York) (도 4)에서 성모의 사색적 모습은 아기가 이미 처형된 듯이 슬픔으로 맞닿아 있다.) 사실상, 예수 고난의 주제에 근거한 십자가 처형의 연작은 모성의 주제에 견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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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잡고 있다. {<죽은 예수(The Dead Christ)>}에서 보듯, 예수의, 즉 아들의 죽음이 불러 일으키는 비극적, 인간적 감정이 가미된 열정-고통- 멜랑콜리-기쁨이 얽힌 미결정된 감성이 모체의 고요성에 무지개 색을 부여해 준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비극적 표방과 그 어머니의 조용한 분노가 예수의 눈의 표현에서 가장 잘 연합되었다.

모성성의 주제는 1455-1460 년에 다시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 벨리니는 어머니의 손을 강조한다. 그 손은 만테냐(Mantega)의 영향으로 엄격하면서 그래픽적 정확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꼭 죄는 포옹, 소유적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고전, 분투가 있는데, 아기 예수는 헛되이 그녀의 힘있게 쥔 손을 풀려고 한다. <성모자(Madonna and Child)> (Amsterdam and Berlin)를 묘사하면서 크리스테바는 “이것이 모성적 유혹의 원초적 기억인가? 성모 손의 조숙한, 성적인 매만짐이 위안적이기 보다 위협적이었던 느낌에 대한 회상인가?”라고 질문하고 있다.55)

크리스테바가 다음 시기로 잡은 1460 - 1464 년에는 특히 어머니의 손이 벨리니 모자상의 핵심을 차지한다. 그 손들이 은밀하게나마 아이의 둔부를 향해 움직이는 경우를 <성모와 예수(Madonna and Child)> (New Haven)와 <성모자(Madonna and Child)> (Correr Museum) (도 5)에서 볼 수 있고, 때로 아기의 성기(penis)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에서 모체의 놀라운 분열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성모의 손이 그 대상을 꽉 잡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몽상에 빠진 듯한 부드러운 농부와 같은 얼굴 표정을 보이는데, 이는 구체화시킬 수 없이 빗나간, 그리고 잃어버린 경험으로 거의 실의에 빠진 모습이라 할 수 있다.56) 이 연작의 절정은 <성모자(Madonna and Child)> (Bergamo) (도 6)이다.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에 강한 빛이 떨어지고 있다. 성모의 공격적인 손이 놀란 아기의 위와 성기 부분을 건드리고, 아기는 격렬하게 이를 벗어나려 한다. 성모의 가운이 모체로부터 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분리하는데, 빛나는 그녀의 얼굴만이 노출되어 있다. 특색 없는 그녀의 응시는 아래로 향한 눈썹 밑으로 살며시 빠져나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감출 수 없는 환희는 친밀하면서 확연하게 표현되었고, 그녀의 뺨은 평화를 발산하고 있어 신기하고 야릇한 겸허함, 그리고 고상함을 구성한다. 벨리니 이전에는 이와같이 모체의 분열된 특성이 명백하게 표현된 경우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57)

어머니/아이 분리의 주제는 <예수 봉헌(The Presentation of the Temple)> (Galleria Querini Stampalia, Venice) (도 7)에서 회화의 내러티브를 넘어선다. 성모는 천으로 감겨 있는 아기를 잡아 들어올리고 있는데 둘 사이의 신체 대 신체끼리 접촉이 두드러진다. 왼쪽에는 여인 공동체가 있고, 오른 쪽은 약간 떨어져 있는 노인이 성모가 내주지 않으려는 아기를 팔을 들어 받으려 하고 있다. 법에 따르면, 아기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명백히 분리되어야 하나, 벨리니의 그림에서는 이 둘의 공생이 더 압도적이어서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 듯 하다. 그들의 포옹은 죽은 예수를 성모의 품에 끌어안는 그 비극적 포옹을 예견한다.58)

1475 에서 1480 년까지의 시기에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표현이 공간적 탐구를 수반함을 알 수 있다.{<경배하는 성모자(Adoring Madonna and Child)> (National Gallery, London) (도 8), <성모와 축복하는 예수(Madonna and Blessing Child)> (Academy Galleries, Venice)} 이 시기 동안, 벨리니의 회화는 표현 상의 변화를 보이는데 첫째, 어머니와 신성한 주제보다 다른 이미지들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둘째, 건축적으로 조성된 풍경이나 구조 안에서 최소화된 신체를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황홀경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in Ecstasy)> (Frick Collection, New York)는 “색채의 순수한 공간화를 향한 형상화(figuration toward pure spatialisation of colour)”를 추구한 것인데 이러한 경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예이다.59)

1480 에서 1490 까지에는 어머니와 아기 예수 사이의 분열이 구체적일 뿐 아니라 주제면에서 강조되었다. 예를 들어, <두 그루의 나무와 성모(Madonna with Two Trees)> (Academy Museum, Venice) (도 9)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성모의 표현에서 이제 도달할 수 없는 평온함보다는 경직감이 더 뚜렷하다. 이 그림의 성모의 이미지에서 평온하고 차분한 모습을 압도하는 적대적인 측면 시선을 눈치챌 수 있다. 이전 시기의 ‘소유적 어머니(possessive mother)’는 ‘적대적 어머니(hostile mother)’로 향하고, 전자의 거리-쾌락 균형(distance-pleasure balance)은 거리-고통(distance- anguish)의 느낌으로 변형된다. 이에 수반되는 공격성은 <성모자(Madonna and Child)> (São Paolo) (도 10)에서 놀랍게 표현되는데, 성모의 은밀한 죄책감이 아기 예수의 목을 조를 듯 움켜쥐는 제스처로 인해 갑작스레 노출된다.60) 이 시기에 얼굴 표현과 신체 자세를 통해 전달되는 모성 심리의 변화는 또한 회화 표현상의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이후로 풍경을 점차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나 많은 인물들 및 천사들이 아기 예수를 나르시즘적 고립감에서 나오도록 유도함을 알 수 있다. (예로써, 성 베드로와 세바스챤과 함께 있는 성모자 <Madonna and Child with Saints Peter and Sebastian> (Louvre, Paris)를 들 수 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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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니 성모자에 있어 색채는 입체감의 표현에 중요한 요소로서, 크리스테바는 이가 벨리니에게 있어 형상화(figuration)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두 그루의 나무와 성모(Madonna with Two Trees)>에서 색채와 원근 덕택으로, 두 분리된 입체가 동일한 표면으로부터 전방으로 돌출된다.

채색된 덩어리의 이러한 병행은 공간감을 창출하면서 색채 자체에서의 분화를 유도한다. 순수한 빛을 향해 나아가면서, 벨리니의 색채는 언제나 다양한 색조이고, 밀집되어 있는 것조차도 불가피하게 빈 공간에 부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모자와 성 캐더린,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Madonna with the Child Jesus and Saints Catherine and Magdalene)> (Academy Galleries, Venice)에서 보듯이, 벨리니는 색채 표현에 치중하면서 실제로 빛나고 고뇌스런 모성적 얼굴 대신에 시각의 미묘한 분화로 표현하였고, 형상적이고 규명될 수 있는 것을 정교한 색조 분화로 대신하였다.62) 크리스테바의 분석에서, 벨리니의 성모화가 후기로 갈수록 구상작업에서 순수한 색채의 공간화를 위한 작업으로 전환하며, 공간적 요소를 점차 색채의 표현 조직으로 유입시킴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크리스테바의 벨리니의 성모자 회화 읽기를 내용상으로 볼 때, 먼저 ‘도상적(iconographic)’ 어머니에서 매력적인 ‘어머니-유혹녀(mother- seductress)’로, 그리고 ‘위협하고 도피하는(threatening and fleeing)’ 어머니에서 스스로를 대리시키는 빛나는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회화의 전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서전적 설명은 불가능한 부분이 많고 또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벨리니의 아내와 아들의 죽음은 간과할 수 없다. 1485 년, 그의 아내 보체타(Ginevra Bocheta)의 유산을 그가 기록했고, 1489 년 보체타는 그의 아들 알비스(Alvise)를 그녀 유서에 상속자로 명단에 넣었다. 이 두 시기 사이에 그 아이가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알비스는 1499 년에 사망하였다. 1485- 1499 년 사이, 아내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벨리니의 가족에 대한 경험 및 그의 부성적 역할 인식은, 크리스테바의 지적에 따를 때, 모성의 심리에 대한 것과 그의 양식의 양자에 개입하는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63) 다시 말해, 1480-1500 년 사이에 보았던 적대감과 절망이 뒤섞인 느낌이 베어있는 성모화, 아기 예수의 은밀한 ‘복수’가 치밀하게 고안되어 있는 성모화의 표현은 위와 같은 화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동떨어져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견해이다.

벨리니의 경우에서 보듯, 부성(paternity)은 남성 주체에게 있어서 모체가 주는 근원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듯하다. 이는 황홀한 모성적 열락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그 공격성의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남성 주체가 ‘소유적 모체(the possessive maternal body)’로부터의 분리라는 것뿐 아니라, 소유적 모체에서 느끼는 위협을 인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크리스테바는 이 위협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는 그[남성 주체]가 즉시로 그 신체로 회귀하게 하고, 마침내 어머니를 ‘탈신비화하기(demystify)’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더욱 적절한 언어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이 언어는 그녀의 독특한 상상적인 열락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원초적 억압의 경계에 있는 열락인 것이다. 이 경계를 너머서서 충만하고, 모방적이고 진정한 기호(signs)가 있다.”64) 크리스테바의 동정녀 제식을 통한 모성성 연구는 이와같이 ‘원초적 타자’로서의 어머니의 존재를, 그리고 이와 주체와의 관계를 언어체계, 즉 의미과정의 질서와 연관지어 분석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러한 상징질서를 확대한다.

다시말해, 모체의 언어 이전의 요소들이 인식되는 기호적(semiotic) 영역을 조명하면서 말이 전달할 수 없는 부분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밝힘으로써 언어체계의 범주를 확장한다고 평가된다.

Ⅳ. ‘표현할 수 없는 것’/‘분리’의 상징화:

홀바인의 <죽은 예수> (Holbein’s <Dead Christ>)65)

크리스테바의 글, ‘홀바인의 <죽은 예수> (Holbein’s <Dead Christ>)’는 그 서두가 무척 인상적이다. 종교화에 대한 비종교적 인상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1522 년,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이 그린 <무덤에 있는 죽은 예수의 시체(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도 11)를 해석한 것인데, 크리스테바는 도스토예프스키 (Dostoyevsky)의 소설 「천치(The Idiot)」에서 작중 주인공이 “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신앙을 잃게 될 것이다!”66)라고 한 대사를 논문의 도입부로 소개하였다.

(11)

<무덤에 있는 죽은 예수의 시체>는 거의 천을 두르지 않은 상태에서 석판에 몸을 쭉 펴고 있는 시체를 보여준다. 실물 크기의 그려진 시체는 측면에서 보여지고, 그 머리는 관객을 향해 약간 돌려져 있고, 머리카락은 천에 흩어져 있다. 오른쪽 팔은 전면에서 보여지는데, 쇠약하고 고문당한 신체 바로 옆에 놓여 있다. 가슴에는 창의 핏자국이 있고, 손에는 십자가 처형의 흔적, 못 자국이 보이는데 길게 뻗은 가운데 손가락의 경직성과 고통이라는 차원에서 연결된다. 이 순교자의 얼굴은 희망 없는 슬픔의 표현을 담고 있다. 공허한 응시, 날카로운 선의 옆모습, 푸른 빛 감도는 녹색의 안색은 진정으로 죽은 사람의 것이고, 아버지에 의해 버림받은 예수의 그것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거기에는 구원의 약속이 없다.

인간 죽음에의 꾸미지 않은 표현, 시체의 거의 해부학적 파헤치기는 관객들에게 신의 죽음 앞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전달한다. 여기에 우리 자신의 고통 또한 섞여 있는데 그것은 초월에 대한 어떤 미미한 제시도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홀바인은 모든 건축적이나 구성적 환상을 모두 포기하였다.

무덤의 돌은 그림의 윗부분을 누르고 있는데, 이는 단지 12 인치밖에 안되며 영원한 죽음의 느낌을 강조한다. 이 시체는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경직된 느낌, 돌과 같이 느껴지는 냉랭함이 압도적이다. 관객의 응시는 이 폐쇄된 관을 아래로부터 뚫고 들어간다. 관객의 시선은 그림을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따르다가 시체의 발에 막고 있는 돌에서 멈추게 되는데, 이는 관객을 향해 더 넓은 각도로 벌어져 있다. 이 그림에서는 시체가 전 영역을 채우고 있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설명을 위한 어떤 노력도 없다. 우리의 시선은 경미하나마 육체적인 세세한 묘사를 따라 가는데, 못박히고, 찔린 상처들을 살피다가 구성의 중앙에 위치한 손에 집중된다.

홀바인의 <죽은 예수>에는 자연의 초월적이거나 고양시킴의 약속이 결여된 만큼이나 발작적인 고통의 고딕적 에로티시즘은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고독한 사색 안에 갖힌 “고통의 경제적이고 절약적 표현의 그래픽한 처리”라고 크리스테바는 묘사한다. 이는 고요하고 절제된, 환상 없이 드러난 슬픔, 엄격함과 경건함의 표현으로서 색채적이거나 구성적 고양이 아닌 조화와 조절의 능숙함을 보여준다.67)

이와 같이 홀바인의 절제된 표현에 대한 당시의 종교,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바젤(Basel)의 성상파괴주의(Iconoclasm)와 홀바인의 미니멀리즘 - 크리스테바의 용어를 빌어 - 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바젤의 상황은 상업적 도시이며 번영하는 종교적 도시로서, 1521-23 년의 신교도 성상파괴주의에 의해 전복되었다. 교황의 물질주의적, 이교도적 남용에 반작용하면서, 비텐버그(Wittenberg) 개혁자들은 교회를 해고하고, 이미지와 신앙의 모든 물질적 표현을 파괴했다. (이후, 1525 년의 농부들의 전쟁도 미술품의 파괴를 가중했고, 1929 년에는 엄청난 우상철폐(idolomachy)가 시행되었다.) 신실한 가톨릭은 아니었지만, 미화된 성모들을 그렸던 화가로서, 홀바인은 바젤의 성상파괴 분위기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편지를 갖고 1526 년경 영국으로 떠났는데, 이 편지가 그를 토마스 모어(Thomas More)에게 소개하였다. 그 편지에 “여기에서는 미술이 차갑다. 그는 몇 안되는 천사를 모두 폐기하기 위해 영국으로 간다.”라고 씌여 있다.68)

홀바인은 이러한 시대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다양한 측면들 - 회의주의에서 우상숭배의 거부에 이르기까지 - 을 자신의 특정적 방식으로 통합하였다. 그 과정에서 회화의 주된 관건에 직면하였던 바, 이태리 미술에서 특히 예수의 수난의 표현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듯 에로틱한 호화가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에 형태와 색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테바는 그러한 표현의 방식이 죽음의, 소멸의 문턱에 닿듯, 사라짐과 흩어짐으로 인식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홀바인의 색채와 구성에서 드러나는 무신론은 형태와 죽음 사이의 그러한 경쟁을 다루고, 최소한의 시각성에 의존하여 극도의 고통과 멜랑콜리아를 나타낸다고 분석한다.69)

홀바인의 <죽은 예수>의 표현적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크리스테바는 이태리 도상과의 비교를 시도한다. 수난(Passion) 동안의 예수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있어 이태리 도상은 그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고 최소한 고귀하게 하고, 대부분 슬픔에 잠겨있는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뿐 아니라 애도에 빠져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수난에의 대면을 당연히 받아들어야 하는 태도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체를 덩그러니 혼자 남겨 둔 홀바인의 그림에 주목하면서, 크리스테바는 관객들의 머리 위에 위치한 홀로 뻗은 신체가 나타내는 이러한 분리감은 충격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고 강조한다.70) 예수의 고난은 구체적으로 선과 색채에 더불어, 뒤로 제쳐진 머리, 성흔(스티그마타)을 지니고 있는 오른 손의 비틀림, 그리고 발의 위치 등 세 가지 요소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이 모든 것이 회색, 녹색, 갈색의 어두운 팔레트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주의는 바로 인색한 표현에 기반하면서 고립된 그림의 구성과 위치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

(12)

크리스테바가 이태리 성화 중 홀바인의 <죽은 예수>와 유사한 것으로 예시한 것은 만테냐의 <죽은 예수> (c.1480; Brera Museum, Milan) (도 12)인데 이 그림이 죽은 예수의 유사-해부적 시각의 선례라고 설명한다. 관객을 향해 돌려 있는 발바닥과 시체의 압축적 시각이 묘하게도 잔인함의 인식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쪽 구석에 나타난 두 여인들은 슬픔과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이에 반해, 홀바인은 그들을 생략하면서 관객, 즉 우리와 죽은 신의 아들과의 전적으로 인간적 동일시에 호소하는 ‘비시각적인 호소’ 이외의 모든 다른 요소를 배제했다는 것이다.71)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수난에 대한 이태리 도상에 가장 반대되는 짝은 역시 고딕 미술일 것이다. 크리스테바가 선택한 그뤼네발트(Grü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1512-1515) (도 13)는 고통의 표현을 그 절정으로 보여주는 고딕 표현주의의 적절한 예이다. 십자가의 처형을 표현하는 중앙 패널은 살의 부패와 같이 순교의 세세한 부분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뤼네 바르트의 예수는 홀바인처럼 고립으로 감축되지 않았다. 예수가 속했던 인간적 영역은 요한의 팔에 쓰러져 버린 성모에 의해, 또 막달라 마리아와 세례요한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그들은 그림에 대한 관객의 연민의 감정을 강하게 유도한다. 이것에 대해 크리스테바는 ‘홀바인은 그뤼네 바르트보다 더 극렬한 표현으로 순전한 리얼리즘을 그의 유일한 방편으로 삼은 듯하다’라고 묘사한다.72)

그뤼네 바르트와 만테냐는 고딕 미술과 이태리 미술의 중요한 예들로서, 크리스테바는 이 두 작품이 예수의 죽음의 사건에 있어서의 ‘자연적 죽음(natural death)’과 ‘신성한 사랑(divine love)’이라는 고딕 미술과 이태리 미술의 두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고딕 미술에서는 도미니크적(Dominican) 영향으로 자연적 죽음의 표현, 끔찍한 고통의 고딕 에로티시즘을 강조하고, 이태리 미술에서는 프란시스코적(Franciscan) 영향으로 빛나는 신체의 성적 아름다움과 조화로운 구성을 중점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초월적인 것의 영광이 숭고한 것을 통해 가시적으로 된다.

그런데 크리스테바는 홀바인의 <죽은 예수>에서는 이 두 성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73)

홀바인은 만테냐와 이태리 가톨릭에서 배운 해부학적이고 시각적으로 평정을 이루는 교훈을 무시하지 않았고 동시에 고딕 정신 또한 관심을 기울여서, 크리스테바의 표현에 따르면, 슬픔을 “인간화(humanising)”하였다. 그는 고통을 부인하고 살의 오만함이나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는 이태리적 길을 따르지 않고서도 그것을 그림에 보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홀바인은 따라서 이와 다른 영역에 속하는데, 그의 그림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수난을 우리에게 더 접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이를 펑범하게, 일상적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74)

이와 같은 표현적 특징을 통해,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홀바인의 그림은 르네상스 인간상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발전된다. 즉 죽음에 종속된 인간, 죽음을 포옹하는 인간, 그것을 존재 안으로 흡수하는 인간, 그리하여 죽음을 영광을 위한 조건이나 죄악된 본성의 결과로가 아닌, 새로운 존엄성의 기반인 “탈신비화된 실재(desacralised reality)”의 궁극적인 핵심으로서 통합하는 그런 인간상을 말한다. 이것은 무신론의 그것이 아니고, 환영이 벗겨지면서 고요하고 존엄스런 위치에 도달하는 것인데 홀바인의 그림이 이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75)

고립적인 구성으로 고조되는 홀바인의 그림과 관객 사이의 분리(caesura)의 표현은 전능한 아버지와 분리된 죽은 시체로서의 예수, 그리고 그로 인한 무신론적 파급효과라는 보다 근본적 의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크리스테바는 홀바인의 <죽은 예수>에서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정서는 고립이 유도하는 분리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분리의 의미를 주체의 욕망과 의미체계와의 연관에서 도출해 내고 있다. <죽은 예수>에서 예수는 석관의 기반으로 인해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낮은 관 천정으로 말미암아 내세에 대한 아무런 전망이 없어 보인다. 홀바인의 이 그림은 접근할 수 없고, 멀고, 이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함(a beyond)’을 내포하지 않는다. 회화적이든 신학적이든, 어떠한 매개, 제안, 교화 혹은 고취도 없이,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우리는 “비가시적인 초월적인 꿈과 죽음에 의해 구성되는 분리의 공포에 쓰러지고 만다.”76)

홀바인의 그림이 야기하는 실감나는 신과의 분리감을 크리스테바는 헤겔이 제시했던 표현에 있어서의 딜레마와 연결시켜 고려한다. “신은 죽었다, 신 자신은 죽었다”는 헤겔의 말은 놀랍고 끔찍한 표현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는 표현에 있어 분리의 가장 깊은 심연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77) 홀바인의

<죽은 예수>는, 유일하지는 아닐지라도, 헤겔이 말했던 “표현의 분리(the severance of representation)”의 바로 그 자리에 위치했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를 인용한다:

우리를 신체와 의미에 얽어매는 연계가 분리되었을 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가능한가? 욕망이, 즉 연계(bond)를 속성으로 갖는 욕망이 분산될 때 그리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가? 욕망이 아니라 분리(severance)와 동일시할 때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여기서 분리는 인간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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