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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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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년 월 2005 8 석사학위논문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이 혜 령

(2)

년 월 일 2005 4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이 혜 령

(3)

지도교수 박 정 기

이 논문을 미학미술사학과 석사학위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년 월 일 2004 4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이 혜 령

(4)

이혜령의 석사학위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박 상 호 인 위원 노 은 희 인 위원 박 정 기 인

년 월 일 2005 5

조선대학교 대학원

(5)

ABSTRACT

서론 .

Ⅰ ---1

작품해석 이론에 있어서 분석의 방법 .

Ⅱ ---4

텍스트적 의미의 분석 과 역사적 의미의 분석

1. ---10

미술작품의 분석의 예

2. : ---16 푸쌩의 <Rinaldo and Armida>(1629)

<Armida Carrying off Rinaldo>(1637)

<Diana and Endymion> (1631-3)

<Tancred and Erminia> (1633-4)

월하임의 작품해석 이론의 의의와 문제점

. -

Ⅲ ---32

도판목록---38

참고문헌---46

(6)

ABSTRACT

R. Wollhiem's theory of Art Interpretation of Artworks

Lee Hye-Roung

Advisor : Prof. Park Chung-Kee

Department of Aesthetics and the history of Art,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In this thesis my intention is knowing two ways. One way is the way of textuality and the other way is the way of borrowing 『Painting as an Art』Chapter Ⅳ. That is a method when the artist tries to incorporate something into his artworks. Wollheim strictly absorbed in looking at visual art. Therefore two aspects will be examined: How much is important and what the limits are.

Wollheim's fundamental thought was based on psychoanalysis, which has largely been marginal to philosophical psychology, and at best a target of critical hostility by philosophers of science. He regarded it as exactly the right kind of theory through which to understand human nature.

Psychoanalysis was crucial to his personal outlook, and played a fundamental role in defining his outlook on art.

In 『Painting As An Art』Wollheim cautions against taking the idea of intention in a too narrow or limited a way. "At least in the context of art," he writes, "intention must be taken to include desires, beliefs, emotions, commitments, wishes." The viewer will infer the intention from the way the painting looks, and this, Wollheim believed,

"presupposes a universal human nature in which artist and audience share".

(7)

This notwithstanding, paintings do not instantly disclose their meanings. Though he disclaimed an intention of psychoanalysing works of art, many of the remarkable interpretations in 『Painting As An Ar t』 seem to presuppose psychoanalytical ideas.

The three threads of Wollheims' life and thought unite in this description: painting, philosophy and psychoanalysis. He argued that if painting presupposes a universal human nature, then "it must be absurd to bring to the understanding of art a conception of human nature less rich than what is required elsewhere." "And he reiterates this thought with the profound observation this would be as true of philosophy or psychology as of art." He took a brave stand against the reductionisms that impoverish the way so many intellectuals have approached what are, in effect, the highest achievements of the human spirit.

(8)

서론 I.

본 논문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요, 미학자이며, 회화이론가인 리처드 월하임(Richard Wollheim, 1923-2003)의 미술작품 해석이론을 그의 주저의 하나인 『미술로서의 회화 (

Painting as an Art

)』를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 미학적 의의와 문제점을 논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월하임 미학의 주요 테마들은 일반적으로 미술의 존재론 (ontology of art) 과 미술작품에 있어서의 재현(representation)과 표현 (expression) 및 이해 와 해석 (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등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테마들은 그의 첫 주저인 『미술과 그 대상들 (Art and It's Objects)』

에 도입되었다

(1968) .1) 이 책은 현대 분석철학 (analytic philosophy)의 전 통 속에서 쓰여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3) 의 후기철학2) 을 미학과 관계시키고 있는 최초의 현대미학의 저서 중의 하나 로 평가되고 있지만, 두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그 첫째는 회화에 대한 그 의 특별한 관심이며, 둘째는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 석학과의 깊은 연관이다. 월하임은 이와 관련하여 특히 정신분석학자인 클라 인 (Melanie Klein, 1882-1960)파의 미술비평가인 스톡스 (Adrian Stokes,

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02-1972) .

월하임은 그러나 이와같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정신질환의 일종인 신 경증 (neurosis)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정신분석학 적인 회화의 설명을 거부한다. 즉, 그는 “꿈의 해석 과 같은 과정을 모델” 로 하여 미술에 숨어 있거나 잠재해 있는 내용을 드러내려 하는 방식의 미술 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인데, 이는 그가 근본적으로 회화를, 시각적 구상

1) 이하에 소개하는 월하임의 미학이론의 개요는 주로 David E. Cooper (ed.), A Companion to Aesthetics, Oxford: Blackwell Publishers Ltd., 1995, pp. 447-449에 기술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2) 이 후기철학은 “일상언어 (ordinary language)"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 대 미학일반의 이론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Lawrence E. Cahoone (ed.), From Modernism to Postmodernism. An Anthology, Blackwell Publishers Ltd, 1995, p. 191 참조

(9)

과 신체의 은유 를 통한 인간 (visual conceptions) (metaphors of the body)

의 내면세계의 외면화 (externalization) 또는 구체화(embodiment)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월하임이 그의 미술이론 내지 회화미학을 궁극적으로, 정신분석학 (Psychoanalysis)이나, 또는 분석철학의 중심적 대 상을 이루고 있는 언어학 (linguistics) 위에 건립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님 을 알 수 있기도 하지만 그가 또한 강조하는 것은 “미술의 본질은 인간의 어떤 보편적인 본질을 전제로 한다 는 것이다” .

미술로서의 회화 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회화적 재현 (representation)을

『 』

월하임은 “들여다보는 것 (seeing-in)”이라는 용어로 분석한다. 이것은 착 색된 (stained), 또는 그려진(painted) 표면 위의 표시(marks)들을 보는, 그 리고 또한 이 표시들의 형상적인 효과들 (the figurative effects)을 보는 심리학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의 자연발생적인 지각경험

의 두 부분이기도 하다 (perceptual experience) .

월하임은 따라서, 화가는 재현활동에 의해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그리 고 관찰자는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매체 (medium)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 이 요구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회화작품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이라는 가공물 (Artefact)에 대해 미적인 태도 (aesthetic attitude)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선 무엇보 다도, 그 어떤 것을, 주어져 있는 하나의 미술의 개념 아래 포섭하여, 그것 을 미술작품으로서 제작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것이 미술작품으로 생산되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정보가 없이는 그것 이 미술작품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월하임 에 있어서 미술작품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에 의해 세계를 재 현해내는 것이며, 이 점에서 그는 곰브릭 (Ernst H. Gombrich, 1909-2001)의 회화적 재현이론에 동의한다. 월하임은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미술작품을 지각해서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명제적인 지식 (propositional 이 개입하는 것이며 이 지식은 한편으로 어떤 것이 하나의 미술

knowledge) , ,

(10)

작품이라는 인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묘사된 예술적인 문제에 대한 통 찰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월하임은 또 미술작품에 있어서 표현 (expression)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 가의 레파토리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보며, 이 점에서도 곰브릭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미술작품이 어떤 하나의 정신상태 나 감정의 상태에서 생산된다거나, 관찰자 (감상자 에게 그와 같은 상태를) 야기함으로서 그것들의 표현력을 얻는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러 한 견해는 작품의 표현력을, 작가의 전기에서 해명되어야 하는 외부적인 특 징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월하임은 또 나아가 미술작품은, 그것이 생산된 역사적 상황과 그 생산조건 을 고려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는, 하나의 미술작품이 현존하는 표현수단을 변형시킬 경우 특히 필요한 일 이다.

월하임은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미술작품들의 이해를 해석의 자유가 언어보 다 크다는 점에서 언어의 이해와 구별한다. 모든 각각의 미술작품은 작가에 의해 제시된 조건들의 틀 안에서 다면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11)

미술작품 해석의 두 가지 방법 .

월하임에 의하면, 우리는 외부세계에서 우리의 정서와 일치하는 어떤 장면 을 발견한다.3) 그런 다음 우리의 내부에서는 “정서와 인식이 융합되어 표현 된다”4) 미술에서 인식은 예술가에 의해서 이끌어진다. 우리가 묘사된 것을 본다는 것은 그 예술가가 나타내려고 의도한 것이다. 적절하게 그림을 본다 는 것은 회화적 요소를 향한 예술가의 태도에 주시해야 한다. 월하임은 어떤 작품이 있다고 볼 경우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도 깊이 있게 생각할 가치 가 있는 그림을 보는 법”5) 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다음 의 인용문은 실제로 월하임이 미술관에서 작품을 바라보았던 경험의 한 구절 이다.

내가 그것을 깨닫게 되는데 대부분 한 시간이 걸렸고 그렇지

않으면 그림 앞에서 옳지 않는 연상 또는 잘못된 인식들을 성립 하기 일쑤였고 그림이 지니고 있는 논점이 저절로 대답될 수 있 을 때까지 같은 양의 시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베니스에 있는 산 살바도르 성당과 루브르 미술관, 구겐하 임 미술관에서 그림이 나의 삶이 될 만큼 긴 시간들을 보냈다.

그런 중에 나는 행인들 중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아차렸 다. 결국 나는 그 그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6)

3) Michael Kelly (ed.), Encyclopedia of Aesthetics, Volume 4,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 476

4) Richard Wollheim, Painting as an A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p. 334 이 저서는 이하에서 PA로 표기한다.

5) PA, p. 8 6) Ibid.

(12)

우선 그림이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를 상정할 경우, 월하 임은 그 대상 즉 하나의 그림을 일종의 텍스트 (text)를 도해하고 있는 것으 로, 또한, 그 그림이 이미지를 보다 이른 시기의 그림으로부터 도입한 것으 로 본다. 이렇게 구성된 그림의 현상은 관찰자가 적절한 경험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만일에 한 그림이 어떤 것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 어 떤 것을 결정해 낼 수 있는 만큼의 시각상의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7) 그림이 란 그들의 의미를 즉석해서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관찰자는 그 의미를 회 화를 바라보는 방법에서 더욱 객관적으로 추론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 중 어떤 것도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법에 관한 영향 을 알 수 없으며 또한 어떤 것도 방법을 제시하여 예술가에게 무엇인가를 그 리도록 강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예술가와 관찰자가 주고받아야 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 라고 월하임은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월하임에게 그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방법을 가지고 보고 있지 않고 여러 가지 장치를 집결하여 보고 있다는 점에 서 매우 난해한 것 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월하임의 사상 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본 논문은 작가가 작품에 차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 법 중에서도 『미술로서의 회화』 4장에 언급하고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이해 하여 푸생 (Nicolas Poussin, 1593/4-1665)의 작품을 통해서 해석해 본다는 점에 주목해있다. 이와 같은 월하임의 사고는 아무래도 작품들은 텍스트 적 인 요소가 지니고 있는 일부를 부활시키려는 교의를 갖고 있다고 의도되었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가 의미하는 하나의 텍스트라는 것은 무엇보다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제 이며 역사와 관계하여 체계적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미술작품을 지각해서 이해하는 데에는 반드시 명제적인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 이 개입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것을 월하임은 어떤 하나의 텍스트가 그림의

7) Rob van Gerwen (ed.), Richard Wollheim on the Art of Painting. Art as Representation and Express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 13

(13)

내용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월하임은 『미술로서의 회화』 4 장에서 원문성의 방법 (The way of textuality)8)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위의 텍스트가 그림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림은 역사적인 의미 즉 역사적인 요소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점에서 월하임은 어떠한 대상 또는 이미지를 보다 이른 시기의 예술로부터 빌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월하임은 『미술로서의 회화』4장에서 차용의 방법(The way of borrowing)9) 이라고 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모든 감각의 미술작품 이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된 성립 생산 조건들을 고려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하나의 미술작품이 현존하는 표현수단을 변경시킬 경우 위의 조건들이 특히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차용이 어떤 그림의 요소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차용 되어 그림에 속하고 있는 것과 같을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절대로 차용된 대 상 또는 이미지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월하임이 말하는 차용된 대상 또는 이미지라는 것은 차용의 방법이 작용할 경우 그 대상 또는 이미지 가 어디서 오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미술작품의 해석을 위해서 월하임이 또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작가가 예술 적인 관점에서 계획하고 있는 정보이다. 이것은 곧 관찰자에게 어떤 하나의 정신의 상태나 감정의 상태를 야기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작가의 전기에서 해 명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월하임은 작가의 정신이나 사상 그리고 작가의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월하임은 이 점에서 고대조각의 포즈와 라파엘의 회화적 독창을 연구했고 동화 흡수시킨 예술가일 뿐 아니라 스토아파철학에 의해 고양된 정신을 회화 에 도입시킨 17세기 프랑스의 대가인 푸생의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 다.

사실상 명확한 어떤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속되는 의미를 일시적 차원으로

8) PA, p. 187 9) Ibid.

(14)

인식해버리는 문제는 지금까지는 대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와도 같은 것이 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의미는 역사적인 차원이 어떤 작용을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 할 수 있는 요소보다 일종의 거대한 흔들림이 될 수 있다 는 기본적인 이론의 작용에 기초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 가지 것은 우리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사의 의미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개개인의 감성 즉 우리가 지속적으로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는 집합적인 인간의 활동과도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은 우리의 사상과 욕구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단계인 반면 인간 활동에 관한 역사적인 설명은 보통 사고와 욕구를 하나의 질서로 이끈다. 결국 그것은 그들의 선택과 해석 설명과 조화되지 않는 것이다, .

대부분 무의식을 이루도록 시도하려는 작용과 역사적인 설명의 의도가 너무 많이 부여되는 이러한 균열은 월하임의 언급에서 또 다른 균열을 부여한다.

의미를 가진 활동 즉 이해할 수 있는 활동과 관계한 일시성 그리고 역사에 시간을 주는 과정 사이의 구별은 월하임이 비평의 과제에 관한 중요한 한 구 절과 이미지에 관한 이해로 명확해 질 수 있다. 그의 저서 『정신과 그 깊이

장에 있는 미술 해석 그리고 지각 (The Mind and It's Depths)』 8 「 , , (

Art, Interpretation, and Perception)

」에서 그는 두 개의 기본을 이루는 해석적 인 전략에서 구분을 짓고 있다. 의미의 수정에 관한 것과 의미가 가능하도록 그 상태를 개정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는 어떤 점에서는 효과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는 규범 또는 관례에 대한 조사를 적용한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 당장에 어떤 것이 우리 가 다가갈 만한 그림인가를 정해서 규범 또는 관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에 관하여 월하임은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의미가 있는 곳에는 어떤 것이 발견되기 위한 사상이 있다 그

“ .

비판적인 목적은 수정하는 것이다. 의미가 있는 곳에는 구성되기 위한 어떤 것이 있으며 또한 부과되기 위한 어떤 것이 있다. 또

(15)

한 추측하건데 시대를 거슬러 오면서 새롭게 된 것도 있다. 그 비판적인 목적은 개정이다.

나의 본능은 수정하는 것에 있으며 내가 알아 낼 수 있는 한 중 대한 고안 또한 수정이다. 미술에 관하여 주요한 문제에 적절히 반응하는 개정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고의적인 표명과도 같은 것이다.”10)

개정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구조’와 ‘부과’ 사이의 관념이 얼만큼 공평 한가와는 상관없이, 월하임 스스로가 그 주제에 전념한 그의 저서에서 고찰 하고 논쟁을 펼친 수정의 임무가 틀림없이 논해져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미술작품은 스스로가 반드시 재구조 됐다는 사실의 영역으로 스스로를 부여 해 버리기도 한다. 또한 유효한 시간은 그 작품에만 응고시키는 시간을 말하 며 경험의 경계가 반드시 예술가의 의도를 무의식의 과다로 전이시키는 관찰 자의 시간을 말한다. 결국은 부적절한 관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언급한 개정에 관하여 수정이라는 매우 유사한 명칭을 구분 짓고 있는 데에는 함축적인 판단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일 듯 하다

예술경험은 항상 이해될 수 있기를 열망하지만 회화의 경험만으로 회화를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예술의 교의 중에서 경험과 이해의 교차점은 월하 임의 저서인 『미술과 그것의 대상 (Art and It's Objects)』 의 주요한 테 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예술경험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입장에 있는 의도적인 활동의 효과가 나타내는 경험을 불러일으켜서 그 작품을 보는 데에 도달 할 수 있는 형식을 취하기를 필요로 한다.11) 이러한 활동은 너무 좁거나 제한된 방법에서는 관찰될 수 없다. 대신에 그 활동이 무엇이 됐든지 예술품을 산출하려는 맹목적인 의도와 동등해 질 수 없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자극하게 하는 의도인 것이다.

10) Richard Wollheim, The Mind and its Depth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p. 134 11) PA, p. 8

(16)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희곡 (drama)의 방법인데 모든 예술, 그 중 에서도 최대한 잘 알려진 예술은 예술가와 관객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확실히 정당화된 것으로 설명해내는 것을 말한다.

월하임은 예술경험의 방법에 앞서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예술가나 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 다. 다만 그림의 의미가 그것을 통한 것일 경우 인간 본성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 예술에 관하여 이해를 돕는 데는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언급한다.12)

월하임에 의하면, 원문성의 방법(The way of textuality)과 차용의 방법 은 화가가 그림의 요소와 의미를 강화하고 확대하기 (The way of borrowing)

위한 장치이다. 이 장치는 그림에 새로운 요소를 소개해 낼 수도 있다는 입 장에서 수정을 목표로 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살펴본다는 점에서 일부 새로운 요소가 한 그림에 개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13)

12)Ibid.

13) 위의 두 가지 방법의 명확한 용어사용이 어려운 관계로, 화가가 작품에 설치하는 장치로 서의 원문성의 방법 (the way of textuality)에 근거한 작품의 해석을 “텍스트적 의미의 해 석”, 차용의 방법 (the way of borrowing)에 근거한 작품의 해석을 “역사적 의미의 해 석 이라 부르기로 한다” .

(17)

텍스트적 의미 분석과 역사적인 의미 분석 1.

텍스트(text)는 현대의 미학, 문화의 연구, 문학상의 이론과 비판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 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내리기에 어려운 것 중 하나이다.

이것은 다양한 목표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수많은 차이와 모순되 는 감각에서 쓰여 졌다. 텍스트에 관한 개념의 역사는 오래되어서 다소 복잡 하며 20세기 동안 다양한 텍스트의 이론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면서 훨씬 더 복잡해졌다. 따라서 그 텍스트의 개념이 두 가지 분명한 그룹으로 나눠져 있는데 고대의 텍스트(classical text)와 현대의 텍스트(contemporary text) 의 개념으로 보다 체계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텍스트의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미학에서 확연히 다른 이 두 개념을 융합시키려 는 부적절한 경향을 피하도록 돕는다는데 있다.

텍스트의 다양한 개념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어왔으나 현대에 그 개념 의 사용은 미술품(work), 예술품(artifact), 그리고 예술적 생산(artistic 과 같은 개념들과 관련된 속에서 구분 짓고 있다 추상적이며 정

production) .

신적인 실체인 텍스트라는 명칭이 말로 분류되기 시작한 기점은 중세였다.

그 사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BC 384- BC 322)에서 비트겐슈타인 까지 텍스트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능한 것이라는 학자들의 긴 논쟁의 역사가 존재해 왔다. 14)

원문성의 방법이 하는 역할은 어떤 하나의 텍스트가 회화의 내용으로 개입 하는 것이다. 그림은 곧 텍스트의 의미 즉 텍스트의 요소를 얻는다는 것이 다. 원문성의 방법은 어떤 독특한 그림이 하나의 사건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 연적이거나 전통적인 몇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건은 어떤 하나의 텍스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신에 도해화 하고 있는 것이며 보다 특 별하게 우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련된 그 텍스트는 회화 요

14) Michael Kelly,(ed.) Encyclopedia of Aesthetics,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Volume 4, pp. 370-371

(18)

소의 일부분으로 되는 것이다.

차용의 방법이 작용할 때는 하나의 차용이 어떤 그림의 요소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용의 방법은 더욱 단순한 방식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 다. 어떤 그림이 어느 정도 앞선 미술로부터 대상 또는 이미지를 차용 할 때 마다 이러한 작용은 그 차용이 그림의 요소와 결합되는데 충분한 것이 된다.

즉 그 대상 또는 이미지가 차용되어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가지 방법들이 작용할 경우 무엇을 야기하며 또한 언제, 무슨 조건에서 작 용하는 것일까?

최근에 미술 역사상의 실천에서 위의 두 가지 방법들이 작용하고 있는 조건 들에 대한 함축적인 하나의 관점15)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틀린 관점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방법을 같은 이유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월하임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이 문제를 교육적인 기점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최근 관점의 명확한 하나의 특징은 위의 문제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한 다는 것이다. 어떤 그림의 내면에 있는 요소를 얻기 위한 하나의 텍스트 또 는 차용을 상당히 간단한 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관심이 갖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떤 것이 한 그림의 요소의 부분이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놓쳐버린 것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대한 물음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월하임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치 있는 질문이다. 그것은 반드시 문제시 될만한 것이며 실제로 중 대한 것이다.

현대의 예술론에서 관대함이라는 우세한 관점은 잘못된 것이기도 하지만 실 제로 그 보다 더 잘못된 것은 하나의 텍스트나 차용이 반드시 예술가의 정신 을 거친다거나 또는 관찰자의 심리를 위해서 그 자체를 언급하지 않고도 그 림의 요소로 개입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하임은 위의 두 가지 방법이 의미하는 관련성이라는 것은 재현된 사건과

15) 월하임이 맹목적인 것들을 인용하고 있는 관점 때문에 최근 실천을 효과적인 범례들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 도 있을 터이다 월하임은 또한 그것들이 보급되고 있다고 본다. . PA., p. 365(각주인용)

(19)

텍스트 사이의 한 가지 경우와 차용된 요소와 앞선 시기의 미술 사이의 경우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모든 경우들이 그림을 이루는데 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는 앞서 존재하는 관련성이 자립적인 책략을 지닌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 이다. 그것은 원문상의 의미와 역사상의 의미를 확신하는데 충분히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적에 그 관점은 월하임이 주목해오고 있는 심리학적인 의미의 설명과 곧바로 대면한다. 그가 주장해오고 있는 그 림의 의미라는 것은 항상 예술가의 정신과 그를 작업으로 이끄는 방법 그리 고 이러한 작품의 산물들이 적절히 제공되어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찰자의 사 고를 가지고 오는 경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이러한 관점은 원문성의 방법과 차용의 방법 모두를 심리학적인 방법에서 설 명해 낼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나의 텍스트는 오직 그 텍스트와 관련된 몇몇 사건을 나타내 는 경우에만 그림의 요소에 개입하는데 또한 그 그림은 그 텍스트가 예술가 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로는, 어떠한 차용이 그림의 요소로 개입하는데 앞선 미술에서 온 몇몇의 대상 또는 이미지를 새롭게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올 때만 그러하며 그 그림은 이러한 차용 또는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16) 이러한 조건들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 텍스트나 차용은 그 그림의 요소 밖에 남는 것이다. 즉 그것이 얼마만큼 미적인가 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와는 상관없이 단지 위대한 역사상의 그림 또는 사회적인 그림 또는 전기상의 그림과 관계할 뿐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러한 제안들 즉 원문성의 방법과 차용의 방법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심리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데, 왜냐하면 맨 처음에 그들은 만일 어떤 하나의 텍스트 또는 차용이 그림의

16) 적어도 철학자 에드가 빈드(Edgar Wind)의 진술들이 월하임의 관점과 가장 가깝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텍. 스트(text)의 의미에 관한 관점이 그의 저서Pagan Mysteries of the Renaissance, London, 1958에서 방 법론적인 설명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차용된 태도”(Borrowed Attitudes)는 Warburg and

의 저널

Courtauld Institute, Vol.2, 1958 Reynolds and Horgarth에 있는 것인데 (Hum and the Heroic 에서 다시 출판되었다 여기에서는 월하임 스스로 완벽한 일치를 찾아낸 어떻게 Portrait, London, 1986 .)

역사의 의미가 생겨났는가 에 대한 설명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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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에 들어간다고 볼 경우 한 관찰자가 그 그림을 적절히 바라보는 어떠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 할 수 있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라는 것은 즉 그 텍스트나 차용에 수정된 경험을 말한다. 또한 그들이 그 텍스트 나 차용에 의해 수정된 관찰자의 경험상에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는 데 그 방법이라는 것은 곧 그 텍스트나 차용이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밝혀 낼 관찰자의 경험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텍스트나 차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주목하자는 뜻이 아니고 그것이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전자는 예술가의 정신 밖에 존재하는 것이고 후자는 예술가의 정신 내면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후자와 관찰자의 경험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 또는 차용이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요구한다면 공통적으로 그것을 심리 학적으로 다루게 하면서 두 가지 방법을 통일시킬 수 있도록 도울 것이며 또한 그들이 얼마만큼 동떨어져 있는가를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냐하면 공통하는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한 텍스트가 말하는 것과 하나의 차용이 말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사이에 많은 차 이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두 가지 큰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첫 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대상과 같은 것에 놓여있고 두 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그것으로 인하여 고안할 수 있는 수단과 같은 것에 놓여 있는데, 그 첫 번째 차이점은 하나의 텍스트 또는 차용과 같은 것에 존재하 는 것이다. 상응하고 있는 하나의 차이점이 복잡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하나의 텍스트가 단순한 것이라면 그 텍스트는 예술가에게 이같이 단순한 것 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된다. 이와 반 대로 어떤 하나의 차용이 복잡한 것이라면 복잡한 하나의 차용이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말하기 위한 것인데 즉, 이와 같은 것을 구성하는 것 이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당시 하나의 차용이 이처럼 복잡한 것을 구성하는 또 다른 것으로 비추어 보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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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그가 차용하는 것에서 온 내용이라는 것은 한 가지 것만을 이야기 하자 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또 다른 것과 관계되어 있음을 그에게 의미하는 것이다. 게다가 차용이라는 것이 더욱 복잡한 것일수록 하나의 차용이 하나 의 텍스트와 더욱 더 분리된다. 때문에 차용에 관한 적절한 설명 상에 두 번 째로 이루고 있는 차용 즉 내용은 반드시 하나의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테면 자동적으로 차용된 대상 또는 이미지가 생겨난 실질적인 원천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왜 간단한 평형상태로 만들지 않는가에 관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그 내용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예술가의 관념과 일치할 수 없 기 때문이다. 만일에 역사상의 의미가 예술가에게 어떠한 그림상의 요소를 전달한 것과 관계된 것이라면 어떠한 경험, 배경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경험, 배경은 옳거나 틀리거나 예술가로서 확실하다고 고안하고 있는 원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한 예술가가 어떤 요소가 생겨나는 근원에 관하여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실제로 그 원천과 관계하는 요소는 그에게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작품구조 내부에 자신의 관념을 포함한 예술가는 그 대상 또는 이미지를 고려하면서 설명을 획득해온 많은 배경을 고를 수가 있 다. 여기에서 예술가가 개척해 낼 수 있는 중대한 문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만큼이나 확장시킬 수도, 단축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 서 주어진 대상 또는 이미지가 무엇을 전달하는가 하는 범위 내 에서 다양 하게 변할 것이다. 어떤 하나의 체계적인 예가 있는데, 어떤 하나의 차용 된 이미지는 어디서 온 근원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것들을 전달 할 수 있을 것 이다. 따라서 보여 질 수 있는 것과 마주하는 배경은 고전적인 어떤 것, 로 마의 어떤 것, 즉 로마의 한 석관, 또는 그 석관에 묘사한 헤라클레스의 도 둑들과 같은 성공적인 추리력이다.

어떠한 근원에서 오는 대상 즉 이미지를 차용하는 범위 내에서 예술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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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 원천에 관한 기술에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할 수 있겠다. 위와 같은 기술은 차용 또는 그가 내용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 두 번째로 구성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와 어떤 하나의 차용이 한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 하는 사이에 두 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그 텍스트 또는 차용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그 둘을 각각 다른 곳에 놓아두고 있 다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가 한 예술가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술가를 성립하고 있는 감정, 사상, 정서 에 관 하여 언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원문성의 방식을 따를 때 그 당시 그 텍스트가 자신에게 떠올랐던 반향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몇 가지 수단을 찾아야 했으며 그러는 과정에 자신을 성립시켜 나가게 되며 그것을 실험하고 즉석해 서 실천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차용의 방법을 따르게 되면 점진적으로 차용의 반향들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하는 임무를 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차용은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인 것 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예술가가 하나의 차용을 자기 그림의 내용으로 소개하려 할 때 마치 하나의 텍스트를 지녀야 하는 것처럼 자기를 합리화 하 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합리적으로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일부분이 이 미 성립되어 있는 다른 몇 가지의 것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또한 더욱 상세히, 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의미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다.

다음의 푸생의 몇 가지 작품들이 이점을 명확하게 해줄 수 있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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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의 분석의 예 푸쌩의

2. : <

Rinaldo and Armida

> (1629)

<

Armida Carrying off Rinaldo

> (1637)

<

Diana and Endymion

> (1631-3)

<

Tancred and Erminia

> (1633-4)

초기 푸생의 작품 중에서도 그가 처음에 1624년에 로마에 도착하여 머무 는 동안에 작업했던 것이며 그 당시 그는 이미 30살이었지만 그 이전에 형 성된 독특한 양식은 없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루이 ⅩⅢ세와 프랑 스의 추기경이자 정치가였던 리슐리외(Cardinal Richelieu)의 후원 하에 작 업하기 위해 1640년 파리를 향해 로마를 떠났다. 파리에 돌아와 짧은 시간을 보내고 2년 후에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살면서 작업해왔던 로마로 돌아왔다. 푸생의 초기 작품을 살펴보는 의도로 <

The Death of Germanicu,

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Minneapolis>(1629> 도판1)와 같은 것을 선택 할 수 있는데 그 작품은 1627년에 완성된 그의 첫 번째 독자적인 그림이다. 작품성이 있는 맨 첫 번째 작품이라고 언급할 수 있는 <

Extreme Unction,

collection Duke of Rutland>)(1638-40)도판2)이란 이 작품은 푸생이 파리로 가기 위해서 로마 를 떠나기 바로 전에 작업했던 것이다. 이 두 그림에서 한 가지 뚜렷한 사실 은 수 많은 개인 작품들에 날짜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며 지금까지도 논쟁할 만한 이유가 된 채로 남아있다. 푸생의 초기 작품들의 내면에는 차례로 두 가지 현상들이 있다.

첫 번째 현상은 눈에 띄게 베네치아 화풍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두 번째 현상은 데생(disegno) 과 색(colorito) 으로 마무리한 소묘의 가치에 있다는 점이다.

중대한 시기인 1633년에는 <

The Triumph of David,

Dulwich Picture Gallery, Dulwich>(1632-3)도판3) 와 같은 그림을 완성했다. 그 작품은 무엇보다 진보적인데 뛰어난 영향력들은 더 이상 티치아노와 바로크 양식에만 존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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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라파엘과 도미니끄 그리고 고대 로마의 소벽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어두운 빛과 지나친 색채감 대신에 붉은색 바탕법 사용과 대각선 구도를 선호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깨끗한 팔레트와 안정적인 빛 그리고 잘 짜여진 인물들 그리고 면적 측정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 변화는 가끔 퇴보와 전진을 가름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원문성의 방법과 차용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좀 더 세밀하게 두 그림을 고안해 낼 수 있어야 하겠지만 이 두 회화작품은 보다 큰 집단화에 속하고 있거나 혹은 가담하고 있어서 두 가지 일반적인 특징들로 일치되어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첫 번째로 두 작품은 사랑에 관한 주제를 재현하고 있다. 여기서는 응답이 없는 욕구불만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랑은 짧은 죽음에 의해서 끝이 났 다. 즉 그들은 거의 더없는 행복의 조건과 같은 사랑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애욕을 다루는데 문제가 되는 주제는 문학의 두 가지 원리에서 나온다. 그 예로 오비디우스(Ovid, 43 B.C - AD. 17?) 의 『Metamorphoses』 와 타쏘(Torquato Tasso, 1544~1595),의 『Gerusalemme Liberata』이 있다.

두 번째로 모든 집단화를 위한 주장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텍스트의 요소 17)로 성립되어 왔다. 또한 나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오비디우스와 타쏘에게서 온 어떠한 사건들을 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 이 외에 그들은 하나의 텍스트(text) 즉 아마도 덕과 부도덕 사이의 관계를 다 루고 있는 텍스트(text)와 일치하는 것을 도해화 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 원문상의 내용은 관능을 만족시키려는 욕구 즉 현세욕을 극복하여 성공해 낼 것이라는 원인을 취지로 한 것이다.

이 두 작품이 원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타당할 만한 두 가지 연구들이 예술가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한 월하임의 관점은 어떠한 연구도 그렇게 될 만한 요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17) Anthony Blunt,Nicolas Poussin, Vol.1, New York and London, 1967, pp. 103-124, pp. 14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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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를 문학의 원천에서 볼 적에 첫 번째 고안은 시인 그 자신에게로 거슬 러 갈만한 매우 강한 우화적인 읽을거리의 전통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이 재현하고 있는 애욕을 다루는 즉 관능을 만족시키려는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고안은 이 두 작품들은 애욕을 다루거나 관능적인 것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무엇을 추구한 것인지는 모르나 애 욕에 대한 역행과도 같다.

그런데 왜 어떠한 제안도 설득력이 없었는지는 보다 분명해질 것인데, 첫 번째 연구인 우화적인 해석의 케케묵은 것은 단지 이 두 작품들이 하나의 원 문상의 내용을 재현하고 있는 사건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만을 남기고 있 기 때문이다. 즉 그 두 작품들 자체가 이러한 내용을 성립하고는 있지만 보 다 더 깊은 질문을 성립시키는데 까지는 미치고 있지 않다. 그 질문이란 우 리의 질문일 수도 있고 그 회화 자체에서 이러한 요소를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연구인 그 두 작품들이 육욕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더더욱 우리의 물음과 멀리 떨어져서 있다. 이 두 작품들이 하나의 원문성의 내용을 가졌다는 것이 성립되어버린 것이라면 매개하고 있는 사건을 그 텍스트가 그 예술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한데, 한 그 림이 나타내고 있는 몇 가지 사건을 통해서 원문상의 요소를 획득한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다소 전심전력을 다한 방법에서 그 사건을 나타내야 하는 전 반적인 필요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들이 성행위를 결핍 하고 있거나 냉소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만이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에 탁월한 질을 갖고 있는 작품들일 뿐 아니라 고도의 성향들을 지니고 있는 초기 작품이 아니더라도 다른 두개의 그림들을 선택한다면 하나 는 오이디푸스를 도해화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타쏘우의 것이 될 것이다. 월하임은 무엇보다도 두 작품들을 가지고 세부적으로 성립 시켜 나가고 있다. 즉 <

Diana and Endymion,

Detroit Institute of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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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roit>(1631-3)도판4) 그리고 <

Tancred and Erminia,

Barber Institute of Fine Arts, University of Birmingham>(1633-4)도판5)이 그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이 두 작품들이 강하게 관능적인 작품들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단지 인간의 삶에서의 적절한 관능주의의 위치에 관하여 알려줘야 하는 것이 또 다른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 작품들은 ‘애욕을 다룬 것과 반대되는 것 으로 역행해 가고 있다’ .

실제로 그들이 애욕을 다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원문성의 요소가 무엇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월하임은 위와 같은 질문에 돌아가서 어떻게 이러한 것이 성립될 수 있었는 지를 생각해보려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두 작품들에 좀 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로는 1629년의 <

Rinaldo and Armida,

Dulwich Picture Gallery, Dulwich, London>(1629) 도판6) 라는 타쏘에 관한 그림이다. 푸생은 이교도자인 아르미다가 자신의 미를 무기삼아 기독교의 기사임을 감추고서 잠들어 있는 리나르도를 죽이려는 그 순간을 나타냈다. 서사시에서 생겨나는 이와 같은 일은 현세욕을 넘어선 이성의 승리를 우화화하고 있다. 즉 이교도자인 여자 마법사를 현세욕 으로 이성은 젊은 크루쎄더로 형상화 해낸 것이다, .

만약에 우리가 더욱 문제시 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물어간다면 그 그림 또한 텍스트를 우화해내고 있는 사건과 같은 것인가를 물어볼 것이다. 과연 그렇 게 된다면 그 문제에 관한 나의 관점에서 볼 적에 리나르도가 아르미다를 극 복해 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푸생이 어떻게 성욕을 넘어선 이성의 승리로 받아들였는지, 또는 이 주제가 그에게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표현한 것을 알기위한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그림을 바라볼 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날카로운 측면에 가면을 쓴 것과 같은 현상의 한 여인이 자신의 등 뒤에 울퉁불퉁 걸쳐져있는 직물을 지고서 가슴이 노출된 채로 잠들어 있는 젊은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왼쪽 손으로 그 남자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긴 송곳칼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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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젊은 남자는 얼굴이 약간 우리 쪽을 향하고 있으며 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갑옷에 기대어 누워있다. 한쪽 팔은 헝클어진 곱슬한 머리카락에 기대려고 자신의 머리 뒤로 굽혀져 있으며 불안정한 빛을 가진 색조인 붉은 빛을 띤다. 입술은 벌린 상태로 다른 한쪽 손은 견고히 놓아둔 방패를 자고 있는 사이에도 어루만지고 있다 무릎은 구부려져있다. . 깃 장식이 되어있는 투구는 그 옆에 놓여있다. 그 여인은 망설이고 있다. 머리카락에 작은 별 모양의 꽃을 단 날개달린 푸토는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 으며 걱정스럽게 그녀 넘어 잠들어 있는 리나르도를 쳐다보고 있다.

월하임은 그 여인과 푸토를 경이롭게 바라볼 그 젊은 남자는 우리가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 속에 있는 단계에서 볼 적에 종교상의 서사시에 나오는 정의롭고 용맹한 기사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광이 난 갑옷과 는 반대로 긴장 이 풀린 사지, 두껍고 부드러운 깃털과 노란 오렌지 빛깔이 나는 비난 옷 의 승마용 바지를 입은 그 젊은 남자의 주변에 유혹적으로 널러져 있는 사물 들은 하나의 다른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들은 풍부한 상상력의 감 각을 언급 하게 한다. 리나르도는 자신의 방패에 기대어 잠들어 있지만 우리 는 마치 그가 한 여성의 가슴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다. 또 한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는 않았지만 우리가 그 어디에서 내가 이 얼굴을 봤지? 하며 우리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그리고 고도의 유럽미술의 전통이 차용이나 영향력을 바라보지 않고 인상학의 반응이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 그리고 친근감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락한다. 그 다음 놀랄만한 대답이긴 하지만 중대한 대답이 의식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잠들어있는 <

bacchantes of Courbet

>(1866) 도판7)(Gustav Courbet, 1819-1877)의 그림 중 하나와 마 주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작품은 열정의 고도의 물결이 깨져버린 즉, 하 얀 시트위에 피로로 흠뻑 젖어 둔 채 남겨 놓고 있는 사람들을 다룬 것에 틀 림없다.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는 의미에서 단지 하나의 어떤 인상에 관하여 언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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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고 하는데 그 인상이라는 것은 그 순간의 인상을 의미하고자 한다. 그러나 쿠르베의 모델인 위슬러의 정부가 성욕과 같은 수중에 떠있음을 말하는

<

Rinaldo and la jolie Irlandaise>

, 의 순간의 기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치 뛰어난 확신에 대한 명백한 것으 로서 사용할 수는 없으나 일종의 그 젊은 기사의 특징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로서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러한 모든 것을 푸생의 각본에서 한 가지 성향으로 정의 내리기 위해서 그리고 각본 그 자체를 관건으로 옮기기 위해서 우리는 월하임이 다음에 제시 하려고 하는 중성적인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아르미다를 성욕으로 가득 차 있 는 리나르도의 적대자로 반드시 짜 맞춰야만 할 듯 하다.

또한 ‘중성적인’ 것이 너무 강한 하나의 단어 일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또 다른 실험을 해보고자 한다. 푸생의 또 다른 작품인 <

Armida Carrying off Rinaldo,

Gemaldegalerie, Saatliche Museen zu Berlin, East Berlin>(1637)

도판9)를 보면 이 작품은 서사시에서 아르미다가 잠들어 있는 그를 살려주려고 그녀가 살고 있는 마법에 걸린 성으로 데려오고 있는 그 순간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모든 방법론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하는데 그들은 마치 연재만화에 나란히 걸려있는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는 7, 8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갖고 있다는 점이 두 그림을 비교하는데 있는 고유성이다. 그 중 더 늦게 그려진 그림은 의심 없이 본래의 푸생의 구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정치의 권력이 접근하기에 어렵게 만든 완벽한 자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 우리에게 보다 먼저 그려진 그림의 내용에 관한 것을 몇 가지 명백히 제공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동 베를린에 있는 그림에서 아르미다는 승리를 얻어 행군을 지시하고 있는 자신의 본래의 상태를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본래의 상태란 것이 무엇인가? 그녀는 관능적인 상태에 있었고 그 성욕은 그녀에게서 사라진 동시에 훨씬 더 명백한 부분으로 리나르도의 강렬한 성욕을 멈추게 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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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잠들어 있는 젊은 기사이며 포로이다. 리나르도가 독일의 그림에서 발산 하고 있는 성욕이 주는 영향력이라는 것이 아르미다의 희생으로 지배당하고 있음을 주장하기에는 어렵다.

만일에 이것이 독일의 그림을 보는 방법과도 같은 것이라면 나는 재현된 각 본이 어떠한 근본이 되는 텍스트를 도해화 하고 있는가를 제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의 재현이 보여주고 있는 것 그리고 누구나 이 텍스트가 푸생에 게 무엇을 의미 했는가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 에서 원문성의 방법이 요구하는 것들이 일치한 것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 이다 그 텍스트는 그림의 내용으로. 개입되는데 이유는 전에 리나르도가 아르 미다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반드시 그녀의 성욕을 짐작 했을 것이며 따라서 즉시 그녀의 성욕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강화시켜서 결 국에 그녀의 패배를 자신의 승리로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푸생에게 있어서 현세욕을 넘어선 이성의 승리란 현세욕의 원천을 차 용하는 이성을 통하여 결정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으 로 욕구를 이겨낸다는 것은 또 다른 어떤 욕구를 넘어선 승리를 경험하는 것 과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독일의 그림이 이러한 근본이 되는 충돌 즉 싸이코마키아 에 있는 내면의 본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두 개의 중심이 되는 (psychomachia)

인물들의 재현보다 더한 것에 근본 원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세 번 째 인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아르미다의 욕구와 다투고 있는 리나르도 의 이성이 인간화 된 즉 외부의 대리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장면을 전달하려고 적의 뒤에서 팔을 붙잡고 있는 푸토의 역할을 볼 적에 어린애 같 이 눈살을 찌푸린 얼굴이 다음과 같은 성욕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 데, 즉 리나르도가 아르미다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했다는 그녀의 도덕성의 대 패배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로 언급할 작품은 오비디우스에 관한 그림인데 그에 관한 주요한 문제는 리나르도와 아르미다와 유사한 텍스트를 우화하고 있음을 주장해 왔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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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 주장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흥미로운 문제는 그 텍스트(text)가 그 그림의 요소에 개입하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가이다.

<

Cephalus and Aurora,

National Gallery, London>(1631-2)도판9)의 이 그림 은 상당히 정교한 작품인데 베네치아의 양식과 유사함을 지닌 이른바 ‘여성 형’ 의 그림이라 불린 것이다. <

Rinaldo and Armida>

보다 아주 조금 후의 그림이긴 하지만 거의 유사한 날짜인 1631-2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여명의 여신인 오로라(Aurora)가 시도하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데 강한 도덕성을 지닌 쎄팔러스(Cephlus)에게 나쁜 일을 시키려고 납치 했으나 그의 아내 프로크리스(Procris)를 사랑하게 된다.

푸생은 침입하려고 하는 그 날의 순간을 선택했다 금성을 상징하는 오로라의. 승마가 마구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서있다. 반면에 오로라와 여신에게 둘러싸여있는 쎄팔러스가 약혼을 하기 싫어서 다투고 있다. 당연히 그가 성 공했을 테지만 그에 대한 또 한 가지 나의 제안은 리나르도(Rinaldo)가 아르 미다(Armida)에게서 느낀 욕구와 같은 것을 차용한 욕구가 아니라 우리가 도덕적인 인물 그 자체 내면에서 떠오른 욕구를 극복하려는 강한 필연성을 느끼게 됐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욕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도덕성에 대한 욕구이다. 절묘한 미를 지닌 오로라의 매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쎄팔러스는 프로크리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며 도덕의 승리를 위해 다투는 합리적 능력을 구체화 해놓은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푸토의 힘을 통하여 용기를 내고 있다. 아마도 하나의 정신상의 이미지의 실현이랄 수 있는 육체적인 그의 아내의 그림으로 그녀의 남편의 눈을 향한 프로크리스의 초상화에 관한 증명은 오이디푸스의 그림에서는 발생하지 않지만 그 각본에 있어서 푸생의 기여와 소개는 확실히 이성이 성욕과 대항하는 목표 그 자체를 수단으로 하기 위한 원천과 같은 것 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성욕 그 자체가 되는 원천을 가리키며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이미지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의 힘이 어느 정도 저하된 하나의 독특한 원천의 형상으로 15세기의 초상화 에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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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15세기에 시사하고 있는 것들의 윤곽에 맞춘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겠 다. 그것은 본능의 보수주의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성욕은 낡은 대상을 갈망한다 또한 최소한의 임무로 얻어지는 행복을 위한 활동과도 같다. . 재현된 장면을 통해서 볼 적에 푸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처음에 오로 라를 이성적으로 거부한 후 프로크리스의 사랑으로 되돌아갔을 쎄팔러스를 암시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오로라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 프로크리스의 사랑을 필요로 한 것을 암시하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 사랑 그리고 성욕은 모두 인간이 추구하려는 미덕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Cephalus and Aurora>

그리고 <

Rinaldo and Armida>

가 시종일관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다시 심리학적으로 보았던 것처럼 원문성의 방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그림들은 꽤 유사한 방식에 있는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똑같은 텍스트를 획득 하고 있다.

그러나 <

Cephalus and Aurora>

는 우리에게 보다 많은 흥미를 주고 있는데 차용의 방법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 부분을 상세히 알려 주고 자 한다. 하나의 텍스트와도 같은 차용은 회화가 갖는 요소의 부분과도 같 은 것이며 더 많은 것을 지닐 수 있는 기회와 같은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 차 용의 방법은 원문성의 방법과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언급했다시피 월하임이 중요하게 고안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차용이 어떤 그림의 요소로 개입해 있다는 것일 뿐이지 단지 그 작품의 내용을 나타내거나 강화시켜서 회상하기 위해서 차용한 대상 또는 이미지가 변함없이 그 그림의 요소에 몇몇 부분이든, 그보다 더 많은 부분에 포함 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러한 점에서 차용의 방법이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

Cephalus and Aurora>

에 관하여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요 소의 부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비록 그 작품이 텍스트를 적용하고 있을 지라도 재현상의 상당한 요소의 부분을 밝혀내는 방법에 치중될 것이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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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그 점이 푸생이 욕정을 넘어선 이성의 승리에 대해서 어떻게 경험했으며 어떻게 고안했는가를 밝혀내고 있는지에 대한 상당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왜 원문성의 방법과 차용의 방법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 거는 없으나 그림에 매우 정확히 나타나 있으며 그림상의 조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많은 미학이론 학자들이 언급했던 것을 고도의 함축적인 예로 제시 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이 그림에서 예시하고 있는 차용의 방법을 확인하고 자 한다. 실제로 <

Cephalus and Aurora>

의 작품에는 두 가지를 차용하고 있 는데 그 두 가지는 원문성의 방법에 있는 양식을 가지고 함께 작용하고 있다 는 점이다.

첫 번째로는 초상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는 푸생은 하나의 기 발한 표현으로 다시 창조해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

The Presentation of the Portrait to Henri IV,

Louvre, Paris>(1623)도판10)라 불 리는 그림으로 메디치가문의 루벤스가 정확하게 사용해 왔던 것을 이 작품은 하이멘과 큐피트가 이미 약혼한 헨리 4세(Henri Ⅳ)에게 젊은 공주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그림이다.

이것은 하나의 뛰어난 창조품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의. 차용이라고 생각 해볼만하다.

<

Presentation of the Portrait>

이라는 작품은 정확하게 한 시대에 완성된 최초의 주요한 작품들에 속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숫자상으로 9라는 인물들은 1623년 18) 5월에 룩셈부르크에 있는 화가에 의해 개인적으로 성립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 해는19) 여름 또는 초가을쯤 푸생이 이탈리아로 향하려고 파리를 떠나기

18) 그 명확성은 Jacques Thuillier and Jacques Foucart,Life of Marie de Medici, Paris, 1969, and New York, 1970, Deborah Marrow, The Art of Patronage of Maria de Medici, Ann Arbor 1980에서 조사 된 것이다 월하임은. Jacques Foucart와Deborah Marrow와의 개인적인 소통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 푸생이 파리에 도착한 날일뿐 아니라 그를 베니스로 이끈 시초는 Denis Mahon, Nicolas Poussin and

Venetian Painting: A New Connexion I&II, Burlington Magazine, Vol.LXXXVIII, No. 514, Jenuary, 에 각각 언급되어 있다

1946, pp. 15~20, and No. 515, February, 1946, pp. 3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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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전에 룩셈부르크에서 작업하고 있었던 때였다. 아마도 그 때 그 곳에서 그 작품을 우연히 보았을 수도 있었으며, 그렇다면 적어도 그와 같은 작품을 생 각해 낼 수 있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 그 자체로 제작된 것이 라면 모든 것이 미 해결책으로 남는다.

두 번째로 쎄팔러스 자신이 그 초상화를 주시하고 있도록 하는 자세에 대한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다 시피 푸생은 분명하게 자신이 로마에 도착한 시기에 보게 된 한 그림과 유사하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 당시 로마에 있는 알도브란디니 컬렉션(Aldobrandini collection) 에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2-1576)의 <

Bachus and Ariadne

,National Gallery, London>(1523)도판11)를 보고 자신의 마차에서 뛰어내려 Ariadne와 포옹하려는

의 이미지에 관한 그림을 차용한 것이다

Bacchus .20)

이 두 가지 차용들은 <

Cephalus and Aurora>

의 요소의 일부분이지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경우에서 볼 적에 푸생은 이 러한 이미지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해내기 위해서 차용한 이미지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기 위한 것이다.

푸생은 티치아노의 작품을 차용하여 개척해내고 있는데 쎄팔러스가 프로크 리스를 좋아하고 있는 오로라를 거절하는 순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즉 그는. 단순히 이성의 부름에 따라가는 한 남자가 아닌 명쾌한 승리를 이끌고, 술에 취한 젊은 신이 열정의 자유와 같은 욕구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한 남 자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푸생은 루벤스의 작품을 차용하여 제작해내고 있는데 쎄팔러스가 자신의 아내의 사진에 반응하는 때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의무감으 로 추상적인 표현을 나타내고 있지 않고 그의 감정을 교묘하게 타오르도록 만 들어 놓은 한 이미지에 있는 미래의 신부를 얼빠지게 바라보는 젊은 구원자와 같은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20) 티치아노의 Bacchus and Ariadne 작품에서 은 쎄팔러스의 자세를 차용한 것은 처음에 Denis Mahon, Nicolas Poussin and Venetian Painting II에서 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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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쎄팔러스의 심리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는 이러한 차용들은 푸생의 작품을 봐서 알겠지만 이성과 욕구 사이의 충돌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듯 하다. 궁극적으로 욕구와 욕구 사이에서 생기는 하나의 전쟁과 다름없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다시금 창작할 수 있게 함으로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 제한을 두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물론 다양한 대상 들이 작품에 있기는 하지만 식물의 변형들은 서슴없이 자신을 죽음과 그리스 도의 부활에 관하여 우화화 하게끔 빌려주는 일이 절대로 없다. 푸생이 그들을 이러한 목표에 놓아두는 한에는 그들은 교의를 해설해 내고 그렇게 해서 그 교의는 원문성의 방법을 수단으로 그림의 요소로 개입하기에 이를 것이 다. 실제로 두 가지 변형의 그림들의 범례에서 볼 수 있는데 <

Venus with the Dead Adonis,

Musee des Beaus-Arts, Caen>(1630)도판12)

Echo and Narcissu

s (Louvre, Paris)(1630)도판13)가 그것이다. 원문성의 방법은 다시 차용의 방법에 의해서 더욱 강화 된다. 왜냐하면 죽은 아도니스와 죽은 나르 시스 모두를 묘사해내고 있는 푸생이 피에타 상과 유사한 자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그리스도의 사지를 두 명의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지로 배치시킴으로서 푸생은 자신이 고안하는 기독교에 대한 신비스런 사건을 독 특한 감각으로 관찰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교도의 신화에 관한 힘을 일으 키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차용의 방법의 범례들로 본 이러한 두개의 그림들은 더더욱 흥미로운 것이 되는데 내가 서술해낼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인 의미의 한 측 면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가 초기에 원천이 되는 것에서 하나의 대상 즉 이미지를 차용 할 때 내가 말했듯이 상당히 많은 요소가 있음에도 작 품에 포함시키려고 차용한 요소 그 이외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차 용한 요소를 단지 예술가들이 변화시키려는 의미를 갖는데 배경의 수단으로 쓰일 만큼만 놓아둔다는 것이기를 바란다. 월하임은 이 점을 언급하려고 하 는데 의미가 풍부한 차용은 항상 어떠한 원천에 대한 서술 하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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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며 이러한 서술은 예술가들이 무엇인가를 이룩해 내려고 의도된 근본 인식의 부분을 분리시키며 또한 실제로 우리가 차용한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 는 방법과의 뚜렷한 차이점을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차용한 요소를 위해서 내가 내용이라고 불렀던 것을 성립시키고 있다.

그는 <

Venus with the Dead Adonis,

Muses des Beaux-Arts, Caen>, 그리고

<

Echo and Narcissus,

Louvre, Paris>가 모두 이 점을 아주 잘 도해화 해내 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은 원문상의 요소의 일부만큼 부활시키려는 교의를 갖고 있음이 의도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푸생이 잘 차용해 놓은 즉, 우리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피에타 상의 자세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하나 의 피에타 상 또는 일부 또는 다른 피에타 상들의 원천이 되는 인식이라는 것은 이 텍스트가 푸생에게 전달한 것을 강화시키는 그들의 고도의 능력에 있는 방법에서 아도니스와 나르시스의 신체를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어떻게 푸생이 창작해낸 자세가 그 그림에 대한 인식을 보다 더 깊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독특한 피에타 상에 관한 인식만으로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이 점에서 어떻게 푸생이 그렇게 하려고 의도했는가를 살펴보면. 결국 미술사가들이 어떠한 정보를 정리하기 위해서 만든 노력들임에도 불구 하고 단지 그 그림과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것은 내용21) 을 정의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 관한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푸생의 작품들에서 식물의 변형들에 대한 애호를 설명하는데 경계선이 없는 풍부함과 창조력의 장소로서 자연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으로서 최고위를 느낄 수

21) 말하자면 이것은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Festschrift fur Max J. Friedlaender,Leipzig, 1927 에 있는Imago Pietatis에서 논한 것이다 그 자세는. Paris Bordone의Pieta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만일 푸. 생이 실제로 로마로 오는 길에 베니스를 지나쳤다면 훨씬 그럴듯하게 만들어 졌다는 하나의 주장과도 같다.

물론 그것은 월하임이 논하는 역사의 정밀함 이 아니라는 미학의 명료한 주장이다 그것은 파노프스키의 방. 법이 인정될 수 있다고 공평하게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특한 피에타 상이 푸생의 작품의 원천이라는. 것에 관하여 어떠한 독특한 이론도 푸생의 그림이 피에타 상에서 온 것이라는 일반적인 주장을 제공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주장하고 싶지 않으나 그의 제안은 그림의 의미와의 관계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명확성을 알아보는데 종종 실패하는 미술사는 보다 우수한 타당성을 반드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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