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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미술과

이야기(종류) - 산업혁명과

예술

▪낭만주의 제리코 들라크루아

▪사실주의 쿠르베 밀레

▪인상주의 계열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 쇠라 고흐, 세잔

▪입체파 Cubism 피카소 브라크

‣‣‣ ▪상징주의

▪야수파

▪추상화

▪다다이즘 C ha pt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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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리 P a ris 정 열 과 예 술

▼ 그 당시 세계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1876년 조선 강화도 조약, 벨 전화기 발명

‣1879년 에디슨 전구 발명

‣1900년 세기 말 흥분과 긴장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낭만주의

낭만주의 미술 탄생 배경

18세기 신고전주의 대표 화가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는 좋은 그림이란 ‘티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이에 어긋나는 그림은 엉터리로 취급했습니다. 그는 주로 황홀경 의 상징이었던 상상 속 동방 하렘의 글래머러스한 여성들 그리스 로마 신 화이야기 등을 그렸습니다. 이는 동방세계에 대한 동경과 클래식 이상미 를 담은 것입니다. 특히 단정하고 우아한 비례를 가진 신체의 아름다움을 미술의 이상적 가치로 여겨 표현한 것입니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The Valpinçon Bather》(1808) [그림07.01]

《샘

The Source》(1820–1856)

[그림07.02]

미술계에서 높은 위치에 오른 앵그르는 낭만주의의 제리코Theodore

Gericault(1791-1824)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작품을 공개적

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불완전한 지성의 표현’이라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앵그르보다 들라크루아가 프랑 스에서 더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림07.03]

프랑스 낭만주의는 인상주의가 출현하기까지 공존 했던 신고전주의 화 파로부터 발전되었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들라크루아의 스승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처럼 다분히 정치적이고 변덕 변심이 심했던 제리코는 미술의 규칙을 혐오한 화가입니다. 그가 남긴 세밀화는 큰 영향을 끼쳤습 니다. 그 중 대작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1818–

1819)1)은 밑그림 없이 직접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그림07.04]

1) 15일 만에 좌초한 메두사호 사건(1816년 6월): 1814년 맺어진 파리 조약 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세네갈을 돌려받게 된 프랑스 왕실은 일련의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고, 그곳으로 원정대를 보낸다.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메두사호'를 필두 로, 수송선, 범선 그리고 호위선으로 구성된 원정대의 임무는 이제 공식적으로 프랑스령이 된 세네갈 영토를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번 원정대의 핵심 메두사호는 1810년 진수한 구축함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 시 영국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인 경력이 있었다. 이곳 선원들은 대부분 바다에 서 잔뼈가 굵었고, 많은 전쟁 경험으로 거칠고 난폭했다. 한편 선장 쇼마레 (Hugues Duroy de Chaumareys)는 루이 14세 시절 귀족 직위를 얻은 상인 집안 출신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왕정복고가 이루어 짐에 따라 1815년, 프랑스로 돌아와 메두사호의 선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2)

그는 지난 25년간 바다에 나가거나 배를 몰아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감각이 없는 그가 바로 이 사건의 문제 의 인물이 된다.

선장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세네갈에 도착하기를 원했다. 점점 배의 속도를 높였다. 갑자기 원정대의 다른 모든 배들과 교신이 끊어져버렸다. 선장 쇼마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단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정 해진 항로에서 벗어나 해안가로 항해했다. 거리상으로는 분명 육지와 가까이 항 해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지만, 해안가에는 수많은 모래톱과 암초가 도사 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배가 좌초할 위험도 많았다. 경험 많은 선원들은 될 수 있으면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져 항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장은 귀 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나선지 15일째 되던 1816년 7월 2일, 메두사호는 지금의 모리타니아 근 처, 서아프리카 해안가에 좌초했다. 그 때는 물의 수위가 최고에 달하던 만조였 고, 그 이후로는 물이 점점 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를 다시 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선장이 배에 있는 3톤짜리 대포 14개를 버리지 않 겠다고 고집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어와 메두사호는 점점 더 망가지고 가라앉게 되었다,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 을 탈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구명보트에는 배에 탔던 400여 명 중, 250명만 탈 수 있었다.

급조한 가로 7미터, 세로 20미터의 뗏목이 완성되자, 선장과 그 일행은 선원과 이주민들을 대부분 뗏목으로 내몰고, 자신들은 구명보트로 향했다. 이렇게 다급 하게 만든 뗏목이 위험천만해 보였는지 17명의 선원들은 그냥 배에 남아있기를 택했다. 결국 이들을 제외한 총 147명이 뗏목에 탔다. 한편 구명보트에 탑승한 선장 일행은 대부분 귀족들이었다. 그중에는 당시 세네갈 총독으로 임명된 슈말 츠(Julien-Désiré Schmaltz)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장은 모두가 육지에 안전히 도착할 것이라고 뗏목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켰 다. 총 6대의 구명보트가 서로 호송대를 이루어 뗏목을 끌어주겠다는 것이 선장 의 굳은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상황이 어수선한 틈 을 타 구명보트에 탄 누군가가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끊어버렸다. 이제 뗏목은 거친 바다 위에 홀로 남겨졌다. 뗏목에 남아있는 유일한 식량은 포도주 두 통과 비스킷 한 봉지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첫째 날 밤에 대부분 바닥났다. 구명보트에 서 멀리 떨어져 약 100km나 떠내려간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제 사하라 사막 근 처에 도달했다. 낮이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고, 밤이면 거친 폭풍우가 휘몰아 쳤다.

뗏목 위의 첫날 밤,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나 파도에 떠내려가 목숨을 잃었다. 둘째 날 밤에는 엄청난 폭동이 일어나 무려 6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넷째 날에 이르자 뗏목에 남아있는 사람은 67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던 나머지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육

적인 제스처와 인체의 해부학에서 미켈란젤로와 루벤스의 영향을 알 수 있으며, 방향이 없는 빛과 엇갈린 대각선들로 구성된 그림이 카라바조의 바로크적 역동주의를 연상케 합니다. [그림05.13][그림05.14] [그림05.15]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창의력이 넘친 화가로 해외 여행을 즐기고, 밝은 색채 동시대 문학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레 미 제라블의 무대에서 자주 인용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제목의 작품 등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 다수를 그렸습니다. 보다 성실한 색조채색법으로 유명한 《민중 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7월 바리케이트를 친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림07.03]

이것은 정치적 동기가 있는 알레고리를 통해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한

을 얇게 썰어 밧줄에 걸어놓고 먹기 편하게 바람에 말려 육포처럼 먹었다. 상황 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급기야 표류 여덟 번째 날, 일부 생존자들은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뗏목 밖으로 내버리기로 결정했다. 끝까지 목숨을 건진 사 람들은 처음 뗏목에 탑승했던 147명 중 겨우 15명. 이들은 표류 13일 만에 근 처를 지나던 배를 발견하고 엄청난 흥분에 휩싸여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그 배 가 이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두 시간 후 기적적으로 그 배가 다시 돌아왔다. 뗏목을 발견하고 다가 왔다. 그 배는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범선 아르구스(Argus)였고, 생존자들을 싣 고 무사히 세네갈에 도착했다. 그러나 세네갈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15 명 중에서 5명이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참혹한 경험의 충격의 여파였다.

이후 끝까지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였던 외과의사 앙리 사비니(Henri Savigny)가 관계 당국에 이 사건을 증언하게 된다. 당국은 조용히 덮으려고 한 이 사건. 이 증언은 한 신문사에 유출되었고, 얼마 후 신문에 대서특필로 실렸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젊은 프랑스 화가 제리코에게까지 들어갔다. 야망이 넘치던 그는 이 사건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곧 작업 에 착수했다. 제리코는 뗏목에서 살아남은 10명 중 2명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의사들을 설득해 시체의 일부를 얻어 썩어가는 인체의 색을 관찰하 는 등 차근차근 필요한 준비를 해나갔다. 평소에도 어두운 주제로 곧잘 그림을 그리곤 했던 제리코는 이번엔 아예 작정한 듯 머리를 깎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이 작품에 몰두했다. 결국 1818년 시작된 이 작업은 총 8개월, 준비과정까지 포함하면 18개월만인 1819년 완성되었다.

(3)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샤를 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반발하여 파리 시민 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1830년 7월 28일의 장면을 사 실주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으로서 정치적 목적을 담은 최초의 근대회화입 니다.

하늘을 덮고 있는 포화 연기 사이로 여인이 중앙에서 깃발을 들고 민중 을 이끌고 있고 옆에 총을 든 어린 소년과 총칼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이 돌과 보도블록, 건축물로 세운 임시 바리게이트를 넘어 전진하고 있습니 다. 어두운 하늘은 혼란스러운 대적 상황을 암시합니다.

화면 오른쪽 포화 연기 사이로 노트르담 성당이 보입니다. 혁명 당시 노트르담의 성당의 탑에 아침부터 삼색기가 꽂혔습니다. 여인은 프랑스 대혁명 당원이 쓰던 붉은 모자 프리지아를 쓰고 오른손에 삼색기를 들고 있습니다. 삼색기는 1789년 루이 16세가 봉기군의 적청색 표식을 자신의 흰색 문장과 결합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 공화국을 상 징하고 있는 여인이 들고 있는 삼색기는 자유와 평등, 박애(형제애)를 의 미합니다.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 미래를 상징합니다. 국민군으로 참 여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 오른쪽에 모자를 쓰고 정장을 입은 채 총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인이 민중들과 다르게 옷을 벗고 있 는데 여인이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자유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 유의 여신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정복과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영감 을 받아 표현한 것입니다. 자유의 여신은 화면 앞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 에게 느껴지는 잔인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 아(1798-1863)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 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을 포착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요점을 확대시켜 사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벌거벗은 여인이 상징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1830년 혁명과 함께 최고의 지위에

오른 루이 필립의 마음에 들어 국가에서 구입했습니다.

《키오스 섬의 학살The Massacre at Chios》(1824)은 키오스 섬에서 터키 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소식을 그가 듣자마 자 제작한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회화의 학살’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림속에 처철히 표현된 죽은 엄마의 가슴에서 젖을 빨려고 하는 갓난 아이를 보고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 습니다. [그림07.05]

혁명과 학살의 현장을 표현한 그림 외에도, 들라크루아는 풍경, 정물, 역사화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인간의 내적인 감정으로 담아냈습니다.

벽화도 그리고, 야생 동물, 사냥 장면, 초상화 등도 그렸습니다. 사물의 외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 정수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습 니다. 그는 이 시대의 화가라면 기존 화풍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 는 대로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회화란 선으로 그린 드로잉(스케치)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을 스스로 확실 히 보여줘 그림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들라크루아의 미술계의 틀에 박힌 사고를 변혁시킨 그의 공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근대 회화의 기틀을 마련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림07.06]

들라크루아의 그림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루벤 스의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인체 묘사에 감탄하였고, 루벤스의 여신과 여 인 누드 표현으로부터 영향 받았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 고통스런 죽음, 학살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특 징은 등장인물이나 빛을 받는 공간 처리로 관람자의 시선이 전체 화폭을 가로지르도록 하는 구도에 대한 일관적 접근을 유지했습니다.

앵그르가 싸늘하고 냉철함, 단정한 비례와 매끈한 표면 처리 등으로 신 고전주의식 웅장함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앵그르와 는 반대되는 활달하고 유동적인 화필로 강렬하고 뜨거운 낭만주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4)

계급과 노동미술, 19세기 사실주의Realism

밀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던 1848년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계급 의식과 노동자들의 권한과 착 취에 대한 문제 의식이 미술에 반영되어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가 즐겨 다루던 역사나 신화를 버리고, 노동자와 가 난한 사람과 착취당하는 서민들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파리 바르비종Barbizon화파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1875)는 1848년의 파리 혁명에 고무되어 시급한 사회 문제

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초기의 초상화와 에로틱한 누드화를 버리고 시 골 농부들의 삶에 애정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1850)과

《이삭 줍는 여인들》(1857)에서 그는 농부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건하고 정감어린 이미지를 부여했습니다.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에서는 거대한 체구의 한 농부가 새로 갈아 엎 은 밭에 열심히 씨를 뿌립니다. 소박한 농부가 씨를 뿌리는 장면은 땅의 재생능력과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합니다. 농부를 사회의 불안정적인 사회 요소로 생각하는 정치적인 부유층들은 그의 급진성을 공격했고, 자유주의 자들을 농부와 서민의 지위를 높이는 그의 작품을 찬양했습니다. 아트 저 널리스트들은 밀레 그림 속 여인들은 검게 그을린 엄마라며 낙인을 찍었 습니다. [그림07.07]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이 경건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기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이 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긴 이방 여인 룻의 성서 이야기를 함 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넓은 밭에는 높은 밀단들이 보이고, 허리를 굽혀 추수한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열심히 줍고 있는 여인들이 당당하 고 경건한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07.08]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1849) [그림07.09]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밀레와 같이 1848년 유 럽의 혁명적 분위기에 고무되었던 화가였지만, 그는 자신을 사실주의 화 가라고 선언했습니다. 쿠르베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과장이나 꾸밈이 없 이 묘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돌 깨는 사람들》은 쿠르베의 사실주의 미술을 집약한 작품입니다. 모자 를 쓴 한 늙은 노인이 한나절 뙤약볕 밑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도끼로 열심히 돌을 깨고 있습니다. 그는 찢어진 조끼에 무릎을 기운 남루한 바 지를 입고, 구멍 난 양말 뒤꿈치를 드러낸 채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습니 다. 그를 거들고 있는 소년은 윗도리가 여기저기 찢어지고 양복바지 멜빵 띠도 하나만 걸친 채 무거운 짐을 무릎으로 받치고 있습니다. 이 무명의 노동자들은 힘에 부치는 힘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일하기에 너무 늙었다는 것을 그의 거칠고 뼈만 남은 손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 고 소년은 학교에 다닐 어린 나이에 힘든 생활 전선에 뛰어든 것으로 보 입니다. 쿠르베는 가난한 서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해 상 류사회를 비난하고 정치적‧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노인 앞 자갈밭 에 있는 투박한 냄비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화가는 서민들의 인격이나 가치가 상류사회인보다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의 그림 《쿠르베 씨, 안녕하시오Bonjour Monsieur Courbet》(1854) 에서는 이젤을 메고 산에 가다가 하인을 데리고 산보하는 귀족 부자를 만 나 수염 난 턱을 높이 올리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미술가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그림07.10]

쿠르베는 미술에서 ‘화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물체의 표현’만이 존재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회주의자들과 개혁가들은 《돌 깨는 사람

(5)

들》을 자본주의와 잠재적 탐욕을 저주한 작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1855년 파리 국제전에 출품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 출품 자체가 화단을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쿠르베는 폭파범 화가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정치색이 가장 짙었던 화가로 꼽히는데, 거침없는 발언을 일삼고, 성직자 들을 비판했습니다. 1873년 파리 코뮌2)의 일원이었던 그는 1871년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기념탑 폭파 사건의 혐의를 받았습니다. 1871년 그가 지지했던 파리 코뮌이 실패하자 그는 체포되어 6개월간 감금당했습니다.

그 이후 말년에는 스위스로 추방당해 스위스 산야를 그리며 여생을 마감 했습니다.

이 사실주의 작가들은 실제 인물의 일상생활 등 사소해 보이는 것을 작 품의 주제로 부각시켜 다루었습니다. 이는 예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 양식에 대한 반발로 해석됩니다.

사실주의 작품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화면 안에서 신고전주의의 엄숙한 암시를 배제 시켰습니다. 사실주의는 고전적 이상을 버리고 현실 을 선택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사조입니다. 그리하여 농부, 창녀, 죽음 등 의 주제와 소재가 등장합니다. 이는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내용을 담은 예 술을 선호하는 상류층 예술 비평가들과 아카데미 예술가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입니다.

인상주의

마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경계에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1883)는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2) 코뮌(프랑스어: La Commune de Paris, 문화어: 빠리 콤뮨,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또는 프랑스 제5차 혁명은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민중들 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파 리_코뮌

한 전시회 때문에 인상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사회의 도덕성을 신랄하 게 공격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2-1863)와 《올랭피아》(1863) 같은 사실주의 작품들에 의해 그의 명성이 높아 졌습니다. [그림07.11][그림07.12]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스캔들을 일으킨 문제작이었습니다. 그는 1863 년 아카데미 살롱 전(국전급)에 처음 《목욕》이란 제목으로 출품했으나 낙 선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낙선한 화가들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낙선작 전시회에 전시되었습니다. 그 전시를 보고 한 관객은 그의 작품 에 대해 젊은 작가의 짓궂은 장난이며 전시할 가치조차 없는 부끄러운 실수 같은 것이며, 풍경에 비해 인물은 형편없이 그렸다라고 혹평을 쏟 았습니다. [그림07.11]

사실 기대 누워 있는 사나이가 쓰고 있는 모자는 당시 파리 대학의 학 생모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낮에 공원에 와서 옷을 모두 벗고, 과일바 구니를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앉아 있는 여인은 수줍어하기보다, 빤 히 누군가를 쳐다보는 표정입니다. 어깨에 붙어버린 짧은 목이며, 접혀진 아랫배며, 한 사나이 가랑이 사이에 마당발과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당시 파리인들에게는 버릇없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경에 속옷만 있고 있는 여자가 물에 반쯤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배경은 당시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조르조네(혹은 티치아노)의

《전원 연주회》에 고무된 작품이지만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 단, 이 당시 가식적인 프랑스 사회의 이중적 도덕성을 지탄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기교면에서도 당시 미술계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화면을 거 친 붓터치로 채웠습니다. 누드여인의 육체를 섬세하고 부드럽고 매끈하게 모델링 하지 않았을 뿐더러 거친 붓자국이 남성들의 바지나 풀밭 여기저 기에 얼룩처럼 나타납니다.

마네는 1865년에는 아카테미 살롱에 매춘부를 주제로 한 《올랭피아》를 출품하여 파격적으로 입상했습니다. 1860년대 매춘부들이 파리 저변에서

(6)

중심가로 등장했지만, 비너스가 아닌 거리의 여인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 는 것은 시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도덕적 모욕이었습니다. 성적이고 선 동적이며 반 전통적인 작품에 분노한 평론가와 시민들은 야유와 항의, 심 지어는 작품을 제거하라는 압력까지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현대 미술의 초석이 된 작품으로 오르셰 미술관의 인기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림07.12]

《올랭피아》는 프랑스 매춘부들이 즐겨 쓰던 여인들의 가명입니다. 그림 의 착상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떠올렸으며, [그림07.13]

누워 있는 상류층의 여인 대신 파리의 매춘부로 대치했습니다. 여인은 머 리에 장미 대신 난초를 꽂고, 화려한 목걸이 대신 검은 끈을 질끈 묶고, 주인에게 충실한 개 대신 성적으로 방종한 검은 고양이로 바꾸었습니다.

하인들이 함에서 의복을 꺼내 오는 대신에 흑인 하녀가 고객이 보낸 듯한 꽃을 들고 오는 현대적이 감각을 살렸습니다. 매춘은 성과 돈에 직접 연 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류층과 중산층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 였습니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을 파는 매춘 행위는 육체와 돈을 다 같이 타락시키는 도덕적 사회적 죄악이었습니다.

마네는 《올랭피아》이후로 누드화를 다시는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카페나 레스토랑 등 당시 사회 모습, 서민 계층의 여성들을 사실적 으로 그린 작품이 많습니다.

인상주의 풍경화, 최초의 시리즈 그림

모네

인상파란 단어는 모네가 출품한 《인상: 해돋이》를 보고 르 샤리바리 지 의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모네와 르누아르‧드가‧모리조를 새로운 인상파 화가라고 부른 데서 유래합니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이런 풍으로 그린 화 가들을 한데 묶어 비판하기 위해 인상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이용했습 니다.

모네 순간적인 시각적 감흥을 기록할 필요성과 자발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침이 아닌 그 순간의 실제로 느낀 빛의 순간적 움직임, 현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단면을 캔버스에 기 록해 남기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작품 소재는 사라져 버리려는 듯 하는 자연에 매료된 화가의 모습 과 죽는 날 까지 원래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자기가 그날 본 것을 그리겠 다는 신념이 보입니다. 유명한 반복된 주제, 소재의 그림 시리즈는 분명 집착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건초더미(짚단)》, 《수련》, 《루앙 대성당》 [그림07.14][그림07.15][그림07.16]

색채와 붓터치로 빛과 사물을 표현한 그의 수련 작품들을 일종의 추상표 현주의 작품이라고도 부릅니다. 말년에 그가 사랑하는 꽃들을 시력 저하로 잘 못 볼 수도 있는데,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안주하는 성 격이 아닌 모네는 가끔 런던에 가서 항상 사보이 호텔 같은 방 발코니에서 안개에 싸인 《템즈강》을 장기간의 시리즈물로 그렸습니다. [그림07.17]

그의 한 폭 그림으로는 《양귀비》 《파라솔》이 대중들의 사랑을 대단히 받고 있습니다. 색채의 조화가 훌륭합니다. 양산과 언덕의 풀은 녹색과 노 랑으로 보색이 대비되어 화면 전체에 균형을 잡아주며, 대담한 붓질로 자 칫 문란해질 수 있는 표면에 안정감과 동시에 생동감을 줍니다. 하늘과 여인의 옷은 밝은 하늘색이 서로 넘나들어 구분이 되지 않으며, 여기 저 기 찍어 놓은 하이라이트가 격렬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대상과 함께 대상 을 둘러싼 분위기까지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07.18][그림07.19]

모네는 시각적 인상에 충실 한다는 인상파의 원칙을 가장 끝까지 밀고 간 화가였습니다. 반면 자신의 눈에만 집착하다 그는 현대 회화를 주관주 의 경향으로 이끌기도 한 인물입니다.

인상주의 인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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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그림07.20]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는 자연 현상의 인상보다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나 자유로운 동작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르 누아르에게 인생이란 끊임없는 파티의 쾌락과 한가로운 여가와 같았습니 다. 고운 얼굴의 여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춤추는 흥겨운 분위기속에서 행 복감을 느꼈습니다. 《뱃놀이 점심》(1881) 《뮬랭드라 갈레트 댄스》(1876) 와 같은 르누아르의 그림은 친한 벗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대화와 쾌락 을 함께 즐기던 때의 그림입니다. 그는 삶이란 끝없는 파티요, 그 때는 세 상이 웃는 법을 알았다고 르누아르는 회고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1495-1498)과 같은 엄숙한 분위기의 식사와 교제가 아닌 현대 사회의 행복하다고 느끼는 삶의 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는 모네와는 달리 야외의 광선이 만드는 색조 변화현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건강한 여인의 누드에도 관심이 없었습니 다. 그는 경마, 승마, 서커스, 발레 등 인간이 표현하는 빠르고 어려운 동 작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찬란한 빛과 발레리나의 동작 연습에 관심 이 많았습니다. [그림07.21]

그의 작품의 구도는 당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실내는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같이 기울고, 직사각형의 일본 판화처럼 공간이 모나고, 우 연히 찍은 스냅 사진처럼 한 발레리나의 다리가 잘렸습니다. 파스텔을 이 용하여 발레 장면뿐만 아니라 목욕탕에서 수건으로 목을 열심히 닦거나 머리를 말리거나 빗는 나체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드가는 여자들만이 갖 는 세계를, 남을 의식하지 않는 개인으로 돌아온 순간을 사진사가 셔터를 눌러 기록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드가는 파스텔을 이용하여 발레 장면, 목욕 장면 등을 사진적 시각(움직 임 포착, 앵글, 프레임)을 활용하여 그렸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시력을 잃어 더 이상 그림을 잘 그릴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조각으로 발레리나를 만드는 일에 쏟았습니다.

1839년 사진 발명품 특허

19세기 예술 사진과 인상주의

사진은 인상주의자들에게 망막에 비친 순간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는데 영감을 주었습니다. 인상주의 그림은 순간순간 변하는 풍경의 모습 뿐 아 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빛과 순간에 대한 관심은 다분히 사진기의 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진의 발명 [그림07.22][그림07.23][그림07.24][그림07.25]

사진의 역사는 니엡스Nicéphore Niépce의 실험과 다게르Louis

Daguerre에 의해 발명된 은판사진이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1839

년 8월 19일 정식으로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공포된 후, 맨 처음 찍은 풍 경 사진들에서 비롯됩니다. 그 후 초상 사진이 획기적으로 유행합니다. 영 국의 탈봇Henry Fox Talbot이 종이 인화법을 상용화 하여 사진노출 시 간이 단축 되었으며, 음화에서 양화로 인화하는 과정도 단축되어 사진 표 현상 커다란 변화와 인쇄술에도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술 사진, 오스카 레일랜더 《인생의 두 갈래 길》 [그림07.26]

스웨덴 태생의 영국에서 활동하는 레일랜더Oscar Gustav Rejlander (1813~1875)는 사진 작품을 고급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합성 사진을 시도 합니다. 회화적 사진pictorialism3)작가로 불리며, 1857년 맨체스터 시티 의 한 예술 전시회에서 《인생의 두 갈래 길

Two Ways of Life》을 출품

3) 표방한 예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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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주목을 받습니다.

선과 악을 나타내는 인물들을 좌우대칭 구조로 표현한 이 작품은 사진이 라기 보다는 사진적 방법으로 재현한 일종의 종교화였습니다. 특히 균형, 조화, 통일감을 중요시한 레오나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그림07.27]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의 대칭적 구도와 1:1.618 / 3:5 / 5:9 / 8:13 의 황금비율을 모방했습니다. 주제 또한 서구회화에 있어 가장 고귀하고 품위 있게 여겨져 온 종교적인 내용으로 오랫동안 화가들이 그려왔고 사 람들의 눈에 익은 아카데믹한 회화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림07.26]

그렇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진적인 방법으로 재현한 작품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열악한 기술적 환경에 서는 3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큰 무대와 시대적인 배경을 갖춘 세트장 그리고 실내 인공조명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레일랜더는 사진기법을 활용한 섬세하고 색다른 방법을 고안해냈습니 다. 그는 우선, 《인생의 두 길》을 데생 했습니다. 그리고 이 데생을 근간 으로 등장인물과 배경, 소품들을 약 30여장의 사진으로 각각 촬영했습니 다. 이렇게 촬영된 네거티브 필름을 다시 데생에 맞추어 재단한 다음 밀 착인화를 했습니다. 많은 등장인물과 소품들을 보여주기에 1장의 인화지 로는 부족해 레일랜더는 두 장을 이어 인화하는 ‘조합인화 combination printing’ 기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치는 번거로운 작업은 무려 6주나 걸렸습니다.

레일랜더의 《인생의 두 길》은 발표와 동시에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세간에 회자되었습니다. 사진을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으로 보며 환영하는 측과 아카데믹하고 전통적인 소재가 사진에 적합한가 의구심을 품은 견해 가 엇갈리는 가운데 《인생의 두 길》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 에게 판매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왕실에서 《인생의 두 길》을 구매 한 것은 사진의 광화학적 재현보다는 오히려 레일랜더의 탁월한 데생에 매력 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하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의 사진과 라파엘 전파

영국 사진가인 마가렛 카메론은 그 시대 유명 인사들의 초상 사진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소프트 포커스를 도입해 초점을 흐릿하게 하여 주변 을 뿌옇게 만들었습니다. 이 기법으로 사진에 고상함과 예술성을 부여했 습니다. 이 테크닉을 활용해, 유명 인사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을 라 파엘전파 스타일의 문학 작품의 한 장면으로 보이게끔 연출하여 회화 같 은 감상적 사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림07.28][그림07.29]

그녀의 작품 《기다림

I wait》(1872)은 라파엘로의 《식스투스 성모의 아

기 천사》(1512-13) 하단 부분의 아기 천사 그림과 분위기가 흡사합니다.

신인상주의

폴 시냑Paul Signac

폴 시냐크은 프랑스 파리 출생의 화가입니다. 처음에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하였습니다. 그 후 쇠라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 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규칙적인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4)을 창시하여 그 림을 그려 유명하며, 단순하고 신선한 수채화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작 품 심사 없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ʻ앙데팡당 전람회’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풍경화 작품으로 《쿰브리 성의 목초지

Comblat le Chateau. Le Pré》(1886), 《콜리우르 해변 The Town Beach, Collioure》(1886), 《베

니스 대운하 Grand Canal》(1905) 등이 있습니다. [그림07.30][그림07.31]

거대한 벽화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유일한 화가였던 동료 쇠라의 갑작 스런 죽음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그는 주로 그리던 풍경화에서 벗어 나 커다란 장식적 작품에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장식적

4) ‘점묘법 Pointillisme’ 또는 ‘분할 묘법 Divisionnisme’이라고 한다.

(9)

회화는 종합 예술을 꿈꾸던 19세기 말의 예술적 경향에 대한 일종의 도전 이었습니다.

1891년 쇠라가 죽은 후 폴 시냑은 페릭스 페네옹과 과학자 찰스 헨리 의 지지를 받아 신인상주의의 수석 대변인이 됩니다. 1899년 시냑은 『들 라크루아부터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집필합니다.

폴 시냑은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 같은 야수파들을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점묘법을 기반으로 한 신인상주의 화풍은 20세기 입체파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

프랑스의 화가이자 신인상주의의 대표 작가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대작인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는 신인상주의 예술 사조 새 길을 창조했습

니다. [그림07.32]

쇠라는 점묘법 붓질로 색을 칠하기보다는 순수한 색들의 작은 점들을 화폭에 동그란 점으로 겹쳐서 찍는데, 화면을 바라보는 관람자는 시각으 로 이 점들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면서 새로운 색상을 창조하고 하나의 형 태로 인지하게 됩니다. 쇠라의 점묘법은 3세기 로마의 고전 미술에서처 럼, 보석과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가 멀리서 보면 색이 합쳐져 형태가 드 러나는 현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쇠라는 32세 젊은 나이로 대 작 몇 점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화법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 았습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한가롭게 휴일을 즐기고 있는 장면입니다.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된 하나하나의 터치는 정확한 원으로된 점묘는 아니지만 약 1cm정도로 규격 화 된 점을 활용했고, 캔버스에서 인상주의에서와 같이 색채가 무질서하 게 겹쳐졌을 때 일어나는 회색톤이 배재되어 색채의 밝고 환한 빛의 느낌

과 순수한 원색의 느낌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오른쪽 화면에, 중년 신사와 함께한 파라솔을 쓴 우아한 숙녀는, 그 앞에 있는 원숭이로 짐작해보아 당시 파리에서 인기 있던 매춘부 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로봇 인 형들처럼 움직임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쇠라가 이 작품을 통해 사회의 새로운 이미지의 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도 하며, 아니면 당대 사 회에 대한 풍자가 그 목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캔버스 유화(油畵, oil

painting)이며, 크기는 207х308cm입니다. 1884년부터 1886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현재 미국 시카고 예술 대학 미술원Art Institute of

Chicago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

세잔, 입체파의 아버지

세잔Paul Cézanne은 인상주의가 변화무쌍한 자연의 외관 인상에 주력 한 나머지 그것들의 고요한 내적 질서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고 보았습 니다. 여타 인상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세잔은 대상의 외형에서부터 본질적 인 특징을 탐구하고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대상의 본질적인 특징을 가장 기초적인 조형단위로 환원시켜 묘사하였습니다. 이 철학적이고 믿음이 투 철한 작가는 모든 사물은 보편적인 질서 체계를 갖추고 있고, 그것으로부 터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특히, 원통, 원추, 구 등의 기본 형태를 신이 만든 불변의 규칙으로 인식 했습니다. 그리고 구상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나타내어 자연에 내재된 영 원불변의 구조를 질서감 있게 화폭에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색 점보다는 색 면에 집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화면 전반적 으로 평면성이 느껴집니다. 색면들이 중심이되어 화면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색면 삼각형의 생 빅투아르 산이나 다면체의 집 같은, 기하학적으로 환원된 대상을 용이하게 구성하여 그려냈습니다. [그림07.33]

(10)

색으로 캔버스를 채워나갔다는 점에서 작가가 인상주의적 조형요소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인상주의자와 세잔 사이에는 명백히 다 른 접근 방식이 존재합니다. 전자가 자연을 가변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러 한 성질을 색점으로 빠르게 화면에 옮겨냈다면, 세잔은 변화하는 자연 속 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적 형태를 발견하고 그것을 색면으로 구사했습니 다. 이처럼 자연의 가변성 속에서 불변의 구조를 찾고자 했던 것이 세잔 만의 인상주의 극복 및 발전 전략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건, 위, 아래, 옆에서 본 시점들이 동시에 적용되어 같은 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잔이 입체주의가 가장 중요 한 조형 전략으로써 내세운 ‘다시점’ 개념의 선구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 니다. [그림07.34]

고흐, 표현주의의 아버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늘 괴로워 했습니다. 추구하는 이상에 비해 현실이 비참해 보이는 순간 극심한 두려 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감정 표출수단이자 소통 창구는 그 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파리의 인상주의적 기법만으로는 그가 내면을 충분히 분출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작품 《해바라기》(1888/9)처럼 강렬 한 원색과 거친 붓질을 사용하는 점은 고흐가 여전히 기존 인상주의의 영 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07.35]

하지만, 고흐는 감정표현에 있어서의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 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마음 속 극단적인 감정까지도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는 오직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스타일을 개척합니다. 감 정을 그려낸다는 것이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는 왜곡되어 보일지언정 화 가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수단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로 애락을 역동적인 필체로 구사합니다. 그의 격정적인 표현력은 이후에 등 장하는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별이 빛나는 밤》(1889)는 기본적으로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어 괴로워 하는 고흐의 내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작가의 독특한 필체를 따라 꿈틀거 리는 대기 사이로는 당시 공동묘지에 많이 심어졌던 사이프러스 나무가 높다랗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사이프러스는 죽음을 상징하는 요소입니다.

이 불안정한 분위기는 공기 중으로 상승하여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으로 한 차례 정화되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미래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복합적으로 어 우러져 표현된 것으로 읽힙니다. [그림07.36]

어느 날, 고흐 앞으로 동생 테오가 재정적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서신이 도착합니다. 안그래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고흐는 그 편지에 충격을 받고 이내 권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작품은 그가 자살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흐드러지듯 그려진 검은색 까마 귀 떼는 당시 고흐가 느꼈던 극도의 좌절감과 고립감이 반영된 듯 보입 니다. [그림07.37]

입체파Cubism: 20세기 현대미술의 한 획

피카소

스페인 바르셀로나 태생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20세기의 미술을 주름잡던 재능있고 성공한 화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 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작품을 후대에 남겼고, 살아생전에도 부유했던 미술가였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세잔의 추모 회고전에서 그림들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았 습니다. 그 후 그는 입체파 형식의 그림을 발전시킵니다. 입체파 그림을 보면 어떤 일면만을 그려놓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시점을 한 화폭에 담아 서 그렸습니다. [그림07.38]

만약 어떤 정밀하게 그려진 그림이 정말 그럴싸하고 진짜같이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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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사실은 우리가 그게 움직이기도 변하고도 있다는 사실을 말은 안 해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우리도 움직이고 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고개도 못 돌리고 눈만 눈동자도 안 움직이고 한 지점에 고정된 채 계속 관찰하는 것이 가 능할까요? 우리는 움직임으로써 그것을 3차원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 다. 물체의 다른 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한 쪽만 보기만 하는 것 자 체가 사물에 대한 왜곡된 인상이지요. 《우는 여인》(1937)피카소의 여인 인물화도 이 생각을 반영하여 그린 것입니다. [그림07.38]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결코 바라보는 그 면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뒷모습, 옆 모습도 알고 있고 다양한 면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여인을 떠올려봐' 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여인을 앞에서 본 모습만 혹은 여러 면에서 본 모습만을 떠올리거나 혹은 차례대로 떠올리는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 서 본 모습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됩니다. 피카소의 작품은 이러한 생각정 보, 인식이 오는 과정을 한꺼번에 한 폭의 화면에 표현한 것입니다.

《게르니카》(1937)를 보면 그저 입체 자체를 표현한 것을 넘어서, 우리 의 건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 오는 것을 표현한 것이란 것을 잘 알 수 있 습니다. 어떤 장면을 본다든지, 글을 읽는다든지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 면 거기에 관련된 이미지가 마구 떠오릅니다. 게르니카는 '전쟁' 이란 것 을 생각했을 때의 피카소가 느끼는 이미지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입 니다. [그림07.38]

피카소의 작품은 우리가 보는 것을 어떻게 그리고 채색하느냐를 넘어서, ʻ생각이 어떻게 다가오고, 우리가 인식하는가?’를 고심하여 그림에 반영한 것입니다. 물론 피카소의 입체파 스타일이 나오기 까지는 인상파 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당대의 수학의 발전에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의 선술집 같은 곳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도 많이 했는데, 프랑세라는 수학을 전공한 자와 리만 기하

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모든 회화적 기법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뛰어났습 니다. 그럼에도 그저 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인간,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 깊 이 생각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천재 예술가로 불리는 것 입니다.

브라크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는 근대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 화가입니다.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일을 생업 으로 삼았습니다. 1900년에 파리로 간 것도 그러한 간판 그림의 기법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집안 내력이 브라크의 예술혼의 근간이 되어 입체주의 표현형식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06년 브라크는 야수파적인 풍경화를 가지고 파리로 입성하며 그로부 터 약 1년 뒤인 1907년, 마침내 파블로 피카소와 공동 작업을 합니다.

그 후로 6년 동안 브라크와 피카소는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입체파 양식 을 발전시킵니다. 둘은 2차원에서 3차원의 오브제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 적인 구도를 파기하는 시도를 감행합니다.

브라크는 그리 뛰어난 데생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직관적인 그림 솜씨는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이 당시 브라크는 단색조 계열의 색채를 통해 정물을 평면적으로 해제하는 작업을 즐겨 했습니다. [그림07.40] [그림07.41]

1912년 브라크는 피카소와 함께 현대 콜라주의 원형인 《파피에 콜레

papier collé》작품을 창조합니다. 파피에 콜레 기법이란 추상적인 선의

요소 때문에 완전히 해체되어 추상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큐비즘의 미학적 방향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회화의 화면에서 사라져 버린 현실감과 일상성을 복원시키기 위해 신문지, 상표, 털, 모래, 철사 등의 일상에서 구하기 용이한 오브제들을 붙여 새로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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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거리

시간과 제스처: 예술가와 다큐멘터리 EBS 다큐 프라임 예술, 할까요? 1-3부 KTV스콘 피카소와 도나마르

형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훗날 파피에 콜레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의해 현대적 콜라주로 발 전되며 20세기 회화에서 비(非)미술 재료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인식 형 성에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파피에 콜레를 창안한 뒤부터 브라크 와 피카소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사물로 공간을 표현한다는 것에 매료되어 여러 가지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색조 계열의 색채를 사용해, 정물들을 평면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평면을 이용한 구성들은 오히려 점점 더 복잡성을 띠고 추상 화에 이르게 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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