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호 2021 April
청주의 역사를 새긴 지명들
청주시 서원구 청남로 2065번지. 필자가 가족을 떠나 주중 대 부분을 머무는 장소이다.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면 서 흥덕구가 서원구로 바뀌었고 도로명 표기가 전면 시행되면 서 수곡동(秀谷洞)이 청남로(淸南路)로 바뀌었다. 직지를 만든 흥덕사에서 유래한 흥덕구가 신라 시대 오소경(五小京) 중의 하나인 서원경에 기원을 둔 서원구로 바뀌었고, 청주읍성의 남 쪽 문으로 이어지는 까닭에 청남로라는 도로명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신라 시대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역사가 우리 대학 주소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명들은 청주를 이해하고 상상하고 경험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실제로 서원대 학교가 있어서 서원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막연하게 청주 남쪽 도로라 청남로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라는 사실을 기억해내 ‘청출어람(靑 出於藍)’을 떠올린 후 청람로(靑藍路)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지명이 단순한 고유 명사이자 지시어로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거의 흔 적, 즉 서원경의 흔적은 물론이고 청주읍성의 흔적을 찾아보기 는 어렵기 때문이다. 지명과 관련된 흔적들도 적지만 그에 대 한 일관되고 풍성한 서사 또한 활발하게 이야기되지 않기 때 문이다. 이것이 청주 지역이 지닌 특수성이다.
청주는 넓은 들을 품고 있는 풍요로운 땅으로, 중원에 자리 하고 있어 전략상 요충지였으며 삼남대로와 영남대로가 분기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청주는 늘 역사의 중심에 있 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같은 이유로 청주에는 역사의 흔적 이 남아 있기 어려웠다. 어느 한 지역을 점유하여 오래 거주할 때 지역 정체성이나 고유문화가 생겨나고 강화되고 전승되기 쉽다. 그런데 청주는 ‘삼남(三南)의 큰 행랑채’와 같은 곳이어 서 늘 사람들이 오갔고 또 들고났다. 청주는 공동의 경험을 기 억하고 공유하기보다는 현재와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면서 발 전을 거듭해 왔다. 충북 지역 전설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충북 의 다른 지역과 달리 청주에는 지역 전설이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다. 전설은 실제 있었던 일로 믿어지며 증거물과 함께 전하는 설화의 한 갈래인데, 두루 퍼져 있는 광포 전설과 특정 지역에 국한된 지역 전설로 구분된다. 청주는 그 옛날부터 오 늘에 이르기까지 폐쇄적인 지역이 아니었던 까닭에 지역 전설 이 전승되기 어려웠다.
현대화된 청주의 모습은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다.
우암산 아래 저지대에서 출발한 도심은 여전히 확장일로에 있 으며, 야외 운동이 가능하도록 잘 조성된 무심천변의 풍경 역 시 새로운 것이 없다. 청주 안에 있어도 청주임을 인식하기 어 려운 것이다. 사실 필자에게 청주라는 지역은 학교와 인근 식 당, 가끔 방문하는 교육 관련 기관들, 그리고 주중 머무는 집 이 각각의 점으로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다. 면은 물론이고 점
과 점을 연결하는 선조차 희미한, 허술한 청주 지도를 머릿속 에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청주가 무지의 장소이자 무장소성 을 지닌 공간이었던 셈인데, 두 가지 이유로 청주에 발을 딛고 청주와 더불어 삶의 역사를 새기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먼저, 청주에 대한 무지 혹은 장소감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결핍과 가난한 일상을 방치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 라 청주가 안정감과 소속감을 경험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 는 장소였으면 하는 바람과 욕구가 생겨났다. 다음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 만난 수많은 유배자들의 삶이 지역 인문학자이 자 교육실천가인 필자의 책무성을 자각하게 했다. 낯선 땅에 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형벌이었던 시대, 어떤 유배자들은 떠 나온 곳을 그리다가 자멸하기도 했지만 대단히 많은 유배자들
이 유배지의 지리와 인문에 대해 기술하는 지역학자로 변신하 였다. 혹은 의사이자 약사로서 지역민의 몸과 마음을 돌봤으 며, 학자로서 지역사회에 새로운 학풍 혹은 문풍을 일으켰다.
유배자들의 적응 및 성장의 서사는 수년간 청주와 수도권을 오가며 바쁘게 산, 나의 삶 전체를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청 주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청주를 기록한 ‘문(文)’, 특히 시와 이야기들을 통해 머릿속으로 청주의 지형을 상상하고 그 위에 여러 장소와 지명을 새겨 넣으며 나만의 인문지리지를 만들 었다. 청주를 이해하는 과정은 청주 땅에 켜켜이 새겨진 역사 를 발견하는 과정이었으며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 짧 은 글은 그렇게 공부하고 상상한 청주에 대한 주관적인 보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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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만개한 무심천변과 청주시내 전경 사진: 청주시청
제474호 2021 April 청주의 역사가 무심천에서 비롯되기도 하였고, 변함없이 청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 역사에 흔적을 남긴 지형물이 바로 무심 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도종환 시인 의 말처럼 무심천은 “그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
고, 그 유구한 역사가 청주의 지명에, 청주에서 전승되는 여러 이야기에, 그리고 청주를 노래하는 시들에 오롯이 새겨져 오 늘에 이르고 있다.
무심천은 현재 34.6㎞, 유역 면적 197.32㎢의 하천으로 청 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미호천과 합수되어 바다로 흘러간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택지리」 첫 구절에 “해마다 떠내려가고 무너지는 것을 걱정”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주에서의 물난리, 구체적으로 홍 수로 인한 무심천의 범람은 상습적이었고 유명했다. 역사 기 록과 더불어 무심천의 범람과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많이 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날에 토정 이지함(1517~1578)이 청주(淸州)와 청주(淸酒) 가 동음이의어임에 착안하여 ‘청주 뜨는 용수 사쇼’라고 외치 면서 홍수를 예고했다는 홍수 예고담부터, 성안길 중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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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은행나무인 압각수 전설은 물론이고, 주성(舟城)이라 는 별칭의 유래담, 청주의 상징인 용두사지 철당간의 유래담 등 청주의 주요 상징물이나 지명 등이 모두 무심천과 관련되 어 있다. 무심천의 범람은 심지어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산 이름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수위가 높아지면 물에 뜬 것처 럼 보여 ‘뜬섬’ 혹은 ‘부산(浮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사실은 홍 수 때 떠내려온 청주 땅이라는 이야기다. 원래 청주 땅이었기 에 청주목에 세금을 냈는데, 현명한 부여 현감이 부임하여 세 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무심천의 범람이 얼마 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 잘 보여주는 전설이다.
청주읍성은 사라졌지만 남문과 북문, 서문과 동문, 성안길 이라는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고, 읍성 자리는 지금도 청주 의 중심이다. 「호서읍지」 등 고지도(古地圖)를 보면 청주읍성 과 무심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북쪽에 주산이 있는 전 형적인 입지는 아니지만 동서로 우암산과 무심천이 있는 배 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심천이 남 쪽에서 북류하여 읍성 근처에 이르렀을 때 왼쪽으로 꺾이면 서 부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수천(無水川)이 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로 평소에는 물이 적고 유속이 약한 순 한 개울이, 큰물이 지면 미친 듯이 범람하여 하천 양쪽의 전답 과 가옥을 휩쓸어가는 악천(惡川)으로 표변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유량이 적은 평소에는 청주 도심이라는 지형을 만 나 왼쪽으로 꺾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해졌을 때는 상황이 달
라졌던 것이다. 유량이 늘고 유속 이 빨라지면 직선으로 흐르고자 하는 물길이 남문을 부수고 청주 읍성을 휩쓸며 북문으로 흘러갔 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색 (1328~1396)과 권근(1352~1409) 등 여말선초 문인들이 청주 옥에 갇혀 있을 때 “갑자기 천둥이 치 고 폭우가 내려 앞 냇물이 넘쳐 남문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북문 까지 치받아 성안의 물이 한 길이 넘어 관사는 물에 잠기고 백성들 의 집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은행나무에 올라 홍수를 피함으로써 스스로 무죄임을 입증해 방면되었다 는 기록도 전한다. 그 은행나무가 바로 중앙공원에 있는 압각 수이다.
무심천이 부자연스럽게 돌아나가는 길목에 청주읍성이 위 치한 것 외에도 범람을 일으키는 지형적인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첫째, 무심천의 바닥은 높은데 시가지는 낮은 편이었 고, 둘째, 주류는 물론이고 작은 지류의 대부분이 중상류에 위 치하고 그 하류에 청주가 자리하고 있어 홍수 시 유량이 대거 유입될 수밖에 없었으며, 셋째, 무심천 상류에 높은 산지들이 위치하고 있어 산이 헐벗었을 때 유속이 더 빨라지고 유량이 불안정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고, 넷째, 수로는 짧은 반면 에 하상계수가 커서, 즉 경사도가 커서 홍수 시 유속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청주는 홍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 다. 청주읍성을 배 모양의 성, 즉 주성(舟城)이라고 부른 것이 나, 읍성의 중앙에 있는 용두사에 돛처럼 높은 철당간을 세워 배가 표류하지 않게 하려 했다는 이야기 등이 모두 청주의 지 형학적 여건과 읍성의 입지에서 나온 것이다.
무심천의 물길을 바꾸어 직강화하고 강둑을 쌓아 물을 가 둘 수 있게 되면서, 즉 무심천을 통제하게 되면서 위험과 위협 요소는 사라졌다. 오늘날 무심천은 친근한 도심 하천으로 사 계절을 느끼고 휴식할 수 있는 장소로 청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에 따라 기록과 문학 속에 등장하는 무심천의 모 습도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이제 무심천은 사건의 주체나 배 청주읍성도 모사화(박효영 作)
자료: 구례 운조루 소장본 청주의 지형과 청주읍성의 공간배치
자료: 임덕순 1998, 530; 예경희 2003에서 재인용.
직지를 낳은 무심천
악천(惡川)으로 표변하기도 했지만, 무심천은 청주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기도 했다. 무심천은 한양 에서 내려오다 만나는 너른 땅이자 추풍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할 때 만나는 너른 땅인 청주를 비옥하게 했다. 특히 우암산 중턱에 촌락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저지대로 내려오면서 형 성된 도시가 청주라는 점에서, 청주는 하천에 의해 운반된 자 갈·모래·진흙이 범람하여 연안의 낮은 땅에 퇴적함으로써 이루어진 충적평야를 바탕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신증동국여 지승람」에 나오는 “호걸이 많고 동남 지역의 집결지이자 앞서
심천이 합수되는 충적평야 지대인 까치내(일명 ‘작천’)의 부자 이야기 등을 보면 무심천변 청주가 물산이 비교적 풍부한 곳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서읍지」에도 “세간의 풍속과 문명됨 이 남쪽의 으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무심천변에 위치했기에 청주는 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무심천 유래담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청주에는 특 히 불교 사찰이 많았다. 20세기 초에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석 불과 관련 유적들을 발굴하였는데, 당시 개발에 참여했던 사 람들이 운천동 일대는 파기만 하면 불교 유적이 나온다고 말 했을 정도였다. 당간의 높이(12.7m)를 볼 때 성안길에 있던 사 찰 용두사(龍頭寺)의 규모도 대단했을 것이고, 세계 최고(最 古)의 금속활자 직지를 만들 정도였으니 흥덕사 역시 그 규모
용두사지 철당간 사진: 청주시청
중앙공원 압각수 사진: 청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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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직지는 무심천의 혜택, 비옥 한 토지와 그것을 물적 토대로 삼아 가능했던 청주의 문화적 수준과 역량을 증거해주는 대표적인 유산이다. 구텐베르크가 동양의 금속활자 기술을 받아들였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 되고 있고, 직지에 대한 연구성과와 논쟁을 포함하면서도 추 리 형식을 취한 「직지」라는 소설이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청 주시에서는 정류장 안내판이나 발길이 닿는 보도블록, 길가 담장에도 ‘직지’라는 단어를 새겨 넣어 청주가 직지의 고장임 을 홍보하고 있다. 그 덕인지 청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나 라 사람들 대부분이 청주가 직지의 고장임을 안다. 그러나 지 금과는 출판 및 유통 여건이 완전히 다른 고려 시대에, 수도에 서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에서, 관(官) 주도가 아닌 승려의 주 도로, 그것도 여신도의 시주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조선 후기까지도 인쇄와 출판은 관이 주도하는 국가 차원 의 큰 사업이었다. 잘 알려진 「팔만대장경」도 고종 23년 대장 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동안 추진한 국가사업의 성과이다. 사 찰에서 목판에 짧은 경전 구절을 새겨 찍은 후 탑에 봉안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했지만, 종이가 귀하고 무엇보다 먹고사 는 문제가 우선인 시대에 베끼기도 아니고 목판도 아닌 금속
활자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직지로 실 현되었다. 사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민간 출판업 자들이 등장하여 목판에 새겨 인쇄하는 방각본 소설을 생산하 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려 시대, 청주의 한 사찰에서 금속활자 를 만들어 경전을 찍어냈다는 것은 한 승려를 통해 발현된 축 적된 불교문화의 수준 및 역량을 짐작하게 하고, 그러한 문화 역량을 발휘하게 한 청주의 물질적인 풍요와 그 풍요를 허락 한 무심천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무심천 위 돌다리, 대교의 기억
조선 시대까지 청주는 대교(大橋)의 도시였다. ‘청주’하면 직지 가 아닌 대교였고, 심지어 무심천을 대교천이라고 기록한 지 리지가 있을 정도다. 돌로 만들어 석교, 청주읍성의 남문과 이 어진다고 하여 남교 혹은 남석교, 간혹 청남교라고도 불린 이 다리는 조선 시대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돌다리로 유명했 다. 2004년 발굴 조사로 남석교가 3행 26열의 석주로 총 길이 는 80.85m임을 확인하였다. 기원전 57년에 만들어졌다는 기 록이 있기는 하지만 10세기 후반 내지 11세기 초 청주읍성이 축조되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무 우암산과 청주시내
사진: 청주시청
천의 유로가 현재와 같이 변경되면서 대교는 더 이상 교량 역 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무심천 하상 지역이 매립되어 시장으 로 변모할 때 조금씩 매몰되면서 그 모습을 감춰버렸다. 남석 교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와 석교동이나 남석로 등의 지명을 통해 석교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대교는 묻혀버렸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청주읍지」, 「조선환여승람」 등 지리지에는 물론이고 여러 문 인들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다리이다.
나그네는 비오는 남교에서 헤어지고 客散南橋雨 구름은 상당성을 가로 둘렀네 雲橫上黨城 서쪽 바람이 불어 잎을 떨구니 西風吹落葉 돌아가는 말은 가을 소리를 밟네 歸馬踏秋聲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김득신(1604~1684)의 시이다.
헤어짐의 장소가 남교, 즉 대교임을 알 수 있다. 비가 내리고 멀리 구름이 상당성을 두르고 있는데 서풍이 불어 가을 잎이 떨어지니 가을 소리를 밟으며 돌아온다고 하였다. 많은 시에 서 대교는 청주를 떠나는 문인들이 이별을 고하고 감회에 젖 는 장소로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청주에 당도했음을 인식하 는 장소로도 등장한다. 사실 장소에 대한 인식은 눈에 띄는 식 생이나 지형, 구조물에 대한 인지에서 시작된다. 청주에 대한 인식 또한 청주에서 볼 수 있는 혹은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 특징적인 것에 주목함으로써 시작될 수밖에 없다. 저지대 평지를 걸어온 관리나 여행자들, 심지어 청주 사람들에게 무 심천을 가로지르는 대단한 규모의 돌다리는 청주임을 인식하 게 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었다. 대교에 당도하여 ‘이곳이 대 교’임을, 그리고 ‘이곳이 바로 그 대교가 있는 청주’임을 확인 했을 것이다. 대교에 당도했을 때 청주에 도착했음을, 혹은 대 교를 건넜을 때 이제 청주 바깥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성안동은 물론이고 무심천 건너 청남대로변 역시 높은 건 물들과 아파트 등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어, 자연물인 무심 천의 존재감이 옛날 같지 않다.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
한동안 청주를 방문하는 지인들은 청주 톨게이트를 지날 때나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시원하게 펼쳐진 가로수길에 진입 했을 때 청주에 당도했노라고 알려왔다. 필자 역시 톨게이트 를 지날 때는 물론이고 특히 가로수길에 접어들었을 때 청주 임을 실감하곤 했다. 청주에 근무하기 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이 걸어갔던 가로수길이 처음 만난 청주의 모습이기 때 문이다. 2021년 현재, 주변에 외곽도로가 여럿 교차하고 도로 변도 정비되면서 가로수길 역시 예전 같지 않아졌다.
지금도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을 지우면서 청주의 지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자면 여전히 그 중 심이자 출발점은 무심천이다. 읍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우리 대학 앞 청남대로에 서서 북쪽을 보면, 높은 철당간을 돛대처 럼 세우고 있는 주성, 곧 청주읍성이 보이고, 읍성을 향해 걸 어가면 조선 팔도에서 가장 긴 석교를 만나게 된다. 석교를 건너면 성안길이 시작된다. ‘금강전도’를 그린 정선처럼 심안 (心眼) 혹은 날아가는 새의 눈으로 우암산에 올라 청주 시내 를 조망한다면 청주읍성, 즉 청주의 오랜 도심은 그야말로 무 심천에 떠 있는 배처럼 보일 것이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청주 의 지형을 상상하다 보면, 고유명사이거나 단순 지시어였던 지명들이 하나씩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청주의 역사를 품은 지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 도시 청주에 새겨져 있 는 풍성한 과거의 역사가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내기 시작 한다.
국립청주박물관 편집부. 2006. 무심천 사람들. 청주: 국립청주박물관.
예경희. 2003. 청주 무심천과 남석교에 관한 역사지리적 고찰. 한국지역 지리학회지 제9권 제4호: 437-460.
오세정. 2016. 충북지역 전설 연구. 우리말글 제71권: 185-212.
임덕순. 1998. 고청주의 공간적 배치와 상징성: 정치-문화지리학적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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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제474호 2021 Apr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