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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이미지에 나타나는 권력 형상 연구- 《힘을 그리다》展의 작품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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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_2021.04.10 심사기간_2021.05.01-14 게재확정일_2021.05.21 DOI https://doi.org/10.47294/KSBDA.22.3.7

수족관 이미지에 나타나는 권력 형상 연구 - 《힘을 그리다》展의 작품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hape of Power in the Aquarium Image - focusing on the exhibition 《Peindre les Forces》

김정이,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Kim, Jung Ee_Department of Fine Arts, Kyonggi University Graduate School

차례 1. 서론

1.1. 연구목적 및 배경 1.2. 연구방법

2. 이론적 배경

2.1. 니체의 힘에의 의지 2.2. 신구상 회화의 권력 형상

2.2.1. 질 아이요(Gilles Aillaud)의 역사적 서사 표현

3. 본인 작품분석

3.1. 구조와 프레임: 능동적 행위의 수동성 4. 결론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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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이미지에 나타나는 권력 형상 연구 - 《힘을 그리다》展의 작품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hape of Power in the Aquarium Image - focusing on the exhibition 《Peindre les Forces》

김정이,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Kim, Jung Ee_Department of Fine Arts, Kyonggi University Graduate School

요약

중심어 권력 니체 신구상주의 능동적 니힐리즘

현대미술은 사회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새로운 양식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대중과 소통 되는 매개물로서 존재한다. 연구자는 빠르게 변하는 것에 발맞추며 다양한 변화 속에 살아가고 있고 살아야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현실의 상황이 힘들게 느껴질 때 그 원인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되 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왔다. 본 논문은 2018년 전시《힘을 그리다》展에서‘보이지 않는 힘’을 시각 화시키는 연구의 기원과 현재 본인의 작업에 대한 정체성,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 방향성을 잡기 위한 연구 이다. 연구방법으로 자기 운명애(運命愛)의 정신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성 되는 운명을 새로운 창 조의 원리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니체를 도입하였다. 신이 주체적이어야 하고 창조하는 인 간으로서의 힘에의 의지, 즉 왜 구조 안에서 행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예술가로서 삶의 주체가 되는

‘능동적(能動的) 니힐리즘’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모든 행위가 사회적으 로 결정되는지도 모르나 연구자는 비관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 람들이 예술가임을 알았다. 문제에 대한 결론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고 대중이 다시 한 번 생 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그러한 예로 인간의 이성적 사고의 반대되는 활동을 한 예술운동인 신구상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질 아이요의 동물원 회화를 연구하였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일상생활을 미술 안으로 끌어들인 신구상주의의 질 아이요의 동물원 회화에서 보여 지는 틀 안의 동 물들은 연구자의 수족관 속 물고기와 일치하는 지점은 있으나 작품 속의 구조내행위에서 차이를 보였 다. 본 논문을 통하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연구자의 역할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정립하고 앞으로의 작 업의 방향성 또한 연구자의 표현방식을 통한 꾸준한 문제의 제기임을 알 수 있었다.

ABSTRACT

Keywords power Nietzsche neo-figuration active nihilism

Contemporary art has a direct relationship with society and exists as a medium to communicate with the public through the process of creating and changing new styles. Researchers are living beings and must live in various changes while keeping pace with rapidly changing things. When such a situation in reality feels difficult, I have considered the cause of it as “power” operating in an invisible place. This thesis is a study to establish the origin of the research that visualizes the ‘invisible force’ in the 2018 exhibition 《Peindre les forces》, the identity of the current work, and the direction of the future work. Nietzsche, who argued that it is important to change the destiny that is inevitably created by the spirit of one’s own destiny and introduced love as a research method into the principle of new creation. I learned that I must act within the structure and take the position of ‘active nihilism’ as an artist in which life is the subject. Virtually all actions may be socially determined. However, the researcher did not fall into pessimism, but knew that artists were the ones who could raise problems about it. The artist’s role is not todraw conclusions about the problem, but to look at the work and make it possible for the public to think again. As an example, neo-figurativeism, which took place near France, is an art movement that was the opposite of human rational thinking. Based on this, I studied Gilles Aillaud paintings at the zoo. The quality of neo-figuration that brought politics, society, and everyday life into art. The animals in the frame shown in Aillaud’s zoo paintings have points that coincide with the fish in the researcher’s aquarium, but show differences in the structural behavior in the work. Through this thesis, it was possible to establish the role of the artist ‘Kim June ee’ living in this era as anti-social, and it was found that the direction of future work is also a constant uestioning through the method of expression of the resear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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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연구목적 및 배경

2018년 ⟪힘을 그리다⟫ 展에서 연구자는 수족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이미지는 가로 560.5cm 세로 162.2cm으로 대규모 아쿠아리움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벽면에는 관상어를 판 매하는 상점에서처럼 수족관 이미지들을 상하로 진열했다. 작품 이미지 안에서 물고기들은 유 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어떤 작품에는 작은 물고기들 사이로 포식자인 상어가 등장한다. 그 상어 는 다른 물고기들과 달리 아주 작게 표현되어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품에는 작은 물 컵 속에 서 수중포식자들이 헤엄치고 있다. 연구자는 이상의 수족관 이미지들에 ‘순응’ 또는 ‘적응’이라 는 뜻을 지닌 ‘Adaptat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힘을 그리다⟫展 (2018)에 선보인 작품들 은 연구자가 생각하는 사회를 이미지화 한 것이다. 매스컴이나 미디어를 보고 느낀 사회의 불안 감이나 공포를 가시화 한 것이다. 연구자는 그러한 불안과 공포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나 틀(frame)의 제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 또는 틀을 가시화하기 위해 수족관이 라는 이미지를 차용하였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주어진 빠른 변화에 발맞추고 살아야 함에 내부의 의지와는 상관없 이 외부의 의지에 의해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순응과 적응, 훈련과 훈육이야 말로 현대인들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일 것이다. 그런데 빠르게 변하는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 힘이 존재 한다. 현대인들은 그러한 권력과 힘에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통해 변화를 발생 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늘 회의적일 수 있다. 연구자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결정을 대부분 연구자 자신의 몫이 아니라 외부 권력의 몫이었다. 삶을 좌우하는 권력과 힘은 언제나 존재했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힘을 그리다⟫展(2018)으로 대표되는 연구자의 작업을 이런 비가시적인 힘을 가시화하면서 구조 내 행위자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의지의 소산들이며 본 연구에서 그것을 탐색하고자 한다. 힘의 문제를 탐구한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 중 ‘지배 하는 힘’과 ‘지배받는 힘’과의 관계를 탐색 했던 니체(Friedrch W, Nietzsche)의 성찰(Gilles Deleuze, 2001)을 참조하고 힘의 가시화 문제에 몰두한 회화적 탐구를 검토하려 한다. 아마도 신구상주의 회화에 대한 검토는 ‘힘의 가시화’를 예술의 차원에서 실천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 다. 이러한 이론과 실천에 대한 검토는 연구자의 <힘을 그리다>展을 정당화 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회화의 장(field)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적 답변 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구조의 엄격한 틀 내에서 행위자의 유의미한 존재 양태와 의미를 묻는 일이 될 것이다.

1.2. 연구방법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9~1885), 󰡔권력에의 의지󰡕(유고작, 1901) 등에서 ‘힘’

에 대한 니체의 언급을 검토할 것이다. 모든 대상(현상)은 힘의 출현이며 힘에 대한 탐구는 결국 각각의 힘이 다른 힘과 맻는 관계의 스펙트럼을 탐색함에 있다는 니체의 견해를 정리해 보려한다. 니체의 ‘Macht’개념에 대한 번역은 다의적용어로서 우리말 문맥 속에서 ‘힘’ ‘능력’

‘권력’ 권한‘등의 의미로 해석하려한다. 미술사적 검토에서는 이론적인 고찰을 토대로 회화영역 에서 힘의 가시화 문제에 천착했던 예술가들을 집중 조명 할 것이며 여기서 연구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사회, 또는 발달된 매체 환경에서 작동, 기능하는 힘과 권력의 가시화에 몰두했던 작가들이다. 이에 앞서 1960~1980년대에 서구 미술사에 등장하여 자본주 의 역학 및 대중매체의 규율권력을 문제 삼았던 프랑스 신구상주의 회화를 조명할 것이다. 또한 신구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질 아이오의 동물원 작업에서 보여 지는 힘의 가시화를 추구하 는 예술이 어떤 내용과 형식을 취할 것 인지를 탐구 할 것이다. 끝으로 ⟪힘을 그리다⟫展에서 선보인 연구자의 작업을 ‘구조와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이를 앞선 니체의 이론과 질아이요의 동물원회화와 비교 분석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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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론적 배경 2.1. 니체의 힘에의 의지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힘은 의지로 불리 우며 이러한 의지 즉 권력의지는 힘의 미분적 요소로 해석했 다. 여기서 참된 문제는 의욕과 비자발적인 것의 관계 속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 속에 있다(Gilles Deleuze, 2001, pp.26-27)고 하였다.

니체의 철학에서 하나의 힘은 결코 고립된 채로 고려 될 수 없으며 이러한 복수적인 힘들은 새로운 힘들을 더 많이 발생 시키고 그 능력을 확장 시키지만 또 다른 힘들은 과소 상태를 만드는데 관여하여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그 능력도 축소시킨다는 것이다.(Ko, B, K, 2003, pp.49-50) 니체는 전자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힘으로 후자를 부정적이며 반응적인 힘으로 분리 했으며 힘의 의지가 긍정적이면 그 힘은 적극적이고 힘의 의지가 부정적이면 그 힘은 반응적이라는 것이다.(Seo, D. W., 2002, p.113)그런데 니체는 ‘억압을 통해 힘의 형태를 부여 하는 법에서 독립해서 힘들이 형성하는 관계를 포착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힘 자체로 나오는 자발적인 것, 발생적인 것으로서 긍정하는 힘의 의지, 곧 적극적 힘에 주목했다.(Seo, D. W., 2002, pp.114-11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모든 존재자는 그대들의 뜻에 따르고 굴복해야 한다.”와 “그대들의 의지가 그렇게 되기 를 바라는바” 라고 말하여 이것을 ‘힘의 의지’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생명 넘치는 자를 발견할 때 마다 힘의 의지를 발견했다”면서 “생명 넘치는 것은 자신의 율법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야 하며 복수하는 자, 그리고 희생물이 되어야한다”고 썼다(Friedrich W. Nietzsche, 2004, pp.200-201)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는 오직 장애물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반응적(수 동적)이라는 것은 결국 밖으로 움켜쥐려는 움직임이 방해를 받는 것이고 따라서 반응하는 것, 수동성은 저항과 반발의 한 행위라는 것이다.(Friedrich W. Nietzsche, 2018, pp.470-471)

“생명 넘치는 자를 발견할 때마다 힘의 의지를 발견했다”는 니체의 주장은 긍정하는 힘의 의지 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을 지향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 다󰡕의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나는 그대에게 폭풍우처럼 ‘아니다’라고 말하며 동시에 ‘그렇다’고 말할 권리를 주었다”고 썼다.(Friedrich W. Nietzsche., 2004, p.391) 이렇 듯 니체가 말하는 긍정에는 ‘그렇다’와 ‘아니다’가 공존한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네”라고 답하는 낙타나 나귀의 긍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을 때의 긍정에 지나지 않지만 (Ko, B. K., 2003, p.297) ‘차원 높은 인간들’의 긍정은 “아직 세워야 할 집이 많기”에 “부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수기로 한” (Friedrich W. Nietzsche, 2004, p.203) 자의 긍정이다. 들뢰 즈가 말했듯 니체에겐 “힘들의 적극적 생성, 반응적 힘들의 적극적 생성”(Gilles Deleuze., 2001, p.128)이 중요 했던 것이다. 저항은 극복하고 ‘힘’에의 의지를 충족시키는 것은 잠시나마 일시적인 상실을 의미하므로 불만족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역설적이다.(Raymond A. Belliott, 2017, p.141)구체적 욕망 이후 그 난관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한층 더 근본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는 구체적인 첫 번째 욕망을 만족시킬만한 난관을 필료로 한다. 끝없는 노력 과 탐구만이 ‘힘’에의 의지를 단단하게 한다.(Raymond A. Belliott, 2017, p.142) 니체는 ‘영원 회귀’를 깨달음으로써 지존의 가치와 위계질서를 초극하고 운명애를 터득한 인간을 위버멘쉬 (Übermensch)라 불렀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원 높은 인간에 대하 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차가운 영혼, 노새, 장님, 술주정뱅이를 두고 내가 대담하다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공포를 알 되 공포를 제어하는 자‘ 심연을 보되 긍지를 가지고 보는 자가 대담한 것이다. 심연을 보되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붙드는 자. 그가 용감한 자이다.”

(Friedrich W. Nietzsche, 2018, pp.505-506)

니체의 긍정 개념은 부정개념을 요구 한다. 니체에게는 부정 없는 긍정 (낙타의 긍정)은 긍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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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며, 부정을 통한 긍정만이 온전한 의미를 가지는 긍정이다(Son, K. M., 2015, p.103). 고 통을 태우고 재가 된 곳 에서 새로운 생성이 늘 다시 시작된다. 니체의 견지에서 창조란 결국 자기 파괴의 고통과 고뇌를 긍정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창조란 위대한 구원 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개인이 계속 되는 변화를 통해 하나의 정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새로운 자기 자신을 생성 시킨다는 것을 이해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가 말하는 창조, 곧 영원 회귀 속에서는 매번 다른 힘의 관계가 형성되므로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 의 반복을 뜻한다. 같은 이유에서 ‘힘(권력)에의 의지’란 힘들의 종합을 위한 원리가 된다. “바로 그 종합 속에서 힘들은 동일한 차이들 곁을 다시 지나가거나 다른 것을 재생산 한다”(Ko, B.

K., 2003, p.52)는 것이 들뢰즈의 판단이다. 그에 따르면 니체의 종합은 “힘들의 종합, 그것들 의 차이의 종합, 그것들의 재생산의 종합”(Gilles Deleuze., 2001, p.103)이다. 서동욱에 따르 면 ‘차이’와 ‘종합’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개념들을 결합하여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종합’은 이 접적 종합(synthese disjonctive)을 뜻한다. “서로 차이 나는 상태로만 관계 맺는 힘들은 서로 이 접적 종합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결국 ‘종합’이란 “차이로 맺어진 관계들”을 뜻한 다(Seo, D. W., 2002, p.118). “힘에의 의지가 수행하는 긍정이 존재자들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며 이러한 차이의 지속적 생산이 영원회귀, 곧 반복을 형성한다”는 것이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 관한 들뢰즈의 판단이라는 것이다(Seo, D. W., 2002, p.119).

2.2. 신구상 회화의 권력형상

⟪힘을 그리다⟫展(2018)을 기획하기 훨씬 전부터 연구자의 작업에는 ‘힘’또는 ‘권력’에 대한 몰두가 나타난다. 보이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연구자의 삶에 관여하여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 는 ‘힘’은 초기작부터 연구자의 일관된 관심사였다. 본 연구는 동시에 발달된 매체 환경과 자본 주의 사회 환경에서의 힘의 가시화문제에 몰두한 여러 예술적 탐구들을 적극검토 할 것이다.

특히 신구상 회화(Nouvelle Figuration)에 대한 검토는 ‘힘의 가시화’를 추구하는 연구자의 예 술에 실천적 단서를 제공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적인 답변을 모색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신구상 회화(Nouvelle Figuration)는 60년대 프랑스파리를 거점으로 부상한 예술운동이며 이 운동은 지금도 진행 중인 상태에 있다. 신구상 회화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사회문화 전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신구상’이라는 단어는 장 루이 페리에(Jean Louis Ferrier)가 기획하며 파리의 마티아스 펠스(Mathias Fels) 갤러리 에서 열린 ⟪신구상⟫展에 처음 사용되었고 당시 이전시의 참여작가는 아펠(Karel Appel), 코르네유(Guillaume), 요른(Asger Jorn), 베이컨(Francis bacon), 뒤뷔페(Jean Dubuffet), 자 코메티(Alberto Giacometti), 그리고 마타(Roerto Matta), 스타엘(Nicoas de Staëel)등으로 이들 대부분은 앵포르멜이나 코브라 그룹에 속하는 작가들이다(Catherine Millet., 1987, p.89). 참여한 작가들은 크리스토포루(John Christoforou), 울트 베르그(John Hultberg), 린드 스트룀(Bengt Lindström), 메사지에(Jean Messagier), 페틀린(Irving Petlin), 푸제(William Didier-Pouget)등이 있다(Catherine Millet., 1987, p.89). 신구상회화가 하나의 이념적인 예 술운동으로서 구체화 된 시기는 1963년으로 이 해에 파리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파리 청년작 가 비엔날레⟫展에 가쇼-탈라보(Gérard Gassiot-Talabot), 랑베르(Jean-Clarence Lambert), 레베크(Jean-Jacque Lévêque), 트로슈(Michel Troche)등 젊은 비평가들은 아이 요(Jilles Aillaud), 아요로(Eduardo Arroyo),에로(Erró Gudmunbur Ferro), 랑시약(Bernard Rancillac), 쿠에코(Henri Cueco), 레칼라티(Antonio Recalcati)등과 블레이크(Peter Black), 호크니(David Hokney),존스(Allen Johns)등을 신구상 회화를 대표하는 예술가들로 선정했다.

(Jean Louis., 1988, pp.9-11)이 운동은 1964년 파리 시립근대 미술관에서 연린 ⟪일상의 신화 Mythologie quotidiennes⟫展 1965년 파리 크뢰즈 갤러리에서 열린 ⟪서술구상 Figuration Narrative⟫展을 통해 자본권력의 작동 방씩과 효과를 비판적으로 탐색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특히⟪서술구상Figuration Narrative⟫展에서 아요로, 아이요, 레칼라티는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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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Figure 1> 죽든지 살든지 내버려두기 또는 마르쉘 뒤샹의 비극적 최후 Viure et laisser mourir ou La fin tragique de Marcel Duchamp(1965)을 발표하여 이미 현대 미술의 신화가 된 뒤샹에 대한 상징적 살해를 시도 했다. 이 화가들 눈에 뒤샹은 ‘모험 정신, 창조의 자유, 예언의 감각, 초월의 능력’ 등의 이미지응 구현하였던 살아있는 신화 였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표현을 찾기 위해 예술이 참여하였던 우스꽝스러운 경주를 용이가게 한 허구의 실체 였던 것이다(Jean Louis., 1988, pp.9-11). <Figure 1> 죽든지 살든지 내버려두기 또는 마르 쉘 뒤샹의 비극적 최후 Viure et Laisser mourir ou La Fin Tragique de Marcel Duchamp(1965)이후 신구상 미술가들은 자본주의가 강화시킨 개인주의를 일탈하는 방편으로 집단 창작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를테면⟪붉은방⟫展(1968)에서 참여한 16명의 신구상 작가 들은 한 장소에 모여 토의를 하고 이어 함께 동일한 주제를 놓고 작업했으며 익명성을 위해 서명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캔버스의 규격도 일정하게 규격화 했다(Seo, Y. H., 2008, p.360). 한편 ‘붉은 방’이라는 전시명에서 드러나듯 신구상 미술가들은 색채의 가독성, 상징송 을 적극 활용했다. 사회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통용되는 색채 이미지들을 활용해 대중들의 심리 를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신구상 작가들이 자주 사용했던 붉은 색은 좌파 정치사상들을 표상하는 색채로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그들의 화화가 좌파적 정치사상을 관한 것임을 인지하게끔 했다(Han, S, H., 2015, p.269). 서영희에 따르면 신구상 화화는 누보레알리즘과 더불어 전화 프랑스 현대미술사에서 형식주의와의 단절을 성취한 최초 의 미술 경향으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여기에 속한 젊은 작가들은 모더니즘에서 이탈하기 위해, 현실의 일상이나 에피소드를 지시하는 이미지를을 선택했고 작품의 자율성을 확증하는 대신, 미술 밖에서 찾은 내용과 주제 전달, 그리고 비판적 증언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Seo, Y.

H., 2008, pp.344-345).

<Figure 1> Vivre et Laisser Mourir ou la Fin Tragique de Marcel Duchamp (1965)

신구상 미술은 동시대 사회와 그 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 생상품 등을 비판하고 한곳에 눌러 앉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보행자이자 목격자로서 그들은 체험적 현실에 천착하여 권력 과 힘의 작동방식을 가시화했다. 프라델(Jean-Louis Pradel)에 따르면 이를테면 아다미 (Valerio Adami)는 “신체에 대한 개념 자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구상(figuration)에 열정을 가진 작가로 “인간의 신체란 일조의 도구인데 이 도구를 통해 사고와 철학이 표상 된다”는 입장 을 피력한다. “그린다고 하는 것은 모든 희미한 개념과 모든 회화적 심리주의와 신비화하고 혼란하게 하는 모든 입장을 넘어서서 현실의 경험을 증가하는 것이다”라고 아다미는 말했다.

그것을 프라델은 ‘모럴의 피륙 짜기(tissu moral)’라고 불렀다(Jean Louis Pradel., 2003, p.159). 그런가 하면 다수의 신구상 작가들은 사진, 영화, 또는 매스미디어를 모델로 삼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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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함과 교묘함을 노출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신 구상 회화에서 뉴미디어들은 새로운 것이지 만 저속한 것으로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블러디 코믹 Bloody Comics>(1977)에서 랑시악은

‘CHILI’라는 문자가 적힌 배경을 뒤로 하고 군복을 입은 채 경례 자세를 취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군부 쿠데타를 풍자했다. 그가 뽀빠이 모자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암시하는 ‘Jimmy’라는 문자를 써놓은 것은 칠레 쿠테타가 미국의 비호 아래 이루어진 일임을 폭로하기 위한 장치이다. 군복을 입은 도널드 덕과 구피, 미키마우 스는 전 세계에 걸쳐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미국의 야심을 드러내는 장치들이다(Han, S, H., 2015, p.275). 한승혜에 따르면 그들은 “만화 특유의 불손함을 무기로 비판의 대상에 공격을”

가했다(Han, S, H., 2015, p.275). 신구상 회화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사회의 메 커니즘을 드러내고 그에 별다른 거부 없이 복속해 들어간 다른 현대인들과 미술가들을 일깨워

‘간격’(distance)을 창출한다. 서영희에 따르면 신구상 에서는 냉랭한 간격과 객관화를 통해 주체의 지배적 위상을 거부하고 객체인 현실의 이미지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낯설게 바라봄으 로써, 마침내 모방의 자기기만과 감정이입을 벗어날 길을 찾았다(Seo, Y. H., 2008, p.395).

프라델은 신구상회화의 지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모든 경제적인 것이 자본의 동일한 배출 순으로 모든 하늘과 땅의 것들을 끌고 사고 있는 지금, 바로 소비의 대상과 공연이미지가 마구 뒤섞인 혼돈 속에서 증명된 것과 지껄여진 것, 역사와 그의 부정, 산 경험과 그의 상투성 사이의 분배선을 그어야 한다. 또 이 장님과도 같은 세계의 객관적인 명확성 속에서 그늘진 부분, 결함, 상처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물의 의미가 대상의 체계라는 그물망 뒤에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은 더 이상 ‘사소한’ 감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의 아트르샤(entrechat)또는 교묘하게 잘 짜인 천처럼 강한 물적 효과 에 속 하는 것이다. 목적한곳, 즉 방대한 시각적 사기의 중심으로 곧장 가려면 이름 없는 이미지 들에 대하여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Jean Louis Pradel., 2003, p.153).

2.2.1. 질 아이요(Gilles Aillaud)의 역사적 서사표현

신구상 회화의 대표적 작가가운데 질아이요(Gilles Aillaud)의 회화작업은 연구자의 작업과 매 우 유사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즉 ‘동물원’을 모티브로 삼은 아이요의 회화 작품들과 수족관을 모티브로한 연구자의 회화작품은 의도와 형식 효과 등 여러 면 에서 조응한다. 그러한 아이요의 작업의 내용과 형식을 검토하여 회화를 통한 힘의 가시화문제에 천착 할 것이다. 니꼴라 부리요 에 의하면 예술적 행위란 ‘하나의 게임’으로서 “그 형식과 패턴, 그리고 기능은 시대와 사회적 문맥에 따라 전개되며 진화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불변의 본질(immutable essence)이란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Nicolas Bourriaud., 2011, p.15).

신구상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질 아이요는 1991년 봄, 스페인 국립레이나소피아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에서 열린⟪질 아이요⟫展을 기획한 큐레이터 크리스티 앙 드루에(Christian Derouet)에 따르면 아이요의 회화 작품들은 “과거에 대한 노스텔지어 없 이 다시금 실재 하는 것(what is real)의 적절한 시도(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http://www.museoreinasofía.es/en/exhibition/gilles-aillaud)를 반영한다. 드루에가 보 기에 아이요의 회화는 실재 회화(real painting)의 회복을 추구 한다. 이를 위해 아이요는 ‘무언 가가 되어가는 회화 the painting has to be something’를 동해 잠정적 가치(transitive value) 를 드러내는 한편 ‘모더니티’에 관한 네오 아방가르드의 수사들 (rhetorics)을 전면적으로 거부 하는 태도를 취했다. 실제로 동물둘이 등장하는 아이요의 유사풍경화들은 자연적이면서 동시 에 인공적인 빛과 색을 드러내는데 이는 네오 아방가르드 의 모던 취향을 거스르는 감수성에 해당한다. 1970년대에 아이요가 제작한 <Figure 2> Untitled(1974), <Figure 2> Otaries- dans-I-eau(1976) 에서 큼지막한 캔버스의 조용한 주인공인 동물들의 이미지는 자본권력, 감시 사회의 틀 안에 거주하는 존재 양태와 상호 관계를 은유적,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 앞에서 관객은 수족관 또는 감옥을 들여다보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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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Untitled(1974) <Figure 3> Otaries-dans-I-eau(1976)

영국의 문예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에 따르면 동물을 만나고, 구경하고 관찰하기 위해 찾아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러한 “만남의 불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경계가 되는 표시”(John Peter Berger., 2000, p.38) 해당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동물원은 왕과 귀족들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으며 본격적으로 대중 일반에게 공개된 19세기 이후 동물원은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교양하는 장 이었다. 동물원에 포획, 감금, 전시된 동물들은 멀리 떨어진 이국 (exotic)땅의 정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표들이었다. 동물원에서 관람객은 어떻게 반응하 는가? 그들은 동물을 구경하기 위해 마치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듯 한 우리에 한동안 멈춰 섰다가 곧 다음 우리로 이동해 간다. 이때 그들은 물론 죽어있는 물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존재를 바라보지만 그들은 실은 철저하게 무시되어 주변으로 밀려난 어떤 존재일 따름이다. 즉 제한된 범위 내 에서 동물은 자유롭지만 그 동물들 자신뿐만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는 폐쇄된 감금 상태를 가정하고 있다. 결국 “유리를 통하여, 쇠창살 사이 의 공간을 통하여 또는 해자(垓字)위의 빈 공간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것들의 실제 모습이 아닌 것”(John Peter Berger., 2000, p.36)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동물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동물원에 간다”고 말 할 수 있고 여기서 문제는 “동물원에 전시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래야 한다고 간주되는 이미지에 맞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데” 있다. 이것은 장 클레르(Jean Clair)언급한 “이미지의 소외가 인간의 소외가 되는 상황”에 해당한다. 존 버거는 <Figure 4>

Hippotame et Arbre L’envers(1971), <Figure 5> Crocodile et Grilles(1969), 그리고

<Figure 6> Bassin Avecotarie(1976), <Figure 7> La Fosse(1967)등 아이요 작품 속 동물 원의 조망이 언제나 ‘초점이 맞지 않는 상(像)’처럼 ‘어긋나 있음’에 주목했다. “비록 그 동물이 당신으로부터 한발자국도 떨어져 있지 않은 쇠창살에 기대어 사람들을 향해 바깥쪽을 보고 있을 경우에 조차도 당시는 철저히 무시되어 주변으로 밀려난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미 “당신이 짜낼 수 있는 집중력을 있는 대로 다 짜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중심에 자리 잡도록 만들기에는 결코 충분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존 버거에 따르면 아이요의 작품에서 동물들은 “공간의 가장자리를 향해 뭉쳐있는 경향을” 보이며 조명 또한 마찬가지로 인위적이기 에 결국 동물들의 주변 환경은 “실체가 없는 가공의 것”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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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Hippotame et Arbre L’envers(1971) <Figure 5> Crocodile et Grilles(1969)

<Figure 6> Bassin Avecotarie(1976) <Figure 7> La Fosse(1967)

보여주기 위해 무대장치와도 같은 장식을 갖추고 있는 동물원들은 사실 어떻게 해서 동물들이 철저하게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입증해 주고 있는 그러한 것이다. 이 실제와 닮은 장난감들은 새로운 동물 꼭두각시, 즉 도시 지역의 애완용 동물들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 던 것이다. ... 어디에서나 동물들은 사라고 있다. 동물원에 갇혀있는 동물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소멸에 대한 살아있는 경계표가 되고 있다(John Peter Berger., 2000, pp.39-40). 존 버거의 관점에서 아이요의 동물원 회사는 “강제를 통해 주류에서 밀려난 것들”을 가시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요가 자신의 작품에서 제시한 ‘동물원’이란 ‘빈민가’, ‘판자촌’, ‘감옥’, ‘정신병원’

과 다를 바 없다. 아이요의 동물원 회화가 함축하는 역사적 서사는 주변적인 것들로 밀려나버린 것, 사라진 것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문화에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상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동물원은 어쩔 수 없이 실망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동물원에 처음 들어 선 사람이 그곳에서 동물다운 동물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장소랑 어디에도 없다. 고작해야 깜빡이며 스치듯 외면해버리는 동물들의 시선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을 곁눈질로 바라 본다. 그 어떤 것도 주위에서 더 이상 중심적인자리를 차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원가와 만나는 것에 면역이 되어있는 것이다(John Peter Berger., 2000, p.41).

3. 본인 작품 분석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20대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많은 것을 보고 자랐다.

물론 1900년 세대의 전 세계적인 수많은 전쟁, 고통, 배고픔과는 비교 할 수 없지 않을까 하지 만 우리는 또 다른 여러 가지 변화와 이슈들 속에서 그것에 빠르게 맞춰나가야 하는 그러한 어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들이 연구자의 작업으로 이어졌고 본 논문에서 과거의 연구자의 작업을 분석하고 현재의 작업과의 차이와 연결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3.1. 구조와 프레임: 능동적 행위의 수동성

2000년 대학을 졸업 후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첫 번째 그룹전을 하였다. 이때 출품 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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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자유>(2000)이다 50호 캔버스 2개에 양쪽으로 작은 새가 한 마리씩 서로를 향해 날고 있다. 이들은 훨훨 멀리 날아 오를 수 도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주 얇은 실이 새들의 발목에 묶여있다. 자유란 것이 있을까? 자유행위를 하기위하여 구조 밖으로 나가거나 구조를 넘나드는 행위자가 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힘을 그리다⟫展 2018의 전시서문에서 홍 지석 평론가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김 정이의 초기작인<Figure 8> 내가 아는 자유 (2000)연작들에는 ‘새’의 이미지가 등장한 다. ‘자유’라는 말에 걸맞게 그림 속 새 들 은 자유롭게 날고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곧 그새를 구속하는 줄이나 틀(frame)이다

<Figure 8> The Freedom I Know (2000)

그 새는 정말 자유로운 것일까? 일단 우리는 그 새가 “자유롭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리에 묶인 줄, 또는 새장 틀 에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그 새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 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내가 아는 자유>에 등장하는 ‘새’에게만 한정된 상황이 아니다. ‘자유’

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어디까 지나 사회가 허용한 틀 또는 한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따름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건을 능동이나 수동의 어느 쪽이든 해석하는 일은 (-그러므로 모든 능동이 하나의 수동이 된다.)모든 변화, 모든 변이는 기인자를 변화의 기체(基體)가 되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Friedrich W.

Nietzsche., 1988, p.333).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한지만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행동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은 프레임 때문이라 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자유라는 단어를 보았지만 진정한 자유가 없음 을 더더욱 느끼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려서는 부모가 학교가 어떤 틀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고 또 국가가 우리를 틀 안에 넣고 나아가 그 위에 또 그 위에 무언가 더 큰 틀의 힘이 존재하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가 여태 부정하고 불신하면서도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힘’ 이었다. 적어도 연구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연구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를 ‘규정하는 힘’이었다. 그것이 프레임으로 나타나 표현 되었고 그 프레임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붓을 꺾는 행위를 한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경험은 그 과정만으로도 힘을 느끼게 하고 노력, 투쟁, 고통은 고난극복의 핵심이다. 그런데 연구자에게 있어서 ‘힘’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고 있다. 이 모습이 현대를 사는 우리 의 대표적인 풍경이라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빠져있고 게임 속에 빠져 사는 모습들에 앞으로는 어떻게 되려나 걱정이 많이 되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하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그곳이 가짜인 줄 도 모르고 그 세상이 전부인 냥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가상의 세계들의 비중이 더 커지는 건 아닐까? 요즘 은행원들은 고객에게 앱을 깔아주며 자신은 일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월급은 숫자로 들어와서 숫자가 나간다. 기계와 인간을 대결 시키고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문자로 대화를 한다. 어디를 가서 물건을 보고 내가 필요한 건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살면 된다. 그게 지금 우리인가.

삐삐와 시티폰, PCS 핸드폰의 발전을 보고 살면서 편리함에 익숙해져서 그 번화가 나라는 사람 의 바코드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잊은 지 오래되었다.

<Figure 8> The Freedom I Know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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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좋다하여 절대로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멋진 수족 관 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을 보며 이런 삶이 투영되기 시작하였다.

-2016 작가노트 중에서-

2016 노트에 수족관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보인다. 수족관이라는 이미지는 연구자로 하여금 굉장한 슬픔의 감정을 일으켰다. 아주 완벽하게 꾸며진 수조 안의 물고기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짜라고 믿고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정해진 시간에 모이를 줄 것 이고 시간을 느끼도록 시간 맞추어 형광등도 켜줄 것이다. 물도 갈아줄 것이고 그중 한 마리가 죽으면 얼른 치워줄 것이다. 아주 완벽하다. 그러나 진짜는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내가 느끼고 생각되는 세상과 비슷하다. <Figure 9> Adaption18(2018)은 500호 가로가 긴 사이즈의 패널 에 오키나와에서 보았던 츄라우미 수족관을 재현해 놓았다. 실제 수족관은 아주 거대했고 그 안에는 지구상 살아있는 어류 중 가장 크다는 고래상어 세 마리가 합사되어 있었다. 마치 쇼를 보여주기 위해 훈련된 것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위, 아래, 옆, 등 모든 면을 다 볼 수 있게 헤엄치 고 있었고 그 외에도 실제 큰 사이즈들의 어류들이 바다 속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그들 사이즈 와 힘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작고 힘없는 존재들일 텐데 우리는 그것을 틀 안에 가두고 관람하 고 있다. 작품의 오른 쪽에 보이는 창살 형태의 틀들은 그들을 가둔 힘을 표현 하고자 실제 수족관의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그 틀은 권력이고 곧 힘이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Figure 9> Adaption18(2018)

<Figure 10> Adaption1801(2018), <Figure 11> Adaption1802(2018)를 보면 수족관 저편 으로 하나의 창이 또 있다. 완벽한 것 같지만 그것은 관람자의 시각을 더 넓게 해주는 장치이다.

본 논문을 쓰고 연구하면서 현재 나의 작품과 형태상으로 너무나도 흡사한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질 아이요의 동물원 작업들이다.

<Figure 10> Adaption1801(2018) <Figure 11> Adaption1802(2018)

<Adaption 18>2018, 작업에서는 거대한 수족관 안에 저편으로 문이 보인다. 그곳에서는 먹이 도 나오고 가끔 수중 다이버들이 들어가 물고기들과 함께 쇼도 하고 불편한 것 이 있으면 청소 도 하는 기능으로 쓰여 진다. 질 아이요의 <Figure 12> Int-Rieur-Vert(1964)의 저 뒤편에 서 보여 지는 문은 나의 작업속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연구자가 본 수족관 안의 상어 와 가오리들이 자신을 보여주듯 헤엄치듯이 질 아이오의 작업안의 물개 역시 스냅사진을 찍는 듯 포즈를 취한 것처럼 재미있는 얼굴을 화면 우리와 가까운 곳에 배치해두었다. 그 동물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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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즐거운지 어쩐지는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유쾌한 장면이 아닌 것임은 분명하다.

<Figure 12> Int-Rrieur-Vert(1964) <Figure 13> Cage-Aux-Lions(1967)

<Adaption1802>2018에서는 그것을 촬영하는 반대편의 사람들의 실루엣도 보인다. 드러내놓 고 힘을 과시하고 있는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질 아이오의 1967년 작 <Figure 12>

Cage-Aux-Lions(1967)에서는 철창 틈새로 보이는 사자의 축 늘어진 앞발의 형태나 사자 실루엣에서 온몸으로 슬픔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그들은 길들여지고 적응을 한다. 질아이요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공간의 형태, 저 뒤편에 보여 지는 문, 곰들을 위한 인공적인 바위나 악어들을 위한 조약돌들이자 얕은 물가와 같은 장치들은 연구자의 수족 관 작업에서 보여 지는 수족관의 프레임과 인위적인 형광 빛, 그리고 확실히 표현되지 않고 흔들리듯 표현된 배경과 흡사 하다고 생각된다.

<Figure 14> Adaption1809(2018) <Figure 15> Adaption1810(2018)

<Figure 14> Adaption1809(2018), <Figure 15> Adaption1810(2018)작업에서는 캔버스 의 외곽형태를 더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캔버스의 테두리를 수족관의 테두리로 더 반짝한 선을 그려 넣었다. 이것이 연구자가 보여주고 싶은 회화 속 에서 보여주는 ‘힘’일 것이다. 프레 임의 명확한 규정,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에게 그어놓은 명확한 선, 이것이 연구자가 궁금해 했고 해결하고자 했던 힘의 가시화를 더욱더 명확히 해 주었다. 다시 한 번 홍지석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를 에워싼 틀’이 그것이다. 질 아이요와 연구자의 작업 안에서 보여 지는 힘을 규정하는 방식은 어쩌면 비슷해 보일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형식의 창안보다 현상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집중하는 쪽을 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연구자의 작업과 유사한 맥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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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6> Serpent-et-Trou(1966) <Figure 17> Adaption(2017)

질 아이오의 1966년 작 <Figure 16> Serpent-et-Trou(1966)을 보면 독사가 무엇인가 잡아 먹어 등이 불룩하다. 스스로 사냥하여 잡아먹은 것이 아니고 주는 먹이를 먹었을 것이다. 우리 안의 독사도 시간되면 먹이를 넣어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Figure 18> Adaption2017(2017)

연구자는 그 힘의 크기를 적극적인 형태로 줄여보았다. <Figure 17> Adaption(2017)과

<Figure 18> Adaption2017(2017)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포식자의 크기를 확실하게 줄어있다. 힘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수족관안의 포식자는 권력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고 그것을 더 작게 작은 컵 안에 분리해 넣음으로서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세에서 나아가 작은 목소리라도 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점이 질 아이요의 동물원과 나의 수족관의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장 클레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아이오의 동물원 그림에 는 브레히트의 연극에서와 같은 주제의 절대적인 거리감이 있다. 회화적 기교에 대한 신화적 허수를 깨뜨리기, 사회적 구조에 대한 암시적인 고발, 이미지의 소외가 인간의 소외가 되는 상황, 그리고 회화를 제작하는 것이 곧 우리 안에 있는 동물을 그린다는 것과 다름없는 현실의 재현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무기력함과는 다른 자세이고 싶다. 조금 더 적극적인 목소리 이고 싶다. 있는 것을 다시 표현하는 재현을 떠나 없는 것을 형상화하는 시각과, 즉 힘의 Reproduction이 아닌, 힘의 Visulalization인 것이다.

4. 결론

본 연구자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힘’에 관해 관심이 있다. 거대한 힘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까? 회화라는 2차원적 표현 방식 안에 어떻게 보여 질 수 있을까? 이 물음의 출발은 최근에 이루어졌지만 본인작품을 과거부터 비교분석해 본 결과 아주 예전부터 연구자의 주제는 항상

‘힘’ 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관심은 당연할 수도 있다. 연구자는 늘 어려서부터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프레임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고 또한 ‘힘’의 횡포에 좌절감도 맛보았다. 그리고 과 거의 수많은 시대의 사유들 속에서 언제나 최고의 논점이 되는 화두는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시간이 있는 한 어디에도 존재했다, 그 힘을 니체는 “삶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자의 본질을 물질이나 정신이 아닌 생명의 힘 상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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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하는 “의지”로 규정한다. 니체적 의미의 힘이란, 생명에서 부단히 솟구치는 근원적이고 내 적인 힘이고, 의지란 힘을 지향하는 성향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에의 의지가 구성해 낸 구성물인 대상을 인식한 내용이 아니라 인식한 대상에 대한 힘과 그 가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능동적 힘이냐 반응적, 수동적 힘이냐, 긍정적 의지냐 부정적 의지냐 하는 것이 대상과 관계 맺는 인식 내용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 긍정적 의지와 능동적 힘을 대표하는 인간상이 자유정신을 구현한 위버멘시인 것이다. 20세기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인들은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았고 힘들었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적응을 하고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빚어지 는 사회, 문화 전반의 의식에 대하여 비판적이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예술가로서 방법을 택했으 리라 생각한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을 화폭에 옮기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 많은 사례들에서 감동을 받는다. 지금 우리의 고민, 지금을 그릴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은 사회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새로운 양식의 생성과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대중과 소통되는 매개물로서 존재한다. 즉 미술가의 역할은 반사 회적인 것이다. 앞서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진정한 위버멘시는 시대의 예술가들이고 본 연구자 도 그런 초극하는 삶을 살고 싶다. 현재의 연구들은 전후세대의 방향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들 의 의식을 계승했다고는 할 수 있다. 빠르게 변해가고 거기에 발을 맞추지 않으면 뒤처지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이 치부되는 이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은 무엇인가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한 작업들을 정리하면서 나의 이야기는 내용면에서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음이 보였다. 정리하자 면 프레임 안에는 정리된 질서가 있고 밖에는 자유가 있다. 늘 자유를 갈망하지만 정작 프레임 밖으로 나가서 누리는 자유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무리로 생각되어진다. 푸코의 말을 인용하자면 현대의 권력 즉 규율사회에서 잘 살아가는 우리는 안에서 투쟁하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적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연구자의 작업 속에 그려진 물고기들처럼 우리는 그 안에서 조용히 적응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그 안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투쟁하는 삶을 사는 것, 저 유명한 선배들 (질 아이요)처럼, 그래서 가치를 창조하는 이가 되는 것, 그것이 니체의 위버멘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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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