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해요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우리가 함께해요"

Copied!
26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앱 마켓과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를 통해

<문회재 사랑>을 만나보세요

| 모바일 앱진 | | 전자책 |

발간등록번호 | 11-1550000-000370-06 ISSN | 2005-3584

우리가 함께해요

하나

한국 전통사상과 예 법 에 담겨있는 겸손

겸양지덕의 대명사 고불 맹사성

소통의 시 대, 겸손한 리 더 십 의 힘 A

APPRRIILL 22001155 V

VOOLL.. 112255

한국인의 마음

겸손

謙遜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인정하다

(2)

차 례

ÚÇ  殫 W©

‘겸손謙遜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인정하다

þ ä!

한국 전통사상과 예 법 에 담겨있는 겸손 김창환

ÿ :

겸양지덕의 대명사 -고불 맹사성孟思誠 신웅순

Ā y 소통의 시 대, 겸손한 리 더 십 의 힘 유창선

Ǩ °.

집 의 얼 굴‘창호窓戶, 다양한 모습으로 내외공간을 소통하다

주남철

Ý5 p ëØ©‚

자연과 습성이 만들어낸 걸작의 진 미 -고창 풍천장어

황 영 철

ä,¬ X; á ‡D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생동하는 시간과의 조 우 -제 천 의 림 지

김 진 희

¸Ù ì1« ÓBjJ¬z 찰나의 순간, 천 년 의 기억을 기록하다 -사진작가 오세윤

성 혜 경 04

08

12

16

20

24

28

™ )¬« à ¢

장난감 없 던 시 절 빗자루 타고 놀던 놀 이 -죽마타기

김순희

ՄO

지 식 인 의 나라, 조선의 서 쾌 강명관

”oœ « ’u

디 지 털 한글 시대와 공병우 세 벌 식 타자기 이 기 성

®Q]í^ð¤p

순회 치유사들의 약초에 대한 전통지식 -칼라와야족의 안데스적 우주관 박원모

ŸU W¨ ^ðW0

생생하게 보고 느끼고 즐기는 문화재 울산,‘ 백 년 의 빛, 천 년 의 소리를 찾아서’

이채윤

^ðµ oC X!.

우리는 왜 위 인 의 생가에 가는가?

신익수

XðN @!+ ^𵠓ê 눈물과 회한으로 쓴 전란의 기 록 -『 징비록』

유환석

çä+ ^ðµÍ

TV에 서 만나는 내 고향 문화재, 매주 금요일 저 녁 <KBS 6시 내 고향>에 서 만나요!

æ ^ðµ æ ÄÕ¬

소중한 문화재, 우 리 손으로 푸르고 건강하게 -제일모직

김 새 별

6±ÞÃû6±« {U 32

34

36

38

42

44

46

48

49

50

발행일 2015년 4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 문화재청 발행인 나선화 편집 대변인실 총괄기획 안형순, 이선준, 김수현

편집위원 김성도, 김지성, 방인아, 이신복, 임은경, 장영기, 정규연, 김정임, 오춘영, 황경순 주소 302-701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문화재청 대변인실

전화 (042)481-4677 팩스 (042)481-4679 이메일 [email protected] 기획・디자인・제작 (주)홍커뮤니케이션즈 www.hongcomm.com

| 본지의 구독은 무료입니다.

| 본지에 실 린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 본지의 저작물은‘ 공공누리’의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그림・만화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마

‘ 겸손

謙遜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인정하다

모름지기

실 로 인 격 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기보다

상대를 인정하고 높여준다.

나 의 위신을 내세우기 전 에 상대방을 높이고

인정했던 우 리 조상.

그 겸손의 마음이 문화재 속 에 깃들어 있 다.

(3)

01 02

육군에서 외국군 위탁교육생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과정을 실시했을 때, 참가한 교육생이‘한국에서의 문화 충격 ’을 주제로 발표를 했다.

“한국어는 경어와 겸양어가 있 어 어려웠다.”며 나 이 어 린 한국 장교들에게‘진 지 드셨어요?’,

‘연세가 어 떻 게 되셨어요? ’했다가 웃음을 산 적 이 여 러 번 있다고 한다.

이 러 한 언 어 의 차이는 서양과 달 리 생 활 속 언어에서부터 자연스레 베 어 나오는 겸손의 깊이를 만든 한민족의 핵심철학에서 기인한다.

글. 김창환 (서울국학원 사무총장)

ÚÇ❶ü|ô÷ý±ƒ¨ #Ð[ r1S ®ºä.

|’ nUS 9 8Î ^ð

겸손은 예로부터 심 신 의 수양과 대인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 으로 중요시해왔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 스로를 낮추는 것, 무조건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모자람을 이 야 기 하는 것 이 아니라 자신과 타 인 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둔 것 이 바 로 겸손이다. 존중하는 마음에서 겸손이 자라고, 겸손에서 예 의 와 질서가 생 기 며, 예 의 와 질서를 통해 공동체가 유지된다. 겸손은 공 동체를 유지하는 기 본 토대가 되는 것이다.

우 리 민족은 아버지를 소개할 때 ‘내 아버지’가 아 닌 ‘우 리 아 버 지’라고 한다. 우리가 영어나 서 양 의 언어를 배울 때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언어적으로 미국은 항상 ‘my father’라고 한다. 우 리 는 항상 ‘우 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잘 살아야 돼’라고 해야지

내가 잘 살아야 돼’하면 문제가 된 다. ‘우 리’라는 굳건한 공동체 의 식 이 자리하고 있 는 것이다. 그 런 우 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은 국채보상운동이나 IMF 금 모으기 운동, 태안기름유출 사건으로 발휘되었고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 다.

우 리 민족에게는‘다스림’마저도 소수가 다수를 누르고 통제하고 몰아가는 것 이 아니다.‘다스림’이 란 ‘다-살 림’으로 겸손함을 가 진 소수가 모두를 살 리 기 위 한 ‘지혜로운 배 려’와 ‘존중’으로 모 두를 하나로 만드는 리더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 전통사상과 예 법 에 담겨있는 겸손

01. 흥인지문 편액. 태조 이성계는 한양천도 후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한양의 4대문의 이름에 대입시켰다. ⓒ문화재청 02. 덕흥리 벽화고분에 그려있는 묘주와 13군 태수들의 절하는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 ê8¦N „ìæ ˜g

‘누구나 태양과 같 이 밝은 본성을 지니고 있 어 사람 안 에 하늘과 땅 과 사람이 하나로 녹아 있 다. 본심본태양앙명本心本太陽昻明인중천지 일人中天地一’이라는 문구가 최 치 원 선 생 이 한자로 번역한『천부경』으 로 전해지고 있 다. 이 처 럼 우 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태양처럼 밝은 본성, 신 성, 얼 을 지 닌 존재로 보았다. 사람이 본성을 깨달으며 어 떻 게 살아야 할지 알 게 되고, 본성의 이 치 에 따라 세상 을 두루 이롭게 하며 얼 을 키우는 것을 삶 의 목적으로 두었다.

그리하여 어린이는 얼 이 어 리 기 시작한 상 태, 얼 이 덜 성장한 사 람을 말하고, 어른은 얼 이 큰 사람, 어르신은 얼 이 커 서 신 과 같은 사람을 뜻한다. 이 는 육체가 나 이 들 어 그냥 늙은이가 되는 것 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 속 성장하는 존재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 다. 이 런 문화 속 에 자연스레 어린이는 어른과 어르신을 공경하고 겸손한 예 를 갖추어야 함을 알 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얼 을 키우는 예법이자 수행법으로 절 문화가 있 다. 절 은

‘‘제 얼’의 준말로 자기를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얼 을 찾는다 는 뜻 이 담겨있다. 절 은 나를 대단한 것 인 양 내세우고 높이는 아상我想을 버 리 게 하고 마음의 겸 양謙讓을 갖추어 하 심下心을 이 루 게 한다. 그래서 절 은 사람의 가장 겸손한 마음을 담은 아름 다운 행동이라 여겨지고 있 다. 절 은 하늘에 올리는 것 이 나 땅 에 올리는 것 이 나 조상이나 어르신에게 하는 것 이 나 모두 같은 것 으로, 존재하는 모두의 뿌 리 인 하늘 앞 에 존중과 겸손을 표하는 것 이 다. 진정한 겸손은 나와 상대에 대한 깊 은 존중에서 비롯되 기 에 나도 남도 가장 신성한 존재로 인정하는 민족의 철학은 겸 손 의 문화를 꽃피울 수밖에 없 는 것 이 다.

8Î ^ðS `N xŸ £æ ï­Ìå

공자는『논 어』에 서‘군자들이 살고 있 는 구 이(九夷: 동 이, 곧 우리나라)

가 서 살고 싶다’고 했으며, 공자의 7대손 공빈이 기록한 『동 이 열 전』에 는‘그 나라는 크지만 교만하지 않고 그 병사는 강하나 침 략 하지 않는다. 풍속이 순후하여 길 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먹 는 자는 밥을 미루고 남녀는 따로 거처하니 가 히 동방예의禮儀의 군자국君子國이 라 하겠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주변국의 수많은 역사왜곡과 분별없 이 받아들인 많은 외래문화 속에서 아름다운 ‘우 리’라는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게 되었고, 성공 중심의 무한 경 쟁 속 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며 겸손과 배 려 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 다. 나 만 행복하려고 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를 이 룰 수 없 다. 물 질문명의 한계에서 새로운 정신문명의 시대를 열어가는 열쇠는 조화와 상생의 공동체 의 식, 반만년 한민족의 홍익철학에서 찾을 수 있 다. 홍익은 진정한 겸손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고,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 이 기 때문이다.

03.합장은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아 세우고 허리를 굽혀 하는 절이다. 절은 자기를 낮추어 겸 손한 마음으로 얼을 찾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4.월드컵 예선경기를 앞두고 태극기를 펼치고 있는 응원단. 태극기에는‘ 사람 안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들어있 다’는 조화와 상생의 천지인(天地人)사상이 담겨있다. ⓒ연합콘텐츠 05.최치원 선생이 한자 로 번역한『 천부경』.‘ 누구나 태양과 같 이 밝은 본성을 지니고 있 어 사람 안에 하늘과 땅과 사 람 이 하나로 녹아 있 다.’는 문구가 전해지고 있 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6.국채 1300만 원 보상 취 지 보도기사. 우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은 국채보상운동이나 IMF 금 모으기 운동, 태안기 름유출 사건으로 발휘되었다. ⓒ대구시청

상생과 조화, 타 인 에 대한 존중과 배 려, ‘우 리’라는 가치가 살아 있 는 공동체 의 식, 이 기 심 이 아 닌 공심을 선택하게 하는 교육, 두 루 이 롭 게 하는 정 치, 더불어 살아가는 경제로 공심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 바로 오천년 한민족의 철학이다.

|« ^ðS â  æ_¾« Ìå

이 철 학 이 ‘홍익인간 재 세 이 화弘益人間 在世理化’라는 단군의 건 국 이 념 이 다. 이 는‘사람 안 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들어있다’

는 조화와 상 생 의 천 지 인天地人사상을 누구나 실천할 수 있 는 생활철학으로 구체화 한 것 이 다. ‘널 리 사람을 이 롭 게 하 리라’

라는 단군의 뜻은 단순한 통치이념이나 지 배 이데올로기가 아 니 었 다. 한민족이 처 음 나라를 세웠을 때 “이 렇 게 한 번 살아보 자. 다 같 이 이 런 나라를 한 번 만들어 보자”며 품었던 민 족 의 첫 마음, 우 리 선조들이 공동체와 국가, 그리고 개 인 의 삶을 통 하 여 실현하고자 했 던 염 원 과 이 상,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 떻 게 살고 싶은가’에 대 한 우 리 조상들의 대 답,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삶 의 가치와 존 재 이유가 바로 홍익이었다.

한편 『태 백 일 사』 「한국본기」 중 에 오훈五訓이 있 는 데, 오훈의 다 섯 번 째 항목인‘겸화불투謙和不鬪’는 겸손하고 화복하여 싸우지 아니한다고 이르고 있 다.

이 어 배달국倍達國시대에는 나라의 체계를 바로 세우는 중심가치, 삼륜구서三輪九誓중 구서의 다섯 번 째 항목이‘ 손우군遜于群’으로 무리에게는 겸손하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그 범위가 넓 어 지 고 제천행사를 통해 두 레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하였고, 조선시대 에 는 향약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의 자 치 규약과 공동체 조직으로 구체화 됐으며, 서원과 함께 향촌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홍익은 두 레 정 신, 품앗이 문화, 상부상조의 생활화 등 화합과 상생의 공 동 체 문화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조선시대의 중심 가치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중 사단의 인 의 예 지仁義禮智에 신을 더하여 오상

이 라 한다.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공동체를 위 한 가르침을 백 성 에 게 알리고 교육시키기 위 해 한양의 4대문大門 의 이름에 대입시켰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 의 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 그리고 중앙 에 는 보신각普信閣으로 이 름 지었다.

03 04

05

06

(5)

03 01

고불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대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조선시대 명재상 중 의 명재상이었다.

맹사성하면 으 레 그 의 효행과 더불어 청렴과 겸양을 떠올리게 된 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재상이라 불려왔던 것도 그 의 성품, 특히 겸양지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 다.

맹사성은 최고의 정치가이면서 시조 문학가이다.

이 시 대 에 맹사성의 청렴과 겸 양 에 대 해 한 번 성찰해보는 것은 현 시 대 우리의 삶 에 큰 의 의 가 될 수 있 을 것이다.

맹사성의 청렴과 겸양지덕을 그 의 치적과 함께 조명해본다.

글. 신웅순 (중부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ÚÇ❷ü|ô÷ý±ƒ¨ #Ð[ r1S ®ºä.

ÍLæ q

맹사성(孟思誠, 1359~1438)은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 창, 호는 고불 이 다. 그는 최 영 장군의 손녀사위이며,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 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 없 이 절의를 지켰다.

맹사성은 우왕 12년 에 문과에 급제, 조선조에 들어와 대사헌, 판서를 거 쳐 좌의정으로 세종 17년(1435)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조선조 500년사의 명재상으로 황 희, 이 원 익 등과 함께 청 백 리 에 올랐다.

맹사성이 살았던 옛 집, 맹 씨 행단(사 적 109호)에 가보면 그가 청 백 리 에

오른 이유를 알 수 있 다. 8년 이 나 정승의 자 리 에 있 었 던 고불의 집 은 빗물이 새고 세간은 볼품이 없 었 다. 나들이 할 때는 언제나 소 를 타고 다 녀 백성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 지 못했다.

하루는 판서가 맹사성의 집 을 찾았다. 마 침 소낙비가 쏟아졌다. 낡 은 집인데다 물벼락까지 맞았으니 여기저기에서 빗물이 새나왔다.

판서의 의 관 이 다 젖었다. 먕사성은 빗물을 피 해 앉으면서 구시렁 거렸다. “하필 손님 계 실 때 소낙비가 쏟아질게 뭐 람.” 이 때 판서 는 자 기 집 에 사랑채를 크 게 짓 고 있 었 다. 집 에 돌아온 판서는“정 승 의 집 이 그러한데 내 어 찌 바깥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 라 며 당장 공사를 중단시켰다.

맹사성은 관에서 주는 녹미 외에는 먹 지 않았다. 하루는 밥맛이 달 라 아내에게 말했다. “ 이보오, 녹미는 아 닌 듯한데 어 디 서 구해온

01. 구괴정九槐亭. 아산 맹 씨 행단 뒤편에 서있는 정자로 맹사성이 황희, 권 진 등 재상들과 우의 를 다지는 뜻에서 느티나무 아홉 그루를 심고 정사를 논했다고 전한다. ⓒ신웅순02. 고불 맹 사성 시조비. 비 석 하단에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원문이 새겨져 있 다. ⓒ신웅순 03. 「 강호사 시가」의 배경인 배방면 중리 앞을 흐르는 금곡천. ⓒ신웅순

고불 맹사성

孟思誠

겸양지덕의 대명사

02

(6)

비 가 그 쳐 각자 제 갈 길 로 떠났다. 과거시험이 끝났다. 면접관 맹 사성과 선 비 가 마주 앉았다. 맹사성은 이 미 선 비 가 합격한 줄을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 며 물었다. “어 떻 게 되었는公?” 깜 짝 놀라 선비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 다. 얼 떨 결 에 말을 받았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堂.” 맹사성은 빙긋 이 웃으며 말했다. “길 가 거 렁 뱅 이 견공에게서라도 항상 배울 것 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 이 공인의 길임을 명심하시게나.” 겸손도 겸손이지만 정승의 말과 행실은 이 렇 게 소탈하고 소박했다.

îo’ ; Ä3

맹사성은 음률에도 밝았다. 풍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영 의 정 하륜이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 여 악공을 가르치도록 왕 께 건 의 할 정도였다. 피 리 소리가 들리면 맹사성이 집 에 있다는 표시였다.

언제나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 키 면 한 곡조씩 불렀다. 스스로 악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토록 음률을 즐기고 사랑했다.

그가 우의정 재 임 시 『태종실록』 편 찬 감관사로서 감수한 일 이 있 었 다. 『태종실록』이 편찬되자 세종이 한 번 보자고 했다. “왕 이 실록 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 를 본받게 되 어 사관이 두려워 나 한 잔 하고 가시구려.” 그는 못 이 기 는 척 다 시 자 리 에 앉았다.

그런데 스님은 찻잔이 넘치는데도 계 속 차를 따르고 있 었 다. “스 님, 찻물이 넘 쳐 방바닥이 다 젖습니다.” 맹사성이 소리치자 스님 은 이 렇 게 말했다. “찻물이 넘 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 은 아시면서, 지 식 이 넘 쳐 인품을 망치는 것 은 어 찌 모르시오.” 이 한 마디에 맹 사성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방문을 나서다 문틀에 그만‘쿵’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한 마 디 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 이 없지요.” 머리를 한 대 더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겸양지덕을 맹사성은 평 생 의 좌우명 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명재상이 될 수 있 었 다.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에 내려갔다 상경하던 도중이었다. 용인에서 비 를 만나 허름한 어 느 주막에 들렀다. 과 객 하나가 누상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 었 다. 선비는 비 에 젖 은 허술한 맹사성의 차 림 새를 보았다. 이 런 저 런 얘기로 둘은 서로 친해졌다. 선비는 이 노 인 을 놀 릴 양으로 공당公堂놀이나 하자고 했다. 맹사성이 묻고 청 년 이 대답하기로 했다. “무엇하러 한양에는 올라가는公?”, “과거시험 보려고 갑 니堂”, “내가 시켜줄公?”, “그러지 못할 것 이堂”선 비는 노인이 과거시험이 무 엇 인 줄 알기나 하겠냐는 듯 비아냥거렸다.

05

쌀이오?” 그러자 아내는“오 래 묵 어 차마 먹을 수 없 기 에 이웃집에 서 빌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허 허, 벼슬아치가 녹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 이후엔 그리하지 마시오.” 이 처 럼 일국의 정승임에도 그는 평 생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æ q

청렴한 삶도 삶이려니와 그를 명재상으로 만든 것 은 겸양지덕이 었 다. 그는 자신보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공복의 예 를 갖추고 반드시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였다. 들어와서는 맨 윗자 리 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에는 공손하게 배웅했다. 그리고 손님이 말을 탄 뒤 에 야 비로소 들어왔다. 그렇게 그는 겸손했다.

맹사성이 처음부터 그토록 겸손했던 것은 아니다. 맹사성이 장원급 제하여 지방의 군수로 부임했을 때 의 일 이 다. 어 느 날 그는 근처의 무명 선사를 찾아 스님에게 질문했다. “스님, 이 고을 수장으로 제 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 보오?” 그러자 스님은“착 한 일 많 이 하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에 맹 사성은 “아 니,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이 런 말을 들으려 고 찾아온 것 은 아니외다.”라 며 버 럭 화를 냈다. “녹차

06 04

04. 전세 맹고불 유물(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 유품들 가운데 옥적과 도장에 새 긴 시문구 등 은 음악과 시에 조예가 깊었던 맹사성 선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문화재청05.

아산 맹 씨 행단(사적 제109호). 고불 맹사성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 래 고려 후기에 최 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문화재청06. 맹사성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21호). 봉분 앞 에는 세종 20년(1438)에 세운 묘비가 있으며 봉분의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이 배치되 어 있 다. ⓒ문화재청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 을 것입니다. 불가하옵니다.” 세종은 그의 말 을 따랐다. 품성은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정사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맹사성은 고택에 살면서 아름다운 「강호사시가」 4수를 지었다. 이 것 이 우리나라 최초의 연 단시조(연 이 어 진 독립된 단시조)이 며 훗날 강호 시 가 의 원지류가 되었다. 맹 씨 행 단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 로 만 년 에 지 은 시조로 추정된다. 「 강호사시가」 첫 수는 이 렇 게 시 작된다. ‘강호에 봄 이 드 니 미 친 흥 이 절 로 난다 / 탁료계변濁 溪邊 에 금린어錦鱗魚안주로다 / 이 몸 이 한가로움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대자연 속 에 봄 이 돌아오니 미 친 흥 이 절 로 난다 / 시냇가에 탁 주, 안주는 쏘가리로다 / 이 몸 이 한가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자 연 에 몸을 맡 기 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 다. 청 렴 과 겸양지덕의 정 신 이 없었다면 이 런 시조를 지 을 수 있 었 을까 싶 다.

일생을 청렴하게 살았고 겸양지덕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맹사성.

그는 진 정 재상다운 재상이었다. 재상은 마음과 영 혼 이 깨끗해야 한다. 물욕이 영혼을 망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 지 만 실천하 는 사람은 그 리 흔 치 않다. 만 인 의 존경을 받을 수 있 는 세심정혼

沁淨魂의 정치인은 과 연 몇이나 될 까.

(7)

한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 던 대한항공 조현아 前부사장의‘땅콩회항’ 사건은 교만으로 가득 찬 리 더 의 행태가 어 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생 생 히 보여주었다.

직원들을 마 치 하 인 다루듯이 멸시하며 욕보이는 갑 의 횡포는 잘못된 황제적 리 더 십 의 전형이었다.

리더가 겸손의 덕을 갖추지 못한 채 아랫사람들 위 에 군림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 힐 뿐 아니라 자 기 자신도 추락시키고, 결국 조직에까지도 큰 타격을 입 히 게 됨 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높은 지 위 에 있 는 인사들이 교만한 행동을 보였다가 질타를 받는 일 들 이 이어진다.

오늘날의 사회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낡은 리 더 십 의 모습이다.

현대사회는 제왕적 리더십에서 탈피하여 겸손한 리더십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 다.

우 리 시 대 에 왜 겸손한 리 더 십 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그 힘 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글. 유창선 (시사평론가)

ÚÇ❸ü|ô÷ý±ƒ¨ #Ð[ r1S ®ºä.

(±+ ±ƒ¨ #ÐB é.

일 찍 이 노자(老子, BC 570~479)는 『도덕경』 제66장에서 이 렇 게 말했다.

‘ 강과 바다가 온갖 계 곡 물 의 왕 이 될 수 있 는 까닭은 / 잘 낮추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온갖 계 곡 물 의 왕 이 될 수 있 다 / 이러하기 때문에 백성들 위 에 서고 싶으면 / 반드시 자신을 낮추는 말을 써 야 하고 / 백성들 앞 에 서고 싶으면 / 반드시 자신을 뒤 로 해 야 한 다’ 노자는 강과 바다가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기보다 훨 씬 높은 곳에서 흘러오는 계곡 물 의 왕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 러

한 자 연의 원 리 와 마찬가지로 성인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로 백 성 을 통치할 수 있 는 것 이 다.

자신을 낮추라는 노자의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더욱 이 현대사회는 갈수록 다원화되고 복잡해지고 있 다. 게다가 모바 일시대가 낳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의 급격한 확산은 이 제 까 지 의 수직적 위계사회를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로 변모시켜 놓았 다. 과거의 사회는 정 치 적 권력이나 경 제 적 부 에 따라 질서가 구 축되는 수직적 위계사회였다. 그 사회의 의사결정은 상층에 속해

소통의 시 대, 겸손한 리 더 십 의 힘

02 01

(8)

있 는 사람들에 의 해 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아래로 전달되 는 하향식 구조였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다원화되었고 그 에 이 어 진 SNS 혁명은 사회환경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된 사회환 경 은 더 이 상 리 더 십 의 독점을 허락하지 않고 있 다. 조직이나 사 회 의 방향을 한 두 사람이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 은 불가능하게 되 었 고 집단지성의 힘 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조직의 CEO든 정 치지도자이든 아 니 대통령까지도 더이상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 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 어 낼 수 없 고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으로 변 화할 것 을 요구받고 있 는 바, 그 요체가 겸손의 리 더 십 에 있다고 할 수 있 다.

|æ U2…« ¸f

지 난 해 한국을 다녀가면서 우 리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프 란치스코 교황은 이 시 대 겸손한 리 더 십 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미 국 «타임»지는 2013년 의 인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정했는 데‘ 겸손한 자 세’로 변화의 물결에 동참해 새로운 천주교 수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선 정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 직후부터 교황의 권 위 같은 것 은 던져버리고 몸을 낮 춰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2013년 열 린 교 황 즉 위 미 사 강론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모든 피조물, 특히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날 미사에서 교황은 차에서 내 려 병자를 축복하고, 경호원이 데려온 아기에게 입 을 맞추는 등 성 경 속 예수를 떠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평생을 약하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소탈하고 겸손하게 다가갔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도 이어졌다. 공항에 환 영 나온 많은 군중들 속에서 세월호 유족 을 만나자 손을 잡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고 광화문 시복미사 때 는 차에서 내 려 유족의 손을 잡아주어 세 계 의 이목을 모았다. 프 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 있 는 동안 힘 있 고 높은 사람들보다는 어 렵 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는 교황으로서의 권위나 격 식 이 아 닌, 겸손의 리더십으로 오늘날 종교를 불문한 세 계 인 의 마음을 얻 고 있 다.

그런데 높은 지 위 에 올라있는 사람일수록 권 력 의 맛 에 빠져들기 쉽다. 자신의 권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 시 와 통제로 사람들을 끌

왔다. 자신의 생각은 일 단 뒤 로 하고, 귀를 열 고 더 많은 의견들을 경청하는 것 이 오늘날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결 국 겸손한 리더는 소통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 각 에 대 해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의견을 갖고 있는지를 가슴을 열 고 주 고받아야 하고, 그 같은 쌍방향 소통의 결과를 겸 허 히 받아들이 는 노 력 이 필요하다. 그런데 리더들 가운데는 자 기 얘 기 만 열 심 히 해놓고는 ‘열 심 히 소통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종 종 있 다. 소통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고, 겸손하지 못한 자세이다.

소통은 자신의 생각을 타 인 에 게 주입하려는 것 이 아니라, 피드백 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고쳐나가는 지점까지 이 를 때 비로소 의 미 가 있 는 것 이 다.

시대는 권위와 격 식 에 서 벗어난 겸손의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 다.

세 상 이 달라졌는데 과 거 시 대 의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에만 갇 혀 있 는 리더십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 지 못한 채 도태될 수밖에 없 다. 그 것 이 어 느 곳이든 리더십이라는 것 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 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 고, 그 리 더 가 제 역할을 할 수 없 음 은 당연한 얘 기 이 다. 권위에만 의존하여 군림하고 다스리려는 리 더십으로 사람의 마음을 과 연 얻 을 수 있을까? 변화된 사회에서 진 정 힘 있 는 것 은 제왕적 리 더 십 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 손 한 리더십이다. 자기를 낮출 때 사람들의 마음이 그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올 것 이 다.

01. 02. 글로벌 네트워크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는 가

운데, SNS 혁명에 의 해 변화된 사 회 환경은 더 이 상 리 더 십 의 독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미지투데이03.조현아 前 부사장의‘ 땅콩 회 황’사건으로 대한항공의 사명도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 다. ⓒ연합콘텐츠 04. 음성 꽃동네 방문한 프 란치스코 교황. 지 난 해 한국을 다녀가면서 우 리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 긴 그는 겸손한 리더십의 전범이라 할 만하 다. ⓒ연합콘텐츠 05.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마련한‘노(勞)랑 사(使)랑 함께하는 코바코 모닝카페’는 노사간 소통 강화를 위 해 CEO를 비롯한 경영진이 직 접 참여하여 직원들에게 아 침식사를 제공하고 임직원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화합의 장 으로 마련됐다. ⓒ연합콘텐츠06. 『도덕경』. 노자는『도덕경』

제66장에서 성인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로 백성을 통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 가려고 생각한다. ‘자기를 낮춰서 어 떻 게 강력한 리 더 의 역 할 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들은 겸손을 강조하 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지위가 부여한 힘으로 조직이나 사람들을 이끌고 가 려 한다. 그러나 이 는 낡은 사고이다. 이 제 사람들은 더 이 상 그 런 리 더 십 에 힘 을 실어주지 않는다. 겸손함이 힘 이 되 는 세상이다.

oòhð+ |æ U2…¨ æ.

겸손한 리더십은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지 않고 타 인 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타인을 배려한다. 리더들이 흔히 범하기 쉬 운 잘못은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는 집착이다. 특히 자기의 노력으 로 성공한 리더일수록 자 기 확 신 이 강한 경향이 있 어 서 일 을 함 에 있 어 독선으로 빠 질 위 험 이 크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경에서 이 같은 리더십은 한계가 뚜렷할 뿐 아니라 심 지 어 위험하기까지 하 다. 현대사회는 워 낙 다양하고 복잡해서 리 더 혼자서 중요한 판단 이 나 결정을 내린다면 많은 무리가 따르게 되어있다. 자신의 지 식 과 경 험 의 한계를 인정하며 자기보다 더 나은 전문가들이나 현 장 경 험 이 많은 실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으며 결정을 내려야 한 다. 리더가 성공한 것은 자신의 인 생 일 뿐이지 그 의 경 험 이 결코 만고불변의 진 리 가 될 수는 없 는 것이다. 우리는 큰 기 업 의 CEO들 이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사 업 이 실패로 끝난 사례들을 많 이 들 어

04 03

05 06

(9)

^õ Éîøú+ ŽA .R

‘문’과‘창호’의 ‘문’은 바로 집 터 밖에서 집 터 안 의 마당으로 들 어서는 ‘대문大門’이 나, 이 마당에서 저 마당으로 드나들 때 채 에 설치한 ‘중문中門’이 나, 사잇담에 세운 ‘일각대문一脚大門’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두 짝 의 문짝으로 이루어진다.

‘창호窓戶’는‘창’과‘호’를 합 친 것으로, ‘호’는 바로‘지게문’

이 다. 지게문은 마루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 에 설치한, 두꺼운 종 이 로 문짝 안팎을 싸 바른 외 짝 문을 말한다. 그러나 외 짝 지게문 만 이 아니라 마당에서 방이나 마루로, 또 마루와 방, 방과 방을 드 나드는 곳 에 설치한 모든 문짝들을 ‘호’에 포함시킨다. 즉 우 리 의 창호窓戶는 우 리 집 의 채에 설치한 모든 창과 외 짝 지게문(戶) 이 나 두 짝 이 상 의 문들 모두를 말하는 것 이 다. 그리고 이 들 문 과 창호를 만든 목수木手는 서 로 다르다. 즉 소목장小木匠은 창호를 짜고, 대목장大木匠은 문을 제작한다.

Éî« – /+ bgóùö§ “G Ĭ.

그 종류로는 안쪽으로 열 고 닫는 ‘안여닫이(內開)’, 밖으로 열 고 닫 는 ‘밖여닫이-바깥여닫이(外開)’, 홈대를 따라 양쪽으로 열 고 닫는

‘ 가로닫이(橫開閉)’가 있으며, 이 가로닫이에는‘미 서 기’와 ‘미 닫 이’

가 있 다. ‘미 서 기’는 문 한 짝을 옆 에 있 는 문짝에 붙 여 홈대를 따 라 열 고 닫는 것이고, ‘미 닫 이’는 한 홈대에 끼 운 문짝들을 좌우로 밀 어 열 고 닫는 문이다. 또 문짝들을 들 어 들쇠에 매달아 열 고, 들 쇠 에 서 내 려 닫는 ‘들어열개’ 등 여 러 열 고(開)닫는(閉)방 법 이 있 다. 이 들 방법에 따라 ‘안여닫이창’, ‘안여닫이문’, ‘밖여닫이창’,

‘‘밖여닫이문’,‘미 서 기창’,‘미서기문’,‘미닫이창’,‘미닫이문’,‘들 어 열개창’,‘들어열개문’이 라 한다.

01.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계 정.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 어 만든 창을 달 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 다. ⓒ문화 재청02.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여 헌 장현광이 살았던 모원당. 툇 간 양쪽은 판문으로 막았고 마 루 뒤쪽은 판벽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두피디아 03. 경주 독락당 담장의 살창. 이 살 창은 독락당과 담장 밖, 터 아래로 흐르는 계류의 모습을 독락당 내부공간으로 끌어들여 담장 밖 자연 공간 모두가 독락당 뜰이 되 게 한다. ⓒ문화재청 04. 목가구(전통창호) 기능보유자 김 재중. 김재중이 제작한 전통 창호는 절제된 비례미와 화려한 장식성을 바탕으로 전통 건축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문화재청

집 을 짓 고 집 을 드나들기 위해서는‘ 문’을 설치하고 채광과 환 기, 조망을 하 기 위해서는‘창’을 달아야 한다.

문과 창은 서양건축의‘door’와‘window’이 다. 그러나 우 리 건축에서는‘문’과‘창’이 아니라‘문’과‘창호窓戶’라 하 여 서양건축과 다르다.

우리의 집 은 집 터 둘레를 담장과 행랑채로 둘러막고 그 안 에 안 채, 사랑채, 별 당, 정 자, 광 채 등 의 채들을 짓 고, 채 와 채 사이를 사잇담(間墻)과 행랑들로 막는다. 그리고 이 들 채들은 다 시 방이나 마루, 부 엌, 광 등 의 간들로 분화되어,

우리의 집 은 채와 간의 분화分化를 이루게 되 며, 자연스럽게 채를 둘 러 싼 크고 작은 마당들이 생긴다.

글. 주남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Ǩ °.

집 의 얼 굴‘창호 窓戶 ’,

다양한 모습으로 내외공간을 소통하다

02

01 03 04

Éî« \s+ Ç« ߺ¨ álä æ.

창호의 모양새는 살(대)짜 임 이 없 는 창호와 창문짝에 살(대)짜임을 짜 넣 는 창호로 나뉜다. 그리고 살대의 살(대)짜임무늬에 따라 서 로 다른 모양의 창호가 만들어지고, 이 들 다양한 창호들은 집 의 얼 굴 표정을 풍부하게 한다.

(대)짜 임 이 없 는 창호로는 부엌이나 광채에 설치하는 ‘판장문板長

’이 있 다. 폭 이 좁고 긴 두꺼운 판자(널 판)를 수직으로 띳 장 에 붙 여 만든 문이다. 다음 ‘골판문骨板門’은 두꺼운 널 판 대 신 얇고 넓 은 널판을 두 장 정도 문울거미에 고정시킨 문이다. 이 골판문 은 방과 대 청 의 옆 벽 이 나 뒷 벽 에 설치하거나, 또는 고방庫房의 출 입문으로 설치한다.

한편 부 엌 부뚜막 위 와 광채의 벽체에는‘살창’을 단다. 살창은 살 대들을 수직으로 울거미에 꽂아 세 워 짜고 창호지를 바르지 않는 다. 살대와 살대 사이로 환기와 통풍, 채광을 한다.

또 살대짜임이 없 이 문짝 양 면 전체를 두꺼운 종이로 싸 바른 창 호를‘맹장지盲障子’, ‘갑창甲窓’, 또는‘흑창黑窓’이 라 하는데 지게문 이 나 미닫이창이 드나드는 곳 에 고정 설치하는 두껍닫이로 쓰 이

(10)

서울 안국동 윤보선 前대통령가의 안채와 별 당(안사

랑)채 사잇담에 설치한 긴 교창交窓은 안마당과 별 당

(안사랑)마당을 서 로 융합시키며, 경 주 독락당獨樂堂냇 가 담장의 살창은 독락당과 담장 밖, 터 아래로 흐르 는 계 류溪流의 모습을 독락당 내부공간으로 끌어들 이 는 차 경借景의 부차俯借로, 곧 담장 안 의 뜰만이 독 락당 뜰 이 아니라 담장 밖 자 연 공간 모두가 독락당 뜰 이 되 게 한다. 즉 우 리 의 집 을 자연과 하나 되 게 한다. 자연으로부터 할 애割愛받은 자 연 공간은 여 러 개 의 인 공 공 간 인 채와 간으로 분화하고, 이 들 채 와 간으로 분화하였던 공 간들은 다 시 하나의 통합된 공간, 곧 집 이 되 어 자연과 융합되는 것 이 다. 이 는 바로 우 리 창호가 있 기 에 그러한 것 이 다.

05

고, 사대부집에서는 빛 을 완전히 차단하는 창호, 즉 갑창-흑창으 로 쓰인다.

창호에 살대를 짜 넣 는 살(대)짜임은 여 러 가 지 모양이 있 고, 그 살

(대)짜 임 의 이름에 따라 창호의 이 름 이 정해진다. 살(대)짜임은 ‘띠 살’, ‘아자亞字살’, ‘완자卍字살’, ‘용자用字살’, ‘정 자井字살’, ‘숫대살’,

‘ 빗 살(交 , 斜窓)’, ‘만살빗살’, ‘격자빗살(滿 斜窓戶, 格子斜 窓戶)’, ‘솟을 빗 살’, ‘귀 자貴字살’, ‘귀 갑龜甲살’, ‘꽃살(주로 궁궐, 사찰등의 창호)’이 있 고, 이 들 이 곧‘띠살창’, ‘띠살문’, ‘아자(살)창’, ‘아자(살)문’ 등 이 된 다.

사대부집의 대청마루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는 독특한‘ 불발 기창호’를 설치한다. 문짝의 중앙에 네모, 팔모, 원 형 의 울거미를 짜고, 그 울거미 안쪽을‘아자살’. ‘정자살’, ‘완자살’ 등 의 살(대)짜 임 을 한 후, 울거미 밖 의 문짝 양 면 모두를 두꺼운 종이로 싸 바른 다. 이 들 불발기창호는 보통 네 짝에서 많게는 여 섯 짝을 설치하 는 데, 두 짝씩을 접 어, 들쇠에 매달아 방과 대 청 의 두 공간을 하 나 의 큰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또한 사대부 집에서는 창호의 제 일 밖 에 두 짝 바깥여닫이‘덧 창(대부분 띠살창호)’, 그 안으로 모기나 파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통풍이 되 는 두 짝 미 닫 이

‘‘사창紗窓’, 그 안쪽으로 두 짝 미 닫 이 쌍창(용자살, 아자살, 완자살 등), 그 다음 마지막으로 두 짝 미 닫 이 ‘갑창(흑창)’을 설치한다. 그리고 제 일 바깥여닫이 덧 창 위 에‘문렴자門簾子’를 치 고, 때로는 방 안 의 갑 창 위 에 치기도 한다. 문렴자는 속 에 솜을 넣 고 양면을 피륙으로 마감한 지금의 커튼과 같은 것으로, 낮에는 노 비奴婢가 말아서 발 고리에 매달았다가 저 녁 이 되 면 다 시 풀어서 덧창을 덮 어 한 기寒氣 를 막고 또한 빛 을 차단하여 개방성開放性과 폐 쇄 성閉鎖性이 공존共存 케 한다.

ŸU Éî« ¬H ¶H w

창호는 집 채 의 방과 방 사 이, 방 의 앞 뒤 옆 벽 면, 주간柱間마다 설 치되고, 이 들 각 창호들의 서 로 다른 살짜임으로 집 채(棟)는 풍부한 모양의 입 면立面을 이 루 게 된 다.

특히 사대부집에서는 안 채, 사랑채, 별 당, 정 자, 행랑채(棟)등 의 여 러 채들과 이 들 각 채의 방과 마루 등 수많은 간들 모두에 창호 가 설치됨으로, 공간마다 서로 다른 모양을 이루게 하면서도 각 공 간들은 독립적인 공간이 되 게 한다. 또한 방과 방 사 이, 방과 마루 사이의 창호들은 이 들 각 공간들이 서로 이어지는 공간의 연속성

屬性을 가지게 하며, 나아가 커다란 하나의 공간으로 확장케 한다.

창호의 살짜임 무늬는 다양한 모양의 창호를 이 루 게 하는 것 은 물 론, 주제의 반복과 변화에서 오는 율동성律動性을 가 지 게 한다. 한 공간의 창호 살짜임 무늬는 다른 공간 창호의 살짜임 무늬로 반복 되거나, 다른 살짜임 무늬로 변화되어 공간마다 다양한 모양으로 율동한다. 또한 같은 살짜임 무늬는 창호뿐만 아니라 외부공간의 담장, 굴뚝 등 의 장식무늬로 다 시 나타남으로써 주제의 반복에 의 한 공간정서의 통일성을 갖 게 한다.

우 리 의 집 은 기단을 형성하고 기 단 위 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 워 도리와 보로 결구하고, 지붕틀 위 에 기와를 덮 어 지붕을 이 루 는 목조가구식구조木造架構式構造로, 집 채 가 대 지大地즉 자 연自然과 분 리된듯하나, ‘들어열개’라는 독특한 창호의 개 폐 법開閉法으로 곧 자 연 과 하나가 된 다. 대 청, 별 당, 정 자 등 의 분합문들을 접 어 들쇠에 매달면 그 순간부터 대지와 분리되었던 공간의 폐 쇄 성閉鎖性은 곧 개방성開放性을 이 루 어 자연과 하나가 된 다.

우 리 의 집 은 옛날부터 춥고 긴 겨울을 나 기 위 한 온돌과, 무더운

여름을 지나기 위 한 마루의 두 가 지 바닥구조를 이 루 어 왔다. 온돌은 공간의 폐쇄성을 요구하였 고 마루는 공간의 개방성을 요구하여, 항상 폐 쇄 적 공간과 개방적 공간이 한 집 채 에 공존共存 케 하였다.

우 리 창호는 이 들 폐 쇄 적 공간이나 개방적 공간 이 개방성과 폐 쇄 성 모두를 가 지 게 하였다. 특 히 덧 창, 사창, 쌍창, 갑창, 이 들 네 겹 의 창호설

치 와 문렴자門簾子는 온돌방의 폐쇄성을 공고히 하면서도, 창호 열 기 와 문렴자門簾子를 걷 어 올림으로 곧바로 폐쇄성을 개방성으로 바꾸어 준다.

우 리 창호는 창호지를 창 의 겉 에 바르는 중국(일 부)이 나 일본의 호 지 법糊紙法과는 달 리 창호지窓戶紙를 창호의 안쪽에 바른다. 따라서 우 리 집 은 외 적으로는 선적구(線的構)을 하고 내 적內的으로는 면 적 구성面的構成을 한다. 기단과 밑 인 방, 도 리, 처 마, 용마루의 선들과, 기 둥, 지붕골의 선들은 모두 창호 살대의 선들과 함 께 선적구성을 하고, 방안의 창호지, 벽 지, 장판지, 천장지 등은 모두 면적구성을 하 게 한다.

우 리 창호는 우 리 집 의 내부공간에 독특한 공간정서空間情緖를 이 룬다. 창살과 창살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햇 빛, 때로는 소 쇄瀟灑한 기분이나 때로는 아기자기한 정 을 불러일으키고, 달 밝은 밤 이 면 처마의 뜰 에 심은 벽오동, 석류, 파초 잎들의 그림자를 받아들여 한 폭 의 묵화墨畵를 이룬다. 그리고 낮이나 달 밝은 밤, 창호지에 던 지는 처마의 그림자나, 살대 그림자의 두께를 보면서 시 간 의 흐름 을 알게되고, 곧 이 어 정갈한 사차원 공간에 내가 있 음(自在)을 깨닫 게 한다.

우 리 창호의 창호지는 빛 과 함께 자연의 소리를 투과한다. 처마에 서 떨어지는 낙수소리(落水-音), 한 여름날 행랑바깥마당 느티나무에 서 구성지게 울어대는 매미소리, 가을날 뒤 뜰 감나무의 까치소리, 깊은 밤 툇마루 아래의 귀뚜라미 소 리, 나뭇잎새 소 리 등등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자연의 모든 소리가 창호지를 투과함으로써 인 공 공간 인 방은 곧 자연과 융합한다. 우리의 창호는 집 자체에 설 치 될 뿐만 아니라, 외부공간의 담장에도 설치된다. 창호는 이 마당과 저 마당 을 서로 서로 융합하게 하고, 나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 게 한다.

05. 달 성 태고정(보물 제554호). 측면에 널벽을 두른 뒤 쌍여닫이 골판문을 달았다. ⓒ문화재 06.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의 꽃살. 창호에 살대를 짜 넣는 살(대)짜임 중 꽃 살은 주로 궁궐, 사찰 등의 창호에 쓰인다. ⓒ문화재청 07.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 호) 벽 의 살창. 앞벽은 윗창이, 뒷벽은 아랫창이 작다. ⓒ문화재청 08. 칠산서원(충청남도 문 화재자료 제102호). 정면에는 띠살문, 뒷면에는 골판문을 달았다. ⓒ문화재청

07

08 06

(11)

Ý5 p ëØ©‚

자연과 습성이 만들어낸 걸 작 의 진 미

‘고창 풍천장어’

어 느 지 역 이 든 그 지 역 의 정 서 와 문화를 대변해주는 맛과 멋 이 있 다. 한 지역사회에서의 음식이란 그들만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삶 의 문화를 알 수 있 게 해주는 문화적 지 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몸 의 원 기元氣를 북돋아주는 보양식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부 엌 에 서 만들어져 이어오고 있 는 지 금 의 음 식 이 아니라, 지 역 의 고유한 삶 의 형 태 나 자연환경 등 의 조건에 따라 스스로 나고 자란 먹을거리를 자연스럽게 활용하게 된

고유한 식재료가 지 역 의 오 래 된 전통음식으로 우연하게 만들어지게 되 는 것 이 다.

삼계탕에 이 어 한국인의 대 표 보양식으로 손꼽는 장 어長魚역 시,

이 뜻 에 따라 전 북 고창을 대표하는 고유한 음식에서, 한국인의 대 표 보양음식으로 사랑받고 있 는 것 이 다.

글. 황영철 (음식칼럼니스트)

ts?^’šF8ˆeVaŠ4´Ž

지금이야 장 어長魚하면 으뜸의 보양음식으로 손 꼽지만, 사 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부터 장 어 류를 보양식이나 식재료로 즐 겨 먹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바로 뱀 의 모양을 한 흉측스러운 장 어 의 모습 때 문이었는데, 20여 년 전 만해도 동해안 어부들이 그 생김새가 뱀 을 닮았다 하 여 잡지도 먹지도 않았던‘장 치’처 럼 장어도 꽤 나 오 랫동안 부정적인 이 미 지 의 물고기로 취급받았다. 조선 후기의 문 신 정 약 전(丁若銓, 1758~1816)이 저술한『자산어보玆山魚譜』에 맛 이 달콤하 고 사람에게 이 로 워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장어로 죽을 끓여 먹으면 이 내 낫는다.’거 나, ‘어부들은 결 핵 에 걸렸을 때 갯 장어를 민간요법으로 썼다.’고 하는 이 야 기 등 이 이 를 뒷 받 침 한 다. 또한 1893년 일 본 인 이 쓴 『조선통어사정朝鮮通漁事情』에서도‘한 국인들은 뱀 을 닮은 모습 때문에 잘 먹 지 않아 일본인들이 잡는 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1908년 에 간행된 『한국수산지』에서도

‘붕장어는 우리나라 전 연 안 에 서 잡히는데 특히 남해안에서 많 이 나기는 해도 일 부 러 잡지는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 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갯 장 어, 붕장어, 뱀 장 어, 먹장어를 먹 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 때 인 1930년 중후반부터이다. 태평양전쟁으로 물자와 식량사정이 어 려 워 진 일 본 이 부산과 울산의 일 부 해안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잡 지 도 먹지도 않는 갯장어를 어획하여 피혁제품을 생산하기 위 해 껍 질 만 가져갔는데, 부두의 노동자들이 이 때 남은 살코기를 조 리 해 허드레 음 식 정도로 먹 기 시작했던 것. 이 후 1950년 한국전 쟁 당 시 부산 자갈치시장 근처의 포장마차촌에서 곰장어(먹 장 어)양 념구이를 팔 기 시작하면서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 리 잡 게 되 었 다. 이후로 뛰 어 난 맛과 월등한 효능의 영양성분이 알 려 지 게 되 면 서 바다에서 나는 장어이든, 민물에서 나는 장어이든 구분 없 이 , 부정적 시각보다는 몸 에 좋은 음식으로 사랑받게 된 것 이 다.

(12)

á˒+ áË´Ž ‘.

장어는 민물장어인 뱀장어를 비롯해 갯장어, 붕장어, 먹장어가 있 는데, 저마다 조리용도는 물론 맛과 먹는 시기도 다르다. 남해안에 서 여름에만 잡히는 갯장어는 담백하고 순수한 맛 이 특징이고 우 리나라 전 역 의 바다에서 잡히는 붕장어(아나고)는 횟 감, 구 이, 탕으로 좋으며 부산을 대표하는 곰장어(먹장어)는 구이용으로 제 맛을 낸다.

대한민국 최 고 의 장어로 손꼽는 고창 풍천장어는 민물장어인 뱀 장어로, 장어류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 어 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유성 어류이다. 이들은 필 리 핀 서 쪽 마리나 해구 근 처 의 심 해 400m에 서 산란한 후 부화된 댓잎모양의 새끼들은 어 미 고향으로 회귀하다 강 가까이에서 실뱀장어로 몸을 바 꿔 제주 도와 영산강, 그리고 고창의 풍천으로 올라와 성장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 는 풍천장어의 풍 천風川은 고창의 지 역 명 이 아니라 선운산 부근을 흐르며 바닷물과 민 물 이 합해져 흐 르는, 길 이 31km 인 천 강 의 기 수 역汽水域을 일 컫 는 명칭으로, 이 수 역 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 의 흐름이 변 하 며 해풍과 육풍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바로 이곳에서 잡은 장 어 를‘풍천장어’라고 한다.

한편 인천강은 조선 영 조 36년 에 편찬된 목판본 지도첩인 『여 지 도輿地圖』에 처 음 등장하는데, 조선 명 종 때 퇴 계 이 황 선 생 문하 에 서 수학했던 유학자 변 성 진(卞成振, 1549~?)의 호인 ‘인 천仁川’에 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렇 듯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하구에서 뭍으로부터 유입되는 부유영양분과 담수종과 해수종의 풍부한 플랑크톤, 큰 수온차, 들 물과 날물에 의 한 물 의 흐름 덕분에 탄력적인 육질에 최고의 영 양 성분을 가 진 풍천장어가 민물장어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것 이 다.

하지만 풍천에서 잡히는 자연산 뱀장어는 이 제 거 의 보 기 힘 들 뿐 아니라,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잡는 전통방식으로는 수요를 따라갈 수 없 어 안타깝게도 자연산 풍천장어 맛을 보기가 어 렵 다. 다만 자연산 풍천장어의 본 래 맛을 만들어내기 위 해 실 뱀 장 어 를 잡아서 양식을 하는데, 이 렇 게 민물에서 키 운 뱀장어를 6개 월 정 도 자 연 상 태 의 바닷물에 두 게 되 면 몸집은 반으로 줄어들 고 사료성분이 싹 빠 진 상 태 의 자연산에 가까운‘갯벌풍천장어’

가 만들어지는 것 이 다.

풍Ë´Ž Z§ ±• €w¬ X=Ž % ²à

맛 좋은 풍천장어라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대중적인 별미나 별 식 같은 구이나 탕으로 먹지는 않은 듯하다. 지역주민들의 이 야 기 를 들어보아도 풍천장어를 푹 고아서 보양식 정도로 먹 었 다 는 것 이 다. 신재효(申在孝, 1812~1884)의『 퇴 별 가(토끼전)』 완판본에서도 미 뤄 짐 작 할 수 있는데‘ 용왕이 병 이 나 서 임 금 자 리 에 높 이 누 워 여 러 날 신음하여 용 의 소리로 우는구나. 수중의 온 벼슬아치 들 이 정성으로 구병할 때… 양기가 부족한가 해구신도 드려보고 폐결핵을 초잡는지 풍천장어 대령하고’라는 대목을 보 면 풍 천

장어를 약리음식 정도로 먹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약리음식이던 풍천장어가 장 어 의 대명사로 명성을 얻 게 된 것 은 1970년대부터로 동백나무 숲 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천년고찰 선 운사禪雲寺덕택이라 할 수 있 다. 당 시 선운사 연 기 교 옆 의‘ 연 기 식 당’과 길 건 너 선술집 형 태 의‘ 신덕식당’ 등에서 장어구이를 처 음 팔 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풍천장어를 구이나 탕 같은 전 문 메뉴로 판 것 도 아니고‘ 끼 워 넣 기’식 의 메뉴 정도여서 이 때 만 해도 풍천장어의 풍미와 진가가 알 려 지 지 못했다. 풍천장어에 대 한 본격적인 명성은 1990년 대 들 어 장어가 스테미너 식품으로 각광받기 시작하고 선운사가 전국적인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국 민보양음식으로 자 리 잡 게 된 것 이 다.

장어요리는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조리법으로 각각의 별미를 선 보이고 있는데, 풍천장어 요리는 고추장 소스를 발라 세 번 굽는 것 이 전부이다. 특별할 것 도 없 어 보이는 조리법이지만 풍천장 어 요 리 의 맛을 결정하는 것 은 양념장이 아니라 풍천장어 고유 의 육 질 맛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맛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 다.

민물장어인 풍천장어는 그 맛도 맛이지만 불포화 지방산과 EDA 등을 함유하고 있 는 고단백 강장식품으로 영 양 적 효능도 뛰 어 나 다. 『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도 강한 양 기陽氣의 효능이 있 어 허 해 진 폐 와 대장을 돋우는 좋은 식품이라 기록하고 있 다. 민간에서는 폐 결 핵, 요통, 신경통, 폐 렴, 관 절 염, 몸 의 기 를 돋우는 약리음식 으로 복용하거나 먹어왔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풍천장어의 유 명세는 영양가나 맛 때문만은 아 닐 것 이 다. 풍천장어가 한국을 대표하는 장어구이 브랜드로 인 식 되 게 된 것 은 인 간 의 삶보다 더 기 구할 만큼 천신만고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풍천장어의 강 인 한 모 태母胎습성과 풍 천風川이라는 독특한 자연환경이 합을 이 루고, 여 전 히 바람과 물은 풍천장어를 살찌우고 있 기 때 문 일 것

01.『동의보감』에는 장어에 대 해‘강한 양기의 효능이 있 어 허해진 폐와 대장을 돋우는 좋은 식 품’이라고 기록하고 있 다. ⓒ문화재청02.고창의 특산물인 풍천장어는 민물장어인 뱀장어로, 장어류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유성 어류이다. ⓒ한국향 토문화전자대전03.풍천장어구이. 선운사 어 귀 인천강에서 나는 장어에 양념을 발라 구운 고 창 지역의 향토음식이다. ⓒ두피디아 04.장어구이는 포 뜬 장어살을 석쇠에 초벌구이 한 후 장어의 뼈와 머리를 삶은 육수에 양념장을 발라 다 시 구워 만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05.

장어구이 양념장은 간장, 고추장, 설탕, 물엿, 생강즙, 다 진 마늘, 계피를 넣고 푹 끓여 청주를 섞 어 만든다. ⓒ우듬지06.고창 선운사. 풍천장어가 장어의 대명사로 명성을 얻 게 된 것은 선운 사 덕택이라 할 수 있 다. 1970년 대 선운사 인근 식당에서 장어구이를 팔기 시작하면서 점차 유 명해졌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02

01

04

03 05

06

(13)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생동하는 시간과의 조우

눈앞에 펼 쳐 진 너른 못 이 평화로움을 전해주고 그 풍경 위 에 자리한 정갈한 산세의 아름다움이 시선을 빼앗는다.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 킨 노송들 사 이 의 황톳길을 밟으며 못을 따라 걸음을 옮길 새 면 마음에 단단하게 엉 켜 있 던 깊은 잡념과 고민들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 렇 기 에 고대시대 천 재 음악가 우륵은 이곳에서 가야금을 탔고, 노후를 이곳에서 보내기로 결심하지 않았을까.

천 여 년 전 의 과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른 농토를 해갈해 온 의림지가 있 는 제천에서 고요히 생동하는 시간을 만난다.

글. 김진희 사진. 김병구

제천 의림지

ä,¬ X; á ‡D

(14)

능력 을 뛰어넘는 일 일 것이다. 안일함 속 에 삶을 가두지 않고 삶 의 가 치 에 몰두해 의 미 있 는 인생을 살았던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것은 종 교를 떠 나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생 각 이 든다.

고요함이 가득한 배론 성지에서 만난 오래된 시간과 오늘의 시 간 의 만남이 전해주는 깊은 사색들이 생동하는 봄 여행을 깊고 따스하게 만들어 준다.

»V’u ‡T.  v¥¨ <.

2006년 12월 의 림 지 일대가 ‘제 천 의림지와 제 림’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20호로 등록되었다. 의림지와 더불어 제 방 위 의 제림과 주 변 의 정자와 누각들이 지 닌 역 사 적 가치와 함 께 경 관 이 뛰 어 난 까 닭이 다.

제방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 킨 노송의 깊고도 진 한 향 이 여 행 에 특별함을 더해준다. 제 림 중 에 오 래 된 소나무뿐만 아니라 버드나무 숲도 의림지와 역사를 함께 해 왔다고 한다. 현재에는 이곳에 전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 이 함께 자라 여 느 휴양림 못지않은 상쾌함과 아름다움을 느 낄 수 있 다.

제방에 잘 정 비 된 데크를 따라 걷다보면 의 림 지 의 곳곳을 돌아보 는데 넉 넉 히 두 시 간 정도 소요된다. 걷는 곳곳 마다 같은 듯 새로 운 풍경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의 옛 지 형 그대로를 살 린 커 다 란 바 위 동굴은 지나는 사람들마다 흥미롭게 여긴다. 제방을 따라 가다 아름다운 정자인 영호정을 만나 그곳을 오르면 저수지를 한 눈 에 담을 수 있 고, 저수지 반대편 골짜기에 흐르는 계곡과 폭포도 볼 수 있 다. 우륵이 가야금을 안고 풍광 좋은 곳을 찾아 다니다가 만난 장소라고 생각하니, 이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경관들이 가야금 의 어 떤 선율로 탄생했을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의림지가 전해주는 평화로운 선율과 닮았을 것이다.

자연은 시 간 이 흘러도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며 같은 자리에서라도

계 절 의 변화와 함께 자신을 새롭게 하며 존재한다. 그렇다 해도 그 안 에 분주함이나 조급함은 없 다. 그 저 시 간 이 주는 선물 속 에 자 신 을 맡 길 뿐이다. 오늘날 의림지와 제림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에도 과 거 의 우륵처럼 평화로운 선율이 흐르고 있 지 않을까.

cP wĒu ®t¨ 7‡j.

의림지를 벗 어 나 서쪽으로 달리다 보 면 그 리 멀 지 않은 곳 에 제 10경 인 배론 성지를 만날 수 있 다. 배 밑바닥 같은 모양의 골짜기에 천 혜 의 요새처럼 안정적으로 조성된 배론 성지에도 알록달록한 꽃 들 이 봄기운에 얼굴을 내밀고 있 었 다.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 원 지 로 큰 가치를 지 닌 이곳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여 행 객 들 이 방문해 오래된 천주교 역사와 마주하고 대성당을 찾아 그 가 치 를 공유하고 있 다.

이곳은 천주교 박해시대에 교우촌처럼 존재했던 곳이기에 조선 후 기 천주교도 황사영이 백서를 썼 던 토굴과 최 양 업 신부의 묘가 있 고 성 요셉 신학교의 흔적을 만날 수 있 다. 그리고 성지라는 이름에 걸맞게‘십자가의 길’, ‘순교자들의 집’, ‘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삶과 죽음에 대 해 사색할 수 있 는 코스들이 있 다.

자신이 경험하고 새롭게 알 게 된 이 념 과 가치들을 위 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 는 용기가 있다는 것 은 사람 안 에 내재한 본능과

01. 의림지 곁 의 제방을 따라 걷다보면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 킨 노송의 깊고도 진한 향 이 여행에 특별함을 더한다. 02.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 수리시설인 의림지는 정자 및 누각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경승지이다. 03. 국내 첫 신학교인 성 요 셉 신학당(현 배론 신학교).

01 02

03

æ »Ë¨ X!.

제 천 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고요함 속 에 아 직 찬 기 운 이 가시지 않은 초봄의 상쾌한 공기가 코끝에 스친다. 강원도와 인접한 충북 제 천 이 기 에 봄 이 찾아오는 속도가 그 리 빠르지 않지만, 제 천 특유 의 한적함과 고즈넉한 분위기 속 에 생동하는 봄 의 전령들이 곳곳 에 서 모습을 드러낸다. 산 나무에 드리운 새순이 망울을 터트리고, 얼 마 전 만 해도 못 전체를 덮고 있 던 살얼음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여 러 고개와 길 에 막 틔 운 봄꽃들이 여 기 저 기 숨어있다.

제천은 월악산, 박달재, 청풍문화재단지 등 제 천10경 과 더불어 다양 한 레포츠와 체 험 이 가능한 관광자원이 풍부해‘2016 올해의 관광 도시’로 선정되었다. 특히 오 랜 역사를 자랑하며 현 재 의 역사와도 어우러지는 제1경 의림지와 제10경 배론 성지에서 제 천 의 봄을 만 나 기 위 해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VĒu *ØÊI W©¨ èä.

의 림 지 에 도착하자 탁 트 인 시야가 눈을 상쾌하게 한다. 의림지는 용두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까닭에 산을 배경으로 한 그 풍광이 아름답다. 도심에서는 보 기 힘든, 멀 리 보더라도 걸리는 것 이 없 는 시원한 풍경이 가슴 속 깊 이 청량감을 전해준다. 얼 마 전까지만 해도 살얼음이 덮였었다는 의림지는 그 사 이 얼음을 녹이고 그 모 습을 드러냈다.

의림지는 김 제 벽골제와 밀 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잘 알 려 져 있 다. 제 천 이 고구려 땅이었을 때 냇 물을 가로막은 커다란 제방이 있 는 곳이라는 뜻 의 ‘내토군’라고 불렸던 것을 보면 그 시 기 에 이 미 저수지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리고 신 라 진흥왕 때 악 성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 았고 그로부터 700년 뒤 에 이곳에 현감으로 온 박 의 림(朴義林)이 쌓 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역사로 거슬러 올 라가 삼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설이다. 제 천 의 북쪽 지역은 물 사 정 이 좋 지 않은 까닭에 관개를 위 해 농경용 수리시설로 만들어져 삼한시대부터 현 재 에 이르기까지 이 일 대 의 농사에 큰 도움을 주 고 있으며 수리역사 연구에 큰 자료로 존재하고 있 다. 게다가 의 림지는 한적하고 그 풍경이 아름답기에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사 랑받는 경승지가 되었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