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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신저자 이민호, 대전광역시 유성구 엑스포로 483 한국한의학연구원 문헌연구그룹 Tel 042-868-9571 Fax 042-863-9463 E-mail [email protected]
明·淸代 ‘錢塘醫派’의 敎·硏·醫
이민호
한국한의학연구원
Education, Research and Medical treatment of the Qiantang Medical School(錢塘醫派) in the Ming(明) Qing(淸) Period
Min-ho Lee
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The Qiantang Medical School(錢塘醫派)formed on the basis of the education provided by Lüshantang(侶山堂)in the specific area of Hangzhou(杭州)displays clear differences from other medical schools in that it combined medicine with educational and research activities.
The Qiantang Medical School(錢塘醫派)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history of th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via providing the education through Confucian academies and the researches conducted to find appropriate treatment methods based on the climate and natural environment of the southern part of China. The tradition of joint researches on the classical works of Chinese medicine is equally important in terms of th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Key Words : Chinese Medical Academy, Local Medical Studies, Qiantang Medical School(錢塘醫派), Lüshantang(侶山堂)
Ⅰ. 서론
중국사에서 하나의 전환기로 인식되는 명말·청초 시기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자본주의 맹아’ 현상이 출현할 정도로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경제적 부가 창출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士農工商’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겨
‘棄儒爲醫’1) 현상이 출현하고, 정부 중심의 의학체계 에서 점차 민간 중심의 의학체계로 전이되면서 특히 경제적 선진지역인 杭州·徽州 등지에서는 지역의학이 성장하였다.
양자강 삼각주의 남단에 위치하여 南宋代 建都 이래 중국 정치, 경제, 문화 및 의학의 중심지였던 杭州는
明 · 淸代 들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환경을 바탕으로 醫藥學 지식의 보급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의학교육, 의료시설, 의학연구조건 등에서 기타 지역과 비교해 우위에 있었다.2) 의약학 발전의 전제가 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杭州는 중국내에서 가장 선진 지역이었다.
경제·문화적 우월을 바탕으로 杭州에서는 명말 이 지역 특성에 맞는 중의학파가 형성·발전되었으니 바로 錢塘醫派이다. 錢塘醫派는 明末·淸初에 형성되어 淸末 光緖年間(1875-1905)까지 200여 년간 걸출한 의학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사료에 기재된 것을 근거하여 살펴본 결과 同門 및 師生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의학
1) 이민호,「明中期 民間 醫藥業의 成長과 ‘棄儒爲醫’」,『중국사 연구』55, 2008.
2) 朱德明, 張承烈,「錢塘醫家學派沿革的區域時代背景」,『浙江中醫學 院學報』27-4, 2003, p.12;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 朱德明,
「錢塘醫派述要」,『中華醫史雜志』34-2, 2004, p.78.
盧之頤(1599∼1664)
張遂辰(1589∼1668) → 張志聰(1610∼?) → 張錫駒(1644∼?)
高世栻(1634∼?) → 仲學輅(?∼?)
인물이 약 40여명에 달한다.3) 錢塘醫派를 대표하는 인들물과 그들의 사승관계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1> 전당의파의 대표인물 및 사승관계4)
이들 중 盧之頤와 張遂辰은 강학을 통한 중의학 전승의 방법론과 학파를 창시한 초기 ‘전당의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張志聰은 전당의파의 체계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어서 張錫駒와 高世栻은 전승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으며, 청말의 仲學輅는 侶山堂의 유풍을 그대로 계승하여 강학을 통한 전승에 공헌했다. 역대 錢塘醫派에 속하는 의가들은 ‘尊經崇古’의 학술사상으로 강학을 통한 인재를 배양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의학 경전을 연구함으로써, ‘講學’과 ‘硏經’, ‘行醫’의 삼위일체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5)
본고는 명·청대 대표적인 지역의학파인 錢塘醫派의 학술과 의료활동의 특성을 교육과 연구, 의료 등 3개 영역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 의학사 영역에서 시대와 지역에 따른 학술유파의 형성과 전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Ⅱ. 中醫講學과 醫學人物의 養成
明·淸代 杭州는 걸출한 의학가인 소위 ‘錢塘三張’
(張遂辰, 張志聰, 張錫駒)을 배출한 당시 중의학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 청대의 王琦는 “順治-康熙初까지 40여 년 동안 外郡 사람들이 武林6)을 칭하여 醫薮라 했다.”7)고 평가했다. 杭州가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중의학 관련 학문이 발달하고 학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높은 교육열과 서원의 융성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8)
3)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 朱德明,「錢塘醫派述要」,『中華 醫史雜志』34-2, 2004, p.74.
4) 이민호,「중의서원 ‘여산당’ 강학과 ‘전당의파’」, 『한국한의학 연구원논문집』16-3, 2010, p.50.
5)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 朱德明,「錢塘醫派述要」,『中華 醫史雜志』34-2, 2004, p.76.
6) 武林은 錢塘, 즉 杭州의 별칭이다.
7) 王琦,『侶山堂類辨』,「跋」, 人民衛生出版社, 1983, p.78. “自順 治至康熙之初40年間, 外郡人稱武林爲醫薮”
전근대시기 중국의 대표적인 중의교육기관으로 평가 받는 ‘侶山堂’’9)이 설립되기 이전부터 杭州에서는 명대 부터 강학 형식으로 중의학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초기 錢塘醫派를 대표하는 인물인 盧之頤는 생도를 모아 강학 형식으로 중의학을 교육한 창시자이다. 盧之頤의 原字는 晋公, 字는 子繇로 自稱 蘆中人이라 했다. 明 萬曆27年 (1599)에 태어나 淸 康熙3年(1664)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았고, 명의로부터도 전수 받아 젊은 시기에 이미 의학에 정통했다. 그의 부친인 盧不遠은 晩明 ‘尊經派’의 대표적인 醫家로 아들인 盧之 頤의 의학에 영향을 주었다. 盧之頤는 부친의『本草綱目 博義』를 기초로 다년간에 걸쳐『本草乘雅半偈』를 편찬 하는 과정에 지방 명의를 초청하여 함께 연구 · 논의하고 대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張仲景의 학설과『內經』을 講解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이 책의 자서에서 “武林 諸君子大集余舍”10)라 한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盧之頤가 의학경전을 강학한다는 명성이 각지로 전해 지면서 張遂辰 門下의 張志聰도 청강하였다. 이후 張志 聰은 淸 康熙3年(1664) ‘胥山之陰, 娥媚之麓’, 즉 현재의 杭州市 城隍山脚粮道 부근에 의학서원인 ‘侶山堂’을 열어 의학을 강의하고,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동학을 모집하였다. ‘侶山堂’에는 수 십 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후에 張志聰의 사상을 전수받은 高世栻의 경우처럼 10년 동안이나 수학한 경우도 있었다. 張志聰은 ‘侶山堂’
에서 30여 년 동안 강학을 계속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제자인 高世栻이 스승의 강학사업을 이어받아 4년 여 동안 지속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은 高世栻의 제자 王子佳가『醫學眞傳』의 서문에서 “康熙30年(1691) 봄 선생은 동문 제자를 侶山堂에 모아 4년여 동안 강학 하였다.”11)고 한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錢塘醫派의 강학 전통은 청말까지 계승되었으니 光緖 年間의 仲學輅는 杭州에서 杭垣醫局을 열어 ‘侶山堂’의
8) 이민호,「중의서원 ‘여산당’ 강학과 ‘전당의파’」,『한국한의학 연구원논문집』16-3, 2010, p.47.
9) ‘侶山堂’이라는 명칭은 蘇東坡의「蘇壁賦」중에서 “侶魚蝦而 友麋鹿”이라는 구절에서 “侶伴以傍山”의 의미를 취해 지었으나, 淸乾·年間에 兵變으로 인해 훼손되어 현존하지는 않는다.(李珍,
「吳山脚下“侶山堂”-寄情“錢塘醫派”」,『中醫藥文化』2008年 第3期, p.27) 2008년 3월 이곳에 ‘侶山堂’정비를 세우고 게막 의식을 진행하였다.
10) 盧之頤,『本草乘雅半偈』,「自序」.
11) 高世栻,『醫學眞傳』,「序」, 人民衛生出版社, 1983, p.137, “丙子 (康熙30年)春, 先生聚門弟子于侶山講堂, 講學論道, 四載有餘.”
醫療 · 講學 · 硏經 삼위일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후세에 전하였다.
명말·청초시기의 盧之頤를 필두로 張志聰과 그의 제자 高世栻, 그리고 청말의 仲學輅에 이르기까지 錢塘 醫派의 중요한 교육 수단이자 후진양성 방법이었던 강학의 특징으로는 다음 4가지를 들 수 있다.12)
첫째, 강학에 참여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의학을 학습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년간 의료 경험이 있는 醫家들이거나 世醫弟子들이 다수 참여하였는데, 張志聰, 高世栻과 같은 당대의 명의들도 있었다.
둘째, 강의, 토론, 분석 등 교학 방법이 매우 다양했다.
강사는 한 사람에 한정하지 않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 라면 누구나 강의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侶山堂’에서 강의는 張志聰뿐만 아니라 張開之, 沈亮辰 등도 참여 하였다.
셋째, 의학경전과 의학 이론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각종 병증에 대한 임상 연구 또한 중시하였다. 錢塘醫派의 강학교재인『侶山堂類辨』,『醫學眞傳』은 의학이론과 당시 주요 병증을 결합하여 치료 방법을 밝히고 있다.
넷째, 강학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 점이다.
張志聰, 高世栻이 ‘侶山堂’에서 수 십 년 동안 활동했고, 仲學輅가 ‘杭垣醫局’에서 20여 년 동안 강학하였으니 이들 두 곳에서 배출한 경전에 보이는 인재가 40-50 명에 달하고 있다. 물론 사서에 기재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Ⅲ. 錢塘醫派의 醫經 硏究와 그 特徵
중국에서 역대 의학 경전에 대한 정리와 연구는 형식상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정부에서 몇몇 의가를 조직하여 정리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의가들의 개별 연구이다. 錢塘醫派의 의학 경전에 대한 정리· 연구는 민간 공동 연구의 선구로 공동 撰注의 새로운 저술 형식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예를 들면 盧之頤는 부친의『本草綱目博義』를 기초로 18년에 걸쳐『本草乘雅半偈』를 편찬할 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반영했고, 張志聰의 저술 가운데 후세에 큰 영향을 준
12)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 朱德明,「錢塘醫派述要」,『中華 醫史雜志』34-2, 2004, p.77.
『內經集注』,『傷寒論集注』도 講學 중에 同學과 門弟의 의견을 참조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錢塘醫派의 또 다른 2편의 대표작인『侶山堂類辨』,『醫學眞傳』도 공동 연구로 이룬 가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錢塘醫派는 의학 경전 연구에 새로운 방법, 즉 공동으로 연구·분석 하는 기풍을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13)
錢塘醫派에 속하는 의가들은 풍부한 학술 저작을 남겼 으며, 특히 주목할 만한 성과는『傷寒論』연구에 있었다.
후한 말 장중경의 저작인『傷寒雜病論』의 출현은 중국 의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① 실재한 저자 한 사람이 쓴 최초의 의서이며, ② 어떤 원리에 바탕해서 구성된 최초의 임상의학서이고, ③ 내복약, 그것도 湯液을 중심으로 하는 요법과 약의 처방을 집성한 것으로 진한대 탕법을 이용한 성과의 결정체이며, 진단 법과 약물을 주체로 하는 치료법을 긴밀히 결합한 최초의 임상 의학서였다.14)
이후『傷寒論』은 삼국시대 魏의 태의령을 지낸 王叔 和와 金代 成無己의 연구 및 주해가 더해진 이래 그 해석을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명·청대에 들어와 서는 지역학파 간 대립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新安 醫學의 傷寒錯簡重訂派와 錢塘醫派가 있었다.
명대 신안의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方有執은 흡현 사람으로 明 嘉靖2年(1523)에 태어나 萬曆21年 (1593)까지 생존하였으나 구체적인 사망일시는 명확 하지 않다. 方有執의 저서『傷寒論條辨』은 상한론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錯簡重訂’설의 영향으로 강남 지역 에서는 백화제명의 학술쟁명이 일어나 方有執 등을 중심 으로 한 ‘錯簡重訂派’와 張志聰 등의 옛 이론을 유지 하고자 하는 ‘維護舊論派’ 및 柯琴 등의 ‘辨證論治派’가 정립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15) 方有執이 錯簡重訂說을 제기한 이후 程應旄, 鄭重光 등이 그 설에 찬동하였다.
『傷寒論』에 나타나는 桂枝湯, 麻黃湯, 大靑龍湯 3가지 처방은 孫思邈이『千金翼方』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 였다. 宋代에는 손사막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三綱 鼎立說을 창안하였다. 許叔微는『傷寒發微論』에서 최초로
“一卽桂枝, 二麻黃, 三卽靑龍如鼎立”이라 하여 후세에
13) 鮑曉東, 張承烈, 胡濱,「試論 “錢塘醫派” 的治學態度與方法」,
『浙江中醫學院學報』27-5, 2003, p.15.
14) 야마다 게이지 저, 전상운, 이성규 역,『중국 의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이언스 북스, 2002, pp.169-171.
15) 王鍵, 牛淑平,「新安醫學的非物質文化遺産特徵」,『中醫藥文化』
2007-5, p.48.
저자 저서명
盧之頤 傷寒論疏鈔金錍
張遂辰 張卿子傷寒論
張志聰 傷寒論集注
傷寒論宗印
張錫駒 傷寒論直解
高世栻 傷寒集解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후 三綱鼎立說은 확대 해석되어 方有執은 ‘太陽病編’의 조문을 衛中風, 營傷寒, 營衛具 中風寒의 3가지 강령으로 분류하고 이를 三綱과 결부 시켜 桂枝湯은 傷衛를, 麻黃湯은 傷營을, 大靑龍湯은 영위가 모두 상한 것을 다스린다고 주장하였다.16) 그는
『傷寒論』이 王叔和에 의해 원래 모습이 상실되었고, 성무기에 의해 다시 한 번 변조되었기 때문에『傷寒雜 病論』의 원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新安醫家 方有執의 주장에 대해 전당의파 학자들은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錢塘醫派에 속하는 대부 분의 의가가『傷寒論』을 연구하였는데 이를 표로 나타 내면 다음과 같다.
<표2> 錢塘醫派의 상한론 관련 학술저작 목록
『傷寒論』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張遂辰은 明末 · 淸初 新安醫派의 ‘錯簡重訂說’17)에 대응하여 ‘維護舊論’을 제창한 대표적인 의학인물이었다. 현재까지도 傷寒學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張卿子傷寒論』에서 그는 “(張)仲景의 書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18)고『傷寒論』을 예찬하였다. 그는 역대『傷寒論』을 연구한 의가들을 모두 존중하면서
“諸家論述, 各有發明”19)이라 하여 어떤 의가에 대해 서도 폄하하지 않았지만, 명말·청초 이전 역대 의가 가운데 ‘尊王(叔和)贊成(無己)’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張遂辰은 王叔和의 편찬 순서가 仲景의 원서와 다를 뿐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으며, 그의『張卿子傷 寒論』은 成無己의『注解傷寒論』에 근거하여 편찬한
16) 김남일외저,『강좌 중국의학사』, 대성의학사, 2006, p.176.
17) 이 학설은『傷寒論條辨』을 편찬한 신안의가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사람인 方有執이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汪滬 雙, 牛淑平,「試述新安醫學的‘學派’與‘流派’」,『中醫文獻雜志』
2000年 4期 참조.
18) 張遂辰,『張卿子傷寒論』,「凡3」(『中國醫學大成 · 傷寒分冊』), 中國中醫藥出版社, 1997, p.283. “仲景之書, 精入無比.”
19) 張遂辰,『張卿子傷寒論』,「凡3」(『中國醫學大成 · 傷寒分冊』), 中國中醫藥出版社, 1997, p.283.
것으로 다만 分卷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成無己의 說을 중심으로 郭雍, 張潔古, 龐安常, 李東垣, 朱震亨 등 의가의 설로 보충하였다. 이후 그의 사상은 張志聰과 張錫駒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고, 이들 두 인물과 더불어 ‘錢塘三張’으로 칭해졌다.
의경 연구를 강조했던 張志聰은 역대 의서 중에서는
『傷寒論』을 중시하여 “상한의 도에 밝으면, 온갖 어려운 병을 만나더라도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학에 입문하는 자는 상한으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어려 움을 극복한 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20)고 생각했다.
『傷寒論集注』는 張志聰의『傷寒論』연구의 결정판이자 錢塘醫派의 대표작인 까닭에 후세에 대한 영향도 가장 컸다.21) 하지만 이 책은 張志聰이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했으며 결국 제자인 高世栻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상 전당의파의『傷寒論』연구의 특징을 신안의가와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維護舊論’을 들 수 있다. 錢塘醫派의 학문 방법은 金代 成無己의 방법론과 일맥상통한다. 錢塘醫派 의가 들이 편찬한『傷寒論』관련 주해서들의 편제는 기본적 으로 成無己의『注解傷寒論』을 따르고 있는데, 원저의 편제에 충실하여 ‘辨脈法’, ‘平脈法’, ‘傷寒3’ 등을 포함 시켰다.22) 반면 傷寒錯簡重訂派의 신안의가 方有執은
『傷寒論』판본 내용 중 ‘辨脈法’, ‘平脈法’, ‘傷寒3’ 등 12편은 모두 장중경의 원문이 아닌 왕숙화가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成無己의『注解傷 寒論』은『傷寒論』의 원래 모습을 변형시켰다고 보았다.23) 이에 비해 錢塘醫派에 속하는 학자들은 方有執이『傷寒 論條辨』에서 주장한 ‘三綱鼎立’, 즉 ‘風傷衛, 寒傷營, 風寒兩傷營衛’에 대해서도 錢塘醫派는 반대하였다.24)
20) 張志聰,『侶山堂類辨』,「醫學入門」, 人民衛生出版社, 1983, p.50.
“明乎傷寒之道, 千般病難, 不出于範圍焉. 故醫學入門, 當從傷 寒始, 先難其所難, 而後易其所易.”
21) 이와 관련하여 청말의 仲學輅는 “凡陰陽氣血之生始出入, 臟腑 經絡之交會貫通, 無不了如直掌矣. 隱庵之功, 岂在仲景之下歟?”라 평하기도 했다.
22)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錢塘醫派”對傷寒論硏究的貢獻」,
『浙江中醫學院學報』28-4, 2004, p.3.
23) 汪滬雙, 牛淑平,「試述新安醫學的‘學派’與‘流派’」,『中醫文獻雜志』
2000年 4期, p.3.
24) 이와 관련 張志聰은 “後人不參旨意, 謂風必傷衛, 寒必傷營, 欲以一言而槪全論, 不思寒亦可傷衛, 風亦可傷營, 不思卽在營衛, 何以復病骨節, 卽病骨節, 何以復當發汗, 只襲糟粕而違聖理, 致本論終于蒙蔽也.”라 했다.
張志聰은 ‘匯節分章’의 방법을 채용하여『傷寒論』
원래 조문의 순서를 기초하여 모두 100개의 장으로 나누고 장마다 하나 내지 여러 개의 조문을 포함시켜 장마다 몇 마디로 조문의 중심이 되는 내용을 개괄하여 王叔和가 정리한『傷寒論』이 결코 ‘斷殘錯簡’이 아니라는 유력한 논거를 제시하였다.25)
둘째, 氣化學說의 제창이다.『傷寒論』의 기화학설을 존중하여 오운육기의 이론으로 상한을 설명할 것을 강조 하였으며, 심지어 “오운육기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傷寒論』을 논할 수 없다.”26)고 하였던 張志聰은
『內經』운기학설을 깊이 연구하여『傷寒論』의 六經은
‘經氣’, 즉 ‘六經之氣’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傷寒 論集注』에서 天의 六氣는 三陰三陽으로 나뉘고, 人身의 三陰三陽 六經之氣가 서로 감응하여 外感의 병 즉 六淫의 氣와 人身六經之氣가 ‘氣類相感’함으로써 발병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五運六氣’, ‘標本中見’을 사용하여 육경의 실질 내용을 해석하는 방법은 錢塘醫派의『傷寒論』
연구의 주된 논점이었다.27)
셋째, 錢塘醫派는『傷寒論』의 六經辨證體系로 臨床 各科 疾病에 적용한 의학 유파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張志聰은『傷寒論集注』에서 “대저 본론(『傷寒論』)은 비록 상한을 논하고 있지만, 경맥·장부는 물론 음양의 이치까지 다루고 있다. 무릇 모든 병을 망라하고 있으니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사서를 알지 못하고서 儒者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론(『傷寒論』)을 알지 못하고서 醫者라 할 수 없다.”28)고 하였다.
넷째, 胃氣를 중시했다. 錢塘醫派는『內經』의 “五臟 六腑가 모두 胃에서 시작한다.(五臟六腑, 皆禀于胃)”
및 “위기가 있으면 살고 위기가 없으면 죽는다.(有胃氣 則生, 無胃氣則死)”의 설을 근거로 張仲景이『傷寒論』
에서 특히 위기가 외감 질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중시했다고 인식하였다. 張志聰은『傷寒論集注』의 범례
25) 김기욱, 박현국, 김재철, 박선주, 「張志聰의 注釋書에 관한 연구」, 『대한경락진단학회지』3, 2005, p.58.
26) 張志聰,『侶山堂類辨』,「傷寒論編次論」, 人民衛生出版社, 1983, p.43. “學者當于大論之中五運六氣承之, 傷寒之義, 思過半矣.”
27)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錢塘醫派”對傷寒論硏究的貢獻」,
『浙江中醫學院學報』28-4, 2004, p.4.
28) 張志聰,『傷寒論集注』. “夫本論(『傷寒論』) 雖論傷寒, 而經脈 臟腑, 陰陽交會之理, 凡病皆然, 故內科, 外科, 兒科, 女科, 本論 皆當讀也. 不明四書者, 不可以爲儒, 不明本論者, 不可以爲醫.”
에서 “본론의 큰 뜻은 사람은 위기로 근본을 삼아야 하니 상한을 다스리는 것은 위기를 손상시킴이 없는 것이므로, 상한을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위기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29)고 했다.
Ⅳ. 硏究와 治療의 結合
중국 고대 醫學家는 의료에는 능한 반면 저술을 남기지 않거나, 반대로 저술을 남겼지만 실제 임상에는 뛰어 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역대 의학유파 가운데 임상과 저술, 강학에 모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예가 극히 드문데, 錢塘醫派는 이 3개 분야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 錢塘 醫派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임상의가로 의술이 좋아, 난치병의 치료에도 뛰어났다.
張遂辰은 傷寒 치료로 명망이 높았으며, 후세 사람 들이 그가 진료했던 곳을 ‘張卿子巷’30)이라 명명하였다.
盧之頤 또한 수 십 년간 의업에 종사하였는데, 그의 의술에 대해『侶山堂類辨』,「跋」에서는 “당시 盧晋公(盧之頤)는 奇疾 치료에 효과가 있어 명성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31)고 하였으니, 특히 奇疾 치료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9대째 의업에 종사한 世醫로 본인도 수 십 년간 임상에 종사했던 張志聰은 특히 臟腑의 기능 및 그 生理·病理 변화에 주목하고, 장부와 질병의 관계를 중시했으며, 經絡이 氣血을 운행하는 것으로 臟腑 간의 상호 연계와 영향을 주고받는 통로라고 생각하여 臟腑 經絡의 기능과 활동을 통해 經氣學說의 변증방법을 논하였다.32) 그는 經氣學說에 입각해 질병을 ‘氣病’과 ‘經病’으로 구분하 였다. ‘氣病’은 부위로 말하면 表와 外에 있고 陽이다.
‘氣’는 주로 장부 사이의 기화 활동을 지칭하며 병이 氣分에 있으면 바로 장부 사이의 기능 활동에 영향을 끼쳐 氣化가 불급하거나 실조하는 병리적 변화를 나타 낸다고 보았다.33) 經病은 邪氣가 경락에 침범하여 정상
29) 張志聰,『傷寒論集注』,「凡3」. “本論大旨, 謂人以胃氣爲本, 治傷寒者, 毋損其胃氣, 治傷寒者, 當以胃氣爲本”
30) 현재의 杭州市 橫河橋 부근의 蒲昌巷이다.
31) 王琦,『侶山堂類辨』,「跋」, 人民衛生出版社, 1983, p.78. “盖其 時盧君晋公治療奇疾輒效, 名動一時”
32) 鄭林, 王國辰,「張志聰醫學學術思想硏究」,『天津中醫學院學報』
21-2, 2002, p.6.
33) 정경호,「張志聰의 醫學思想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2001, p.47.
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결국 병이 기에 있는 것과 경에 있는 것이 다르므로 약물 또한 달리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 했다.34)
高世栻도 40여 년간 의업에 종사하면서 임상 경험이 매우 풍부했고, 특히 辨證求因에 뛰어나 六淫外感을 연구하기도 했다. 高世栻의 자는 士宗으로 明 崇禎7年 (1634) 태어났다. 사망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대표 작인『醫學眞傳』이 1699년 완성되었다는 점을 고려 할 때 최소 65세 이상 살았다고 생각된다. 高世栻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집안이 매우 가난 했다고 한다. 28세 때 그는 이질에 걸려 스스로 치료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후 다른 의사를 불러 치료했지만 역시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결국에는 약을 복용함이 없이 저절로 병이 나았다고 한다.35) 이를 계기로 의학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당시 張志聰의 명망을 듣고 10년 동안 학습하여 명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高世栻의 의술에 큰 진전이 있어 처방이나 용약에 있어 속류와 같지 않았다고 하며, 張志聰도 이 점을 인정하여『傷寒 論集注』에서 그를 ‘高子’라 칭하였다.36)
청말 杭垣醫局에서 20여 년 동안 의료에 종사했던 仲學輅는 변증에도 능해 만년에는 慈禧太后의 병을 치료 하기도 했다. 즉 光緖6年(1880) 6月 慈禧太后의 병을 太醫들이 치료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천하에서 널리 명의를 구하였다. 당시 浙江巡撫 譚鐘麟이 薛寶田과 더불어 仲學輅를 추천하자 淸朝는 우선 태의원에서 시험을 치른 후 이들이 모두 의학에 정통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치료를 맡겼는데, 이들은 태후에게 養心湯과 保元湯을 加減하여 복용토록 함으로써 1달 여 만에 치료하였다고 한다.37) 청말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의학자인 章太炎의 長兄 章炳林은 이러한 仲學輅의 의료를 神妙한 것으로 높이 평가했다.38)
錢塘醫派의 구성원들이 임상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데에는 다음 3가지 요인이 있다.39) 첫째, 그들은 장기간
34) 정경호,「張志聰의 醫學思想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2001, p.61.
35) 高世栻,『醫學眞傳』,「先生自述」, 人民衛生出版社, 1983, p.137.
36)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 朱德明,「錢塘醫派述要」,『中華 醫史雜志』34-2, 2004, p.76.
37) 李珍,「吳山脚下 “侶山堂”-寄情 “錢塘醫派”」,『中醫藥文化』
2008年 第3期, p.30.
38) 仲學輅,『本草崇原集說』,「序」, 淸宣統2年(1910) 錢塘仲氏刻本.
“講醫一宗本經長沙及張氏高氏, 疏方用藥, 神妙變化”
임상에 종사하여 수 십 년의 풍부한 임상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의학 경전에 대한 연구를 중시하여 盧之頤에서 仲學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醫理에 정통 했다. 셋째, 강학활동을 통해 醫理와 실제 임상을 결합 함으로써 의학 기술이 더욱 정밀해질 수 있었다.
Ⅴ. 결론
明末·淸初 시기 중국에서는 정부 주도형의 의학체계 에서 점차 민간주도형의 의학체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 특성에 맞는 새로운 의학파가 형성되고 있었 는데 杭州도 예외는 아니었다. 明·淸代 杭州는 중국에서
‘資本主義 萌芽’의 발원지로 지역의학과 학술유파가 형성 발전할 수 있는 토대라 할 수 있는 경제가 발달해 있었고, 이전과는 다른 사상 분위기와 서원의 발전 등 학문이 성숙할 수 있는 인문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侶山堂’
에서의 강학을 매개로 하여 杭州라는 특수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錢塘醫派’는 의학연구와 의료 실천에 있어 敎·硏·醫 三位一體的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의학 유파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錢塘醫派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강학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 점에 있다. 강학에는 張志聰, 高世栻과 같은 명의들이 함께 참석했고, 강의, 토론, 분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며, 의학경전에 대한 연구는 물론 이고 각종 병증에 대한 임상 연구 또한 중시하였다. 서원 에서 행해진 의학교육은 근대 이전 정식 학교 교육이 성립하기 이전에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행해진 중요한 교육 방법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의학 연구에 있어서는 초기 錢塘醫派를 대표하는 盧之頤와 張遂辰을 비롯하여 張志聰과 뒤를 이은 張錫駒와 高世栻 등 거의 모든 관련 인물들이『傷寒論』연구에 집중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이들은『傷寒論』해석을 둘러싼 논의에 있어서는 당대 또 다른 지역의학유파인 新安醫學家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를 폈다. 그들은 학문 방법론에 있어서 ‘維護舊論’을 주장했고, 氣化學說을
39) 竹劍平, 張承烈, 胡濱, 鮑曉東, 朱德明,「錢塘醫派述要」,『中華 醫史雜志』34-2, 2004, p.77.
제창했다. 또한『傷寒論』의 六經辨證體系로 臨床 各科 疾病에 적용하였으며, 胃氣를 중시한 특징이 있다.
錢塘醫派는 특히 의경 연구에 있어서 공동으로 연구 하는 풍토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張志聰은『黃帝內經素問集注』,『黃帝內經靈樞 集注』,『傷寒論集注』등 대부분의 저작을 중의서원인
‘侶山堂’에서 학자들과 토론 과정을 거친 후 저작하였다.
하나의 저서 속에 여러 사람의 견해를 담았기에 학술 수준이 높고, 서로 다른 논점을 담았기 때문에 후학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錢塘醫派의 구성원들은 연구를 치료에 접목하여 실제 임상에 적용하여 난치병 치료에도 능했다. 그들은 특히 공동 연구를 통해 의리에 정통했고, 풍부한 임상 경험을 후세로 계속 전달함으로써 의학 기술 또한 정밀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 남방의 특수한 자연과 기후 환경에 알맞은 치료방법을 강구하였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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